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의 진리에서 지혜를 찾아
불교의 오대신앙처, 월정사, 상원사, 오대산 답사
곧게 벋은 전나무 숲의 청량함과 달빛의 정기 속에 문수보살 신앙이 자리한 오대산 불국토!
그 품안에 월정사와 상원사가 크게 자리하고 봉우리마다에는 참선도량이 안겨 있다.
북대 비로봉을 올라가다가 시야가 훤히 트인 산기슭에는 부처님의 정골사리가 모셔져 있다는 적멸보궁이 있다.
우리는 불자가 아니더라도 월정사로 향하는 1km이상의 전나무 숲길에서 청정 도량의 깊은 맛을 음미할 수 있으며,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팔각구층석탑과 석조보살좌상에서 선조들의 조각미를 발견할 수 있다.
건축물들은 새로 단장하여 고즈넉한 예스러움의 기풍은 스러졌지만 곳곳에 스며 있는 흔적들에서 선인들의 숨결을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문수보살을 비롯한 여러 부처상을 뵙다가 적멸보궁에 이르러 ‘비워 둠’에서 오히려 ‘가득 참’의 공간미학을 연출한 선조들의 구도정신에 경건할 따름이다.
종교적 인간에 대한 성찰의 기회와 더불어 ‘觀我生(관아생, 나의 생김새를 본다)’할 줄 지혜로움을 깨닫는 답사길이 되기를 기대한다.
오대산(五臺山)
저 북쪽 백두에서 남쪽 지리까지 힘차게 내달려 우리 국토의 뼈대를 이루는 백두대간(白頭大幹) 중심에 날카롭지 않고 둥글며, 산 속이 깊으나 험하지 않아 그윽한 향기를 가진 채 넉넉하게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후덕한 산이 바로 오대산이다.
주봉인 비로봉(1,563m)을 비롯하여 호령봉, 상왕봉, 두로봉, 동대산 등 다섯 봉우리들이 편평하여 오대산이라 부른다.
설악산이 날카로운 기암으로 이루어진 것과 달리 오대산은 장쾌하면서도 노년의 듬직한 육산(肉山)이며 모산(母山)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천연수림지대로 동식물상이 다양하고 풍부한데 특히 월정사로부터 상원사 적멸보궁을 잇는 10km의 계곡은 수백년 묵은 전나무와 소나무, 그리고 잡목들이 우거져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상쾌한 기분을 더해준다.
한편, 한강의 실제 발원지가 최근에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 금대산 북쪽 경사면 바로 아래 옹달샘이라고 밝혀졌지만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는 오대산 서대 수정암(현 염불암)의 우통수(于筒水)가 한강의 발원지라고 적고 있다.
오대산 골짜기에서 모아진 물들은 내린천과 월정천을 이루고 이 둘이 합류하여 오대천을 이루면서 조양강을 거쳐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행정지리학적으로 오대산은 한반도의 중앙 동쪽, 태백산맥과 차령산맥이 교차하는 지점으로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도암면, 용평면과 명주군 연곡면과 홍천군 내면 일대에 걸쳐 있는데, 크게 오대산 지구와 소금강 지구로 나뉘며 그 성격이 서로 다르다.
비로봉 정상에서 볼 때 동대 너머의 청학산 쪽 소금강 지구는 바위산으로 금강산에 견줄 만한 절경이며, 비로봉에서 평창 쪽으로 내려가는 오대산 지구는 부드러운 흙산으로 산수가 아름다워서인지 일찍이 불교의 오대산 신앙이 자리잡고 있다.
