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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19일 (화)
촬영. 현대미술관에 방문하려고 덕수궁에
들어왔더니 때맞춰 수문장 교대식을 하네요. 덕수궁
광명문입니다. 광명문이 제자리를 찾은지 몇달이 되다보니 이젠 이 자리가 제법 어울리는것 같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지금 이곳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
50주년 기념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2019, 10, 17 ~ 2020, 2, 9)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 1부. 1900-1950. 올해는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자, 1969년 국립현대미술관이 문을 연 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삼일운동은 일제의 강압 통치에 항거한 목숨을 건 저항운동으로, 향후 일제통치의 방향을 전환시킨 뜻 깊은 사건이었다. 또한 50년전 경복궁의 한 건물에서 소장품 0점, 직원 4명으로 출발한 국립현대미술관은 파란만장한 한국의 역사와 함께 성장하며, 한 국가의 문화수준을 상징적으로 반영해 온 역사적 징표이다. 각각 한 세기, 반세기가 지난 뜻 깊은 사건을 배경으로, 올해 국립미술관은 덕수궁관, 과천관, 서울관 3개관에서 함께 대규모의 기획전을 마련하였다. 1900년부터 현재에 이르는 약 120년의 시간 속에서, 중요한 역사적 순간들이 어떠한 파장으로 한국의 사회, 문화, 그리고 미술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거시적으로 살펴보는 전시이다. 그 중
덕수궁관에서 열리는 1부 전시는 약 1900~1950년의 시기를 다루고 있다. 의로운 이들의 기록. 19세기 세계 열강들의 제국주의 야욕 속에서, 한반도는 쇄국과 개화의 갈림길에 서서 격변기를 맞았다. 이 때 이른바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로 분류된 각지의 사대부들은 끝까지 쇄국을 고수하며 유교를 숭상 하고 왕을 받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한편으로 세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고루한 이들로 비춰지기도 했지만, 어떤 점에서 이들의"목숨을 건 고집"은 존경받아 마땅한 면을 지니고 있다. 주로 사대부 가문의,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이들이었지만, 시대의 사명에 직면하여 첫째 목숨을 끊거나, 둘째 의병을 일으켜 무장 투쟁을 하거나, 셋째 은거하여 후세를 기약하는 단호한 결정을 주저하지 않았다. 바로
이들의 기상을 기억하고 기록하듯, 화가 채용신은 수많은 우국지사의 초상을 남겼다. 좌) 최익현 초상 / 채용신(1850~1941) / 1925 비단에 채색, 국립현대미술관. 채용신은 원래 무관출신으로 어진화가로 발탁되어 고종을 비롯한 여러 선왕의 어진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정산군수를 역임하였으나 을사늑약 체결후인 1906년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 전라도 일대에서 활동하며 지역의 우국지사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 최익현(1833~1906)은 강화도조약을 결사반대하며 도끼를 들고 상소를 올려 유배를 당했던 인물이다. 이후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1906년 전라도 지역에서 크게 의병을 일으켰다. 이로인해 대마도에 감금되었으나 일본인이 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 하여 단식으로 절명하였다. 수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던 최익현의 초상을 채용신은 여러 차례 제작한 바 있다. 우) 전 우 초상 / 채용신(1850~1941) / 1920, 비단에 채색, 개인 소장. 간재 선생 80세 초상. 좌우 손에 공(公)자를 쥐고, 마음엔 곧음을 간직하였네. 이미 곧고 또 공정하니, 의당 큰 덕을 이루리라. 그런데 어찌하여 마음의 움직임에 열에 아홉은 삿되고 삐뚤어졌나. 옳음을 구하고 그름을 버리는 것은, 회암 주자께서 남긴 유훈이네. 마음은 다잡아 보존해야 하고, 기운은 단속하고 묶어야 하네. 죽음이 이를 때까지 부디 본성을 회복하기 바라네. 스스로 경계하다. 문인 김종호가 감히 쓰다. 경신년(1920) 5월 상순. 전 부사 종이품 채석지가 모사하다.
