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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주인이신 여호와로부터 떠난 인류는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허물παραπτώμασιν”을 직역하면 “정로正路 곧 바른 길과 정당한 도리로부터 멀어지다.”입니다. 부주의不注意로 인하여 진리로부터 떠난 상태 또는 잘못된 경향성을 가리킵니다. “죄ἁμαρτίαις”를 직역하면 “과녁으로부터 벗어나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위해 제시한 목표를 정확하게 맞추지 못한 모든 행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허물과 죄는 강조를 위한 의도적인 반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류는 지극히 죄 친화적입니다.
죄의 경향성이 지극히 농후합니다. “죄 곧 나, 나 곧 죄”입니다. 지극히 작은 죄마저도 맞서서 상대하지 못할 정도로 연약합니다. 죽음의 궁극적 원인과 도구와 영역과 결과인 허물과 죄에 관한한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합니다. 생명을 수여해 주시는 여호와로부터 단절되었습니다.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삶의 특징은 죽음입니다. 삶의 방식은 반역입니다. 지극히 전투적이고, 지극히 철저하고, 지극히 다양한 방식으로, 무엇보다 지극히 의도적이고 또 고의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반역했습니다. 허물과 죄에 완벽하게 종속되었습니다.
하나님과는 어떤 관계도 없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가치를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덕과 윤리, 본질적인 가치와 도리, 목적 등에 있어서 완전히 다른 궤적을 그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나 수없이 많은 편린片鱗들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완전히 죽어 있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특히, “죽었던ὄντας νεκρούς”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없는, 허물과 죄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는,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죽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서 죽은” 등의 뜻입니다.
과거로 번역되어 있지만 실제 시제는 현재분사現在分詞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상태가 현재도 여전히 개선되지 않은 채 이어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멀쩡하게 살아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상태입니다. 죽어있는 상태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허락해 주실 수 있는 거룩하신 하나님께는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훨씬 더 중요한 영적으로도 어떤 바람직한 반응도 할 수 없습니다. 그대로 내버려두게 된다면 죽어있는 상태가 영원히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수백 번 읽고, 쉬지 않고 무시로 기도하고, 수시로 때로는 작정해서 금식하고, 힘에 지나도록 물질을 드리고, 주일이면 이른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누구보다 많이 봉사하고 희생하고 헌신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 죄는 도덕이나 윤리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인식하는 죄는 죄라기보다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와 여러분의 회개는 남의 다리 긁기나 마찬가지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진정한 회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 안에서 값없이 선물로 부어진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기 전, 저와 여러분의 상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삶이 곧 죽음이었습니다. 죽음이 현실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죽음에서의 현존現存이었습니다. 현세적인 가치와 기준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대와 세상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방해하는 초자연적인 악의 세력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스스로는 정의와 공의를 추구했으며 양심적으로 살았다고 자부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에게 내놓아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결국에는 영원한 죽음으로 귀결歸結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히려 이미 허물과 죄로 죽어버린 영혼과 육체의 지극히 이기적인 욕구慾求를 치열하게 추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들고 불순종을 부추기는 사탄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것이 허물이고, 죄이고, 죽음이며,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일인 줄도 모른 채 살았습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어서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죄는 또한 죽음을 불러들인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서 죽음이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롬5:12)라는 증거대로, 본질상 진노의 자식에 불과한 삶을 살았습니다. 한편, 사도는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엡2:4-6)라고 외쳤습니다. 헬라어 원본에는 개역개정에는 번역이 생략된 “그러나δε”라는 부사가 4절 서두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곧 앞의 내용과 다른 내용을 말할 때 쓰여 앞뒤 문장을 이어 주는 부사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 본질상 진노의 자식에 불과한 인류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긍휼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긍휼ελεει”은 “인자, 자비, 충성, 불쌍히 여기다, 측은하게 여기다, 동정하다, 용서하다.” 등의 뜻입니다. 상호간에 언약을 맺은 대상을 딱하게 여기고 불쌍하게 여기는 정도에서 끝내지 않고 살려내기 위해서 죽기까지 의무를 다하는 하나님의 사랑חסד(헤세드)을 가리킵니다. 곧 영원토록 변하지 않고 당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은, 본질상 진노를 받아 마땅한 인류를 그대로 버려둘 수 없으셨습니다. 당신 안에 충만한 긍휼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본질적인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은혜를 풍성하게 베풀어주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모진 핍박과 조롱과 멸시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한 영원한 생명을 부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혀주셨습니다. 땅이 아니라 하늘의 시민권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이는 나중에 이루어지게 될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함께 이미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육신을 입고 땅에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의 소속은 하늘입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지금 현재 하늘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호흡하는 모든 순간 하나님의 거룩한 존전尊前 앞에 서 있습니다.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저와 여러분은 이렇게 놀라운 긍휼을 그것도 값없이 선물로 받았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에게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긍휼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베풀어주시기 위하여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의 과정을 돌아보고 기념하는 사순절 절기 두 번째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긍휼을 베풀어주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도 역시 긍휼을 입을 것이다.”(마5:7)라는 가르침에 따르면,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놓으시기까지 긍휼을 베풀어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육신은 고통스러웠을지라도 누구보다 행복하셨습니다.