오대산이 진성(眞聖)이 거주하는 곳이라고 믿게 된 것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590∼658)가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화현(化現)을 친견하고 부처님의 정골사리, 가사, 발우 등을 얻으면서부터이다. 이로써 “동북방 청량산에 문수보살이 계시면서 일만의 권속을 거느리고 늘 설법한다”는 화엄경을 바탕으로 한 오대산 신앙이 우리나라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처럼 문수보살이 오대산에 머문다는 믿음은 뒤에 7, 8세기에 이르면 오류성중(五類聖衆)이라 하여 오만보살신앙으로 더욱 발전된다. 참고로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와 암자 그리고 상주하며 설법한다는 보살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동대 만월봉(滿月峰) 관음암에는 일만의 관음보살,
남대 기린봉(麒麟峰) 지장암에는 일만의 지장보살,
서대 장령봉(長嶺峰) 미타암(현 염불암)에는 일만의 대세지보살,
북대 상왕봉(相王峰) 나한당(현 미륵암, 상두암이라고도 함)에는 오백 나한,
중대 지로봉(地爐峰) 진여원(현 사자암)에는 일만의 문수보살이 상주하며 설법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오대산은 자장율사가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이 사는 산으로 믿은 뒤로 우리의 역사 속에서 불교성지로서 큰 몫을 담당하여 왔다. 또한 오대산은 삼재(三災)가 들지 않는, 우리나라 12대 명산의 하나로 꼽혀져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사고(史庫)를 두기도 했다.
월정사(月精寺)
월정사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나 자료가 없어 의견이 분분하다.
먼저 오대산 동대에 해당하는 만월산과 서대 정령산 아래 세운 수정암이 합쳐져 뒷날 월정사가 되었을 것이라는 의견과 월정사의 입지 형국이 쟁반위의 달과 같은 모습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어쨌든 월정사는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니 그 때가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이었다. 자장율사는 636년에 중국 오대산으로 유학을 가고 그곳 문수사에서 기도하던 중에 문수보살을 친견한다.
자장율사가 문수보살로부터 “너희 나라 동북방(오대산)에는 일만의 내가 상주하고 있으니 그곳에서 다시 나를 친견하라”는 게송을 듣고 신라에 돌아오자마자 오대산에 들어가 초가를 짓고는 문수보살을 만나기를 고대하며 정진하였다.
자장율사는 끝내 문수보살을 친견하지 못하고 태백 정암사에 들어가 입적하게 된다. 비록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하는 뜻은 이루지 못했으나 이로부터 월정사는 오대산 깊은 계곡에 터를 잡게 되었다.
본래 월정사는 금당 뒤쪽이 바로 산인 특수한 산지가람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금당 앞에 탑이 있고 그 옆에 강당 등의 건물이 세워져 있었는데 이는 남북자오선(南北子午線) 위에 일직선으로 중문, 탑 ,금당, 강당 등을 세운 신라시대의 일반적인 가람 배치와는 다르다.
그 뒤 고려와 조선시대 때 각기 한번씩 불탔다가 다시 중건하였고 1950년 6. 25 전쟁의 참화로 모든 건물이 불타고 소장 문화재와 사료들도 모두 재가 되어버린 비운을 겪었다.
지금의 월정사는 1964년 탄허스님이 적광전을 중건하고 그 뒤로 만화스님과 현해스님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중건해온 것이다. 비록 몇 차례 화재와 전화로 많은 성물(聖物)과 문화재를 잃긴 하였으나 어엿한 대가람의 모습을 되찾게 된 월정사는 독특한 특징을 지닌 당우들이며 국보로 지정된 팔각구층석탑, 석조보살좌상을 비롯하여 많은 보물과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
월정사의 본당인 적광전의 앞뜰 중앙에서 조금 비껴난 자리에 팔각구층석탑이 서 있다.
