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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마을은 초량 왜관, 조선인 마을은 초량촌] 조선과의 외교 및 무역 업무를 막부로부터 위임을 받은 대마도는 두모포 왜관에서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왜관 이전을 요청하였다. 이전 요청이 시작된 것은 두모포 왜관이 문을 연 지 30년이 막 지나던 시점이었다. 조선으로서는 조성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두모포 왜관을 옮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왜관 한 곳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들게 마련이었다. 또한 비용뿐만 아니라 큰 공사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노동력이 많이 필요한데 자칫하면 조선 백성, 특히 부산이나 경상도 일대의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이런 까닭에 왜관 이전은 쉽게 성사되지 못하였다. 두모포 왜관이 좁고 불편하다는 일본 측의 요구가 잇따르자 왜관 내에 임시 가옥들을 지어 거주 공간을 늘여 주거나 선창을 수리해 주는 등 나름 개선책을 내놓았지만 왜관 이전 요청은 줄어들지 않았다. 결국 1673년(현종 14) 9월 새 왜관 부지로 초량이 결정되었다. 3년간의 공사를 마치고 1678년 4월에 초량 왜관이 완공되었다. 왜관이 초량 일대에 들어섰으므로 그 이름을 초량 왜관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당시 초량은 지금의 동구 초량동하고는 약간 차이가 있다. 초량 왜관은 두모포 왜관보다 부지는 10배가량 증가하였고 두모포 왜관에서 부족하던 무역과 관련된 기반 시설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500명 이상의 대마도 출신의 남자 성인만 거주하고 있었다. 초량 왜관과 멀지 않는 곳에 조선인 마을인 초량촌(草梁村)이 있었다. 두 곳의 거리는 지금의 코모도 호텔을 가는 고개만 넘으면 되므로, 남자 걸음으로 식은 죽 먹기의 거리였다. 초량촌이 처음 조성된 것은 초량 객사가 들어선 이후였다. 일본 사절이 와서 조선 국왕에게 숙배례(肅拜禮)를 거행하는 곳이 초량 객사였다. 왜관 북쪽에 위치하였는데, 객사 주변의 경관을 조성하기 위해 객사 업무에 관련된 건물, 일본어를 통역하는 통역관 관청을 짓고 더불어 일반 백성의 집을 지어 백성들이 관청 주변에 살도록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큰 관청이 들어서면 그 주변에 마을을 조성하는 일은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초량 객사를 중심으로 조선인 마을인 초량촌이 조성된 것이다. 1709년(숙종 35) 당시 초량촌에는 90가구가 넘는 민가가 조성되어 있었다. 왜관 업무를 담당한 조선인 역관의 집무소가 초량촌에 있었기 때문에 용무를 보러 오는 일본인이 많았다. 처음에는 공무로 초량촌에 역관을 만나러 오던 일본인은 점차 조선 백성들의 집에도 자주 들렀다. “왜인이 종일 끊임없이 왕래하면서 모두 민가에 가서 있다. 초량촌 92호 가운데 왜인이 없는 집이 없다”라고 할 정도로 초량 사람들은 일본인을 이웃사촌처럼 여길 정도였다. 그러므로 초량촌은 밀무역이나 정보 누설, 일본인 불법 난출(闌出)의 온상으로 간주되었다. 너무 친밀하게 지내다 보니 조선인 여자와 일본인 남자 사이에 매매춘(賣買春) 행위도 발생하면서 곧 사회 문제로 부각되었다. 1709년경 초량촌은 불온한 지역으로 간주되면서 “밤낮없이 우리 백성과 함께 지내고, 그 가장[남편]이 집에 없을 때에도 왜인이 홀로 그 부녀[아내]와 상대한다. 대개 그 남자는 왜관의 물품을 받아서 다른 지역의 장시에 팔러 나가서 이익을 취하고 본전을 돌려주니 왜인의 사환(使喚)이 되어 은전을 받는다. 부녀자는 홀로 왜인과 집에서 상대하면서 하지 않는 일이 없어 그 정의(情意)가 지극히 은밀하다. 남편이 있건 없건 더불어 지내는 것은 사는 이치가 있기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서로 어울립니다”라며 비판을 많이 받았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사이가 친밀한 것을 필요 이상으로 가깝다고 간주하여 조선인 마을을 강제 이주시켜 버린 일도 발생하였다. 동래 부사 권이진(權以鎭)은 초량촌의 역관 관청 담장과 바닷가까지를 연결하여 담을 쌓았다. 