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영천(永川)의 문화답사 경상북도 남동부의 중앙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은 포항시와 경주시, 서쪽은 경산시와 대구광역시, 남쪽은 청도군, 북쪽은 군위군과 청송군에 접하고 있다. 전체 면적은 920.29㎢이며 총인구가 107,701명(2007년12월31일 기준)에 이르고, 1읍 10면 5개동으로 되어 있다. 시청소재지는 문외동이다.
자연환경 동쪽 경계는 태백산맥의 남쪽 여맥에 해당하며 이 부근에서 산세가 약해져서 운주산, 도덕산, 관산 등의 낮은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고 서쪽에는 팔공산지괴가 있다. 남쪽 경계에는 금박산,사룡산,구룡산 등이 있고 북쪽은 보현산을 주봉으로 해서 수석봉과 보자산 등이 있어 완전한 분지를 이룬다. 산맥으로 이루어진 시 경계에는 갑령, 노고, 시티재 등 유명한 고개들이 있고, 이들 고개는 예로부터 교통로로 이용되어 왔다. 낙동강의 대지류인 금호강은 하천 분지의 물을 집수하여 낙동강으로 변환하는데, 이 강의 주요 지류인 자호천, 고촌천, 신녕천, 고현천 등은 분지 중앙에서 모두 합류한다.
역 사 고대 - 변진 24국의 하나인 호로국과 골벌국이었다가 신라에 병합되어 절야화군(지금의 영천)과 사정화현이 되었다. 757년(경덕왕16) 각각 임고군과 신녕현으로 개명되어 양주에 속하였다. 고려 - 고려건국 이후 임고군, 임천현, 도동현이 통합되어 영주가 되었는데 고울군 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 고려에 이어 영주군,신령현으로 나뉘어 오다가 1413년(태종13) 영주군이 영천군으로 개명되었고 신령현은 한때 해체되기도 하였다. 근대 - 1895년 영천, 신령이 모두 군이 되어 대구부에 속하였고, 1896년 경상북도 영천군, 신령군이 되었으며 1914년 군면통폐합시, 신령군이 영천군에 흡수되어 오늘에 이른다. 1934년 화북면, 고경면이 만들어졌고 1937년 영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현대 - 1973년 금호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1년 영천읍이 영천시로 승격되어 분리되었다가 1995년 1월 1일 영천시와 영천군이 통합되면서 영천시가 되었다.
문 화 문화제 영천시민들이 10월이나 11월을 전후해서 벌이는 영천문화제는 1974년부터 개최되고 있는데 이 때 씨름, 곳나무싸움, 줄다리기, 농악 등의 민속 경연대회가 행해진다. 이 경연을 통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곳나무싸움이 재현되어 해마다 시행하고 있다. 짚으로 고를 만들어 나무를 꽂고 이를 빼앗아 달아나는 싸움인데, 이 고를 일정 기간까지 감추는 편이 승리하기 때문에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상대편이 찾지 못하도록 감추게 된다. 이 곳나무싸움이 격렬해지면서 석전이 시작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승리하는 편에 서는 풍년이 들고, 패하는 편에서는 흉년이 든다고 한다. 이 곳나무싸움은 풍년을 기원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민속 이 지방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줄다리기, 고싸움, 석전, 씨름, 농악, 윷 놀이 등을 들 수 있다.
동제 수령이 많은 당나무나 당집에 제단을 마련하여 매년 1년 동안 동네의 태평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낸다
길안내 대구선과 중앙선 철도가 이곳에서 분기하고 경부고속도로가 시 남부지역을 통과하며, 대구-경주간의 국도와 의성, 안동, 포항 등을 잇는 국도, 청송, 영양 지방으로 연결되는 국도가 있어 매우 편리하다.
▣중요 관광지▣ 치산관광지 팔공산 주봉 북쪽 자락에 들어앉은 계곡이다. 치산 저수지에서 약 1km 올라가면 신라 선덕여왕 14년에 원효대사와 자장율사가 창건한 천년 고찰 수도사가 있으며 상류에는 신령재와 고려 문종시대에 흥암 혼수대사가 창건한 진불암을 만날 수 있다. 수도사에서 계곡을 따라 약 1.6km 올라가면 치산폭포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 폭포는 팔공산에 산재해 있는 폭포 가운데 가장 낙차가 크고 낙수율이 풍부하다. 팔공산 남쪽과 서쪽으로부터 에워싸고 있는 광활한 일대의 원시림지대에서 흘러내리는 폭포는 3단을 이루고 있어 장관을 이룬다. 온갖 형상의 기암석과 울창한 숲으로 풍치미 또한 뛰어나며, 여름의 녹음, 가을의 단풍, 겨울의 설경을 자랑한다. 계곡의 맑은 물과 호수는 주변의 산세와 조화를 이루에 경관이 좋다. 또한 주변 관광지로는 제 2석굴암, 팔공산 순회도로와 연결되어 있으며, 등산로는 수도사 - 치산폭포 - 동봉 - 동화사 - 갓바위로 연결되어 있다.
보현산 천문대 보현산(1,124m)은 경북 대구와 포항 사이에 있는 영천시의 진산이나 다름없다. 이곳 정상에는 특별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누구나 쉽게 들러볼 수 있는 보현산 천문대가 서있다. 한국천문연구원 소속으로 충북 단양의 소백산천문대, 대전의 대덕 전파천문대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천문관측소 중 하나다. 천체에 대한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볼거리를 제공하는 나들이 명소로 한번쯤 찾아볼 만하다. 천문전시관과 대형 광학망원경 주위로 동쪽 멀리는 포항 앞바다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대구 팔공산과 군위 일원의 산군들, 그리고 남쪽으로는 영천 기룡산과 북쪽의 청송, 안동 등 경북 내륙의 상쾌한 산줄기가 한 없이 펼쳐진다.
이처럼 일대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기에 장엄한 일출의 장면과 아름다운 낙조의 광경도 빼어나다. 일출과 일몰광경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해마다 연말연시면 해돋이와 함께 새롭게 각오를 다지려는 관광객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1996년 4월 문을 연 보현산천문대는 국내 최대 규모의 직경 1.8m 반사망원경, 태양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는 태양플레어 망원경 등을 가동하고 있다. 일반 탐방객을 위해서는 방문객 센터(전시관)을 운영하고 있는데 주말에도 열려 있으며 각종 별자리사진 등을 감상하고 관련서적이나 천체사진, 간단한 기념품 등도 구입할 수 있다.
-보현산 천문대 전경- . * NGC 7635 거품 성운("The Bubble Nebula") 보현산천문대 1.8m 망원경으로 찍은 NGC 7635 의 모습. H-alpha, V, B 필터 사진을 합성. 중심부의 밝은 별 (태양의 10-20배 크기)로부터 나오는 강한 복사에너지에 의해 별 주위의 가스와 먼지로 된 물질이 밀려나 마치 거품이 이는 듯한 모습으로 보여져서 거품성운 (The Bubble Nebula)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지구로부터 3.5 kpc (11,300광년)
* M82 외부은하 보현산천문대 1.8m 망원경으로 찍은 M82 외부 은하의 중심부 모습. H-alpha, V, B 필터 이미지를 합성. 보현산천문대 1.8m 망원경 + 2k CCD 카메라 사용 사진의 시야는 9.8 arcmin x 8.8 arcmin 이다. 왼편이 동쪽이며, 위쪽이 북쪽이다.