팔각구층석탑은 연꽃무늬로 치장한 이층 기단과 우아한 조형미를 갖춘 탑신 그리고 완벽한 형태의 금동장식으로 장엄한 상륜부 등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뛰어난 석탑이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세웠다고 하나, 그 무렵의 탑들은 평면 정방형에 삼층 또는 오층의 탑으로 이루어진 것에 반해 이 탑은 평면이 팔각형이며 탑의 층수도 구층에 이르는 늘씬한 자태를 이루어 고려시대(10세기)의 석탑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탑은 전체를 화강암으로 조성하고 상륜부에 일부 금동장식을 더하였는데 여러 차례의 화재로 손상을 입은 부분이 더러 있으나 오늘날까지도 본래의 형태를 그대로 간직해 오고 있다.
기단은 아래층 각 면에 안상을 새기고 연꽃 장식을 베풀었다. 그 위로는 괴임돌을 놓아 윗층 기단을 정성스레 받들어 기단 전체가 마치 부처님의 연꽃 대좌처럼 장식 되었다.
그 위에 탑신을 받았으니 탑신은 곧 부처님이다. 탑신 안에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져 있으니 불사리는 부처님의 진신이나 다를 바 없고 그러한 진신의 부처님이 연꽃 대좌 모양의 기단위에 계신 것은 당연하다.
그리하여 기단 위에는 부처님을 앉히기 위한 방석과 같은 석재를 별도로 끼웠으며 탑 앞의 석조보살 좌상도 부처님과 같은 탑 앞에서 공양하는 자세를 하고 있다.
탑신은 각 층마다 줄어듦이 적고 층수는 9층을 헤아려 탑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느낌을 더해주고 있다. 팔각은 불교의 실천수행에 기본이 되는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한다.
층마다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석재로 이루어지고 일층의 사면에는 네모난 감실이 하나씩 있는데, 남면의 감실이 가장 크며 문틀을 단 흔적도 있다.
몸돌은 모서리마다 귀기둥이 새겨지고 끝은 밑면이 수평이고 위는 곡면으로 처리하여 추녀 끝이 살짝 위로 솟아 가뜬해 보이며 추녀 끝마다 풍탁이 달려 탑은 언제나 바람의 향기를 음미한다.
상륜부는 금동장식을 더하여 탑위에 보관을 얹은 듯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러 번의 화재로 1970년 해체보수를 통하여 1층 5층 6층 9층을 새 돌로 갈았으며 그 당시에 1층과 5층에서 총 12점의 사리구가 발견이 되었다.
은제의 불상 1구와 4점의 청동 거울, 금동 향합과 향주머니, 전신사리경 등의 총 12점의 유물들은 2003년 6월 보물로 일괄 지정되었다. 또한 2000년 8월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보수공사시에 지하 1m아래에서 탑의 기단부로 보이는 또 하나의 유구가 발견되었다고 하니 본래 기단부가 3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팔각구층석탑은 높이 15.2미터로 우리나라의 팔각석탑으로는 가장 크다. 그뿐만 아니라 그 아름다움에서도 단연 으뜸이며 고려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주목받고 있다.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팔각구층석탑 앞에는 본래 이 탑을 향하여 오른쪽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공양을 드리는 모습을 한 석조보살좌상이 있었다(좌상 전체 높이 1.8m).
지금은 성보박물관 안으로 옮겨져 있는데,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서 부처님을 바라보고 있는 이 보살상을 일명 약왕보살(藥王菩薩)이라고도 한다.
이 보살상을 약왕보살로 보는 이유는 법화경에 근거한다.
법화경 약왕보살 본사품에는 과거 일월정명덕(日月淨明德)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 희견보살(喜見菩薩)이 부처님으로부터 법화경 설법을 듣고 현일체색신삼매(現一切色身三昧)를 얻었다.
환희심에 가득찬 보살은 여러 가지 공양을 올렸고, 마침내 천 이백년 동안 향을 먹고 몸에 바른 후 자신의 몸을 태우며 공양하였다.
그리고 다시 몸을 받아 일월정명덕국(日月淨明德國)의 왕자로 태어났을 때 일월정명덕여래는 그가 장차 부처님이 될 것이라는 수기(授記)를 주었다.