그 담장에는 설문(設門)을 만들어 두 나라 사람들의 자유로운 출입을 억제시켰다. 초량 왜관 설문은 왜관 정문인 수문(守門)과 함께 조·일 민간인 교류를 통제하는 상징적인 장소였다. 이와 아울러 설문 안, 즉 초량촌 안에 있던 조선인 백성들의 집은 설문 밖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왜관과는 반대 반향인 왜관 북쪽으로 이주된 셈이다. 이 마을은 새롭게 만들어진 초량촌이라 하여 신초량촌이라고 불렀다. 신초량촌은 오늘날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부산역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동구 초량동의 지명 연원이 되는 셈이다.
왜관 일본인과 거래하는 조선인에 대해서도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게다가 임진왜란까지 겪은 후에는 조선의 위정자들의 시선은 격분에 가까웠다. 왜관에 와 있던 대마도 사람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앞잡이’, ‘변란을 일으킨 왜놈들은 진실로 우리나라가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원수’였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 왜관을 둘러싸고 약조 체결은 물론, 서로 하지 말아야 하는 내용을 금조(禁條)로써 따로 규정하여 두 나라 사람들이 익히도록 하였다. 약조나 금조 조항을 어길 때는 어김없이 범죄자가 되었다. 그것도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중죄인이 되었다. 초량으로 왜관을 옮기고 난 후에는 양국 사람들의 교류가 빈번하다기보다 문란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1683년(숙종 9)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하고 그 내용을 약조 제찰비(約條制札碑)에 새겨 양국 사람들에게 왜관 통제의 엄격함을 널리 공포하였다. 약조 제찰비 제1조가 바로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왜관 경계 밖을 나온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월경죄(越境罪)였다. 왜관이 오랜 시간 부산에 있으면서 조선인과 왜관 일본인이 쉽게 짓는 죄는 월경죄였다. 각각의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공간을 제한하고, 이 제한된 공간을 넘어 출입할 경우에는 목숨을 담보해야 할 정도였다. 월경죄를 중죄로 다스린 이유는 마음대로 왜관을 출입하면서 금지된 물품을 거래하는 밀수, 이와 동반되는 국가 기밀 누설 등 이차, 삼차의 문제가 발생한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두모포 왜관 시절에도 ‘왜관의 문밖에다 동래부와 부산진의 군관을 각각 1명씩 정하여 날마다 돌아가면서 숙직하게 한다. 훈도, 별차, 예단 역관, 동래와 부산에서 일을 맡겨 부리는 아전, 동래의 표문(標文)을 받은 자 외에 이유 없이 출입하는 자는 발각되는 대로 무거운 형률에 따라 죄를 부과한다’는 약조 조항이 있었다. 일본인에 대해서도 ‘왜인은 왜관 문밖을 나가더라도 앞개울은 건너갈 수 없다’ 등으로 허락받지 않은 왜관 경계 출입을 금지하였다. 그런데 왜관 출입에 대한 금지 조항은 이후에도 계속 만들어졌다. 금조를 계속 만들고, 더 자세히 만들어 나가는 것을 보면 그만큼 그간의 교류가 쉽게 끊을 수 없는 두터운 것임을 방증한다. 월경죄 다음으로 사형으로 다스려지는 죄는 밀수였다. 양국 사람들이 월경죄라는 중벌에도 불구하고 왜관을 드나든 이유는 짭짭한 수입이 보장되는 ‘밀수의 유혹’ 때문이었다. 밀수품으로 많이 발각된 품목은 쌀과 산삼(山蔘)이었고, 이외에도 다양한 품목이 오고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밀거래 현장에서는 일본인들이 물건 값을 미리 조선인들에게 주고 물건을 구해 오도록 하였는데, 이때 조선인들은 일본인에게 채무가 발생하였다. 이 같은 불법 왜채(倭債)를 통한 밀거래가 발각되면 조선인과 일본인 모두 타격이 컸다. 1692년(숙종 18) 발생한 쌀 밀거래 사건을 살펴보면 왜관 밀수의 정황이 쉽게 파악된다. 왜관과 가까운 초량촌에 사는 손기, 김종일, 추선봉 등이 일본인에게 왜은(倭銀)을 받아 쌀 50석을 사서 몰래 왜관 안으로 들어가려다 발각된 사건이었다. 그런데 사건 조사 과정에서 은을 받아서 손기에게 전달한 사람은 일본어를 통역하는 소통사(小通事) 3명이었고, 담당 아전 배득길, 군관 2명과 또 다른 소통사 3명이 왜관 출입을 도왔다. 