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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리 방화사건과 미군정-강덕환| ☆ -- 제주4.3사건진실
오라리 방화사건과 미군정 마을에서 불타는 연기가 솟아오른다. 공중에서는 정체가 불분명한 비행기가 낮게 지나가고 지상에서는 군용 트럭에 탑승하고 무장한 경찰기동대가 마을로 진입한다. 비포장 도로여서인지 덜컹이다가 몇몇은 내리기도 한다. 뒤이어 밭담을 넘으며 진격하는 모습, 집들을 수색하고, 관을 짜는 대패질 모습이며 늙은 할아버지와 아낙네, 어린 아이의 모습도 비친다. 이 장면들은 미군정 시절인 1948년 5월 1일 제주시 오라동 연미마을을 배경으로 촬영된 무성 기록영화 ‘제주도의 메이데이(May Day on Cheju-Do)’이다. 물론 이 필름은 ‘폭도의 소행’으로 기록 편집되었고, 제주4·3과 관련하여 미국의 역할을 들여다보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 시기의 전후 상황을 조금만 더 들어가 보자. 4·3이 발발하던 초기만 하더라도 치안상황으로 간주되던 흐름들이 4월 28일의 평화회담, 4월 29일의 미군정장관 딘 소장의 제주극비 방문, 5월 1일의 오라리 방화사건, 5월 3일의 귀순자 습격사건, 5월 5일의 수뇌부 회담, 5월 6일의 9연대장 전격 해임, 5월 10일의 5·10선거로 이어지면서 미군정 당국에 의해 제주는 적성지역으로 간주되고 초토화의 토벌작전을 지시하게 된다. 미군정은 왜 그랬을까. 48년 말 소련은 UN무대에서 미·소 양진영의 점령정책을 비교하면서 제주4·3문제와 관련하여 미군정의 실정(失政)을 비난하는 강도를 높이기 시작했고, 이에 미국 측에서는 한국에 파견된 군정장관에게 조속한 사태 해결을 지시했고, 국제사회에서 소련의 공세를 막아내기 위한 방안으로 제주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반란’으로 규정해 갔다는 점이다. 미군은 진짜 제주에 왔을까. 해방 후 제주도에 대한 미군 진주는 다른 지역에 비해 늦게 이루어 졌다. 제7사단 제184연대의 연대장 그린(Green) 육군대령 지휘하의 항복접수팀(38명의 장병으로 구성)과 제24군단 병기장교 파우엘(Powell) 육군대령 휘하의 무장해제팀이 제주에 들어 온 것은 1945년 9월 28일의 일이었다. 물론 이 이전에 사전정찰을 위한 선발대(제308폭격대)가 1945년 9월 24부터 25일까지 제주읍 서측의 한 비행장을 착륙지점으로 결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재조선미국군사) 무장해제팀을 제주에 파견하기로 결정한 것은 9월 13일로 보인다. 항복접수팀은 항공편, 무장해제팀은 배를 이용하여 제주에 들어온다. 이들은 제주농업학교에서 항복문서에 조인을 받고 서울로 귀환하였는데, 일부 장병들은 계속 남아서 상황조사에 임하였다. 그러나 종전 전부터 일본군 포로를 통한 미국육군전략처(OSS)에 의해 정보는 수집되고 있었고 미군 무장해제팀이 오기 전부터 일본군의 항공기, 포, 무기, 폭발물, 탄약 등은 파괴되거나 수장하도록 지시를 받고 있었다. 전술부대로서는 제24군수지원사령부 배속의 제749야전포병대대가 10월 22일에 처음 진주하였다. 장병 503명으로 편성된 제749야전포병대대는 모슬포비행장과 제주비행장에 주둔하여 일본군 및 민간인의 본국송환업무를 수행하다가 11월 10일 제6사단 20연대 배속의 제51야전포병대대 분견대(1개 소대 내지 1개 중대의 규모)가 제주비행장에 상주전술부대로 진주하게 되자 11월 26일과 29일에 부산으로 떠나게 된다. 제51야전포병대대 분견대는 작전형 군정 전반을 관장할 책임이 주어져 있었지만, 영토형 군정은 제101군정단 예하의 제59군정중대가 1945년 11월 9일 제주에 도착해서 제주비행장에 주둔하고 전후 민사정부 수립의 임무를 담당하게 된다. 제주도 군정책임자인 제주도사로서 부임한 사람은 스타우트 육군 소령이었다.(당시 제주도사의 직무를 대행하고 있던 김문희는 도사 대리로 임명한 것으로 판단됨.) 한편 주한 미육군사령부 방첩대는 1947년 3월부터 제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47년 3월에는 준위 1명과 사병 2명으로, 47년 4월 중순경부터는 제주 지구대에 준위 2명, 사병 2명이 활동한다.) 4·3과 미군정, 어떻게 볼 것인가. 1. 미군이 군중해산 지원(3·1절기념대회) 1947년 3·1절 기념대회를 앞두고 2월 17일 3·1절투쟁기념준비위원회(위원장 안세훈)를 결성하게 된다. 그 후 민전 의장단은 2월 25일 제주도군정청에 제주북교에서의 집회 허가서를 제출하고 미국인 경찰고문관 패트릿치 대위를 방문하여 3·1절 기념행사에 대한 의견교환이 이루어 진다. 2월 28일에는 스타우트 제주도지사는 이 행사를 제주서비행장에서 가지도록 통고 했으나 제주북교에서의 집회는 강행되었다. 