오리장림 (자천 숲) 이 숲은 옛부터 오리장림이라고 불리워 왔는데 근래에 와서는 자천숲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오리장림이라는 말은 옛날 도로가 나기 이전에 자천리 일대 좌우 5리에 걸쳐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국도가 개설되면서 숲이 좌우로 갈리고 그 후 학교설립, 도로확장, 사라호 태풍 등으로 많은 부분이 유실되어 지금은 자천 마을 앞 군락지 등 몇곳에서만 옛 향취를 더듬어 볼 수 있어 아쉬움이 크지만 차량통행이 뜸한 국도를 따라가는 호젓함도 느낄 수 있다. 숲이 형성된 약 400여년 전부터 이 곳 주민들은 마을 수호를 위하여 매년 정월 대보름날 자정에 제사를 올렸으며 봄에 잎이 무성하면 그 해에는 풍년이 온다고 믿고 있다. 이 숲에는 10여종이 넘는 나무들이 분재박물관을 연상시키듯 온갖 자태를 뽐내고 있으며, 여름에는 자천 마을 앞을 흐르는 고현천의 바람과 하늘을 가리는 오리장림의 그늘이 자연 그대로의 시원함을 빚어낸다.
* 숲의 현황 숲을 이루는 수종은 12종 282본으로 낙엽활엽수는 은행나무 1본, 왕버들 37본, 굴참나무 87본, 시무나무 9본, 느티나무 25본, 팽나무 26본, 풍게나무 18본, 회화나무 26본, 말채나무 2본 등 9종 231본이다. 상록침엽수는 소나무 27본, 곰솔 5본, 개잎갈나무 19본 등 3종 51본이다. 수령은 20 ~ 350년으로 추정되고 수고 6~24m, 수관폭 8~28m로 노거목들이 많다.
만불산 만불사 경북 영천 만불산 만불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부처님이 모셔진 사찰이다. 전각, 탑, 범종, 대불 그리고 도로에까지 나투신 수십만의 부처님들이 참배객들을 자비로운 미소로 반겨주고 있다. 만불보전에는 원불로, 인등대탑에는 인등으로, 황동범종에는 만불로, 대불 앞에는 부처님동산으로 나투신 부처님들은 우리들을 부처님 나라로 인도하고 있다. 만불산 만불사에서는 부처님과 함께 다양한 신행 체험을 할 수 있는데, 세계 최초로 황동으로 조성된 황동만불대범종을 직접 타종할 수 있으며, 황동와불열반상의 부처님 발바닥과 만불보전의 수정유리광여래불을 직접 만지면서 소원을 발원할 수도 있다. 만불사는 생과 사를 함께하는 사찰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효를 돌아가신 영가에게는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만불사에서는 스님들만 모실 수 있었던 부도를 일반인도 이용할 수 있도록 부도탑묘와 왕생납골단을 조성하여 새로운 불교식 장례 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또한 만불사 대웅전에서 시작하여 황동와불열반상, 영천 아미타대불로 이어지는 숲속 길은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명상과 산책을 하기에 좋은 코스이며, 만불보전과 인등대탑의 야경, 석양이 지는 용천지 방생장 등은 일몰 후의 전경 또한 아름다운 곳이다.
만불산 만불사에 모셔진 부처님-
* 문화재 33m 영천 아미타대불, 황동와불열반상, 황동만불대범종, 인등대탑, 만불보전, 관음전, 대웅전, 법성게 법륜, 수정유리광여래불, 복주머니, 부처님 진신사리 5과, 유자영가, 노천 아미타불, 보리수나무, 부도탑묘
팔공산도립공원(은해사지구) 대구 도심에서 동쪽으로 22km거리에 대구시와 경상북도 4개 시군에 걸쳐있는 팔공산은 비로봉(1,192m)을 가운데로 동봉(1,155m)과 서봉(1,041m)으로 줄기를 뻗고 있다. 천년이 넘은 동화사를 비롯한 수십개의 사찰과 암자가 있으며, 울창한 수림, 맑은 물이 흐르는 수 갈래의 계곡 속에 이른 봄의 진달래, 늦봄의 영산홍, 여름엔 후박 등이 청초하게 피어나고, 가을에는 단풍과 활엽수, 겨울의 설경 등이 신비의 경지를 이룬다.
동편에 영천 은해사가 위치하고 있는데 이 절은 조계종 제10교구의 본산으로 혜철국사가 신라 헌덕왕 원년(809)에 이곳 해안평에 창건하였고 조선 명종 원년(1546)에 천교화상이 이곳으로 이건하여 은해사라 하였다. 은해사에는 거조암, 백흥암, 운부암, 중암암 등 8개의 암자와 국보 14호인 영산전과 보물 3점이 지정되어 있고 건들바위와 기기암의 장군수 및 안흥폭포가 있는 명승지다.
-은해사 전경-
돌할매 무게 약 10kg, 직경 25cm의 화강암을 들면서 자신의 운세를 점친다고 해서 '돌할매'라 부른다. 두손으로 돌을 들어올릴때 돌이 들리면 자신의 염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돌이 꼼짝도 안하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즉 염원하는 바에 대해 가부결정을 해 준다는 것이다. 이 돌이 화제를 모으는 것은 예언능력에 대한 신통력 여부보다는 사람에 따라 혹은 염원하는 바에 따라 돌이 들리기도 하고 안들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돌을 드는 요령은 처음에는 아무 생각없이 들어보는 것이다. 정성이 없으면 쉽게 들리는 것을 직접 확인하는 절차이다. 다음에는 본인의 생년월일과 주소, 나이, 성명 등을 말하고 소원이나 애로사항을 이야기 하면 돌이 들리는지 안들리는지를 통해 그 가부를 알려 준다고 한다. 이 돌의 역사는 약 350여년이 되며 마을주민들이 길흉화복이 있을 때마다 돌을 찾아다 제(祭)를 지내왔다고 한다. 또한 마을에 전염병이 돌거나 흉사가 생기면 "돌할매 다지러 간다"며 참배를 했고 매월 음력 보름이 되면 동민제(洞民祭)를 지내왔다고 한다.
-돌할매-
은해사 은해사는 조선 31본산, 경북 5대 본산, 현재는 대한불교 제 10교구 본사의 자리를 지키는 경북지방의 대표적 사찰이다. 그리고 교구 본사 중 본존불로 아미타불을 모시는 미타도량 으로도 유명하다. 신라 41대 헌덕왕 1년(809년) 혜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사찰이 해안 사인데 이 해안사로부터 은해사의 역사가 시작된다. 현존하는 암자만도 여덟개가 있고 말 사 숫자가 50여 개에 이르고 한국 불교의 강백들을 양성, 교육하는 "종립 은해사 승가 대 학원"이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불, 보살, 나한 등이 중중무진으로 계신 것처럼 웅장한 모습이 마치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정토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은해사이다. 또 은해사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 어날 때면 그 광경이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듯 하다고 해서 은해사라고도 한다. 은해사는 현재 말사 39개소, 포교당 5개소, 부속암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이다. 1943년까지만 하더라도 은해사에는 건물이 35동 245칸에 이르러 대사찰의 위용을 자랑했 지만, 현재 은해사 본사 내에는 19개 건물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거조암 거조암은 은해사의 한 암자인데 직선 거리로 4km 가량 떨어져 있고, 들어오는 입구도 다르다. 거조암은 당초 거조사라 하여 은해사보다 앞서 창건되었다. 신라 효성왕 2년(738)에 원참조사가 창건했다고도 하고 경덕왕(742∼764)때 창건했다고도 한다. 은해사와 거조사가 언제 한 울타리 안에 놓이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근래에 와서 은해사를 본사로 하고 거조사를 말사로 편입하여 거조암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국보 제14호로 지정된 영산전은 잡석이 불규칙하게 축조된 기단위에 길죽하게 만들어져 있으며, 소박하고 간결한 주심포계 형식을 취하고 있는 앞 뒤 정면 7칸 측면 3칸의 길쭉한 맞배지붕 집이다. 공포, 보의 단면, 솟을 합장, 포대공 등에서 일부 고식을 볼 수 있으나 일반적인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선초기에 중수하면서 많은 부분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영산전안에는 석가모니 불상과 526분의 석조나한상을 모시고 있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단 하나뿐인 오백성중청문이란 책자가 있다. 이 책에는 5백나한상의 이름이 적혀있는데, 제작연대는 알 수 없고 영파스님이 저술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 은해사의 가람 은해사는 조선시대 대부분의 산지가람처럼 단탑단금당식 (單塔單金堂式)으로 가람배치가 되어있다. 대웅전 앞에 있던 오층석탑은 최근 보존을 위해서 부도전으로 이전하였다. 대웅전 앞에는 보화루가 있고 보화루 좌우로 심검당과 설선당이 있으며 그 가운데 장방형 의 정원이 있는 중정식 가람배치 구조이다. 중정은 장방형이지만 중간부분에 계단을 축대 를 만들어 놓아서 보화루로 들어오는 참배객이 볼 때, 정방형에 가깝게 보여서 대웅전이 더 웅장하게 다가오는 느낌을 준다.
