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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까지 서울과 부산은 잇는 축은 경부선 철도였다. 1962년 서울-부산 특급이 6시간 10분대로 운행을 시작하였고 1966년에는 특급 맹호가 5시간 45분대로 운행되었다. 1969년에는 서울-부산 간 초특급 관광호가 4시간 45분으로 운행되었다. 당시 경부 가도에 자동차와 화물차가 달리고 있었으나 소요 시간은 거의 하루 이상 소요되었기 때문에 철도에 대한 경쟁자는 없었다. 그러나 철도는 다른 운송 수단과 비교하여 다량의 여객과 화물 수송에는 유리하나 소단위 수송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단거리 화물 수송에는 화물 적환비의 비중이 높아 경쟁력이 떨어졌다. 1970년 경부 고속 도로 건설은 철도와 경쟁을 하면서 바다로 열려 있는 부산항을 바꾸어 놓았다. 고속 도로는 길의 역사에서 기술의 혁신(innovation)이었다. 독일의 히틀러(Hitler)가 “수레와 말에 의한 교통이 자신들을 위한 도로를 만들었듯이 기차는 자신을 위해 필요한 궤도 선로(軌道線路)를 만들었다. 따라서 자동차도 자신을 위한 전용 도로를 건설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건설된 독일의 아우토반(Autobahn)이 고속 도로의 효시이다. 이 용어는 차(auto)와 기차(bahn)를 합친 것으로 두 교통수단의 장점을 합친 새로운 개념의 도로였다. 1970년 7월 7일 경부 고속 도로가 완공되어 개통되면서 서울에서 출발한 화물은 불과 5시간 만에 부산항에 도착할 수 있었으며, 철도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언제든지 부산항 바다에 화물을 적재할 수 있었다. 경부 고속 도로가 개통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화물들이 부산항으로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항구에 도착한 화물들은 태평양, 대서양을 넘나드는 선박 위에 지체 없이 선적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전의 화물의 재래식 처리 방법으로는 넘치는 화물을 감당 할 수 없었으며, 부두의 모습도 바뀔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전반에 2차에 걸친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이루어진 조선 기술의 발달은 해운 기술에 큰 변화를 유발하였다. 이때 이루어진 해상 운송 기술의 변화는 조선 기술의 발달에 따른 선박의 대형화, 탱크와 전용선의 등장, 화물의 컨테이너화였다. 배의 대형화는 초기에는 주로 탱커선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석유의 해상 수송이 급증하면서 전용선이 등장하였다가 이후 석탄 운임이 상승하면서 곡물, 목재, 철광석, 자동차 등의 전용선이 등장하였다. 이와 함께 일반 화물을 컨테이너 용기에 담아 싣는 컨테이너선이 1960년대 이후 운항하기 시작하면서 해상 운송에 새로운 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966년 4월 북대서양 항로에 컨테이너선이 등장하였다. 일반 화물을 컨테이너 용기에 담아 싣는 이 해운 기술은 아주 단순한 아이디어였으나 이는 해상 운송에 새로운 혁신을 야기하였다. 해상 컨테이너가 처음 등장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 해군의 기동력 강화를 위한 군사 수송부터다. 그러나 민간에서 이용한 것은 1950년대 중반부터 자동차에서 철도로 이어지는 육상 일관 수송에서 시작되었다. 컨테이너선은 해운에서 필요한 고속화, 전용화, 대형화의 기술 혁신을 동시에 만족하는 기술 혁신이었다. 재래 정기선의 화물은 대부분 잡화로서 화물의 형태가 천태만상이다. 이 다양한 화물을 선박에 적재나 하적하는 데는 기계의 힘에 의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기계화는 화물 크기의 표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화물의 포장, 중량, 규격이 같아야만 기계화가 가능하며 능률도 오른다. 