희견보살은 부처님의 사리를 수습하여, 팔만사천의 사리탑을 세우고 탑마다 보배로 만든 깃발과 풍경을 매달아서 장엄하게 꾸몄다. 그러고도 모자라 탑 앞에서 자신의 두 팔을 태우며 칠만 이천 세 동안 사리탑을 공양하였으니 이 분이 바로 약왕보살이다.
강원도 일대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형태로 조성된 이 보살은 턱이 약간 길고 눈두덩이 두껍고 빰은 도톰하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고 있어 복스럽게 느껴진다. 머리위에 높다란 원통보관을 쓰고 있는데 관 옆에 작은 구멍이 얕게 파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관에 장식이 달려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보발(寶髮)은 등으로 살짝 감추어져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를 새기고 앞가슴은 영락(瓔珞)으로 장식하고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으고 절대자를 향해 경원을 표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보살은 탑을 향하여 한가운데가 아닌 오른쪽으로 조금 치우쳐 앉아 있고, 상체가 하체에 견주어 큰데 이것은 우리 눈의 착시 현상을 감안한 것이다.
그리고 오른쪽 무릎을 꿇은 것은 고대 인도의 관습에 따라 자신을 낮추고 스승에게 최상의 존경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조금 아래로 내려놓은 오른쪽 팔꿈치는 아래에 받침을 괴었는데, 잘 살펴보면 특이하게도 이 받침은 동자상(童子像)이다.
2000년 8월 석조보살좌상 보수공사 당시 지하 1m 아래에서 상중하의 3부분으로 구성된 대좌臺座가 발견되었다. 대좌의 연꽃문양은 통통하게 살이 오른 둥글며 커다란 중판연화문(重瓣蓮花紋)을 조각했다. 역시 보살좌상과 함께 성보박물관 안으로 옮겨져 있다.
월정사 성보박물관:보장각(寶藏閣)
월정사 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성보박물관은 연건평 206평의 한식 팔작지붕 형태의 건물로 지상 1층, 지하 1층의 전시실로 되어 있으며,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를 전시 주제로 삼아 불교 문화유산들을 전시하고 있다.
1999년 10월 개관한 이후 2000년 7월 문화관광부에 불교전문박물관으로 등록함으로써 강원도의 유일한 불교전문박물관으로 자리하고 있다.
월정사 성보박물관은 국보인 상원사 중창권선문을 비롯하여 보물 수타사 월인석보와 고려시대 월정사 팔각국층석탑 사리구11점, 조선전기 상원사 문수동자상 복장 유물23점을 비롯하여 강원도유형문화재 20여점, 말사에서 옮겨온 조선후기 불화와 불상, 전적, 근대 한암, 탄허 스님의 유품에 이르기까지 약 500여점의 성보들을 소장하고 있다.
월정사 부도밭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가다가 오백미터쯤 되는 곳에 부도밭이 있다. 이 부도들은 스님의 묘탑으로서 모두 23기가 있다.
불가에서는 스님이 입적하면 화장을 하는데 이때 평소 정진한 기운과 불이 어우러져 사리라는 결정체가 남는다. 부도는 이 사리를 모신 곳이다.
부도는 부도(浮圖), 부두(浮頭), 불도(佛圖) 등으로 표기되고, 그 어원은 붓다(Buddha)에서 유래한다. 즉 부처님처럼 추앙받는 스님 또 다른 ‘붓다‘라 하였고 그러한 스님의 탑 또한 생사를 초월한 ‘붓다‘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붓다‘는 세월이 흐르면서 ‘부도‘라는 명칭으로 바뀌고 그 의미는 ‘스님들의 사리탑‘을 지칭하게 되었다. 건립연대가 확실한 것 중에서 가장 오래 된 부도는 양양진전사지(흥법사터라고도 함)의 844년 염거화상탑(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으로 우리나라 석조 부도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신라시대에 건립된 부도는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이 기본이고 9세기 후반에 많이 건립되었다.
