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나무 외 4편
유현서
나는 당신을 멍나무라 부른다
멍이 없으면 이 세상 아픈 말씀들 갈 곳이 없어진다
구멍구멍 희푸르게 앓는다
내가 뱉어낸 상처투성이의 말들이, 당신이 절벽처럼 응수한 匕首 품은 말들이
허공으로 솟구치다 안착하는 곳
그에게 수신되지 않고 당신에게 송신되어 곧바로 순해지는, 덕지덕지 상처 기운 조각보
비틀거리는 노숙자도 지겟작대기 부러져라 두들겨 맞던 망아지도 수놈들의 발정에 불붙이던 粉女의 질퍽한 욕지거리도 넥타이의 주먹감자도 앳된 며느리의 눈물방울도
오지게 품고 나서야 비로소 완벽해지는 당신,
갈 곳 없는, 九重深處에서나 떠돌 말들이 붕붕―,
시퍼런 이파리로 환생하는 나의 플라타너스!
깊은 멍을 가진 사람만이 머물게 만든다
그의 그늘이 만평이다
폐교에서 출석을 부르다
저요, 저요!
망초꽃이 먼저 손을 든다
축구공이 튀어 오르고
얼굴 없는 발들이 풀먼지를 일으킨다
누군가 손만 내밀어 종을 친다
종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하이디, 라고 쓴 손가락 뒤로
몽당분필이 한번 더 부러진다
산안개가 몰려온다
학교명패를 입에 문 교문이
서서히 잠긴다
뒷산 소쩍새가 내려다본다
알프스에 오르기 위하여
풍금의 페달을 세게 밟는다
폐부 깊숙이 바람이 샌다
누가 틀어놨는지
저요, 저요!
꼭지 떨어진 수돗물 소리만 대답한다
당신을 다루는 법
- 열쇠와 자물쇠
난 꿈꿔요 당신의 몸속에서 유영하는 꿈을,
아무 때나 받아주지 않기에 속이 타요 하루에 딱 두 번, 출근할 때와 늦게 귀가하는 밤
스스럼없이 줘요
당신에게 들어갈 땐 절대로 급하게 굴면 안돼요 당신 몸이 열릴 수 있도록 아주 부드럽고 매끄럽게 살살 노크해야 해요 서두르면 반드시 탈이나요 너무 긴장해 나를 받아주질 못할 때도 있어요 그럴 땐 아주 부드럽고 매끄러운 윤활제가 필요해요
또 또각거리는 소리가 들리네요 혼자가 아니에요. 저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길 원하나 봐요
왜 이리 뜨거워지죠 숨이 가빠오네요 철커덕, 당신이 열리네요
호박꽃
애호박을 등에 업은 호박꽃이 함초롬히 젖어 있다
새끼를 품고도 벌을 부르는 저 화냥기,
꼭꼭 여미었던 옷고름을 풀어 제치고도 남겠다
초록에 진노랑은 찰떡궁합이라 거침없이 내로라하는데
누가 호박꽃도 꽃이냐고 되물을까
젖망울에 살짝 띠운 꽃술이 닫힌 지 오래된 꽃방을 질끈 조인다
호박벌이 난다
윙윙거리는 소리가 물 흐르듯 잘잘거린다
수시로 글썽거리는 호박꽃이 참 예뻐 보이는 날, 흠뻑
이슬에 젖고 싶다 호박꽃이 되고 싶다
민들레
의례히 피는 꽃이라고 하기엔 너무 죄송하다
지상 최대의 목표가 겸손인 것처럼 몸을 바싹 낮추고 살얼음 박힌 산비탈을 읽고 있다
밟으면 밟히었다 송두리째 뽑을라치면 송두리째 뽑혀주었다
싹둑, 칼로 도려내면 퐁퐁 뿜어대는 붉은 피마저 거름으로 삭히었다
한 뙈기 두 뙈기 늘려간 땅이 해마다 번져갔다
어머니, 저 왔어요
열여섯에 시집 온 어머니가 일궈냈던 묵정밭에 수건을 머리에 둥글게 말아 얹은 민들레, 화살촉처럼 삐죽삐죽 올라와 있다
비탈길을 맨발로 달려 나오신다
당선소감
유현서
계곡에서 본 산벚나무가 잊혀지지 않는다. 화사한 이불로 산 전체를 덮어 놓은 듯 만개한 산벚나무 뿌리들이 얼마나 단단하던지 옹이진 돌처럼 보였다. 그 모습으로 저리 환하게 꽃피울 수 있다는 것이 내 안에 차돌처럼 박혔다. 분분히 날리는 산벚나무 꽃비가 마치 동생이 무려 다섯에 제 자식까지 키워야했던 실비집 그녀의 눈물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늘 입이 걸었고 이상한 소문을 달고 다녔으나 단 한 명도 남의 집에 보내지 않고 잘 키워냈던 그녀.
