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續東文選卷之十 / 七言絶句
自警(자경)
[終南守昌壽]
이창수(李昌壽)
蕪穢靈臺不自鋤。무예영대불자서
辛勤空誦五車書。신근공송오거서
百年奔走迷南北。백년분주미남북
誰信人間有廣居。수신인간유광거
영대 거치른 것 스스로 김매지 않고서 / 蕪穢靈臺不自鋤
부질없이 괴로이도 오거서만 외웠노라 / 辛勤空誦五車書
백년을 분주해도 남북이 희미하니 / 百年奔走迷南北
뉘라서 이 세간에 넓은 곳이 있다 하오 / 誰信人間有廣居
ⓒ 한국고전번역원 | 양주동 (역) | 1969
蕪穢무예=토지가 황폐해진 것. 잡초가 무성하다.패륜아.
靈臺영대= 신령스럽다는 뜻으로, 마음을 이르는 말
鋤=호미 서, 어긋날 서.김맬서. 辛勤신근=힘써 부지런히 일함.
五車書오거서=다섯 수레에 실을 만한 책이라는 뜻으로,
많은 책을 이르는 말
이창수李昌壽
인로(仁老) 조선후기 병조판서, 이조판서, 홍문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덕옹(德翁). 세종의 아홉째 서자 영해군(寧海君)이당(李塘)의 후손이며,
이백린(李伯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병조참판 이언강(李彦綱)이고,
아버지는 이태제(李泰躋)이며, 어머니는 칠원윤씨(漆原尹氏)로 정언 윤지화(尹志和)의 딸이다.
이민제(李敏躋)에게 입양되었다. 판중추부사를 지낸 이창의(李昌誼)의 동생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40년(영조 16)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그 해 정언이 되었으며,
선천부사(宣川府使). 교리·응교·집의·부교리·부응교·승지·황해수사, 우승지·영흥부사(永興府使)·경상우병사,
대사성을 거쳐 1754년 대사간에 올랐다.
1756년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음해 병으로 체직되었으며,
그 뒤 도승지·부제학, 이조참판, 판윤, 내의원제조·병조판서·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 1761년 평안감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우참찬·지경연, 병조판서·이조판서를 지냈으며,
1763년 해남(海南)으로 귀양갔다가 곧 풀려났다.
이듬해 이조판서로 다시 등용되어 판의금부사·한성판윤·예문관제학·형조 판서·수어사·
내의원제조·홍문관제학·판돈녕부사를 두루 역임한 뒤, 1772년 마지막으로 수어사(守禦使)를 지냈다
. 1778년(정조 2) 문헌(文憲)이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