* 은해사의 성보문화재 은해사 내에는 보물 제 1270호인 은해사 괘불 탱화, 대웅전 아미타 삼존불, 후불탱화, 괘 불신장탱화. 쇠북 등 수많은 문화재가 있다.
* 주요문화재 거조암 영산전(국보14호), 백흥암 극락전수미단(보물 486호), 운부암 청동보살좌상(보물514호), 백흥암 극락전(보물 790호)
사일온천 산 정상에 자리해 말 그대로 하늘과 가장 가까운 온천이다. 총 4개 성분에서 온천합격판정을 받은 국내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명품 온천수의 100% 공급을 자랑한다. 또한 국내 유일의 최고급 월풀 욕조가 구비된 호텔식 가족탕, 대중탕에서 바로 연결된 100평 규모의 노천탕은 온천욕의 새로운 경험을 제공한다.
-사일온천 내부-
영천댐 영천에서 국도를 따라 포항방면으로 5분쯤 가다보면 왼쪽으로 뚫린 지방도로가 있다. 이 길을 따라 20분쯤 가면 눈 앞이 탁 트이는 바다 같은 영천댐이 보인다. 댐의 높이는 42m, 제방의 길이는 300m이고, 총 저수량은 9,640만톤으로 1974년에 착공해서 1980년에 준공되었으며, 포항과 영천의 식수와 공업용수로 활용하고 있다. 이 댐의 건설로 자양면의 6개 법정동이 수몰되기도 했지만 어디서 보아도 물과 산이 어우러진 절경이다.
댐으로 가기 전에 주위의 문화재를 살펴보면, 임고면 양항리에 임고서원이 있고, 선원리에 정용준 가옥, 선원동철불좌상, 환구세덕사, 함계정사 등이 있으며, 선원동을 지나면 삼매리에 정재영가옥 및 산수정, 자양서당, 동인각 등이 있다. 또한 댐 주위를 돌아보면 자양면 성곡리에 강호정, 오회공종택, 하천재, 사의당, 삼휴정, 오회당이 있고, 조금 가다보면 생육신 이경은선생을 기리는 용계서원과 제단, 부조묘 등이 있으며, 댐을 지나 보현쪽으로 가면 충효재가 있다. 한편, 면사무소 뒤 기룡산에는 천년고찰인 묘각사와 거동사가 자리잡고 있다
수도사 팔공산 영역을 사찰로 구분 지을 때 하나의 독립된 영역을 지니고 있는 사찰은 동화사 은해사 파계사 선본사(각바위)와 영천 수도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사찰은 아니지만 사찰을 중심으로 연출된 자연환경은 어느 사찰보다 뒤지지 않습니다. 수도사의 자연은 치산계곡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치산계곡은 수도사 1km 아래에 있는 치산저수지부터 시작하여 6km까지 거대한 암반과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그러나 치산계곡의 절경은 수도사에 1km 정도 오르면 감상할 수 있습니다. 수도폭포가 그 주인공입니다. 공산폭포 치산폭포라고 불리고도 있는데, 지금은 사찰이름을 따서 수도폭포라는 정확한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수도폭포는 팔공산에 산재해 있는 여러 개의 폭포 가운데 가장 낙차가 크고 낙수물이 풍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팔공산 남쪽과 서쪽으로부터 에워싸고 있는 광활한 일대의 원시림지대에서 흘러내리는 30m 높이의 폭포는 3단 폭포를 이루고 있습니다. 폭포 아래 넓은 소에는 시원한 계곡물이 흘러내리고 주변에는 야영을 할만한 곳도 많아, 여름에는 가족들이 피서지로 많이 찾습니다.
또한 치산계곡은 온갖 형상의 기암석과 울창한 숲으로 주변 경관이 뛰어나며 여름에는 짙은 녹음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설경 등 어느 계절 하나도 빠지지 않습니다. 정상 바로 밑의 진불암에서는 팔공산의 기기묘묘한 봉우리들이 바로 눈앞으로 보이며, 정상인 신령재에 올라서면 팔공산의 장쾌한 전경이 한눈에 펼쳐집니다.
영천시에서는 이 일대 8만 2천평에 대규모 위락시설을 만들어 도시민의 여가활동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국민 관광지로 조성할 계획으로 있으며, 현재 대형 주차장 2개소와 화장실 그리고 수변 피크닉장 및 어린이 놀이터를 조성해 놓았습니다. 또한 제 2석굴암, 팔공산 순환도로와 연결되어 있으며, 치산폭포 등봉 동화사 갓바위로 이어지는 등산코스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 창건배경 및 역사 수도사는 647년(진덕왕 1) 자장(慈藏, 590∼658)과 원효(元曉, 617∼686) 두 스님이 함께 금당사(金堂寺)라는 이름으로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뒤의 연혁은 잘 알 수 없고, 고려시대에 들어와 1206년(희종 2) 보희(普熙) 국사가 중창하였는데 보희 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의 역사도 문헌이 전하는 바가 별로 없다. 1805년(순조 5)에 징월 정훈(澄月正訓, ?∼?) 스님이 중창하였다. 정훈 스님은 동화사를 중심으로 대구·경북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던 고승이었다. 이어서 1899년(광무 3) 산령각을 지었다.
그밖에 사찰에 전하는 사적기나 역사서는 아니지만, 조선시대 중기의 학자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이 전국의 명산대찰을 유람하며 지은 "산중일기(山中日記)"에 수도사가 나오므로 이 기록을 수도사 역사의 하나로 취급할 있다. "산중일기"에는 정시한이 1686년(숙종 12) 6월 24일 수도사의 응담(應湛) 스님을 염불암(念佛庵)에서 만났고, 또 8월 20일에 수도사 영자전(影子殿)에 가서 여러 날 묵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 수도사에 승통(僧統) 응담(應談)을 비롯하여 당시 나이 83세의 처순(處淳), 그리고 옥륜(玉倫)·옥행(玉行)·탄흡(坦洽) 스님 등이 맞아주었다는 내용도 보인다. 또 정시한은 수도사 터에 대해 말하면서, 건좌손향(乾坐巽向), 곧 서북쪽에서 동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방위로 비록 평평한 편은 아니지만 폭포 바로 머리 위에 있어서 이곳이 곧 정기가 모이는 곳으로 여기고 있다는 말도 하여 당시 수도사의 여러 정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근대에는 1929년 윤경천(尹敬天) 스님이 신도 김용필(金龍弼)과 함께 원통전을 중수하였다. 최근에는 1979년 우희장(禹熙璋) 주지가 이용하(李容夏) 신도회장을 비롯한 여러 신도의 시주를 모아 해불당(海佛堂) 해회루 요사 등을 중수하였다. 그리고 1985년에 삼성각을 지었으며, 2000년 6월에 석조 약사여래 삼존불상을 봉안하였다.