이 3·1절기념대회 당시 시위군중을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미군이 동원되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제6사단 정보일지에 의하면 이 날 “미군이 군중해산을 지원했다”고 하면서 개입된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2. “원인엔 흥미가 없다. 사명은 진압 뿐”(브라운 대령) 1948년 4·3이 발발할 당시 제주비행장에 주둔하고 있던 제51야전포병대대 분견대는 극소수의 병력에 불과했고 전술부대로서의 상징적 의미밖에 없었기 때문에 미군병력이 직접 토벌작전에 참가시키지는 안했고, 제59군정중대의 보급지원과 보호역할을 담당하는데 그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제20연대의 병력이 추가 배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있다. 주한미보병 6사단 정보일지에 의하면 “1948년 5월 11일 보병 20연대 분견대는 제주비행장 활주로 남쪽에 대규모의 무리가 나타나자 긴장한 채 두 차례나 경계태세를 취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주 전술부대인 제51야전포병대대 분견대와는 달리 제주4·3의 진압을 위하여 20연대 병력 중의 일부가 제주도 증파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때에도 미군들이 동원되었지만 적극적 공세를 취하지 않았고 다만 점령군으로서 작전지휘를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제6사단 20연대의 연대장 브라운 육군대령이 1948년 5월 22일부터 6월 30일까지 소수의 파견대를 인솔하여 국방경비대 11연대의 토벌작전을 지휘하였음을 보여주는 기록들이 있다. 1948년 6월 8일자 조선중앙일보의 보도내용(조덕송 특파원)에 따르면 제주현지시찰기자단 일행이 제주도 치안행정의 최고 지휘자인 브라운 대령을 찾아 벌인 인터뷰에서 “4·3폭동사건의 원인을 규명하여 보았는가”라는 기자단의 질문에 “나는 원인에 대하여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을 시키는 것뿐이다. 내가 평정에 성공한 다음 폭동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나의 책임이고 조선인 행정관리의 책임이다.”라고 말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유혈의 제주도’라는 신천지 7월호에서도 “제주읍에는 국방경비대 현지(제11연대)사령부가 있고 치안을 주로 담당하고 있는 경찰의 경비사령부가 있고, 소탕(평정), 치안, 행정의 최고 지휘자인 미군본부가 있다. 위급한 산악지대의 전투에는 경비대가 주동이 되어 있고, 또한 해안 경비대는 제주도 해안의 경계와 육지로부터 증가되는 파견부대의 수송에 당하고 있으니 이를 통솔 지휘하는 최고 지휘관이 미군 부라운 대령이다.”라고 하면서 제주4·3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3. 미군정의 초토화 지시(김익렬 연대장 유고) “나는 이 무렵 또 다른 고통스러운 시련을 당하고 있었다.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은 미군 고위층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제주읍내에 있는 미군 CIC에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이 와 있다고 지시했다. 지시한 시간에 가 보았더니 군정장관 딘 장군의 정치고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름을 밝히기를 거절한 그는 국제정세와 한국 장래문제를 소상히 설명하고 나서 제주도 폭동이 빠른 시일 내에 진압되지 않으면 미국의 입장이 난처해지고 한국의 독립에도 유해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일을 신속하게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초토화 작전이라고 강조하고 이에 대한 나의 견해를 물었다. 나는 군인의 태도는 단호하고 명료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으므로 한마다로 ‘노’라고 대답했다. (중략) 내가 초토화 작전을 감행하여 임무를 완료한 후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한국에서 살기가 어렵게 된다면 나의 가족과 친척을 데리고 미국에 이민 가 살도록 해 준다고도 했다. 