월정사 부도는 원탑형의 부도도 있으나 대부분이 석종형(石鍾形)을 하고 있다. 석종형 부도는 부도의 겉모양이 종과 비슷한 데서 생긴 이름이다. 이러한 석종형 부도는 고려말 이후부터 조선시대에 크게 유행하는데 그 시원(始原)은 통일신라 하대인 9세기로 본다.
이중 기단과 옥개를 갖춘 혼합형 부도도 있는데, 석재는 대개 화강암이고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모습이 선사들의 삶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부도는 2미터가 넘는데, 임산부가 눈을 가리고 부도를 잡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다. 부도밭은 산책하며 명상에 잠기기 좋은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으며, 앞쪽의 오대천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오대산 사고(史庫)
사고(史庫)는 역사 기록물을 보존하는 서고(書庫)라는 뜻으로 흔히 조선시대의 최고 기록물인 왕조실록을 보관한 곳이라는 뜻이다.
세종임금 이전에는 궁궐내의 춘추관에 보관하다가 화재 등으로 없어질 것을 염려하여 세종 21년(1439)에 춘추관 이외에 충주⋅청주⋅전주 등 의 사고에 왕조실록 외 1부씩을 보관하다가 임진왜란 때에 전주사고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불타 없어졌다.
선조 39년(1606)에 다시 이 전주본을 대본으로 삼아 실록 4부를 만들어 오대산을 비롯한 3곳에 사고를 짓고 춘추관을 더하여 4곳으로 나누어 보관하였다.
그런데 오대산 사고에 소장되어 있던 왕조실록은 조선이 일본에게 망한 후에 일본 동경(東京)대학에 반출되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불타 없어졌다. 다행히도 그중 일부가 남아 2006년 7월 14일에 되찾았다.
다음은 되찾은 오대산 사고본과 관련된 소재구(국립고궁박물관장)님의 글이다. 오대산 사고본의 중요성과 함께 우리 선조들이 역사 기록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글이기에 참고 자료로 싣는다.
‘다시 찾은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2006년 7월 14일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이 93년 만에 환수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임금을 중심으로 한 조선왕조의 주요 국정의 내용을 거의 일기체 형식으로 기록한 방대한 사실기록이다. 역대 왕의 실록은 반드시 재임했던 왕의 사후에야 편찬이 되었다.
그리하여 선왕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후대에 남은 실록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실록편찬은 상세한 국정사실의 기록을 후대에 남기는 것 이외에도 왕이 재임 시에 소임을 다하도록 하는 데에도 커다란 역할을 했다.
이에 실록의 영구보전을 위하여 여러 부를 인출(印出)하고 전국 각도의 천재지변을 피할 만한 곳을 지정하여 그곳에 사고를 짓고 분산 보관해왔다.
그럼에도 실록은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고 오로지 전주사고에 보관했던 실록만이 남게 되었다. 그것도 안의(安義), 손홍록(孫弘祿) 두 사람이 전주사고의 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겼기 때문에 전화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조 임금 대에 들어 이 전주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은 다시 4부를 새로 인출하여 춘추관, 태백산, 묘향산, 마니산, 오대산 등 전국 5대 사고에 보관하게 되었다.
오대산 사고본의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해서 보존되었다. 그런데 오대산 사고본은 1913년 일제에 강탈되어 동경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1923년에 오대산 사고본은 관동대지진의 화재로 대부분 망실되는 참화를 겪게 되었다.
오대산 사고본은 모두 787책이었으며 그 중 지진화재의 참화를 면한 것은 오직 74책뿐이었는데 이 책들은 당시 개인에게 대출 중이었기 때문에 다행히 화를 면하게 되었다.
