和順譜跋略曰余幼(初)(1)不知和順之崔與全州同姓譜牒亦未得其詳旣聞於人心疑之問于族姓人崔命龍指譜中有海州牧使諱永濡爲和順始祖云必譜牒或疑傳寫之誤遍求和順之譜最久得之開寧崔民挺氏首以牧使公爲始祖一展而了然無疑以此尤知族譜之不可忽也卷中又載曺適庵所爲序次令人尤起感歎也然牧使公是文成公阿之第二子初名龍角與兄龍生弟龍甲龍鳳並名而後改永濡譜與序宜錄而不載此爲一欠今當添入又於全州崔氏譜中令載和順支派以明同爲文成公之後庶使子孫知本宗之不可忘而族姓之不可以遠近視也
萬曆丁巳完山後裔崔晛跋
東鶴寺宗會錄記略曰崔之先出於完山傳來也久矣其派之流雖或分於和順岐於海州即其初則一也惟我宗伯洬{崔海州十世孫}澤世{大護軍十世孫}兩公於斯惻焉摭古詢今廣輯聞見鳩成譜草要我族類會東鶴之寺乃修系也隨其闕而補入因其略而致詳叙其兄弟叔姪之序而各分其列等級分明尊卑不紊此豈非兩公重宗睦族之義乎云云崇禎戊寅仲冬記
右二條旣已略辨於前而今又收錄於此者盖分合異同之辨固不可不十分纖悉故隨得隨錄以備後人之參考而至於海州之崔尤非前所聞也
<화순최씨족보발문>에 이르기를;
나는 처음에 화순최씨가 전주최씨와 같은 성씨인지에 대해서 알지 못하였고 족보 또한 구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사람들로부터 그런 소리를 듣고 마음속으로 의심이 나서 같은 일가인 최명룡에게 물었다.
그가 소개해주는 족보를 살펴보니 해주 목사 휘 영유를 화순최씨의 시조로 하고 있는데 혹시 족보를 복사할 때 잘못하여 그렇게 적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화순최씨 족보 중에서 가장 오래 된 것을 개령에 사는 최민정씨로 부터 구할 수 있었다.
그 족보 머리에 목사공(최영유)을 시조라고 밝히고 있었으므로 그리하여 모든 의심이 사라졌고 더욱 더 족보를 알아야 할 것이며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게 되었다.
책 속에 또 수록되어 있기를 조정에서 적정한 벼슬에 오른 사람들이 그 업적에 따라서 차례대로 적혀 있어서 내용을 보고 저절로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목사공은 문성공 휘 아의 둘째 아들로 처음 이름은 용각이며, 형 용생과 아우 용갑, 용봉의 이름도 나란히 적혀있었다.
뒤에 이름을 영유로 바꾸었다는 사실을 족보에도 마땅히 적시하여 기록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은 것이 한 가지 흠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지금 당장 <전주최씨족보>에 화순 지파를 추가하고 똑같은 문성공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밝혀서, 여러 자손들로 하여금 같은 일가인줄을 알고 잊어버리지 않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며, 또 같은 일가인데도 누구는 멀게 생각하고 또 누구는 가깝게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1617년(광해 9) 전주최씨 후손 최현이 발문을 적었다.
<동학사종회록>에 이르기를
최씨의 선조는 전주에서 나왔다고 전해 온지 오래 되었는데, 그 중 한 파가 혹시 화순최씨로 나누어졌다면 해주 목사 때 그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하나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가문의 최백속{해주 목사 최영유의 10세손}과 최택세{대호군공의 10세손} 두 분께서 간절한 정성으로 널리 옛 것을 모으고 지금 것을 물어 정보를 폭넓게 수집하여 초고를 만들어 우리 일가들을 동학사에 불러 모아 족보를 다듬도록 하였다.
이제 그 부족한 부분을 보강하여 채워 넣어 형과 아우, 아재비와 조카간의 질서를 정확하게 정리하고 각기 나누어진 순서에 따라서 그 서열과 존비를 분명히 하여 혼란스럽지 않도록 해야 하는 일이 어찌 두 분만의 일이겠는가?
종중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종족 간의 화목을 도모하자는 뜻이 아니겠는가? 운운(중략)
하였다.
1638년(인조 16) 동짓달(11월)에 적었다.
위의 두 조(條)는 앞서 이미 고증한 내용과 같은 것인데 지금 다시 이와 같이 목록에 나타나니 어찌 나뉘고 합하며 다르고 같음을 증명하지 아니 하겠는가?
불가불 남김없이 자세하게 수록하여 후세 사람이 참고할 수 있도록 대비해야 하겠기에 앞의 기사에도 불구하고 다시 수록한다.
* 각주.
(1) 같은 내용의 글이 인재공의 문집 <인재집>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두 문헌을 비교하여 보면 서로 다른 부분이 많은데 <인재집>에 수록된 내용이 더 충실하고 오류가 적은 것 같다. 이 부분의 경우에도 <인재집>에는 “어려서(幼)”가 아니라 “처음에(初)”로 되어 있으므로 <인재집>을 따라 “幼”를 “初”로 교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