국립영천호국원 나라와 민족을 위해 고귀한 목숨을 바친 호국 영령을 추모하며 그분들의 희생과 애국애족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현재는 추모뿐만 아니라 전후 세대의 호국 안보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영천은 나라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굳건히 이겨낸 영광스러운 역사의 현장으로 곳곳에 선인들의 자취가 남아 있다. 특히 민족의 비극이었던 한국전쟁 당시 신녕전투는 낙동강 방어선의 최후보루로서 총반격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나라의 운명을 되살린 전투로 기억되고 있다
영천 보현마을 [녹색농촌체험] 태백준령이 남으로 흘러 보현산(1,124m)을 이루고 그 줄기가 동으로 뻗어 작은 보현산(835m)과 수석봉(821m)을 맺어 뒤에서 감싸안고, 남으로 보현천을 사이에 두고서 기룡산(961m)이 병풍처럼 둘러싸서 지켜주는 보현골은 산지수려하고 청정한 고장이다. 임고서원과 영천댐, 거동사, 보현산천문대, 오리장림을 잇는 아름다운 벚꽃 드라이브코스가 개발되어 있고, 우리 녹색농촌체험마을 보현골과 인근의 별빛마을 정각리는 다양한 농촌, 문화체험을 할 수 있다.
도계서원 이 서원은 조선조 선조시대 가사문학(歌辭文學)의 선구자이며 효자로, 임진왜란 때는 수군으로 종군하여 많은 공적을 남기고, 해안 지방의 만호(萬戶)까지 역임한 노계(蘆溪) 박인로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드리는곳이다. 이 서원에는 노계 선생의 문집을 인쇄한 목판각인 박노계집판목(朴蘆溪集板木, 유형문화재68호)이 보관되어 있다.
선생은 조선 명종 16년(1561년)에 영천군 북안면 도천리에서 태어나셨다. 나면서도 총명하여 배우지 않아도 글을 알고 남이 글을 읽는 것을 들으면, 모두 기억하는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 글재주는 임진왜란 때 태평사(太平詞)를 지어 사졸들을 위로한 것을 비롯하여, 선상탄(船上嘆), 사제곡(莎堤曲), 누항사(陋巷詞), 독락당(獨樂堂), 영남가(嶺南歌), 노계가(蘆溪歌) 등 여러 가사에 잘 나타나있다. 더군다나 천성이 지효(至孝)하여 부모상에 다같이 3년 씩 여묘(廬墓)를 살았다. 선생의 효심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은 선생이 지으신 시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홍시가(早紅枾歌)와 부자유친가 (父子有親歌)를 읽으면 남의 자식된 사람으로 하여금 누구나 부모님을 사모하고 효도할 것을 맹세하게 만들었다고 하니, 참으로 좋은 교훈의 시가가 아닐 수 없다. 선생은 벼슬을 지내고 나서 훗날 이곳에 은거하여 저술활동에 진력하였다. 뒷날에 노계선생의 학덕과 충효사상을 경모(敬慕)하여 사림(士林)이 도계서원을 세워 해마다 춘추로 향사를 받들어 오늘날에도 계속해오고 있다.
정각마을 [농촌체험] 연중 서늘하고 청정한 기후 보현산 천문대로 유명한 경북 영천의 정각마을은 온 마을이 별빛의 영롱함을 간직한 마을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난히 별들이 많아 천문대까지 세워질 정도로 유명한 이곳은 밤하늘 사랑하는 가족과 별헤는 추억을 마음속에 담아 갈 수 있는 곳이다. 또한 낮에도 밤하늘 별빛 같은 화려한 풍경들이 마을로 내려온 듯 멋진 풍경들이 많아 밤낮으로 즐거움이 가득한 곳이다. 영천 정각별빛마을은 행정자치부에서 아름마을가꾸기사업 마을로 지정해 놓았으며, 청정지역에서 재배해 내는 사과와 미나리등을 아펫워 생태마을로 발돋움하려는 희망을 하나씩 만들어 가고 있다.
정각마을의 대표적인 농산물로는 별빛을 먹고 자라서 새콤하고 달콤한 맛이 뛰어나다는 사과와 천도복숭아를 들 수 있다. 별빛사과라 불리는 이곳의 사과는 전국최고의 청정지역이자 사과생산지로 적합한 일교차를 지니고 있어 맛과 당도가 어느곳 보다도 좋다고 한다.
매년 5월이면 전국적 규모의 대규모 별빛축제가 개최되기 때문. 어릴적 교과서에서 배웠던 카시오페아, 북두칠성, 북극성 등 책으로만 보아왔던 별자리들과 은하수 그리고 별똥별을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정각마을에서는 이에 맞추어 다양한 농촌체험행사도 마련해 놓고 있어 팜스테이 체험마을로 좋은 곳이다.
진불암 진불암(眞佛庵)은 팔공산 제일봉인 비로봉 아래 자리잡고 있는 작은 암자이다. 치산관광지인 치산계곡 중간쯤에 자리한 수도사에서부터 3.3km 거리에 위치한다. 한 시간 가량 산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깊은 산중에 위치해 있다. 신녕면을 지나 수도사까지는 승용차로 달릴 수 있으나, 수도사부터는 일찌감치 차를 버려두고 갈 용기가 필요하다. 계곡을 건너 타박타박 걷다보면 공산폭포를 만나고 온갖 새들의 재잘거림 속에 울창한 숲속을 걸어가다 맑은 하늘이 확 뚫렸다 싶으면 바로 그곳에 작고 소박한 별천지인 진불암이 자리해 있다. 일설에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사찰로서, 후면에는 청정법신 비로봉이 전면에는 대자대비 관음봉, 우측에는 실행제일 보현봉이 그리고 좌측에는 지혜제일 문수사리봉으로 사방이 보살님들로서 장엄되어 있는 곳이라 한다.
절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 진평왕 때 창건되었다고 입구 간판에는 적혀 있으나, 구전에 따르면 고려 말 환암 혼수(幻庵 混修, 1320~1392) 스님이 창건했다고 합니다. 사역에는 인법당과 칠성각, 산신각이 있는 작은 암자이지만, 절 마당에서 바라다 보이는 팔공산 능선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나무 사이를 휘감아도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능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절 이름 그대로‘참부처’를 찾아 정진했을 무수히 많은 옛 스님들의 모습이 마음속에 그려지는 곳이다.
* 창건배경 및 역사 진불암의 초창은 고려 문종 때의 혼수국사(混修國師)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후 조선시대에 들어서 1637년(인조 15)에 이응선(李應善)씨가 중수하였고, 1813년(순종 13)에 등월(燈月), 월진(月長) 두 스님이 다시 중수한 곳이다. 근대에는 1944년 대구의 소위 80연대라고 하는 일본병영에서 우리 학병이 다섯명이 탈출하여 이 절 다락에 숨어 있었다. 일본 해병대는 이들을 좇아 마침내 이 암자에까지 들이닥쳤다. 당시 노스님의 태도가 너무나 태연하므로 왜병들은 의심없이 무사히 통과하였다. 이렇게 젊은 학병 다섯 명은 생명을 건지고 무사할 수 있었다.
-진불암 전경-
묘각사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용화리 산9번지 기룡산(騎龍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의 말사이다. 기룡산(騎龍山) 묘각사는 지금으로부터 1300여년 전 신라시대 선덕여왕 당시 의상스님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유서 깊은 사찰로, 영천시 자양면 용화리에 자리하고 있다. 1999년부터 대대적인 불사에 들어가 아미타삼성전을 복원하고 관세음보살상도 새로 제작하였다.
이 절의 부근은 예로부터 불보성지(佛寶聖地)로 널리 알려졌다. 그래서인가 절의 뒷산은 보현보살이 머무른다는 보현산(普賢山)이며, 산 아래 동네는 마을입구부터 미륵불(彌勒佛)의 상주처(常住處)임을 암시하듯 미륵불의 용화삼회법회의 의미를 상징하는 용화동(龍華洞)이다. 이어 삼매동(三昧洞) 덕연동 선원동(禪院洞) 원각동(圓覺洞) 공덕동(功德洞) 정각동(正覺洞) 등 수많은 지명이 마치 화장세계(華藏世界) 불국정토를 표현한 듯한 마을 이름들이 많다. 이렇듯 10만억 국토를 지닌 서방정토는 이곳 기룡산에 유연찰토를 정하며 바로 이 사바에 시현되고 있다.