이 74책 중에서 27책은 곧 회수되었으나 도서관이 불탔으므로 둘 곳이 없어 서울의 경성제국대학으로 돌아왔고 뒤늦게 회수된 나머지 47책은 돌아오지 못한 채 남의 땅에서 남아 있다가 이제야 고국으로 품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중 ‘오대산 사고본’의 환수는 여타 조선왕조실록과는 다른 특별한 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조선왕조실록이 있는데, 왜 오대산 사고본 환수에 대해 유독 특별하게 반응하는지, 왜 오대산 사고본이 중요한지에 대하여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오대산 사고본은 여타의 사고본과 다른 점이 있다. 즉 오대산 사고본 중 선조임금 이전의 실록은 임진왜란 이후 실록을 재간할 때 틀린 글자, 빠진 글자, 문장 등을 바로잡기 위하여 사용되었던 이른바 교정본 실록이었다는 점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실록의 백데이터였던 셈이다. 조선왕실에서 정부문서 기록보존을 위하여 여러 부의 복사본은 물론 그 이전의 백데이터까지도 소중히 갈무리하였다는 점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은 여타의 실록과 다른 편찬 의의를 지니고 있다. 즉 오대산 사고본은 실록의 교정 과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과거보다 훨씬 더 수월하게 문서보존을 할 수 있는 현재의 과학만능 시대의 우리보다도 훨씬 투철하였던 선조의 기록보존정신을 배워야 할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국보 제151호이자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상원사(上院寺)
월정사에서 서북쪽으로 9km쯤 더 오르면 오대산 비로봉으로 올라가는 중턱에 상원사가 있다. 산내 암자이기는 하나 역사적인 내력이 깊은 사찰이다.
상원사는 신라 성덕왕 4년(705)에 신라의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두 왕자에 의해 오대산 중대에 창건되었는데, 처음 이름은 진여원(眞如院) 이었다.
자장율사가 개산한 뒤로 오대산이 불교 성지로서 그 이름을 빛내면서 마침내 오류성중(五類聖衆) 곧 다섯 부류의 성인들이 머무는 곳으로 신앙화 되기 시작하던 즈음이다.
이 때의 창건 설화를 ‘삼국유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신라 신문왕의 아들 보천태자는 아우 효명과 더불어 저마다 일천 명을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에 이르러 여러 날 놀다가 태화(太和) 원년(元年)에 형제가 함께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형 보천태자는 오대산 중대 남쪽 밑 진여원 터 아래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곳에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으며, 아우 효명은 북대 남쪽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곳에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다.
두 사람은 함께 예배하고 염불하면서 수행하였으며 오대에 나아가 공경하며 참배하던 중 오만의 보살을 친견한 뒤로, 날마다 이른 아침에 차를 달여 일만의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
이 때, 신문왕의 후계를 두고 나라에서 분쟁이 일자 사람들이 오대산에 찾아와 왕위를 이을 것을 권하였는데 보천태자가 한사코 돌아가려 하지 않자 하는 수 없이 효명이 사람들의 뜻을 좇아 왕위에 올랐다. 그가 성덕왕(聖德王)이다. 왕이 된 효명태자는 오대산에서 수도하던 중에 문수보살이 여러 모습으로 몸을 나타내 보이던 곳에 진여원을 개창하니 이 곳이 지금의 상원사이다.“
고려시대에는 상원사가 어떠한 중창의 발자취를 걸어왔는지 밝히는 자료는 없으나 이색(李穡)의 ‘오대 상원사 승당기(五臺上院寺僧堂記)‘에는 고려말 ‘나옹스님의 제자라고 알려진 영로암(英露庵)이라는 스님이 오대산을 유람하다가 터만 남은 상원사를 중창하였다‘ 고 적혀 있다.
고려말부터 일기 시작한 척불(斥佛) 정책은 조선시대에 들어 더욱 거세어져 불교는 극심한 박해를 받기에 이르렀다.