돌아오는 길에 봉사 차 영아원에 들렀다. 채 두 돌도 되지 않은 아이를 안고 보낸 5시간은 내게 차라리 고문이었다. 눈빛에 서려있던 슬픔과 그 작은 가슴에 굳어가던 의심의 덩어리. 임시 엄마라는 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그 경계의 눈빛, 그렇게 아이는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이리라.
그런 존재의식이 내 시의 길에서 수시로 돌멩이처럼 차이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삶이 내 시의 원천이라면 아주 작고 여린 것들은 모두 내 시의 소재가 됨과 동시에 앞으로 살아갈 내 삶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밟히고 뽑혀도 끝끝내 목숨 버리지 않고 살아남는 바랭이처럼 시의 끈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끊임없이 타자와 사물들이 말을 걸어온다. 울면서 소리치면서 아프다한다. 그럴 때면 나도 몸살을 앓는다. 신 내림을 피하려 들면 아프다는 무속인처럼 내 안에 가시가 되어 박히는 상처들. 그들의 곤고한 삶을 대신 노래하는 자가 시인이라면 왜 아픈 것들이 유독 내게 와 닿는지 이제야 알겠다. 천형처럼 절룩이며 시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면 보다 더 높게, 넓게, 깊게, 천착해야만 하리라 새삼 느낀다.
시인이란 멍에를 씌워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시의 끈을 놓치지 말라고 열심히 채찍질 해주시고 시의 날을 벼려주신 여러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마음과 마음의 얼개가 촘촘하게 엮여진 <함시>동인과 <발견>동인께도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묵묵히 격려해주는 남편과 두 아이의 박수소리가 계곡물소리처럼 들리는 날입니다.
애지신인문학상 시부문 심사평
----유현서 씨의 시에 대하여
시는 고통의 꽃이요, 그 열매이다. 고통만이 인간을 살아 움직이게 하고, 고통만이 모든 인간들을 더욱더 크게 끌어 안는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삶 자체가 고통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결핍, 재화의 결핍, 우정의 결핍, 존재의 유한성과 그 유한성에 따른 힘의 결핍 등은 우리 인간들을 언제, 어느 때나 생존의 벼랑끝으로 내몰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통에 익숙한 자, 그 고통을 찾아서 더욱더 용감해 지는 자는 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하여 시를 노래하게 된다. 요컨대 우리 인간들은 한 줄의 시구에 의하여 새로운 지상낙원을 개척하고 전지전능한 人神이 되고 있는 것이다.
[멍나무] 외 9편을 응모해온 유현서 씨는 신인의 풋내가 전혀 없는 원숙하고 무르익은 언어의 구사와 함께, 그 언어의 격조만큼 ‘고통의 나무’를 가꾸어 왔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깊은 멍을 가진 사람만이 머물게 만든다/ 그의 그늘이 만평이다”라는 [멍나무], 폐교를 폐교답지 않게 살아 움직이게 하며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불러들이고 있는 [폐교에서 출석을 부른다], 열쇠와 자물쇠의 관계를 남녀의 뜨거운 사랑으로 노래하고 있는 [당신을 다루는 법], “새끼를 품고도 벌을 부르는 저 화냥기”의 [호박꽃], 그토록 끊임없이 짓밟히고도 또다시 피어나는 [민들레] 등이 유현서 씨의 시적 재능과 그 앞날을 활짝 꽃 피어나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는 이 세상의 삶의 본능의 옹호이자,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찬가이다. 진심으로 축하를 드리며, 유현서 씨의 앞날에 詩神의 은총이 깃들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애지신인문학상 심사위원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