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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주의적 세계관:
영지주의에 대한 간략한 요약
다음은 영지주의에 대해 영지주의 주교가 소개하는 글입니다. 불교를 스님이 소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언어로 그들이 설명하는 영지주의를 읽다 보면 우리가 성경을 이해할 때 참고할 만할 것을 찾을 수 있으며, 현재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의 체계를 비교하며 점검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이 글의 출처: http://gnosis.org/gnintro.htm 여기는 영지주의를 알리는 곳입니다.
The Gnostic World View:
A Brief Summary of Gnosticism
영지주의적 세계관:
영지주의에 대한 간략한 요약
영지주의는 그노시스에 바탕을 둔 가르침인데, 그노시스(Gnosis)란 내적이고 직관적인 수단으로 도달하게 되는 초월적인 지식을 말한다. 비록 그처럼 영지주의가 개인적인 종교경험에 의존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경험이 영지주의적 인식을 낳는다고 생각하면 착오다. 오히려 바르게 말하자면, 영지주의는 특정한 종교적 경험을 나타내며, 그 경험이란 신학이나 철학의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신화라는 매체에 친숙하며 그런 매체를 통해서 자신을 표현한다. “신화”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바는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되며, 오히려 이런 신화에 구현된 진리는 신학적 교리나 철학적 명제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다음의 요약문에서, 영지주의적 신화가 그 독특한 시적 그리고 상상을 담은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산문의 형태로 요약하고자 한다.
우주론
모든 종교적 전통이 인정하는 바는 세계가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다른 점이라고는 이 불완전성의이유를 제시하는 설명과 그에 대하여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제안이 다를 뿐이다. 영지주의자들도 나름대로 이런 문제를 보는 관점이 있는데, 어떠면 다소 놀랄 수도 있다: 그들이 믿기로 세계가 흠이 있는 이유는 그렇게 흠이 있는 방식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불교처럼 영지주의도 이 땅에서의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근본적인 인식과 함께 시작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에게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서로를 소비한다. 이에 따라 서로에게 아픔과 두려움, 그리고 죽음으로 고통을 준다(초식동물조차도 식물의 생명을 파괴함으로 생존한다). 게다가, 자연적 재난이라고 부르는 지진, 홍수, 화재, 기근, 화산 폭발 같은 것도 발생하면 더 큰 고통과 죽음을 야기한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복잡한 생리와 심리로 말미암아 지구에서 존재하는 이런 고통스런 모습을 잘 알고 있다. 또한 자신이 이 흠 많고 열악한 세상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자주 깨달으면서 고통을 겪는다.
많은 종교가 주장하는 바는, 세상의 불완전성에 대한 책임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지지하기 때문에, 그들은 창세기의 신화를 해석하면서 처음 인간 부부가 저지른 범죄가 세상에 현존하는 부패한 상태를 야기한 피조물의 “타락”을 가져왔다고 선언한다. 영지주의자들은 그 신화에 대한 이런 해석은 틀린 것이라고 대답한다. 세계의 타락의 책임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이에게 있다. 특히 단일신론을 믿는 종교에서 창조주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런 영지주의적 입장은 신성모독적으로 보이며 종종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기도 한다.
흠이 있는 피조물과 그것을 만든 흠 많은 창조자에 대한 인식을 교묘히 회피하기 위한 방법이 계속 고안되고 있지만 이런 주장 중에 어느 것도 영지주의자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고대의 그리스인들은 특히 플라톤주의자들은 사람들에게 우주의 조화로움에 주목하라고 조언했는데, 그렇게 그 웅대함을 칭송함으로써 자신들의 현재적 고통을 잊으려 했다. 그러나 이런 조화도 여전히 잔인한 흠과 황량함, 그리고 존재의 낯섦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조언은 영지주의자들에게는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어 보인다. 동양의 업보 사상도 영지주의자들에게는 피조물의 불완전성과 고통을 설명하는데 부적절하게 여겨진다. 업보는 기껏해야 고통과 불완전성의 사슬이 작동하는 법을 설명해줄 뿐이다. 그것은 왜 그런 슬프고 해로운 체계가 처음으로 존재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일단 세계의 고통과 불완전성에 대한 영지주의적 설명이 가지고 있는 이런 “낯설고” “신성모독적인”특성에 대하여 받은 최초의 충격이 진정되면, 그것이야말로 모든 설명 중에서 가장 납득할만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더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신에 대한 영지주의적 개념에 대해 익숙해져야 하며, 그것은 진정한 신은 원래적으로 존재하는 분이며 그리고 그것이 좀 격이 떨어진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거짓되거나 창조하는 신의 모습이다.