처음에는 5만 달러를 주겠다고 했다가 또 10만 달러를 주겠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얼마가 필요 하느냐고 마치 어린아이 달래듯 하는 것이었다. (중략) 군정장관 딘 장군이 본국 정부의 독촉에 쫓긴 나머지 정치고문을 보내서 경찰이 건의한 초토작전을 내가 실시하도록 세뇌공작을 하여 본 것일 터이다. 이런 절반 위협적으로 절반 유화적인 설득이 매일같이 두 세 시간씩 계속되었다.” 4. “미군정은 유혈사태 제공자”(존 메릴 박사) “4·3의 유혈사태는 이승만 정권이 져야할 것이다. 다만 미군정이 유혈사태 원인의 제공자라는 데에는 동의한다. 미군정의 일관성 없는 한반도 정책이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1990. 6) “1948년 8월 15일 이전에 미국이 어느 정도 개입했었고, 또 현지에서 특히 우익청년단체들이 제대로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점령한 지역에서 이처럼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곳은 없는데 참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미국의 고문단이 개입됐다는 것은 비극적인 일입니다.”(1992. 6. 제민일보 인터뷰) 5. :미국은 윤리적 법률적 책임이 있다“(부르스 커밍스 교수) 미군정 때 4·3이 발발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48년 8월 15일까지 미군정은 38선 이남의 법적이고 공식적인 행정부였다. 비록 한국정부가 수립됐지만 한·미간 비밀협약에 따라 미군은 49년 6월까지 한국의 군대와 경찰을 지휘 통제했다. 따라서 45년부터 49년 6월 30일까지 제주섬에서 발생한 모든 학살극과 잔혹행위에 대해 미국은 윤리적 책임뿐 아니라 실제적이고도 법률적 책임이 있는 것이다. 여순사건에는 미군이 직접작전을 진두지휘했지만 제주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미군은 토벌대를 훈련시키고 죄수를 심문했다. 그리고 게릴라 수색에 미군정찰기를 동원했다. 미군은 학살극을 억제하기는 커녕 칭찬하고 지지함으로써 소극적 관여를 한 것이다.(1998. 3. 14. 제민일보 인터뷰) 역사적 진실은 미군정의 뒤통수를 내다보고 있다. 미군정이 제주라는 현장에서 토벌의 전면에 직접적으로 나섰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은 일부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 후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정치질서 내지 힘의 재편과정에서 한반도의 남녘땅 제주도는 그 틈바구니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이고 이로 인해 엄청난 비극이 초래되었다는 사실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책임론에서 미국은 외면하고 있다. 4·3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지난 1999년 12월 21일, 스티븐 보스워스(Stephen W. Bosworth) 주한 미국대사는 지방 춘주 6개 일간지와 가진 제주4·3과 관련한 인터뷰에서 “미국정부가 책임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미국정부가 제주도로부터 철수하고 있는 과도기적 시점, 그리고 철수한 이후에 일어난 일이었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상에서 살펴봤듯이 제주4·3의 한 축에 미국이 자리 잡고 있었음은 최근 각종 자료나 연구자들의 성과물에서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지난 92년 <4·3역사 그림전>을 개최했던 강요배 화백은 오라리 방화사건을 다룬 ‘왜곡’이라는 작품을 발표한 적이 있다. 마을이 불타는 모습을 비행기에 타고 필름에 담고 있는 촬영팀의 뒷통수를 그리고 있다. 자기들은 세상에서 최고로 위대하고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하면서 제주4·3을 왜곡할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역사적 진실을 눈은 오히려 그 보다도 더 높은 곳에서 응시하고 있음을 알고 있을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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