좌)
고능선 초상 / 傳 채용신(1850~1941) / 1919, 비단에 채색, 개인 소장. 우) 오준선 초상 / 傳 채용신(1850~1941) / 1924, 비단에 채색, 개인 소장. 오준선(1851~1931)은 호남의 대유학자 기정진의 계보를 이으며, 의병장 고광선, 기우만 등과 교유하였다. 의병 활동을 직접 하지는 않았지만 이를 지원하고 조선 의병의 역사를 정리하는 데 힘썼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일제가 주는 은사금을 끝내 거절하여 고초를 겪었고 이후 광주 인근의 용진산에 들어가 후일을 기약하며 643명의 후학을 양성한 바 있다. 고종이 승하하자 변란에 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지 않고는 상복을 벗을 수 없다 하여 임종 때까지 백립을 쓰고 살았는데, 채용신은 바로 그런 상복 차림을 한 오준선의 모습을 그렸다. 한편
채용신은 오준선이 강학하던 용진정사에서 약 3개월간 머물며, 그곳의 풍경을 그리기도 했다. 용진정사지도
/ 채용신(1850~1941) / 1924, 종이에 채색, 개인 소장. 용진정사지도의 가운데
부분.
좌) 민충정공 혈죽도 / 양기훈(1843~1911) / 1906, 종이에 목판화,
국립현대미술관. 대한제국 1905, 11, 30, 충정공 민영환은 나라를 위해 순국함에 피 묻은 옷과 칼을 협실에 저장해 두었는데, 다음해 7월 4일 문을 열어 보니 대나무 네 줄기가 종이 틈과 판자 사이에 저절로 자라고 있었다. 크기는 작아 3~5척에 불과하지만 천 길의 기세가 있으니 이상하지 않은가? 이르기를 충절 정신의 감응이 아니라면 어찌 가능한 일이겠는가? 많은 신사들이 모두 탄식하며 그림으로 그리고 판각하고 아울러 다음과 같이 찬을 지었다. 소멸되지 않는 것은 충의이고 흩어지지 않는 것이 정기인데 그 기운이 하나로 뭉쳐 대나무가 절로 자라났네. 단단한 가지와 곧은 마디 푸른 잎이며 꼿꼿한 줄기는 충정공의 높은 기개를 다시 보는 것 같다네. 그 기풍과 절조에 감동되어 온 누리가 한 마음이라. 장차 그 장렬한 절의 힘입어 기울어진 국운이 부지될 터 이를 그림으로 그려 전하거니 꽃다운 이름 만고에 빛나리. 우) 우당인보(友堂印譜). 이시영(1869~1953), 정인보(1893~1950) / 1946, 1949, 종이에 수묵,우당 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 이 인장들은 대개 우리 형님의 손에서 만들어져 나온 것이다. 손때 묻은 자취가 내 눈에 들어오니 지난 일들이 어제 일과 같다. 슬프다! 같은 길을 걷는 동지로서 정예롭고 굳세며 지식이 뛰어난 분인데, 기구하고 홀홀 단신으로 고독하게 고통을 받으셨다. 형님은 또한 호연지기와 의지로 번뇌를 극복하셨다. 대단히 어려운 역경에도 불구하고 예술활동을 처음과 같이 하셨다. 후대 사람들은 인장의 붉고 희고 굴곡된 모양을 바라보며 그의 충의를 느끼고 애타는 마음으로 바라보니 빛이 나고 우리 형의 됨됨을 알 수 있다. 광복 이듬해(1946) 겨울, 친아우 시영은눈물을 닦으면서 쓴다.