- 묘각사 전경-
임고서원 임고서원은 고려말의 충신인 포은 정몽주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명종 8년(1553)에 노수, 김응생, 정윤량선생 등 향내 유림들이 임고면 고천리 부래산에 창건한 사액서원이다. 최초의 사액서원인 백운동서원이 사액된지 5년후인 1555년에 임고라 사액 되었으므로 초기 서원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이 서원은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선조36년(1603)에 중건하였다.
인조 21년(1643)에 장현광 선생을, 영조 3년(1727)에 황보인 선생을 추가로 배향 하면서 선현 배양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고종 8년(1871)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 1919년 존영각을 건립하여 포은 선생의 영정만 모시고 향사를 지내 오다 1965년에 다시 복원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1980년에 보수, 정화하였다. 서원에는 정몽주 선생 영정 2폭과 "포은문집 圃隱文集" 목판 113판, "지봉유설 芝峰類說" 목판 71판, "포은집" "御使性理書" 11권 외에 200여 권의 중요한 전적이 소장되어 있어, 선생의 업적과 초기 성리학 사상의 한 흐름을 느낄 수가 있다. 또한 서원 앞에는 수령 500년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거목인 은행나무가 버티고 서있다.
-임고서원 전경-
시안미술관 제1종 미술관으로 정부에 등록이 허가된 시안미술관은 7000여평의 폐교부지를 매입하여 옛 학교의 향수와 현대식 첨단건축물이 공존할 수 있도록 장기간의 리노베이션 기간을 거쳐 6000여 평을 잔디로 새단장한 야외조각장과 함께 고풍스런 유럽식 현대건축물로 조성되었다. 자연을 그대로 담은 시안미술관은 미술관으로써의 기능과 동시에 시민들의 마음의 쉼터로 자리잡아 많은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미술관의 기본 기능인 미술자료의 연구, 수집, 전시의 기능과 함께 교육부분을 특성화하여 연구하고 시도함으로써 전문 미술관 교육을 지역시민에게 제공하여 수도권과의 문화서비스의 수준차이를 좁히고 편중현상을 극복하기 위하여 다양한 노력을 시도하고 있다. 2007년도에는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서, 문화관광부로부터 지역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로도 지정이 되었다.
2005년 한국여행작가협회로부터 ‘폐교를 활용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으로도 선정된 바 있는 본 미술관은 최근 들어 TV 드라마 촬영지와 가수음반앨범 촬영지로도 각광받는 등 경북 내 중요한 문화관광 및 문화예술교육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 시안미술관 전경-
거동사 거동사(巨同寺)는 경북 영천시 자양면 보현산(普賢山) 남쪽에 자리한 천년 고찰이다. 영천시를 지나 안강 방면으로 나가 조교동 삼거리에서 임고를 따라가면 영천댐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산허리를 감고 굽이굽이 이어져있는 영천댐을 따라 보현산 쪽으로 약 20km 올라가면 보현산 청소년 야영장 안내 표지판이 보인다.
일명 약초 마을이라 불리는 마을 안길을 따라 약 2km 더 가면 거동사가 보인다. 유난히 저수지가 많은 산길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길, 나무마다 주렁주렁 풍성한 열매를 매달아 놓아 마음의 풍요로움을 안겨주는 곳이다. 주변에 남아있는 암자의 유허지를 보아 대찰(大刹)이 있었음이 추측이 되나, 애석하게도 지금은 대웅전과 승방, 요사채 하나와 산신각만 남아있다. 신라 고찰이라고 보기에는 여느 절과 다름없는 평범한 절이지만, 한 때는 건물이 100여채가 자리한 대찰이었다고 마을 주민들에 의해 입으로만 전해올 뿐, 번창했던 시절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다.
거동사가 한참 융성할 당시에는 아침밥을 짓기 위해 쌀을 씻으면 쌀뜨물이 계곡을 따라 흘러내려 3㎞ 아래인 영천댐 상류인 지금의 충효사까지 내려올 정도로 신도가 많았다고 한다. 너무 많이 찾아드는 신도를 감당하기 어려워 한번은 주지스님이 유명한 대사를 찾아가 신도의 발길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묻자, 이 대사는 절에 있는 부도군의 위치를 옮기면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다음날 스님은 부도탑을 지금의 거동사가 정면으로 보이는 산기슭으로 옮겼고 이때부터 거짓말처럼 신도의 발길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사찰건물도 하나 둘 없어지고 쇠퇴해 지금의 거동사만 남아있게 됐다는 것이다.
최근 이곳으로 부임한 혜휴 주지스님은 그동안 찾지 못했던 부도탑을 수맥연구가의 도움으로 다시 찾았다고 한다. 절 맞은편에 있던 3기의 부도군을 거동사 인근에서 찾아내 지난 4월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이전에 묻혀있던 부도탑에서 엄청난 기운을 느낄 수 있어 곧바로 찾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동안 신도의 발길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한 이곳에 신기하게도 부도군을 옮긴 후 이번 초파일에는 마을 진입로가 막힐 정도로 많은 신도가 찾아들었다고 한다. 주지 혜휴스님과 거동사 신도님들은 부도군이 옮겨진 후 번창했던 시절의 옛 영광을 다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차있다.
-거동사의 부도탑-
조양각 명원루 혹은 서세루라고 불리는 조양각은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당시 부사이던 이용, 그리고 향내 유림들과 합심하여 지은 건물로서 영남 7루의 하나다. 원래는 조양각을 중심으로 좌우에 청량당과 쌍청당 등, 여러 개의 건물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현재 조양각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되어 있으며, 이 고장을 거쳐간 수 많은 명현, 풍류객들의 싯귀가 조각된 80여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조양각 경내에는 산남의진비와 영천지구 전승비, 백신애 문학비와 황성옛터 노래비 등의 기념물이 있다.
-조양각 전경-
은해사 산사체험 저녁예불과 기도를 통해서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보고 사찰예법과 108배를 통해 번뇌로 가득한 마음을 비워 낸다. 자정을 넘어서 산내에 있는 암자에 달빛과 별빛을 벗 삼아 산행을 하며 자연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새벽에 다시 예불 참석을 하고 앞마당을 다함께 청소한다.
은해사 산사체험의 특징은 프로그램이나 지도법사에 의존하기보다는 자연과 함께하고 자기 자신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도록 짜여져 있다. 프로그램마다 참가자 자신의 의지에 따라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사회에서 갖고 있던 여러 가지 고민과 피곤했던 몸을 쉬게 하고 재충전 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봉림사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2372번지 학서산(鶴棲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다.
얼마나 많은 길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었던가. 얼마나 많은 길들을 내가 걸어갈 수 있다고 믿었던가. 얼마나 많은 길들을 결국 밟아보지 못하고 잊어 버렸던가.