태종은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고, 11종(宗)이던 불교 종파를 7종으로 통합하는 등 척불에 앞장섰으나 만년에는 상원사 사자암을 중건하고 자신의 원찰로 삼았다.
나아가서는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 먼저 떠난 이의 명복을 빌고 후세에까지 그 이로움이 미치게 하여 남과 내가 고르게 불은(佛恩)에 젖게 하라‘고 하였다.
이어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불교에 귀의하여 그 잘못을 참회하기 위해 많은 불사를 행하였으며 나라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불서의 간행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세조는 오대산에서 두 번의 이적을 체험하였다. 지병을 고치려고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나서 병이 나았고, 상원사 참배중에 고양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일화가 그것이다. 이렇듯 세조와 상원사는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근세에는 방한암 스님이 오대산으로 들어온 뒤로 상원사에서 이십칠 년 동안 두문불출하며 수도 정진하였으며, 6.25의 참화를 비껴가게 했으며 수련소를 개설하여 후학 양성에 진력하였다. 오늘날에도 전국에서 선남선녀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불교 성지로서 명성을 얻고 있다.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
현존하는 한국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우며 청아한 소리 또한 이루 비길 데 없는 것으로 알려진 이 종은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조성되었다.
조선 태종 때 불교가 박해를 받을 때 안동으로 옮겨졌다가 조선 예종 원년(1469)에 상원사에 다시 옮겨진 것으로, 한국 종 고유의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는 대표적 범종이다.
음통(音筒)이 있는 용뉴(龍뉴) 아래 종신은 약간 길쭉하게 배를 불리다 끝에서 안으로 살짝 오므라든 형태가 이상적인 비례감과 안정감 있는 조형미를 이루었고, 풍부한 양감과 함께 세부적인 묘사 수법이 사실적이다.
종신(鐘身)에 있는 상대, 하대, 4유곽(乳廓)의 문양은 당초문을 바탕으로 2 ~ 4인의 작은 주악비천상(奏樂飛天像)이 있는 반원권문(半圓卷紋)이 새겨졌고, 종복(鐘復)에 비천상과 교대로 있는 당좌(撞座)는 8판연화문(八瓣蓮花紋)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비천상은 경쾌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으로 구름 위에서 천의(天衣) 자락을 휘날리는 모습이나 또 공후(공후)와 생(笙)을 연주하는 손의 표현이 매우 섬세하여 생동감이 넘친다. 볼록한 두 뺨, 유연한 신체에 걸친 천의 등은 8세기 전반의 이상적인 사실풍의 불교 조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정상에는 약동하는 용이 있고 그 옆에는 연꽃이 조각된 음통이 붙어 있다. 용뉴 좌우에는 70자에 달하는 명문이 해서체로 음각되었는데 첫머리에 ‘개원 십삼년 을축 3월 8일 종성기지(開元 十三年 乙丑 三月 八日 鍾成記之)‘라고 되어 있어,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상원사 종에 보이는 음통, 종 끝부분이 안으로 오므라든 종신형(鐘身形), 상대와 하대 및 4유곽 등의 주조적인 특징은 한국 종의 대표적인 유형이 되어 이후의 모든 종이 계승되었다.
이 종이 본래 있던 절의 이름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 종은 안동 근처의 어느 사찰에 봉안되어 있다가 태종이 불교를 박해할 때 안동 문루로 옮겨졌다고 한다.
세조 때 상원사에 봉안할 종을 팔도에서 찾고 있던 중 안동에 있던 이 종이 선정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세조가 승하한 직후인 예종 원년(1469)에 상원사에 도달했다고 한다.
종을 안동에서부터 상원사로 옮겨오던 중에 3,379근(斤)이나 되는 큰 종이 장차 죽령(竹嶺)을 넘으려 하는데 움직이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종 꼭지를 하나 떼어서 안동으로 보내니 비로소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전설을 입증하듯 네 곳의 유곽 안에 1곽(廓)의 종유가 하나 없다.