(후략) 설중매 /
박기정(1874~1949) / 1933, 비단에 수묵, 차강선비박물관. 차강 박기정은 대표적인 의병 출신의 화가이다. 뛰어난 기량을 가졌으나 서화협회에조차 가입하지 않고 강원도 지역에서만 주로 활동했기 때문에, 서울화단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의병장 유인석(1842~1915)의 의진에 가담하여 영월, 평창, 정선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웠고, 일제강점기에는 만주와 중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에게 지속적으로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그는 오로지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만 사군자를 그려서 팔았던 것으로 전해지며 그의 정신은 제자였던 민주화운동가 장일순(1928~1994)에게로 이어졌다. 박기정의 작품 중 <설중매>병풍은 총 12폭의 거대한 화면 위에 눈을 맞은 매화나무를 가득 채워 그린 것이다. 비록 굽어지고 상처나고 고사한 줄기를 몸에 지녔으면서도, 이 매화는 곧 제일 먼저 봄을 알리고 새로운 싹을 피우게 될 것이다. 어떠한
세파도 꿋꿋하게 견디고 이겨내며, 한 시대를 올곧게 살아간 화가의
인생을 닮아 있는 작품이다. 묵죽도 /
김진우(1883~1950) / 1940,종이에 수묵, 한국은행 대구경북본부. 벽옥같이 깊은 숲에 물 한 굽이 해동의 안개 낀 산 위로 달이 떠오르네 담묵으로 푸른 난새 꼬리를 그리니 청풍에 오백칸을 깨끗이 쓸리라. 금강산인 일주 김진우는 박기정과 마찬가지로, 1895년 을미사변에 반발해 의병을 일으켰던유인석의 문하에 들어가, 만주 및 연해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의병 출신 서화가이다. 유인석의 사후 귀국하였으나, 임시정부 수립 때에는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 의정원 강원도 대표 의원을 역임한 바 있다. 1940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으로, 넓은 화면에 단단하게 쭉쭉 뻗은 왕죽의 기운 찬 모습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마치 창칼과 같이 찌렁찌렁 울리는 기세 좋은 대나무의 모습은 의병 출신
화가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자신의 재산을 모조리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에 바쳐 말년을 가난으로 보냈던 사대부 출신의 독립운동가 중에는 "사군자"를 그리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에게 절개와 의로움을 상징하는 사군자는 스스로를 위해서는 마음의 다짐과 수양이며, 친구들을 위해서는 우정과 교유의 징표이고, 또한 독립운동가로서는 독립자금을 마련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한반도 전역과 만주, 중국 등지에서 활동하며, 평생 일경에 쫒겨 기록을 남기지 않아야 했던 이들에게 현존하는사군자는
의미 있는 역사의 기록물이기도 하다. 대나무 /
이응노(1904~1989) / 1971, 종이에 수묵담채, 이응노미술관. 송광사전도
/ 송태희(1872~1941) / 1915, 비단에 수묵담채, 송광사 성보박물관. 회갑연시(복제본)
/ 한용운(1879~1944) / 1939, 종이에 수묵, 만해기념관. 바쁘게 지나간 예순 한 해 사람들은 짧은 생애라고 말하지요. 세월은 비록 흰 머리를 짧게 했지만 풍상도 이 붉은 마음은 어쩌지 못해. 가난을 받아들이니 범골이 바뀐 듯, 병을 버려두니 묘방을 누가 알리. 유수같은 남은 생을 그대여 묻지마오, 뭇 나무에
매미소리 지는 해를 따르니. 활판인쇄기
/ 대신철공소 / 1950년대, 출판도시활판공방. 근대기에 널리 쓰인 활판인쇄기이다. 이미 1883년 박영호, 김옥균 등에 의해 관 주도의 출판기관 박문국이 설치되었고, 이곳에서 최초의 납활자 인쇄본 신문인 한성순보가 발간된 바 있다. 이후 성경을 제작하려는 기독교계의 노력 혹은 출판 사업을 통해 대중을 계몽하려는 선각자들의 주도로 유럽이나 일본에서 제작된 활판인쇄기가 적극 도입되고,국내 생산도 가능해 진다. 활자주조기에 납물을 부어 기본 활자를 만들고 이를 조판하여 종이에 눌러 인쇄하는 새로운 기술의 도입은, 20세기