그러나 화주의 화물을 규격화시키는 것을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큰 상자를 화물주의 공장 창고에 보내서 내부에 화물을 채우고, 거기서 세관원에 신고하고, 수출 통관에 맞춰 봉안하면, 거기서부터 도착지의 문전까지 상자째 운송되어 대량의 화물을 한 단위로 운반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컨테이너 전용선이 운항되기 시작한 것은 1976년 1월로, 호주의 국영해운공사(ANL)가 한국-필리핀-홍콩을 잇는 노선을 운항한 것이 효시다. 그러나 이것으로 화물 적체가 해결되지 않자 부산에 컨테이너 전용 부두를 건설하게 되었다. 컨테이너 전용 부두는 다른 재래 부두와는 다른 시설이 필요하다. 통제소(control tower), 대형 컨테이너 전용선이 접안할 수 있는 안벽 시설, 화물을 능률적으로 수송하기 위해 항구와 연결된 내륙 요지의 주요 공업 도시 주변에 설치한 공 컨테이너의 인수 및 인도 장소인 내륙 데포(inland deport) 등이 필수적으로 이는 종래와 다른 차원에서 해안선의 변화를 유발하게 되었다. 1978년에 제5 부두가 완공되었으나 급증하는 컨테이너 양을 충당하지 못하자 2단계 사업으로 제6 부두가 건설되었다. 1983년 이후 컨테이너 물동량은 더욱 증가하여 대형 선박에 대한 하역 장비의 대형화가 불가피해지면서 북외항에 컨테이너 전용 부두인 신선대 부두를 건설하여 5만 톤급 선박 3척이 접안할 수 있게 되었다. 인근의 감천항이 부산항의 보조항으로 개발되었다. 1995년부터 가덕도에 부산 신항만 건설이 추진되면서 부산 일대 해안 매립은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1970년대 이후 부산 바다 일대의 해안 매립 내용은 ˂표2˃와 같다. 1945년 해방 이후 부산항은 시설 면에서 대규모 개발 사업은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기존 시설에 대한 부분적인 보수만 이루어졌으며, 1960년대까지만 해도 본격적인 항만 개발 사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60년대의 제1차 경제 개발 계획과 제2차 경제 개발 계획이 성공함에 따라 1970년대에는 해상 화물 수송 수요가 급증하면서 항만 시설 확충이 불가피하게 하였다. 특히 전국 수출입 화물의 40% 이상을 담당하는 국내 최대항인 부산항은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하게 되었다. 1974~1978년 5개년 계획으로 시작된 부산항 1단계 개발 사업으로 제5 부두, 제7부두, 제8 부두, 연안 여객 부두, 국제 여객 부두를 축조하였다. 그러나 1단계 사업의 준공에도 급증하는 물동량에 시설이 충당하지 못하자 2단계 사업이 시작되었다. 제6 부두 건설과 제3 부두, 제4 부두, 중앙 부두 및 제5 물양장 개축 등으로 구성된 이 사업은 1983년에 준공되었다. 2단계 사업의 주목적은 급증하는 컨테이너 물동량을 원활히 처리하기 위한 제6 부두의 건설에 중점이 주어졌다. 1983년 이후 컨테이너 물동량은 더욱 증가되어 대형 선박의 하역 장비 대형화가 불가피해지면서 3단계 사업이 이어졌으며, 북외항에 신선대 컨테이너 전용 부두가 완공되었다. 1990년대부터는 부산항의 물동량이 넘치면서 가덕도 일대에 부산 신항만이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1997년에 착공하여 2013년 현재 북컨테이너 부두는 운영 중이며 다른 부두는 건설 중이다. 이와 같은 정부 주도 개발 사업과 함께 민간 자본에 의해 해안 매립이 꾸준히 이루어졌다. 1974년 용당동에 동명목재 부지가 매립되었고, 1975년에는 남부민동 신민학원 학교 부지로, 같은 해 4월에 극동석유 부지가 감만동에서 매립되었다. 1979년에는 감만동에 연합철강 부지를 매립하였고, 1980년에는 청학동에 대한준설공사와 대한조선공사가, 1982년에는 수산대학이 대연동에 학교 부지로, 1984년 부산시가 대연동에 컨테이너 적치용으로 매립하였다. 한편 1987년에는 88 서울 올림픽을 위한 요트 경기장을, 용호동에는 동국제강 부지를 매립하였다. 어항인 남항에서도 수산 가공업을 위해 대규모 부지가 매립되었다. 외지인이 많이 찾는 자갈치 시장은 원래 개항 당시의 자갈 해안으로서 거의 이용되지 않았던 곳이었다. 