긍휼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순종해야합니다. 청교도 목사로서 누구보다 회심과 경건을 강조했던 그Thomas Watson의 설명에 따르면, 하나님 품속에는 세 명의 자매가 사이좋게 살고 있습니다. 사랑과 은혜와 긍휼입니다. 사랑은 애인을 방문하는 친구입니다. 긍휼은 병자들을 한 명 한 명 찾아다니며 위로하는 의사입니다. 은혜는 죄인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긍휼은 불가항력적인 허물과 죄 때문에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구약 성경의 주석משנה(미쉬나)과 주석을 다시 현실 상황에 맞춰서 쉽게 해석한 주석גמרא(게마라)으로 구성된 교훈서Talmud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웃집으로 가서 낫을 좀 빌려오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울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궁금해 하는 아버지에게 이웃집에서 낫을 빌려줄 수 없다고 대답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주었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이번에는 단호하게 거절했던 이웃이 낫을 빌리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아들은 빌려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생각은 그와 달랐습니다.
빌려주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불과 며칠 전에, 냉정하게 거절했던 사람에게 굳이 빌려주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며 따지듯 물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당신이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역시 빌려주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복수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당신은 빌려주지 않았지만 우리는 빌려주겠다고 말하면서 미워하는 마음으로 빌려주는 것은 증오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거절당했지만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그저 낫이 필요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선한 마음으로 빌려주는 것은 긍휼이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긍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채 쉬지 않고 당신을 거절하고 대적했던 저와 여러분에 대하여 가졌던 거룩한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긍휼을 베푸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셨다.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셨다. 그래서 그들을 여러 가지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막6:34)라는 증거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나왔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막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오자마자 너무나 허무하게 목이 잘려 죽은 세례요한의 장례까지 치렀습니다. 선교 보고를 마쳤을 때는 피곤함이 한꺼번에 밀려들었습니다. 거기다 오고 가는 사람들까지 많았습니다. 음식 먹을 겨를도 없었습니다. 쉬기 위하여 배를 타고 한적한 곳을 향해서 떠났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배를 댄 곳에는 이미 무수히 많은 무리들이 모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행이 도착할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그들이 마치 목자도 없이 방황하고 있는 양들처럼 보였습니다. 목자가 없는 양은 살아있지만 이미 죽은 존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실제로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의 착취의 대상에 불과했던 그들은 영적으로 굶주려 있었습니다. “조선왕조라는 완전히 절대 독재에서 살던 나라에 갑자기 자유민주주의가 들어오면 감당이 되겠는가. 하나님이 뿌리 깊은 붕당정치와 계급 타파를 위해 일제의 압제를 일정 기간 허락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길밖에 없었다...그러면 몽둥이 역할을 한 일본에게도 ‘나 때문에 수고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독립됐다’라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 바로 구속사다.”라는 정신 나간 소리나 지껄이는 목사 설교를 들어야하는 오늘의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지명도가 있다는 유명 목사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희생과 헌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성도들의 주머니를 탈탈 털어내기 위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상품으로 내놓습니다. 자신들의 주장에 따르면 믿음이 좋고 성령 충만하다고 말합니다. 따르지 않으면 믿음과 성령 충만하기는커녕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렇게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와 있는 탐욕을 추구합니다. 