초 출판과 인쇄 분야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신문관. 최남선(1890~1957)은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그곳의 선진 문물에 자극받고 조기 귀국하면서,활판인쇄기와 기술자를 데리고 왔다. 활자주조기에 납물을 부어서 활자를 만들고, 이를 조판하여 기계로 찍어내는 납활자 기술은 기존의 목판인쇄술을 획기적으로 뛰어넘는 방식으로, 속도감 있는 대량 인쇄를 가능케 했다. 그는 신문관(新文館)과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자비로 개설하여, 한편으로 자라나는 어린이와 청년들을 계몽하는 잡지 발간에 힘썼고, 다른 한편으로 조선의 고문(古文)을 복간하는 사업에 매달렸다. 삼일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조판한 곳도 신문관이었다. 조선광문회 광고 / 1910년경, 출판도시활판공방. 조선광문회는 910년 최남선의 주도로 만들어진 고전 간행 단체이다. 한국에 전해 오는 귀중한 고서를 수집, 편찬, 개간함으로써, 비록 나라는 잃었지만 민족정신은 지켜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조직되었다. 이 자료는 단체의 조직 후 뜻있는 자들의 협력을 요청하는 광고문으로, 광개토대왕비에 새겨진 글자를 집자하여 만든 것이다. 고구려의 웅비하는 기상을 담은 비문의 글씨를 통해 선조의
위엄을 보존하고 계승하고자 하는 광문회의 취지를 강렬하게 전달하고 있다. 근역강산
맹호기상도 / 20세기 초반, 비단에 채색, 고려대학교박물관. 좌) 고희동(1886~1965) / 부채를 든 자화상 / 1915,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중)
나혜석(1896~1948) / 자화상 / 1928, 캔버스에 유채,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우) 길진섭(1907~1975) / 자화상 / 1932, 캔버스에 유채, 도쿄예술대학미술관. 길진섭은 평양 일대에서 개신교 목사로 활동하며 삼일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길선주 (1869~1935)의 아들이다. 도쿄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후 귀국하여 당대 문인계 인사들과 긴밀하게 교유하며, 김용준과 함께 화가로서문장파(文章派)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이 작품은 길진섭이 1932년 일본의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할 때 그렸던 자화상이다. 졸업 과제로 자화상을 제출해야 했던 학교의 방침에 따라 제작되어, 현재 도쿄예술대학 미술관에 보관되고 있다. 와이셔츠 위에 느슨하게 맨 넥타이와 헝클어진 머리 그리고 날카로운 눈매는 자유분방하면서도 뚜렷한 소신을 지녔던 화가의 심성을 절묘하게 드러내고
있다. 김용준
초상 / 변월룡(1916~1990) / 1953,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홍명희와
김용준 / 김용준(1904~1967) / 1948, 종이에 수묵담채, 밀알미술관. 모든 위대한 예술은 결국 완성된 인격의 반영일 수 밖에 없다. 인간이 되기 전에 예술이 나올 수는 없다. 미(美)는 곧 선(善)이다. 미는 기술의 연마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인격의 행위화에서 완전한 미는 성립된다. 기술을 부육(腐肉)이라면 인격은 근골(筋骨)이다.든든한 근골과 유연한 부육이 서로 합일될 때 비로서 미의 영혼은 서식할 수 있다. 김용준, <예술에 대한 소감> <근원수필>(1948)
중에서 전시실 모습입니다. 잡지
<개벽>에 실린 작품과 삽화들 (1920~1921) 1920년대에는 잡지나 단행본에 삽화도 그려 주었던 김환기 화백의 그림이 지금은 우리나라 최고가의 그림 1위부터 10위까지 싹쓸히 했습니다. 엊그제인 2019년 11월 23일 김환기의 점화, 우주가 홍콩컨벤션전시센터에서 열린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약 131억8천750만원(8천800만 홍콩달러)에 낙찰되었다고 합니다.(수수료 포함가격 153억4천930만원) 두폭화로 이뤄진 작품이지만 우리나라 미술품이 100억원이 넘게 매매된것은 처음이라고 합니다. 254*127cm의 독립된 그림 두점으로 구성된 전체크기 254*254cm의 이 그림은 작가의 후원자이자 친구, 주치의였던 김마태(91)씨 부부가 작가에게 직접 구매하여 40년 넘게 소장했다가 이번 경매에 처음 출품 했다고 하네요. 일제강점기 나라를 잃은 수많은 민초들은 압록강을 건너 만주와 연해주로 진출하였고, 때로는 중국을 거쳐 미국이나 유럽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이들 중 예술가로 성장한 이들은 한반도 밖의 새로운 풍경을 자신의 화폭에 담았다. 또한 비록 나라를 잃었지만, 조선의 정신과 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리고자 노력했던
일군의
문예인들이 있었으며,
이들이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임용련(1901~?)
