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학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진다.
묵가는 '실용적인 것'에 눈이 먼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더 이상 '문화적인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다른 학파(송견, 반전론자)는 욕망의 감소에 눈이 먼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욕망의 만족을 잃게 된다.
또 다른 학파(신도, 법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가된 규범에 눈이 먼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개인적 가치를 잃게 된다. 또 다른 입장(신불해, 법가)은 권력의 지위에 눈이 먼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식견을 갖추는 것의 필요성을 잃게 된다. 또한 다른 학파(혜시, 궤변론자)는
말에 의해 그리고 역설에 대한 취향에 의해 눈이 먼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현실성을 잃게 된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학파(장자)는 자연적인 것에 눈이 먼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적인 것의 영역을 잃게 된다.
모든 학파들이 옳다. 하지만 그것은 특정한 관점에서 옳다.
그들 중 누구도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단순화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거짓을 참으로 삼지는 않았지만 일부를 전체로 삼았다.
(p189)
공존의 속사임이다.
왜냐하면 소리 자체는 항상 위계적인 모든 인과성으로부터 독립적으로 간주되자 마자
그리고 그 소리가 단번에 동일한 차원에서 간파되기 때문이다. 이때 소리들은 더 이상
경쟁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소리들 간에는 서로 비교가 있을 수도 없다.
다시 말해 스스로의 구멍에 따라서 발생하는 각각의 소리는 스스로의 의향에 따라 펼져진다.
그렇기 때문에 도가 사상가는 음악을 통해 그리고 한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인간적인 것에서 천상적인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배제의 반대로서의 공존에 대하여
성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논리적 차원에서 보면 현자의 관점은 그 자체로는 공존하게 만들어야 하는 능력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에서 도가 사상가의 도가 구축되는 것이다. 즉 사물을 바라보는 각각의 다른 방식 역시 발생한 소리처럼 그 자체로부터 획득된다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그 각각의 다른 방식이 개별적 존재자의 반향이 라는 것과 그 자체로는 항상 정당화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 또한 자연적인 구멍과 유사한 다양한 성향을 끊임없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느린 사람, 교활한 사람, 비밀스런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만족하고 화내고 탄식하고 기뻐하기도 하며, 근심하고 한숨짓고 변덕을 부리고 겁을 먹기도 하며, 유혹하고 해방되고 경망스럽고 도망치기도 한다. 각 사람의 개별적인 의견을 표명하면서 자신의 성향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빈 공간에서 발생하는 음악 또한 마치 물방울이 버섯을 터뜨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시적인 발현이며 우리 앞에서 끝없이 변모하는 것이다. 잘못은 이러한 음악을 진리로 만들기를 원하는 것에 있다.
바람이 그칠 때 모든 구멍은 텅 빈다. (p235-236)
현자는 그 차이가 외관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으며 그것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지만
현자는 그 차이의 근본적인 통일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러한 통일성으로부터 그것의 연속성이 유래한다. 현자는 그 차이에 의해서 한정되도록 내버려두기는 커녕 그것을 넘어서고자 한다.
즉 현자느 그것을 상대화시킬 줄 아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현자는 그 차이의 통일성을 간파하고 열린 마음을 갖는다.
그 무엇에 의해 도가 훼손된다는 것은 무엇에 의해 사랑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경우는 자신의 집착과 편파성을 통해서 개방성과 반대 방향으로 향하게 되는 하나의 선호를 가리키는 것이다.(p267-268)
그러한 사물들이 너에게 드러나 보이는 것은 그러한 사물들이 너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물들이 나에게 드러나 보이는 것은 그러한 사물들이 나에게 있는 것이다. 라고
플라톤이 프로타고라스를 인용해서 말한다. 우리가 이미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도가 사상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타자로부터 출발해서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 사람들이 인식하는 것은 자신으로부터 출발해서이다. 각자는 자신의 참, 거짓을 가지고 있다. 그는 그의 것을 가지고 있고 나는 나의 것을 가지고 있다.
프로타고라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만일 네가 무엇인가를 크다고 천명하다면 그것은 또한 작은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만일 네가 무엇인가를 무겁다고 천명한다면 그것은 또한 가벼운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모든 것은 사람들이 비교하는 그 무엇에 달려 있으며, 그 무엇도 그 자체 속에서 그리고 그 자체에 의해서는 결정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확하게 자질이 규정될 수 없는 것이다.
( p277-278)
논쟁은 상대를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타자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의존은 생산적이다.
여기에서의 대화는 그래서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다.
너와 나는 동등하다.(p353)
"너에게 고유한 사유하는 방식에까지 이르러라" 그러한 후에 너는 타인의 사유하는 방식을 차례로 맛보게 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에서)
첫댓글 다시 음미하고 싶은 구절을 여기에 옮겨 놓는다.
자연과 인간이 유사하다는 부분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다양성이 곧 자연스러운 것이 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