신론
영지주의적 신 개념은 대부분의 종교들에서 말하는 것보다 더 정교하다. 그 방식에 있어서, 단일신론과 다신론에 대한 인식을 통합하고 조화시키며 또한 유신론과 이신론(理神論) 그리고 범신론(汎神論)도 아우른다.
영지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참되고 궁극적이며 초월적인 신이 존재하며, 그 분은 모든 피조된 우주를 초월해 계시며 “창조하다”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그런 의미에서 어떤 것도 일체 창조하지 않으셨다. 이렇게 참된 신은 어떤 것도 만들거나 창조하지 않으신 반면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간에 만물 안에 있는 모든 것의 근본을 자신이 “발출”하게 하거나 자신으로부터 나오게 한다. 어떤 의미에서, 만물이 신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물은 신의 본질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같은 방식으로, 원래의 신의 근본의 많은 부분이 그 근원으로부터 지금까지 투사되어왔으며 그 결과로 그 과정에서 온전하지 않은 변화를 겪는다고 인식되어야 한다. 우주나 자연 또는 어떤 피조물을 섬기는 것은 그러므로 발출된 신의 근본에 비하면 낯설고 오염된 부분을 섬기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영지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신화는 많은 변종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은 영지주의적 영체(靈體)인 이온(Aeons)을 언급한다. 이온은 궁극적이고 참된 신과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이를 연결해주는 신적 존재다. 참된 신과 더불어 이온들은 충만함(플레로마)으로 구성되는데 그 속에는 신성의 능력이 충만하게 작동한다. 충만함은 우리 존재적 상태와는 대조적인 것인데, 그것을 반대로 말하면 허무(텅 빔)라고도 할 수 있다.
영체적 존재 중 하나는 소피아(“지혜”)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그것은 영지주의적 세계관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지혜는 두루 다니면서 자신으로부터 흠 있는 양심을 발출하는데, 그것이 물질과 정신세계와 같이 그 자체에 흠이 있는 모습으로 만물을 창조하는 창조신이 된다. 이 존재는 자신의 근원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이미 존재하는 신적 근본을 취하여 다양한 것들을 만들었으므로, 데미우르고스(Demiurgos)나 “절반창조자”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그것은 진짜로 절반만큼 피조물 안에 참된 신성의 요소가 있지만, 절반 창조자와 하늘의 부하들인 아르콘들(Archons)이나 “통치자들”에게는 인식되지 않는다.
인간론
인간의 본성은 세상에서 발견되는 이원론을 반영한다: 부분적으로 그것은 거짓 창조신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 참된 신의 빛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썩어질 육체와 정신적인 구성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영적인 구성요소도 있는데, 이것은 신이 가지고 있는 본질의 파편이다. 이 영적인 부분은 종종 상징적으로 “신성한 불꽃”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세계와인간의 이런 이원론적 특성에 대한 인식은 영지주의적 전통에 “이원론자”라는 별칭을 부여했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자신 안에 있는 신성한 불꽃에 대해 무지하다. 이런 무지가 인간의 본성 안에서 촉진되는데 그것은 거짓 창조자와 그의 아르콘들(통치자들)의 영향 때문이다. 이 둘은 남자와 여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진정한 본성과 신성에 대해 계속해서 무지하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우리를 땅의 것에 집착하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우리로 하여금 이런 낮은 우주의 통치자들에게 종노릇하게 하는데 일조한다. 죽음은 낮은 감옥으로부터 신성한 불꽃을 자유롭게 하지만, 그것은 마치 신성한 불꽃이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며, 그 후에 물질세계의 고통과 노예상태 안에서 다시 모양을 갖게 된다.
모든 인간이 영에 속한 사람(뉴마틱스, pneumatics)은 아니고 그러기에 그노시스와 해방이 준비되어있다. 어떤 이들은 땅에 속한 사람들이고 물질적인 존재(휠레틱스, hyletics)라서 물질적인 것들만 인식한다. 다른 이들은 대부분 정신적인 영역에서 살아간다(싸이킥스, psychics). 어떤 사람들은 보통 데미우르고스를 참된 신으로 오해하며 물질과 정신 너머에 있는 영적인 세계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거나 무지하다.