/ 십자가 / 1929, 종이에 연필, 개인 소장. 임용련은 배제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일 때 발발한 삼일운동에 가담하여, 일경의 수배를 피해 압록강을 넘어 중국으로 건너갔다. 임파(任波)라는 이름으로 중국 여권을 만들어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시카코미술학교에 입학, 유진 프란시스 세비지(1883~1978)의 지도를 받았다. 이 작품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얘수를 내리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성모마리아, 막달라마리아, 사도 요한으로 보이는 인물은 등장하지만, 이들의 제스처와 골격, 표현 등은 서양 전통의 그것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다. 배경의 구름이나 나무를 표현하는 방식도 이채로울 뿐이다. 마치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을 보는 것과 같은 세기말적 분위기가 묻어난다. 임용련(1901~?) / 에르블레 풍경 / 1930, 하드보드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박영직(1893~1959) / 부인상 / 1950년대,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변월룡(1916~1990) / 가족 / 1986,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변월룡은 일제강점기 연해주의 조선인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행방불명되었고, 변월룡은 호랑이 사냥꾼인 할아버지와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릴 때부터 미술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그는, 동네 어른들의 후원을 받아 유학을 떠날 수 있었고 러시아 최고의 미술학교인 레핀 미술 아카데미에서 수학,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가 생애 말년에 제작한 <가족>은 화가의 매우 자전적인 작품이다. 연해주에서 보낸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과 할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의 모습을 하나의 화폭에 담고 있다.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서 기다란 담뱃대를 든 할아버지와 다소곳이 한복을 입은 어머니가 화면 왼쪽을 응시하는 한편, 어린
소년은 등을 돌린 채 저 멀리 미지의 세계를 갈구하는 듯 생각에 잠겨 앉아 있다. 변월룡(1916~1990)
/ 저녁의 나훗카 만 / 1968,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좌) 배운성(1900~1978) / 자화상 / 1930년대, 캔버스에 유채, 전창곤
컬렉션. 우)
배운성(1900~1978) / 모자를 쓴 자화상 / 1930년대, 캔버스에 유채, 전창곤 컬렉션. 변월룡(1916~1990) / 칼리니노 / 1969, 종이에 에칭, 개인
소장. 정점식(1917~2009)
/ 하얼빈 풍경 / 1945, 종이에 펜, 수채, 개인 소장. 진공관
라디오 / 1930년대 추정, 부산박물관. 좌)
최승희 신작무용공연회 포스터 / 1930년대, 근현대디자인박물관. 우)
폴리도르 실연의 밤-가극 포스터 / 1930년대, 근현대디자인박물관. 제2전시실 모습. 이쾌대(1913~1965)
/ 이여성 초상(이쾌대의 형) /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이쾌대(1913~1965)
/ 부인도 / 1943,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진
환(1913~1951) / 천도와 아이들. 이쾌대(1913~1965)
/ 말 / 1943,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이인성(1912~1950)
/ 해당화 / 1944,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이인성은 대구 출신의 화가로 어린 나이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연이어 수상하면서, 일찍부터 천재 화가로 식민지 말기 한국 상황을 매우 잘 대변한다. 1944년 마지막 조선미술전람회에 추천작가로 참여하면서 출품한 작품 <해당화>는 같은 해에 숨진 만해 한용운의 시, "해당화"를 떠올리게 한다. 봄은 지나갔으나 오지 않은 "님"을 기다리며 어찌할 바 없는 애잔한 심사를 그린 한용운의 시와 이인성의 그림은, 식민지 말기 한국 상황을 매우 잘 대변한다. 바닷가 모래밭에 피는 해당화, 바다 위 조각배, 평화로이 거니는 말, 나뒹구는 조개껍질 등은, 어딘가를