봉림사를 찾아 가는 낯선 길 위에서 길동무하는 청솔모와 외진 산길은 이어지고, 한 발짝 한 발짝 떼어놓는 발걸음 마다 외길의 정적을 깨는 소리들... 내 발자욱 소리에 흠칫 놀라기도 한다. 우리네 삶과도 같은 길 위에 선 나그네의 몽뚱아리를 데려가는 이 길. 그 길의 목적지는 봉림사이다.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학가산에 자리한 봉림사(鳳林寺)는 조선 영조 18년(1742)에 징월스님이 세웠다는 절이다. 경내에는 현재 대웅전과 산신각 그리고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대웅전의 오래된 불화 석가모니후불탱이 남아 있다. 원래 봉림사는 징월스님은 신라 문무왕 때에 창건한 보현산의 법화사를 옮겨 지어 이 절을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봉림사의 주불전인 대웅전은 징월스님이 창건할 당시의 건물로 추정되는데 앞면과 옆면이 모두 3칸짜리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봉림사 전경-
별빛마을 경북 영천시에 위치한 별빛마을에 가보면 모든 가로등에 갓을 씌어 놨다. 인근에 위치한 보현산 천문대의 관측률을 높이기 위해 설치했다지만 이 때문에 마을의 밤하늘은 더욱 영롱하게 빛나는 것 같다. 매년 5월에는 별빛축제도 열린다.
* 별빛 마을의 자랑 고로쇠 수액 고로쇠수액은 지리산에서 나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별빛마을의 고로쇠수액 맛을 보고, 이를 채취하는 웰빙숲에 가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별빛마을의 웰빙숲에는 하늘을 찌를 듯이 곧게 뻗은 아름다운 나무들로 가득하다. 고로쇠수액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유통과정을 믿을 수 없다는 분들이 있는데, 별빛마을에서는 고로쇠수액을 얻는 과정을 직접 보기 때문에 더욱 믿음이 간다. 또한 이 마을에 사시는 숲 해설가 선생님과 함께 나무에서 수액을 어떻게 얻는지 살펴보고, 청진기를 통해 나무의 숨결을 느끼는 귀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 별빛 축제 매년 5월에 열리는 별빛축제는 국내 첫 천문축제로도 그 의미가 크다. 계절별로 다른 별자리를 볼 수 있고, 낮에는 태양망원경으로 흑점이나 홍염, 불기둥 등을 관찰할 수 있다. 소달구지 타기, 도자기 만들기, 구들장에 고기 구워먹기, 2000인분 이상의 단체 산채 비빔밥 무료시식, 아마추어 무선 통신체험, 패러글라이딩, 산악자전거 대회 등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즐거워하는 프로그램들이 마련되어 있다.
* 향긋한 미나리의 맛 별빛마을에서는 무공해 채소인 미나리를 공동으로 재배하고 있다. 특히 청정 미나리의 대명사인 한재미나리를 길러 고소득은 물론 소비자들의 만족도가 높다. 무엇보다도 미나리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를 식당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재미있다. 보통 한단에 6천 원이며, 미나리전과 직접 만든 손두부도 판매한다. 비닐하우스에서 갓 뜯은 미나리에 지글지글 구운 삽결살을 얹어 먹는 맛이 별미이다.
-별빛마을 가로등에 갓이 씌어있다-
영지사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용호리 14번지 구룡산(九龍山) 아래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다. 어진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 했던가. 맑은 향내 묻어나는 가을바람에 마음을 비우는 시간, 영천땅을 밟으면서 바쁜 세상사 속의 일상을 뒤로 하고 내 삶의 나침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영지사는 경북 영천시 대창면 九龍山과 五芝山의 12봉을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는 유서깊은 전통사찰이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다. 절로 올라가는 길 조금 못 미쳐서는 광해군 4년(1612) 지산 조호익(1545~1609)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지봉서원(芝峰書院)으로 세웠다가 숙종 4년(1678) 사액 받아 개명한 도잠서원(道岑書院)이 있다. 지산 조호익 선생은 조선 선조 때 성리학의 대통을 이은 학자로 임진왜란 때 귀양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충절을 다했으며, 광해군 때에는 선산 부사까지 역임한 인물로 도잠서원은 그를 제향하기 위해 1613년에 건립된 것으로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00호이다. 이 도잠서원에서 조금만 더 가면 영지사가 있다.
영지사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것은 바로 공룡발자국 화석이다. 이 화석은 쥐라기 말기와 백악기 초기 암석에서 발견되는 이구아노돈 계통의 공룡으로 현재 12개의 발자국이 나타나 있다고 하나 잘 보이지 않는데 발자국으로 보이는 흔적은 일부 엿볼 수 있다. 공룡발자국화석을 지나면 영지사의 약수가 있다.
약수터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길옆에 영조 50년에 중수한 〈임자갑유공비壬子甲有功碑〉가 있다. 그 맞은편으로 역대 스님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승탑이 있는데, 석종형 승탑 4기가 나란히 자리해 있다. 이 승탑의 밑면에 새겨진 독특한 무늬와 용도를 알 수 없는 받침의 연꽃무늬가 방문객의 발길을 끈다. 승탑군들을 지나면 영지사의 범종각이 사역으로 가는 문을 대신하게 되는데, 2층의 누각식 형태로 운판과 법고, 범종 등 불전사물이 걸려 있고, 현판에는‘구룡산 영지사’라고 쓰여 있다.
영지암에 제 하다(「題 靈芝庵」) 7자 8구 푸른 골짝 찬 못에 그림자 흔들리니, 지팡이 짚고 가끔 시내 다리 건너누나. 봄날에 비 내리자 지천으로 꽃은 피고 눈이 녹는 높은 산에 옥이 싹을 내미누나 한 잔 술로 인간 세정 알 수가 없을거니 몇몇이나 이곳 와서 서성이며 걸었던가 늙어서도 오히려 삼수 뽑을 수 있기에 흰머리로 청산드니 흥취가 또한 많네. - 지산 조호익 - 영지사 범종각 안에 걸려있는 현판 중 조호익이 지은 시를 적은 현판이 전하고 있다.
-영지사 전경-
옥간정 이 건물은 조선 숙종때 성리학자이신 훈수 정만양선생과 지수 정규양 선생 형제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세운 정자이다(숙종 42년, 1716년) 훈수와 지수 형제는 임진왜란 때 선비의 몸으로 의병을 일으키신 호수 정세아 장군의 5세손이다. 양수선생(훈수, 지수를 일컬음)은 형제가 한 곳에서 학문연구에 힘쓰면서 육유재와 태고와(후에 모고와로 고침)를 지을때 정각선에 살던 승려한테 어린 향나무 두 그루를 얻어 그중 한그루를 태고와에 심었는데 오늘날까지 자리고 있다. 이곳에 있는 나무 한 그루 돌 하나에도 양수선생의 의지를 담아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횡계구곡"이 바로 그것이다. 시전에 나오는 "맏형은 흙으로 만든 나팔을 불고 동생은 대나무로 만든 피리를 분다" 에서 나온 "훈수"로 형제간의 우의를 표상하여 두 분 선생의 저술을 "훈지록"이라 한다. 양수선생의 우애와 굳은 의지는 자손의 이름도 "훈지" 두 글자의 변과 머리를 따서 짓도록 유언하여 지금까지 시행되고 있는 것에서 엿볼 수 있다.