역사를 통하여 볼 때, 인간은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노예상태에서 발전하면서, 윤리적 종교성을 지나, 영적인 자유와 자유하게 하는 그노시스로 나아간다. 퀴스펠(G. Quispel)은 다음과 같이 글을 썼다: “세상에 유배된 영혼은 물질이라는 지옥을 지나 도덕주의라는 연옥을 통과하여 영적 낙원에 도달해야 한다.” 인식에 대한 이런 식의 진화는 영지주의자들에 의해 제안되었는데, 이는 진화론의 개념이 알려지기 오래 전의 일이다.
구원론
그러나 진화적 힘만으로는 영적인 자유를 유발하게 하는 데는 부족하다. 인간은 자신의 참된 기원과 근본적인 본성 그리고 자신의 궁극적인 운명에 대해 무지한 물질적인 존재로 이루어진 곤경에 빠져있다. 이런 곤경에서 벗어나려면 인간은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인간도 자신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일찍부터 빛의 전령들은 참된 신으로부터 나와서 그노시스를 필요로 하는 인간들을 도왔다. 몇몇의 이런 구원자에 대해서만 영지주의 문서는 언급하고 있다; 그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셋(아담의 셋째 아들), 예수, 그리고 예언자 마니(Mani)다. 대다수의 영지주의자들은 항상 예수님을 주요한 구원자(쏘떼르)로 여긴다.
영지주의자들은 죄에서 건져지는 것을 구원으로 보지 않고, 죄를 유발하는 무지에서부터 건짐을 받는 것을 구원으로 여긴다. 여기서 말하는 무지란 영적인 존재에 대한 무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 무지가 그노시스(초월적 지식)에 의해 추방되며, 그노시스가 결정적으로 계시되려면 빛의 전령이 가져다 주어야 하는데, 그 빛의 전령은 특별히 그리스도요, 참된 하나님의 로고스다. 그의 고난과 죽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가르침의 삶과 그가 세우신 신비 곧 그리스도가 자신의 구원의 사역을 행하신 것에 의해서 구원이 이루어진다.
구원에 대한 영지주의적 개념은 다른 영지주의적 개념과 마찬가지로 정교하다. 한편으로, 영지주의적 구원은 흔히 중매자가 없는 개인적인 경험으로 오해를 받는다. 즉, 영적으로 스스로 깨쳐야 한다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이 굳게 붙들고 있는 바는, 구원을 주는 그노시스의 잠재적인 힘이 모든 사람들 안에 이미 있으며, 그 구원은 남이 대신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루어내는 것이다. 동시에 영지주의자들이 인정하는 바는, 그노시스와 구원이 양심 안에서 효과적으로 일어나기 위해서는 자극을 받고 도움을 입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자극은 빛의 전령에 의해 제공되는데, 그는 자신의 가르침에 더하여 구원의 신비(의식)을 세워주는데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이들은 빛의 사도와 그 후계자들이다.
사람은 우리의 참된 본성의 지식이 다른 관련된 실재와 함께 유한한 존재라는 바로 그 조건에 의하여 우리에게서 숨겨져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참되신 신의 초월성은 이 세상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 그분은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라고 사람들이 부른다. 그러므로 위로부터 계시가 내려와야 구원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내재적인 불꽃은 “무로부터 나오는” 구원의 지식에 의하여 땅의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행위
만약 “윤리”나 “도덕”이 규칙의 체계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영지주의는 그 둘 다를 반대한다. 그런 체계는 대개 데미우르게로부터 기인한 것이며 자신의 목적을 섬기도록 탐욕스럽게 도안된 것이다. 만약, 다른 한 편으로, 도덕이 내면의 불꽃이 밝게 비추어줌으로써 나오는 내적 순전함으로 구성된 것이라면, 영지주의자는 이처럼 영적으로 제시된 존재론적 윤리를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수용한다.
영지주의자에게, 계명과 규칙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구원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다. 행동의 규칙은 수많은 목적을 따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질서와 평화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사회 단체들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 등이다. 그러나 규칙은 구원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노시스에 의해 일어나는 일이다. 도덕은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일시적이고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그것은 개인의 영적 성장에 따라 늘 변화되고 개정되기 마련이다.