향한 여인의 처연한 표정과 함께 그 무엇에 대한 갈망과 희구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해당화.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랐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합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못 들은 체하였더니 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입니다그려. 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고 "너는 언제 피었니"하고 물었습니다. 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 -만해
한용운- 김환기(1913~1974) / 항아리와 매화 / 1958, 하드보드에 유채, 개인
소장. 김환기(1913~1974)
/ 항아리 / 1958, 하드보드에 유채, 개인 소장. 김환기(1913~1974)
/ 백자 / 1950년대 후반,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김환기는 전라남도 안좌도 출신으로 중학교 시절부터 도쿄에서 유학하였고, 이후 일본대학 예술학부에서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귀국 후에는 해방 직후 설립된 서울대학교와 홍익대학교의 초대 미술교수를 역임하며, 한국 화단의 가장 중추적인 인물로 활약했다. 그러나 1956년 돌연 프랑스 파리로 가서 약 2년간 체류하였고, 1963년에는 상파울로 비엔날래 참석을 거쳐 뉴욕에 정착, 1974년 작고할 때까지 뉴욕에서 생활했다. <백자>는 김환기의 파리 체류기에 제작된 작품이다. 그는 파리의 화단에서 활동할 때에도 전형적인 한국의 소재를 선택하여 당시 파리의 주류 화단과는 차별되는 자신만의 고유한 색채를 유지했다. 김환기는 누구보다 백자를 사랑했고 조선의 소박한 목가구를 애호했으며 한국 고유의 소담한 아취를 찬양했다. 이 작품의 소재가 된 조선의 백자는 실제로 김환기가 직접 수집하고 소장했던 것으로 일부
아직도 현존하고 있다. 이쾌대(1913~1965)
/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 1940년대 후반,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이쾌대는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0년대 일본 제국미술학교에서 유화를 본격적으로 공부하였다. 매우 촉망 받는 예술가로 성장하였으나, 1948년 그의 형인 이여성의 월북 이후 남한 사회에서 점차 설 자리를 잃었다. 한국전쟁 중 미군 포로로 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1953년 휴전협정에 따른 포로 교환시 북으로 넘어가면서 한국 미술사에서 오랫동안 조명 받지 못했다. 이쾌대는 1945년부터 1950년까지 매우 혼란스러웠던 해방공간에서 가장 빛나는작품들을 남겼다.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또한 이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한국의 전형적인 자연 풍경과 평화로운 농촌 마을을 배경으로, 푸른두루마기를 입은 채 한 손에는 붓과 팔레트를 들고 당당히 정면을 응시하는 화가의 자화상이다. 해방이 되었다는 기대감 속에서, 한국의 정서와 정신을 배경으로 당차게
앞을 향해
나아가리라는
화가 자신의 다짐과 같은 작품이다. 임군홍(1912~1979)
/ 새장 속의 새 / 1947, 종이에 유채, 개인 소장. 김만술(1911~1996)
/ 해방 / 1947, 청동, 국립현대미술관. 임군홍(1912~1979)
/ 행려 / 1940년대, 종이에 유채, 개인 소장 이쾌대(1913~1965)
/ 해방고지 / 1948,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이쾌대(1913~1965) / 군상4 / 1940년대 후반,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오세창(1864~1953)
/ 정의인도(복제품) / 1946, 종이에 수묵, 만해기념관 제공. 이응노(1904~1989)
/ 구성(옥중화) / 1968, 종이에 수묵담채, 이응노미술관. 이응노는 1904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송태희에게서 처음 한국화를 배웠다. 한국전쟁 후 프랑스로 가서 서양의 현대 미술 조류를 연구하는 한편, 이를 한국 전통 미술의 토대 위에서 작가 고유의 방식으로 결합시켰다. 1968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그가 동백림 사건으로 투옥되어 감옥에서 그린 것이다. 이응노는
간첩으로 몰려 감옥 생활을 하는 중에도 수많은 실험적 작품들을 남겼다. 서세옥(1929~)
/ 사람들 / 1990년대, 종이에 수묵, 국립현대미술관. 김종영(1915~1982)
/ 3.1 독립선언기념탑 부분도 / 1963, 종이에 수채, 김종영미술관 김종영(1915~1982)
/ 3.1독립선언기념탑 부분상 / 1963, 청동, 김종영미술관. 미술관을 나왔습니다. 맑은 하늘이
반갑네요. 목을 축이고, 점심 먹으러 가는길에 구세군 중앙회관도 잠시 둘러
봤습니다. 새로 단장한 1층과 2층을 공개해
놓았습니다. 아래층에서 차를 사서 먹을 수 있게 꾸며 놓은
2층의 탁자. 옛날 자개장의 문짝을 이용해 만든 탁자가 참
멋있었어요. 전시실도 있습니다. 1층 휴게실. 차와 빵을 주문하는
곳. 빵 만드는 곳. 꽃 파는 곳. 새문안교회 있는 곳. 유명하다는 삼계탕 집에서. 삼계탕 먹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