양수 선생은 나라의 기둥을 길러내기 위해, 1716년 봄에 옥간정을 짓고, 가을에 진수재를 횡계리에 지어 1720년 2월부터 매달 강의를 실시하니, 향내의 제자가 100여명에 이른다. 그 제자 중에서 매산 정중기, 풍원부원군 조현명, 명고 정간, 이유, 신준 등 수많은 명현달사를 배출하였으며 나라에서 몇 차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끝까지 사양하고, 이 곳에서 은거하여 살았다. 훌륭한 스승에 현명한 제자, 아름다운 산수가 한데 어울려 자그마한 산골 횡계마을은 교육의 전당으로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4칸 반의 "ㄱ"자형 누각 건물로 창호 구성방법 등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는 건물이다
- 옥간정 전경- 내고향 화북면 횡계리 소재
신녕포교당 신녕면 소재의 신녕포교당이 위치한 곳은 인근에 은해사를 비롯하여 오백나한도량으로 유명한 거조암이 있고, 신녕향교명륜당이 자리해 있다. 주택이 밀집한 도심 속의 평지에 세워진 경내에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 아담하게 자리한 평온한 모습이다. 그래서인지 입구에는‘新寧布敎堂’과‘法輪寺’라는 푯말이 나란히 적혀 있다. 포교당이 들어서기 이전에는 법륜사라는 이름으로서 지역민들과 함께 호흡해 온 사찰이다. 200여년이란 창건 역사화 함께 이곳은 신녕 면민들의 교육과 불법 홍포를 위한 도심 속의 사찰로서 기능을 다하고 있다. 특히 부근에 위치한 항공부대 포교로서 매달 2회의 군법회를 전담하며 불교 포교의 중심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신녕포교당 전경-
* 창건배경 및 역사 신녕포교당의 창건과 연혁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60년 불교정화운동 이전까지 있었던 법륜사가 그 전신이라고 한다. 절의 창건은 약 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1960년 불교정화운동 이후에야 은해사의 포교당이 되었다. 원래 이름은 ‘법륜사(法輪寺)’였다고 한다. 이곳에는 부도 1기가 있는데, 사각기둥 탑신에 옥개석을 갖춘 부도이다. 탑신에‘우바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재가자의 부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명문이 뚜렷하지 않아 주인의 법명이나 성씨까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성시기가 1880년(고종 17)임을 알 수 있는 명문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이곳의 당우로는 1961년에 산령각을 세웠고, 그 뒤 1975년에야 주불전인 극락전의 단청을 하였다. 그리고 경내의 중앙에 세워진 오층석탑은 1980년대에 건립되었다
영천 만취당(晩翠堂) 만취당은 건물은 조선 선조 때 성리학자인 지산(芝山)조호익(曺好益) 선생의 7세손이며 정조5년(1781년)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조학신(曺學臣, 1732~1800) 선생이 살던 집으로 만취당은 사랑채에 붙인 이름이다. 조선시대의 유교사상은 주택에도 영향을 미쳐 한 집안 내에서도 남녀의 처소를 안채와 사랑채로 분리하였으며 조상에 대한 제례를 중시하여 사당을 갖추도록 하였다. 이 집은 안채와 중사랑채 및 사랑채가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사당 뒤쪽에는 신주를 모셔다 제사드리는 별묘(別廟) 및 보본재(報本齋) 등이 배치되어 사대부 저택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집 뒤의 마을을 감싸고 있는 울창한 소나무 숲은 선생이 손수 심어 이루어낸 것으로 전한다.
* 조학신 치재 선적(善迪)의 아들로 태어남에 도량과 사람됨이 뛰어나다. 1759년에 영조의부름에 나아가 칼 쓰는 시합을 보였더니 임금님이 장하다고 크게 칭찬하여 사복(司僕) 내승(內乘)으로 임명하였다. 내직으로는 국가의 중요직책을 맡았고, 밖으로는 여러 골의 목사(牧使)로 지냈다. 선생이 백성을 다스림에 정성을 다하니 정조께서도 높이 칭찬하여 규장각지(奎章閣誌)와 대전통편(大典通偏)등을 각각 1부와 말 한필을 하사하였다. 세상을 하직함에 임금으로부터 부조와 제문이 내려졌다.
한광사 여름 한낮 한바탕 소나기가 퍼붓고 지나간 뒤 산빛이 더욱 푸르다. 도로를 만드느라 잘려나가 속살을 드러낸 듯 상처난 산기슭엔 노란 달맞이꽃이 지천으로 피어 상처를 보듬는다. 여름은 그렇게 눈부신 초록으로 세상의 아픔을 덮고 어루만져 좋았다. 늘 그렇게 말없이 고마운 것들이 있다.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주위의 모든 것들이 변하여도 말없이 함께 견뎌온 석불과 석탑을 만나러 가는 길은 그래서 더욱 마음이 따뜻하다. 화남리 작은 마을을 지나 산자락으로 들어가면 작은 계곡 물소리가 싱그럽고 한광사가 한적하게 자리잡고 있다.
한광사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현재 한광사 앞마당에 놓여진 석불 좌상과 그 옆의 삼층석탑이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이므로 이 일대가 신라시대의 절터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뒤의 연혁은 남아 있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서 폐사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다가 1958년에 옛 절터에 새로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원래는 이 절의 전면 동서로 각각 탑이 있었는데 현재는 한 기만 남아 있고 한 기는 산산이 분해된 채 건물의 주춧돌로 사용되었거나 뜰에 흩어져 있다. 그리고 현재 보존되어 있는 탑도 제 위치가 아닌 것 같으며 동서 두 탑 가운데 어느 것이지 구분할 수도 없다. 석불 좌상은 신라말 고려초의 전형적인 양식을 갖춘 비로자나 불상으로서 현재 보물 제676호로 지정되어 있다. 육계가 분명치 않은 나발의 머리카락, 작고 둥근 현실적 얼굴, 좁은 어깨, 빈약한 체구 등에서 단정하게 참선하고 있는 선사(禪師)의 모습과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과 함께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아래위로 포개어놓은 지권인(智拳印)의 비로자나 수인, 얇게 빗은 듯 규칙적인 평행밀집 옷주름 등은 바로 9세기나 10세기의 전형적인 비로자나 석불 양식이다.
* 창건배경 및 역사 한광사는 신라 문무왕(재위 661∼680) 때 의상 스님이 창건하였다. 현재 한광사 앞마당에 놓여진 석불 좌상과 그 옆의 삼층석탑이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이므로 이 일대가 신라시대의 절터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뒤의 연혁은 남아 있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서 폐사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다가 1958년에 최명도(崔命道) 스님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 청제비 (보물 제517호) 영천 청제라는 저수지의 건립 경위와 그 과정을 기록한 신라 시대의 비석이다. 이 비(碑)는 자연판석(自然板石)으로 윗쪽이 넓어, 흡사 부채꼴 모양이다. 비수(碑首)는 본래 없고, 비의 받침의 유무도 알 수 없다. 비 전면에는 청못을 축 조할 때의 사연이 적혀 있다. 이 비의 서남쪽 5m에 청제 중(重)립비가 서있는데, 청제비가 여기에 세워진 사연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영천의 남쪽에 청제(보통 "청못"이라 함)가 있는데 이 못의 북쪽에 비가 있다. 그글에 "당나라 정원14년(798)에 임금이 양내사(兩內史) 를 보내서 인부 14,800여명을 시켜 못을 막고 비를 세워 전말(顚末) 을 기록했다"고 말하고 있다. 대개 이 못의 관개(灌漑)는 300여석이라 지금도 이익을 보고있는데 지난 순치(順治) 계사년(1653년)에 어떤 사람이 절단한 바가 되어 흙속에 묻혀, 그 고적(古跡)이 부전(不傳)함을 애석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여기에 고쳐세워 이 같이 기록한다.
"아! 후인이 이 비로 말미암아, 이 못을 폐(廢)해서 안되는 까닭을 생각하게 된다면 이 비가 이못에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강희(康熙) 27년(1688) 9월" 삼국 및 통일신라 양시대에 걸쳐 양면비(兩面碑)는 이것이 처음이고 농업수리비(農業水利碑)로서 제자리에 1200여년이 넘도록 서있는 것도 이 비가 처음이다. 이 청제비가 노천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80 년에 비각을 세움으로써 보존할 수가 있었다.
부귀사 부귀사(富貴寺)는 영천시 신녕면 왕산리 1050번지 팔공산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의 말사이다. 신령면을 지나 부귀사 가는 길, 아스팔트 포장이 잘 되어 있는 지금도 굽이굽이 산길을 돌고 돌아가는 이 길은 그 옛날엔 어떠했을까? 부처님 찾아뵙는다는 일심 하나만으로 걷고 또 걸으며 끝없이 걸었을 이 길이 참으로 마음 아련하다. 팔공산 동쪽 자락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많은 절과 굿당들이 얼굴을 빠꼼히 들이밀어도 부귀사는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더니 계곡 끝, 결국 길이 끝나는 지점에 다다라서야 그 모습을 드러낸다.