위의 논의에서 주목한 것처럼, “육신에 속한 사람들”은 보통 도덕에 별 관심이 없지만, “정신적 수양을 하는 사람들”은 종종 도덕에 아주 큰 비중을 둔다. 이와 대조적으로, “영에 속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다른 것 즉, 더 높은 문제에 더 관심을 갖는다. 다양한 역사적 시대는 또한 인간의 행위와 관련한 다양한 태도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마니교적이고 카타리파적인 영지주의 운동(the Manichaean and Cathar Gnostic movements) 이 두 개는, 행위의 순수성이 더 숭고한 의미를 갖는다고 여기는데, 이와 같은 방식으로 대답한다. 오늘날 서양 문화는 아마 더 많은 방식에 있어서 2~3세기의 알렉산드리아의 방식과 유사한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영지주의자들은 고전 알렉산드리아 영지주의의 태도를 수용하여, 행동의 문제를 대개 개인의 판단에 맡겨두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긴다.
영지주의는 생명을 향한 수많은 일반적인 태도를 수용한다: 그것은 세상에 속하지도 말고 세상을 따라가지도 말라고 권면한다. 즉,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요, 자기중심주의를 반대하는 것이요, 다른 존재의 자유와 존엄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일은 모든 개개의 “그노시스(초월적 지식)”의 직관과 지혜가 개인의 삶에 적용하기 위한 개인적인 행동지침의 원리를 추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운명
공자가 죽음에 대하여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왜 당신은 어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죽음에 대하여 나에게 묻는 거요?” 이 대답은 영지주의자도 쉽게 하는 말이다. 도마가 쓴 영지주의적 복음서에서 유사한 질문을 제기한 사람에게,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인간은 반드시 그노시스(초월적 지식)에 의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적인 실체를 알아야 하는데, 이는 그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나왔고 그리로 자신들이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초월적 지식은 그들이 땅에 몸으로 살아 있을 때 습득되어야 한다.
죽음은 자동적으로 데미우르게의 영역에 있는 속박에서 자유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 자신이 육신으로 있을 동안에 자유하게 하는 그노시스(초월적 지식)을 얻지 못한 사람은 한 번 더 존재의 덫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마치 재탄생의 고리라는 방식이 일어나는 것과 유사하다. 영지주의는 영원히 윤회가 반복된다는 교리를 강조하지는 않지만, 암시적으로 대부분의 영지주의적 가르침이 반영하는 것에 따르면, 육신에 있을 동안에 초월적인 기원에 따라 실제적으로 행동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생의 삶의 슬픈 상태로 되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구원과 관련하여, 또는 죽음 이후의 영혼과 정신의 운명에 대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발렌티누스라는 위대한 영지주의 교사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리스도와 소피아가 플레로마(충만)의 입구에서 영적인 사람, 즉 영에 속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가 그 사람을 최종적 결합이라는 신방(新房)으로 안내하려고 돕는다. 톨레마이우스라는 발렌티누스의 제자의 가르침에 따르면, 영적인 상태에 이르지 못한 사람도 즉, 정신에 속한 사람도 대속을 받고 천상의 플레로마의 입구에서 살 수 있다. 때가 차면, 모든 영적인 존재는 그노시스를 받고 더 높은 자아와 결합할 것이다. 그것은 쌍둥이 천사를 말한다. 그렇게 하여 플레로마로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된다. 그러나 그노시스를 얻고자 하는 진지한 노력이 없이는 이것들 중 어느 것도 가능하지 않게 된다.