부와 명예는 물론 하나님께 돌려야할 절대 권세까지 누립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 교황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교황이 천주교에는 한 명뿐이지만, 기독교에는 부지기수로 많다는 비아냥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끝없는 우상숭배와 배교의 길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영적인 갈급함에 몸부림치며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고 있는 성도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통해서 발생하는 천문학적인 물질과 따르는 부와 명예와 권세와 기득권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함하고, 거짓 증인을 내세워 정죄하고, 정치적 안위에 목을 매고 있던 총독을 몰아붙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게 못 박아 죽였던 종교 장사치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고 가슴이 미여질 만큼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로 오랜만에 가지려고 했었던 쉴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 것에 대하여 불쾌하게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넘치도록 충만한 연민의 정이 발동했습니다. 피곤함도 잊어버린 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들의 죽은 영혼을 살려내는 영적인 양식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하루해가 저물어 가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당신의 가르침에 집중하고 있었던 그들을 배불리 먹여주셨습니다.
그들의 피곤한 육신을 회복시키는 육적인 양식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공급해주셨습니다. 그들의 전인全人 구원을 위해서 일하셨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전혀 없습니다.(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시23:1)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은혜를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베풀어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천사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의의 천사를 부르셨습니다. 당신이 세상을 창조하고 그 세상에서 가장 으뜸 되는 피조물로 인간을 창조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의의 천사는 정색正色했습니다. 세상을 온갖 불의로 가득 채워놓을 인간을 굳이 창조할 이유가 무엇이냐며 반대했습니다. 거룩의 천사에게도 똑같이 물어보셨습니다. 거룩의 천사 역시 세상을 온갖 종류의 더러움으로 가득 채워놓을 인간을 창조해야할 이유는 없다며 반대했습니다. 빛의 천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상을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어둠으로 가득 채워 놓고야말 인간을 절대로 창조하지 말라며 반대했습니다. 긍휼의 천사만큼은 달랐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하게 간파했습니다. 반드시 인간을 창조하셔야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세상은 불의하고 더러워지고 어두워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기어코 불의와 더러움과 어두움 속에 있는 인간에게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르쳐주겠습니다. 그들이 새로워지고 하나님께서 기대하는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겠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긍휼이 풍성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떠나 허물과 죄로 죽어버린 인류를 단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으십니다. 아니 절대로 포기할 수 없으십니다. 그만큼 사랑하십니다. 너무나 싫고 역겨워서 도무지 상대조차도 하고 싶지 않은 그 인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다가오고 계십니다. 여전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전히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가 회개하고 당신께로 돌아서기만 하면 값없이 선물로 허락해 주실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까지 예비 해 놓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내신 대속의 삶을 통해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명한 성경 해설가로 알려진 그Alan Redpath는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큰 유혹을 잘 감당해내고, 대적의 맹렬한 공격까지 굳건히 막아낸 다음 작은 바늘에 찔린 상처에 어처구니없이 넘어지기도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지극히 작아보여도 한 때 성령으로 충만했고, 하나님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가진 모든 것은 물론 하나밖에 없는 그렇기 때문에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다고 장담했던 저와 여러분을 너무나 어처구니없이 넘어뜨리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풀어주소서! 내게 은혜를 베풀어주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겠나이다.”(시57:1)라고 기도했던 시인처럼, 호흡하는 모든 순간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를 구하고, 구하고 또 구해야하는 이유입니다.
자신이 본질상 진노의 자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깨달아 알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런 자신의 구원을 위해 기꺼이 거룩한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받아 누리고 있는 긍휼을 흘려보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앞서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복된 삶, 긍휼을 흘려보내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참된 행복을 누리는 복된 삶, 무엇보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복된 사순절 절기를 보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