문수동자상(국보 221호)
문수동자상은 상원사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이 상이 바로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임을 가리키는 중요한 동자상이다.
옛날 상원사 화재 때에도 선객들이 이 동자상을 불길로부터 구해내는 데 온 힘을 쏟았다는 유명한 상으로 앉은키는 98cm이다.
문수동자상은 나무로 조성된 불상이며, 보관이 없는 머리는 양쪽으로 묶어 올리고 앞머리는 자연스럽게 내려 이마를 가렸으며 얼굴은 양볼을 도톰하게 하여 천진해 보인다. 이목구비는 온화하고 적당히 가는 목에는 삼도(三道)가 보인다.
가슴에는 영락이 달린 목걸이를 걸치고 오른편 가슴 쪽으로 치우쳐 드러난 통견의 천의를 걸치고 가슴 밑으로 띠를 매었는데 옷주름이 명확하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왼손을 내려서 엄지와 약지를 맞댈 듯한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을 하고 있으며, 왼쪽 다리는 안으로 접고 오른쪽 다리는 밖으로 둔 반가부좌를 하고 있다. 고려시대 불상에서 조선 전기 불상으로 전개되는 불상조성 양식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1984년 7월 문수동자상에서 조성발원문 등 23점의 복장(腹藏) 유물이 발견됨으로써 이 불상이 조선 세조임금이 직접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세조12년(1466)에 조성된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유물로는 의숙공주발원문, 문수상 등 중수발원문, 백지묵서진언집(白紙墨書眞言集), 두루마리 대방광불 화엄경, 오대진언, 묘법연화경, 대방강원 각수다라요의경, 육경합부, 명주적삼, 생명주적삼, 금동제 사리함, 사리, 수정구슬, 백색수정 사리병, 세조의 어의(御衣)를 싼 노랑색 명주 보자기 등 조선시대 초기 복식사는 물론 및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불상에도 사리를 보장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유물은 월정사 성보박물관에서 전시, 보관하고 있다.
적멸보궁(寂滅寶宮)
적멸보궁은 부처님 정골사리를 봉안한 곳이다. 적멸보궁은 모든 바깥 경계에 마음의 흔들림이 없고 번뇌가 없는 보배스런 궁전이라는 뜻이다.
욕심(貪)과 성냄(瞋), 어리석음(痴)이 없으니 괴로울 것이 없는 부처님의 경지를 나타낸다.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정골사리가 모셔져 있어 법당 안에는 따로 부처님상을 조성하지 않고 불단만 설치하는 것이 특징이다. 무소유의 불교 철학을 상징하는 의미로도 볼 수 있고 금강경 사구게(金剛經 四句偈)의 말씀을 표현한 불교의 건축 양식으로도 해석해 볼 수 있다. 참고로 금강경 사구게를 살펴보자.
金剛經 四句偈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以生其心
불응주색생심 불은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하다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응당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 향, 미, 촉, 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요 응당 머문바 없이 그 마음을 낼 지니라
만약 색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일체의 함이 있는 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觀)할지니라.
적멸보궁 바로 뒤에 84센티미터 높이의 개석(蓋石)을 갖춘 비석 모양의 마애불탑이 세워져 있다. 이것은 진신사리가 있다는 ‘세존진신탑묘(世尊眞身塔廟)’이다.
우리나라에는 다섯 군데의 적멸보궁이 있다. 오대산 적멸보궁은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기도하던 가운데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얻은 석가모니 정골사리를 봉안한 불교의 성지이다.
중대에 위치한 적멸보궁은 오대산 비로봉에서 흘러내린 산맥들이 주위에 병풍처럼 둘러싸인 중앙에 우뚝 솟아 있다. 적멸보궁이 자리한 곳은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이라 하여 용의 머리에 해당된다. 조선시대 암행어사 박문수가 이 곳을 방문하고 천하의 명당이라고 감탄했던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