개항 이후 인접한 동광동과 광복동이 일본인 거류지로 되면서 어민들이 소형 선박을 이용하여 생선을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소규모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일본이 1910년 이곳에 부산 어시장을 설립하여 시장 기능을 흡수하려 하였으나 활어 유통 기능은 소형 선박에 의하여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1925년 매립 공사와 함께 항만 축조 공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지금의 충무동[당시는 소화통(昭和通)]이 형성되었고, 현재와 같은 해안선이 이루어졌다. 서구 남부민동에 위치한 부산 공동 어시장은 원래 부산 종합 어시장으로 1963년부터 지금의 제1 부두 자리에 있었다. 그 후 무역량의 증가하면서 1966년 부산항 정비 계획에 의해 남항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매축지를 정비하고, 공유 수면을 매립하여 수산업 단지를 조성하였다. 이상과 같이 부산 해안선의 변화를 종합해 보면, 일제 강점기 해안선의 변화는 부산항 북항 일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1970년대 이후는 북항뿐만 아니라 전 지역에 걸쳐 매립이 이루어졌으며, 용도도 항만 건설 외에 철강 공업과 조선소 부지, 어항 부지를 마련하기 위한 매립 등 다양한 목적으로 진행되었음을 보여 준다. 특히 1970년대 남천동과 1980년대 후반의 민락동 앞바다 매립은 주택 지구 건설을 위한 것이었으며, 1987년 우동의 경우 88 올림픽 요트 경기장 건설을 위해 매립이었다. 남천동 매립지에 건설된 삼익 아파트는 해안에 건설한 아파트의 효시로, 이후 경관이 뛰어난 해안 지역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해안은 육지와 바다가 서로 상호 작용하는 구역으로 육지 말단부의 지형학적인 운동과 해양의 파랑 운동, 연안류, 조류 등 해안과 관련한 모든 프로세스가 집합하면서 균형을 이루는 매우 역동적이고 복잡한 동적인 환경(dynamic environment)이다. 우리가 해안에서 볼 수 있는 지형 경관들은 이러한 시스템의 요소들이 상호 작용한 결과로, 우리가 본 시점에서의 평형 상태이다. 도시의 산업화로 해안 공간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인간이 개입하여 자연 해안을 인공 해안으로 바꾸어 놓으면서, 위의 기사 내용과 같이 종래의 자연 속에서의 평형을 깨뜨려 놓았다. 해안 매립은 연안 육역[만조 수위 선부터 500m 내, 항만, 어항, 산업 단지의 경우 1㎞ 내]뿐만 아니라 연안 해역[만조 수위 선부터 영해까지]까지 지역의 환경 변화를 유발한다. 일반적으로 해안의 인공 구조물은 항만 시설, 호안, 해안 도로, 건물 건축 및 침식 방지를 위해 설치된다. 부산의 해안선은 약 300㎞로 항만, 어항, 상업 지역, 친수 공간 등 다양한 형태로 이용되고 있다. 부산 북항과 가덕도 신항을 중심으로 공업[항만] 지역, 해운대·자갈치를 중심으로는 상업 지역 중심으로, 기장군·강서구·이기대·태종대 등은 녹지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들 중 공업[항만] 지역은 대부분 매립에 의해 토지 수요를 충당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이후 부산 연안의 공유 수면에서 총 137건 12.9㎢의 매립이 있었으며, 이는 영도구 행정 구역 면적인 14.1㎢와 비슷한 크기이다. 이는 부산항의 기능 확대를 위한 항만 용지의 확보와 신시가지 조성 등을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백경훈, 2012] 부산에서 해안 매립의 가장 보편적인 목적은 항만 건설이다. 항만 시설을 위해서는 해안의 적절한 공간을 매립하여야 하고, 항구로서 기능하기 위해 부두, 방파제, 물양장, 호안 등 여러 부두 시설이 필요하다. 부두는 평행 안벽 부두와 돌제 부두로 구분된다. 부산 북항의 제1 부두, 제2 부두, 제3 부두, 제4 부두의 경우 돌제 부두에 해당되며, 중앙 부두는 평행 안벽 부두에 해당된다. 방파제로는 오륙도 방파제와 부산 북항 방파제가 있다. 방파제는 파랑으로부터 항만을 보호하거나 항만 내에 모래가 퇴적되어 수심이 얕아지는 것을 막기 위한 시설로 일반적으로 항만을 감싸고 1기 혹은 2기가 설치된다. 부두의 이와 같은 시설물들은 연안류가 방파제의 말단 근처에서 외해 쪽으로 확산되며 유속이 급격히 감소되기 때문에 항만 입구 방향으로 토사가 퇴적되어 사주가 형성되기도 한다. 방파제가 외해 쪽으로 연장되면 하류부의 해안선이 변하며, 항만의 입구 위치나 폭이 방파제 연장으로 변하여 항만 내 퇴적 향상이 변하기도 한다. 