그노시스와 프쉬케(정신): 심층 심리학과의 관련성
이십 세기 동안에 심층심리학이라는 새로운 과학원리가 매우 부각되었다. 심층심리학자들 중에는 영지주의에 단호하고 폭넓은 관심을 가진 이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 단연 두드러진 이는 융(C. G. Yung)이다. 융은 1950년대에 영지주의 저작을 보유하고 있는 나그 함마디(Nag Hammadi) 도서관에 관심을 끌게 하는데 기여를 한 사람인데, 그 까닭은 그가 영지주의적 통찰이 빼어난 심리학과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주목 받는 영지주의 학자인 필로라모(G. Filoramo)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융의 생각은 고대영지주의자들의 생각에도 같은 정도로 오랫동안 스며들어 있었는데 융은 이 영지주의자들이야말로‘심층심리학’의 창시자라고 간주했다… 즉, 그것은 고대의 그노시스(초월적 지식)이었던 것이다. 단지 그것은 보편적 종교의 형태를 띠었고, 어느 정도 형상화되어 동시에 명확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개념이었는데, 그것이 융의 영적 처방(Yungian spiritual therapy)이었다.” 그런 인식의 빛 가운데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지주의는 종교인가 아니면 심리학인가?” 그 대답은 그 둘 다라고 보면 된다. 영지주의 문서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신화의 모티브(동인)는 심리학과의 관련성과 적용점을 내포한다. 예를 들어, 눈 멀고 오만한 창조자-데미우르게는 존재론적 자아(the ontological Self)와의 접점을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소외된 인간의 자아와 매우 유사한 점이 있다. 또한, 지혜신화는 인간의 정신의 이야기와 매우 유사한데, 총체적 무의식과의 관련성을 상실하여 자아(the Self)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유사성이 매우 풍성하게 존재한다.
많은 밀교적 가르침이 “위에 있는 것처럼, 아래에도 있다”고 선포한다. 우리의 심리학적 특성(소우주)은 형이상학적 특성(대우주)을 반영하는데, 그처럼 영지주의는 심리학적이고 종교적인 정통성을 갖게 된다. 영지주의 심리학과 영지주의적 종교는 서로를 배척할 필요가 없으며 통전성의 암시적 차원에서 서로에게 보충이 될 수 있다. 영지주의자들이 늘 견지(堅持)하는 바는, 신성이 인간의 영혼 안에 스며들어 있지만 그 안에만 제한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영지주의적 종교 가르침이 심리학적 통찰과 일치한다는 점은 그러므로 유서 깊은 영지주의적 원리에 비추어볼 때 이해할 만 하다.
결론
어떤 작가는 “그노시스”와 “영지주의”를 구별하려고 한다. 그런 구별은 도움이 되면서 동시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노시스는 의심할 바 없이 개념과 지침이 아니라 마음의 감응에 근거한 경험이다. 다른 한편으로, 영지주의는 그노시스의 경험에 바탕을 둔 세계관이다. 이런 이유로,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에서, 그노시스라는 말은 종종 경험과 세계관 둘 다에 사용된다(독일어로는 die Gnosis, 불어로는la Gnose).
어떤 의미에서, 영지주의가 없이는 어떤 그노시스도 없다. 왜냐하면 그노시스의 경험은 불가피하게 그것이 발견되는 세계관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적 세계관은 경험적이며, 그 바탕은 그노시스에 대한 영적 경험의 일종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적 세계관의 다양한 부분을 제외하거나 희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면 그 세계관은 더 이상 경험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신학은 종교라는 영적 씨앗을 둘러싸는 지성적인 포장지라고 불러왔다. 만약 이것이 참이라면, 대부분의 종교는 그 자신의 포장지에 의해 억제되고 질식되고 있다는 말도 참이 된다. 신화는, 영지주의 신화를 포함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초월성, 신비성은 다른 요소를 지닌 심리학적 원형과 함께 그런 해석을 하는 데 기여를 한다. 여전히, 그런 신화적 진술은 부인할 수 없는 심오한 진리를 말해주는 것들이다.
영지주의는 높은 권위를 가진 그런 진리를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가장 고차원적인 부분인 영에서 나오는 목소리로 말하기 때문이다. 이 영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망하는 대로 흘러간다.” 그러므로 이것이 영지주의적 세계관이 수세기의 핍박에도 소멸되지 않는 이유다.
영지주의적 세계관은 항상 때에 맞는 가르침을 주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참된 그노시스인 “마음의 지식”에 대해 가장 잘 대답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지주의가 때에 적합한 가르침을 주는 예들이 증가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천년기의 말미에 많은 이념들의 급진적인 기능 저하가 나타나 영지주의에 의해 제기된 위대한 질문과 대답을 회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지주의가 가진 그런 명료성, 솔직함, 그리고 권위는 인간의 곤경이 감동을 주고 (때로는) 설득시키는데 실패한 질문에 답을 준다. 만약 당신이 이 요약 글에 어떤 긍정적인 차원의 반응을 보였다면, 당신은 어쩌면 스스로 영지주의자일 수도 있다!
+ 스테판 횔러(영지주의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