왜관을 자주 출입하는 소통사는 은을 왜관 밖으로 유출하기가 손쉬웠고, 일본어를 할 줄 알아서 왜관 안팎을 연결하는 밀거래의 중간 브로커 일을 한 것이다. 이 일로 밀거래 당사자인 손기·김종일·추선봉은 사형을 받고, 밀수를 도운 소통사와 아전 및 군관 등은 서북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일본인의 경우는 죄가 발각되면 대부분 대마도로 송환되어 처벌을 기다리다가 흐지부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법 왜채의 경우는 밀거래 자금이라는 것도 문제가 되었지만, 대마도의 재정 압박으로 이어져 큰 문제가 되었다. 불법 왜채를 가져간 조선인들이 제대로 물건을 주지 않거나 밀거래가 발각되어 자금도 물품도 회수되지 않으면 고스란히 자금을 댄 상인이나 대마도의 무역 관련 기관이 손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왜채를 돌려받기 위한 사절이 대마도에서 파견되기도 하였고, 왜채를 쓴 사람들에 대해서는 엄한 벌로 죄를 물었다. 밀거래 역시 오랜 기간 교류해 온 사람들 간의 신뢰 속에서 이루어졌지만, 이곳에서는 사형에 처할 정도의 중죄였다. 밀무역과 함께 큰 사회적 문제로 등장한 것이 왜관 일본인과 조선인 여성 사이의 매매춘이었다. 조선 후기 왜관에 상주한 사람은 ‘대마도의 성인 남자’였기 때문에 이런 사건이 종종 발생하였다. 『숙종실록(肅宗實錄)』에는 일본인의 자식을 의미하는 “왜산(倭産)이 많다”라는 기록이 나올 정도였다. 물론 일본인 남성과 조선인 여성 사이에 매매춘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실제 사랑하는 사이도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발각되는 사건은 모두 돈을 주고받은 상황이었다. 그것도 왜관 주변에서 관련 일을 맡고 있는 남성[특히 남편이나 아버지]이 알선하여 부인이나 딸을 일본인에게 소개시키고 돈을 받은 일도 있었다. 어떤 조선인 남편은 아내가 일본인과 간통하자 그 일본인을 죽여서 바다로 던져 버린 일도 있었다. 왜관에 왔던 조선어 역관인 오다 이쿠고로[小田幾五郞]가 18세기 말에 쓴 『초량 화집(草梁話集)』에는 조선인이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즉 ‘조선인 금제(朝鮮人禁制)’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왜관 문 근처에 여인이 왕래하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다’는 조항이다. 그리고 간통, 매매춘, 강간 등의 일이 발생하자 이를 막기 위한 교간 약조(交奸約條)까지 체결되기도 하였다. 교간 약조에 명시된 처벌 역시 무거웠는데, 최고 사형부터 유배형까지 부과되었다. 왜관도 사람 사는 동네이고, 왜관 밖도 사람 사는 동네였다. 긴 시간 매일 아침 얼굴을 보면서 지내는 까닭에 여러 일이 발생하고 친분도 생기고 갈등도 야기되었다. 다만 왜관이 일본인이 사는 마을이고 또 변방에 위치하여 국가의 안위와 직결되는 곳인 탓에 양국 사람들의 사적인 만남이나 은밀한 거래는 결코 용납되지 않고 범죄시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범죄는 ‘교류 공간’이라는 일상의 틈 속에서 생겨나는 또 다른 만남의 연장이었다.
왜관 안팎에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공식적인 만남의 장소가 정해져 있었다. 왜관 안의 개시 대청에서는 매달 여섯 차례 양국 상인과 무역 관련 관리들이 마주보고 흥정을 일삼았다. 마치고 나면 일본인들은 스키야키를 끓여 두고 조선인과 함께 술 한 잔을 할 수도 있었다. 왜관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일본 음식을 자주 얻어먹은 조선의 역관은 아침 시장에서 음식 재료를 구입해 일본인에게 조선 음식을 대접하는 일도 있었다. 업무를 마치고 왜관 밖을 나가는 조선인에게 일본인들은 수고하였다며 담배, 귀한 과자와 사탕을 선물로 주기도 하였다. 왜관 수문 밖 매일 열리는 아침 시장에서는 판매자와 소비자로 조선인과 일본인이 만날 수 있었다. 아침 시장에서는 단골 관계도 형성되어, 꼭 물품을 거래하지 않더라도 타향살이하는 일본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친분도 생겼다. 왜관 밖에 있는 연향대청은 대마도에서 사절이 오면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던 곳이다. 