또한 항만 내 매립과 외항 방파제로 인해 조류의 흐름이 약해지면서 해수 교환이 억제되는데, 부산항의 경우 북항의 해수 교환 체류 시간이 1945년 1,647일에서 1990년대 후반에는 2,631일로 984일 증가하였다. 부산의 경우 도시화가 가속화하면서 해안 지역 개발도 가속화하였다. 해운대지역을 중심으로 고밀도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인공적 시설물의 해안 근접 현상이 가속화한 것이다. 이외에 거의 전 해안에 걸쳐 해안 도로가 건설되었고, 상업 및 주거 시설이 입지하며 인공 해안이 만들어졌다. 이를 위해 해안에는 인위적으로 호안(護岸)을 쌓고 구릉을 절개하면서 도로가 만들어졌다. 해안 도로는 해안의 접근 향상을 위해 꾸준히 건설되었으며, 해안 지역으로 점점 더 밀착하였다. 지반이 약하고 파랑에 대비하기 위해 직립 호안을 함께 설치하였으며, 주차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인공 해안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호안벽의 경우는 연안 육역을 해안 침식과 월파(越波) 피해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으나 파랑이 호안 벽에 가하는 압력이 증가하여 기저부를 세굴(細屈)할 수 있고 해안의 안정성을 약화시킨다. 또한 육지로부터 공급되는 모래 퇴적물의 이동을 제한하기 때문에 해안의 침식을 가속화시킨다. 단순화된 해안선은 육지로부터는 인간의 접근을, 바다로부터는 배의 접근을 용이하게 한다. 해안에 인접하여 주택 지구가 형성되면서 오염된 생활수가 정화되지 않고 바다로 유입하면서 연안 생태계의 건강성을 악화시켜 다양한 생물 서식지가 파괴되기도 한다. 항만 개발로 부산 연안에는 연간 13만 척의 선박이 출입하고 있다. 이들 선박에 의한 폐유와 오염 물질 방기는 해양 오염을 가속화시키기도 한다.
지금 부산항 야적장에는 컨테이너 박스가 발 디딜 틈도 없이 가득 찼다. 인간의 윤택한 삶을 위해 부산의 바다는 자연이 내린 아름다운 곡선을 포기하고 정서가 메마른 직선을 받아들였다. 자갈 소리가 나는 해안선 대신에 회색의 콘크리트 부두가 들어섰다. 대구와 청어가 잡히고 미역과 패류를 채취하던 곳이었으나 작은 섬만큼 큰 배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경제 규모가 커질수록, 입항하는 선박의 규모가 늘어날수록 해안선은 점점 직선으로 되어 갔다. 아파트 부지 마련을 위해 감추어져 있던 풍치 좋은 해안도 이제 직선이 되어 갔다. 사람들은 해안의 작은 바위틈으로 자꾸 숨어 들어가 낚시를 하면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꿈을 키우던 호기로움을 잊어 버렸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경제 성장 제일주의에 의해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고 있다. 거대해진 선박의 규모에 맞추기 위해 부산항의 규모도 키우면서 그만큼 자연의 선을 잃어 갔다. 직선의 해안선을 보는 우리의 사고도 단순화되어 갔다. 해안선의 변화는 단순히 선의 변화가 아니라 육지와 바다가 만나는 곳의 모든 것이 단순화되고 직선화된다. 해안은 직선 만능주의에 젖은 인간들에 저항하기도 하였다. 다음은 1990년에는 영도와 송도의 남항에 면적 6.12㎢[185만 평]의 인공섬 건설과 관련된 기사 내용이다. ‘인공 섬 계획에 찬성하는 관계자들은 앞으로 5년 동안 도시 개발에 필요한 재원 6조원을 마련하는 데 필수적인 사업이라 주장하나 반대론을 펴는 사람들은 △부산항의 항만 기능 상실 △계획 추진 과정의 비민주성 △환경 파괴 △적지 선정 여부 △투기성 우려 등을 제기하고 있다.’[『한겨레 신문』, 1990년 11월 6일] 이 인공섬 건설 계획은 결국 시민과 학계의 저항으로 무산되었다. 21세기 들어 항만 기능이 가덕도 신항만으로 옮겨 간 부산 북항은 문화 공간으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연안 및 국제 여객 부두와 제1~4 부두를 중심으로 친수 공간으로 재구성하여 종래의 산업 코드를 문화 코드로 바꾸려는 내용이다. 사람들은 잃어버린 곡선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자연에게 곡선을 돌려주어야 하는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삶을 위해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