신녕면에서 부귀사까지 도보로 약 1시간 20분 정도 소요되는 이 산길은 식수원으로 사용되는 왕산지 맑은 물과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에 넋을 잃고 가는 길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스팔트 포장이 잘 되어 있어 편안히 감상하다 보면 길 막바지에 있는 부귀사에 이른다. 부귀사는 591년(신라 진평왕 13)에 혜림대사가 창건한 1400년 고찰로서 고려 때는 보조국사 지눌이 주석하기도 했다. 부귀사라는 이름은 산부수귀(山富水貴), 산이 좋고 귀한 물이 있다는 뜻으로 부귀사의 약수는 아토피성 피부병에 효험이 탁월하고 각종 차의 맛을 내는 찻물로 유명하며 오랜 시간 저장해도 이끼가 끼지 않는 등 수질이 뛰어나다고 한다. 팔공산이 어떤 산인가? 골골이 절터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대단한 산이 아닌가. 부귀사에서 산길을 따라 30분이면 거조암에 다다를 수 있다.
혜림법사가 거조암을 창건하면서 산길을 따라 자재를 운반하여 부귀사를 함께 창건했다는 설이 신빙성을 갖는 대목이다. 신령면에서 4km 거리의 험한 산길로 자재를 운반하는 것보다 거조암에서 가져오는 것이 더 수월했을 것이다. 부귀사에서 머물다보면 이곳이 참 맑은 도량이라는 알 수 있다. 조용하고 한적하지만 느낌이 어둡거나 가라앉지 않고 편안하다. 한번 와보면 또다시 찾아와 며칠이라도 머물면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맑은 도량이니 만큼 이곳에서 청소년을 위한 수련회와 템플스테이가 열리면 제격일 것이다. 신령면에서 부귀사를 시작하는 4km의 거리도 행군해 보고, 그 흔한 식당 하나 보이지 않는 청정 지역에서 머무른 시간은 평생 마음의 자산이 될 것이다. 그리고 부귀사에 명물이 있느니, 바로 ‘깜둥이’라는 이름을 가진 개 한 마리이다. 공항에서 마약을 단속하는 종류의 개라고 하는데 처음엔 온통 시커먼 녀석이 슬금슬금 다가와 놀라지만 우리에게 자기의 몸뚱이를 들이밀며 꼬리 치는 모습에 경계를 풀게 된다. 경내에서 제법 떨어져 있는 산신각이나 부도밭에 갈 때면 마치 에스코트라도 하는 양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호위를 하고, 전각에라도 들어가면 다시 나올 때까지 문 앞에서 점잖게 기다렸다가 다시 뒤따라 나서고 하는 모습이 너무 예쁘고 대견하다.‘부귀사’하면 무엇보다도 이 녀석이 떠오르고 그리울 것 같다.
-부귀사 전경-
영천보성리 암각화 암각화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바위나 동굴벽에 기호나 물건, 동물 등의 그림을 새겨놓은 것을 말하는데, 주로 농사의 풍요와 생산을 기원하던 주술행위의 결과물로 보인다. 이 암각화는 거북이 모양으로 생긴 바위 한 쪽 옆면에 7개의 그림을 새겨 놓았다. 그림을 새긴 면의 넓이는 최대 길이 337㎝, 최대 폭 130㎝이다. 포항 칠전리와 고령 양전동, 영주 가흥리에 있는 암각화와 비슷한 것으로 보아 같은 문화유형으로 추정되나, 각 그림의 세부형식이 조금씩 달라, 서로 시대가 달랐거나 혹은 지역이 다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연대를 정확하게 규명하기는 어렵지만 청동기 후기나 철기시대 초기 단계의 것으로 보이며, 선사시대 경북지방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정신세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영천보성리 암각화-
숭렬당 조선 세종 때 대마도와 여진 정벌에 공을 세운 이순몽 장군의 집으로 세종 15년(1433)에 중국식으로 지은 건물이다. 1970년 문화재로 지정된 뒤 복원공사를 한 건물로 지금은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사당으로 쓰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인데 그 양쪽 끝 칸에 날개를 단 듯 지붕을 덧달았다. 따라서 전체로 보면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으로 볼 수 있다. 이 같은 모양은 맞배지붕이 팔작지붕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이고 있는 지붕 형식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짜은 구조는 새부리 모양으로 뻗쳐 나왔다. 평면은 가운데 3칸보다 양쪽 끝 칸이 한 자씩 좁으며 건물 안쪽의 천장은 가구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꾸미고 있다. 구조가 조선 전기의 수법을 보이고 있지만 일부 재료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들이 조선 후기의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 조사 결과 몇 차례 수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대체로 검소하고 건실하게 지은 집이다.
-숭렬당 전경-
영천향교대성전 영천향교는 옛 성현께 제사를 드리고 학문을 갈고 닦는 지방의 국립교육기관이다. 제사를 지내는 공간의 중심 건물인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 세종 17년(1435)에 처음 세웠고 중종 8년(1513)에 군수 김흠조가 고쳤는데, 지금 있는 건물은 그 뒤에도 여러 차례 다시 짓고 수리한 것이다.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가운데 칸과 양쪽 두 칸에 여닫이문을 달아 문 윗부분을 우물 정(井)자 모양의 창살로 꾸몄다. 옆면 1칸을 터서 복도형식으로 만든 일반적인 대성전 건축 형식과는 달리, 옆면 3칸을 모두 내부로 만들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건물 안쪽은 가운데 칸 뒷쪽에 1개, 양쪽에 2개씩 제단을 만들었고 천장은 서까래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 영천향교대성전 전경-
영천 신월동삼층석탑 신월동삼층석탑은 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높이가 4.75m이다. 이중기단(二重基壇)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아올린 것으로 전형적인 신라석탑의 양식을 잘 지니고 있다. 윗기단부의 면석(面石)에는 8부중상(八部重像)이 양각되어 있고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다. 옥개석(屋蓋石) 받침은 4층이고 추녀 밑은 수평을 이루었다. 상륜부는 파손되고 남은 것이 없지만, 오히려 파괴된 상륜부가 전체적인 균형미를 조화롭게 만들고 있으며 화려함이 강조된 무늬는 마모되어 초기의 모습을 잃지 않은 것이 오히려 세월의 풍상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내고향 가톨릭의 요람(자천공소)
-자천 공소 전경-
-자천 공소의 은혜의 모후상-
내 고향 특산물
돔베기 옛부터 ‘토막고기’라는 어원으로 경북 중남부 지역의 제수로 빠지지 않는 품목으로 가시 및 비린내가 없어 남녀노소 즐겨먹는 음식으로서 영천장 하면 돔베기가 전국적으로 유명하여 많은 소비자가 찾고 있다
-영천 돔베기-
삼색감자 삼색감자는 흰색과 붉은색, 자주색의 밝은 빛을 띠며 소화촉진, 노화방지 등 건강보조 식품으로 알려져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각광받고 있다.
-삼색감자-
찰벼 찐쌀 찰벼의 쌀은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하고 저급 불포화 지방산이 많다. 영천 찰벼찐쌀은 직접 가마솥에 화목으로 쪄 고향의 그 맛을 최대한 전해주고 있다
-찰벼찐쌀-
영천사과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던 대구 사과의 원류로 당도가 높고 과즙이 많으며 아삭아삭한 과육의 참 맛을 느낄 수 있다. 전국 최고의 사과로 손꼽히며 비타민C가 풍부하여 건강에 좋다.
- 영천사과-
◈찾아가는 길◈ 서울→경부고속도로→영천I.C→영천시내 방향 서울→경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여주분기점)→중부내륙고속도로→(구미분기점)경부고속도로→영천I.C→영천시내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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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blog.daum.net/cm1292 원문보기 글쓴이: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