오늘날 부산광역시장에 해당하는 동래 부사, 부산 첨사가 배석하는 큰 잔치에서부터 크고 작은 규모의 잔치가 이곳에서 열렸다. 큰 잔치가 열리는 날에는 평소 왜관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는 여성도 눈에 띄었다. 이날만큼은 조선의 기생도 부르고 악기도 동원하여 흥을 돋우었다. 연향대청 담장 너머로 풍악이 퍼지면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흥겨운 잔치를 보려고 몰래 담장 안으로 들어가려다 혼이 나기도 하였다. 업무를 보는 조선인만 왜관 안팎을 드나든 것은 아니었다. 왜관에 글 꽤나 하는 조선 문인과 학자들도 초빙하였다. 대마도에서 온 문인들이 조선 문인과 만나 서로의 작품을 나누어 보기도 하고 그간 궁금하였던 한문학, 조선 풍물에 대해 묻기도 하였다. 왜관 안 동향사(東向寺)란 절에는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승려가 있었는데, 이들 역시도 조선의 유명한 고승을 초청하여 필담을 나누곤 하였다. 18세기 대마도의 조선통(朝鮮通)으로 불린 학자이자 외교관인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는 초량 바닷가에서 오인의(吳仁儀)·김태경(金泰敬)·이명수(李明叟)란 사람과 일본 시인의 시에 대해 논평하는 자리를 가졌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아메노모리 호슈는 조선어를 공부하다가 모르는 것이 생기면 자주 수문에 있는 소통사와 군관에게 가서 물었다. 그런 이유로 부산 말을 많이 배웠다. 아메노모리 호슈는 대마도로 돌아가서 조선어 입문서인 『교린수지(交隣須知)』를 지었는데, 개항 이후 이 책은 개정판이 만들어졌다. 내용은 좋으나 경상도 말이 많이 들어가 있어 이를 수정하고자 한 것이다. 아메노모리 호슈의 예는 왜관과 부산이라는 지역이 부단히 교류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왜관은 조선인들에게는 이국(異國)을 볼 수 있는 관광 코스이기도 하였다. 1763년(영조 39) 통신사의 제술관으로 임명된 남옥(南玉)은 출발하기 전 부산에 머물면서 이곳저곳을 구경하였다. 그런데 통신사 일행 중에는 왜관을 구경하는 사람이 많았다. 서울 사람들은 대부분 왜관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라고 해도 먼저 왜관을 보고 싶은 호기심이 대단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남옥은 자존심을 세워 “이번 행차가 부산에 있다가 돌아간다면 왜관 구경을 갈 수 있다. 그런데 조금만 있으면 오사카의 번화함과 에도[江戶, 현 도쿄]의 부유함을 볼 것인데 왜관쯤이야 볼 만한 것이 있겠는가” 하면서 왜관 구경을 가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봄에 겹겹의 벚꽃이 왜관 안에 만발하면 왜관 관수(館守)는 조선인을 초대하여 또 술 한 잔을 기울였다.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왜관 벚꽃은 대단한 구경거리로 소문나 있었고, 본 사람은 꼭 다시 보고 싶은 추억이 되곤 하였다. 이렇게 왜관은 양국 사람과의 접촉, 만남, 교류가 수없이 반복되는 공간이었다.
최근 부산에서는 왜관을 적극적으로 불러내고 있다. 물론 관광과 무관하지 않은 사업이지만 부산의 문화 원형을 만드는 시도이기도 하다. 하지만 왜관에 관심을 보인 것은 일제 강점기의 일본인에 의해서였다.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부산부사 원고(釜山府史原稿)』는 『부산부사(釜山府史)』의 초안본이다. 『부산부사 원고』는 전체 6권 중 제2권을 왜관편(倭館編)으로 다룰 정도로 부산의 역사에서 왜관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은 자신들의 선조가 살았던 공간인 두모포 왜관, 즉 고관(古館)을 공원으로 조성하고, 그곳에 쓰에효고 기념비[津江兵庫記念碑]를 세웠다. 쓰에효고[일명 평성태(平成太)]는 두모포 왜관을 초량 왜관으로 옮기는 것을 교섭하기 위해 대마도에서 온 이관 차왜(移館差倭)였다. 지루하게 끌던 왜관 이전 교섭은 쓰에효고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전환기를 맞이하고 이관은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그러므로 일본인에게 쓰에효고는 넓은 초량 왜관을 마음껏 오랜 기간 사용하고, 이어 전관 거류지를 멋지게 건설할 수 있게 해 준 은인과 같은 존재가 아니겠는가? 그것도 모자라서 용두산 공원에도 기념비를 하나 더 세웠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목숨 걸고 초량 왜관을 쟁취한’ 이야기로 극적 반전을 이루어 냈고, 일본인에게 기념과 기억을 되풀이하게끔 하는 존재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 부산의 대표 자본가로 군림한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는 죽기 2년 전인 1928년 자신의 동상을 고관 공원에 세웠다. 그해 6월 17일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동상 제막식도 열었다. 그들에게는 역사적이고 기념의 땅인 고관에 아예 쐐기를 박듯이 동상을 세웠다. 이런 일 때문에 지금도 대지 공원으로 기억하는 어른들도 있다. 광복 이후 일본인이 벌인 이러한 시설들은 모두 사라졌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교류’를 찾는 일은 어려웠다.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양국 간의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강조하면서 아메노모리 호슈의 성신 외교(誠信外交)를 언급하였다. 노태우 대통령의 발언을 계기로 양국 평화와 교류의 아이콘으로 통신사가 떠올랐다. 현재의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역사 자원을 적극적으로 동원하는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서유럽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경기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방안으로 역사 자원을 활용하여 도시 경관을 만들어 나갔다. 일본도 이와 유사한 방법을 동원하였다. 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경유한 지역들의 사람들이 1995년 11월 대마도에 모여 조선통신사연지연락협의회(朝鮮通信使緣地連絡協議會)를 결성하였다. 조선통신사연지연락협의회의 기본 이념이 ‘아메노모리의 성신’이었다. 이렇게 일본에서 고조된 통신사에 대한 관심은 부산에도 도입되었다. 부산에서 통신사와 함께 관심을 보인 것은 왜관이었다. 1995년 지방 자치 단체장을 민선으로 진행하면서 지역 발전의 차별화 전략에서 지역의 역사가 재빠르게 홍보되었다. 1997년 12월 1일 착공된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제2전시관은 ‘부산사(釜山史) 전시관’으로 특화하여 세워졌는데, 조선 시대 왜관의 역사를 유물과 함께 알려 주고 있다. 1999년 4월 부산광역시는 역사 유적지에 표석을 건립한다고 밝히곤 2000년부터 영가대와 부산포 왜관, 두모포 왜관, 초량 왜관 터, 연향대청 터에 차례로 세웠다. 2000년 6월부터 매달 2회씩 일본에서는 후쿠오카에서 부산까지 ‘조선 통신사 역사 탐방 기행’을 상품화해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정작 이들 일본 관광객은 기대한 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고 한다. 통신사나 왜관을 보고 싶어 부산을 찾았지만 관련 유적들이 거의 없다는 것에 실망한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부산시와 시민, 상인들을 자극하였다. 2004년 5월 부산 중구청에서는 ‘전국 최초 시범 가로 사업’의 일환으로 왜관 알리기에 적극 나섰다. 광복로 일원을 정비하면서 왜관과 관련된 유적지에는 이를 알리는 시설물을 설치하고 시민과 관광객에서 유적의 의미를 더하였다. 2010년 2월에는 초량 왜관에 ‘미친’ 사람들이라고 소개된 바 있는 부산초량왜관연구회도 창립하였다. 왜관을 연구하고, 홍보하고, 복원까지 고민하는 단체로 2013년에는 법인으로 만들어 왜관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각종 학술 대회를 개최하고 시민들에게 왜관이 부산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알리고 있다. 왜관은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현재 우리의 역사가 되고 있다. 왜관을 끊임없이 출입하면서 일본인과 교류하고자 한 앞 시대 부산 사람들의 역동성을 찾아보면서 ‘열린 도시’ 부산의 역사적, 문화적, 국제적 도시의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