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비우스의 띠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를 읽고 -
백 란 주
얼마 전 한 연예인이 사진 속 안중근 의사를 알아보지 못해 논란이 일었다. 이에 대해 한 국회의원의 발언은 어른이 되는 사회에 대해서 생각하게 했다.
자신의 페이스북에 “저는 대학원에서 사학을 전공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사무국장 출신이기도 하며 민족정기를 지키는 의원으로 지난 4년을 보냈다. 정답을 알고 나서 보니 몇 분은 성함과 행적을 아는 분들이었지만 얼굴을 보고 맞추지는 못했다....... 왜 그런 것 인지는 우리사회가 같이 고민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만 비난 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연예인은 “역사에 대한 저의 인식 부족으로 인해 불쾌감을 느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역사에 대해서 진중한 태도를 보였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점에 대해서 많은 것을 깨닫고 반성하고 있다.”
요즘 ‘아이돌’이라는 이름의 연예인들을 보면 안타깝기도 안쓰럽기도 하다. 어릴 적부터 연습생으로 시작되는 시간 속에 아이들은 진짜 모습을 지우고 ‘연예인’이라는 화려함만 기억하고자 한다. 정말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는 아이들은 시간이 주는 한계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가 버린다. 춤과 노래로 하루 종일 연습하는 아이들이 갖는 꿈과 의대나 법대를 목표로 하루 종일 공부만하는 아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적 양은 그렇게 차이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삶의 질, 인식의 차이는 너무도 다르게 다가온다. 분명 모 국회의원 말처럼 우리 사회가 같이 고민해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연예인 프로필은 줄줄 외우고 있어도 역사 한 자락을 잇지 못하는 아이들이 이 연예인의 모습만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 모습이 우리의 현주소일지도 모른다. 아이의 엄마인 내게는 먼저 살아가는 선배로서의 책임마저 느끼게 했다. 어린 연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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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에게는 사실로서의 역사보다는 기록으로서의 역사로 잊혀 질 권리도 없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 사회인지. 불현 듯 사람은 격하게 외로워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공감하게 된다.
무언가를 결정할 때, 서양 아이들은 동전을 던지지만 아시아 이이들을 가위바위보를 한다. 앞이냐 뒤냐 그 단면만으로 결정하는 동전은 ‘실체’이며 ‘독백’이다. 하지만 상대의 손과 만났을 때 의미가 생기는 가위바위보는 ‘관계’이며 ‘대화’이다.
가위바위보는 강한 것보다 약한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쳐 준다.
거대한 중국과 강력한 일본이 힘자랑만 한다면 가위바위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주먹 아니면 보자기의 뻔한 싸움에는 양자택일의 대립밖에는 생기지 않는다. 부드러운 ‘보’가 딱딱한 ‘바위’를 이기는 가위바위보의 ‘덕’이 동아시아 평화의 엔진이었다. 하지만 가위바위보는 ‘바위’와 ‘보’만으로는 성립될 수 없다. 대륙인 중국과 섬나라인 일본 사이에 한반도라는 ‘가위’가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끊임없이 경쟁하면서도 절대승자 없는 아시아의 다이내믹한 둥근 원이 만들어진다.
이어령의 가위바위보 문명론 중에서 -
이분법은 나쁜 짓이다.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나는 이분법에 너무도 익숙하다. 딸 둘인 경우다. 첫째와 둘째의 구분은 흑백의 논리처럼 선긋기를 하기 일쑤다. 두 딸아이에게 비교와 대조를 적절히 섞는 나는 분명 나쁜 엄마다.
작가는 자녀가 셋일 때 아들과 딸이 섞여있는 경우 부모는 자신의 자녀를 서로 비교하기 보다는 각각 특성을 이야기 한다고 말한다. 공감하는 부분이다. 세 꼭짓점은 가위바위보처럼 서로 물고 물리기 때문에 서로를 적당히 견제하면서 타협해 가는 과정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가위바위보의 관계의미 보다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나와 너가 되고 찬성과 반대가 되는 것 같다.
폐쇄성의 법칙
불완전하게 끊어진 부분들이 하나의 완전한 형태로 지각되는 심리학적 원리이다. 예를 들어 불연속한 선으로 이루어진 것을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원, 사각형, 삼각형 등의 모습으로 인식하는 현상이다. ‘전체는 부분의 단순한 합이 아니다.’라는 게슈탈트 법칙의 하나로,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규칙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음을 가리킨다. 기존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미완의 형태를 완성된 형태로 인지한다는 것이다.
폐쇄성의 법칙은 단순히 시각적 경험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상호작용에 해당된다. 상호작용에는 언제나 해석의 여지가 있어야 한다. 모든 정보가 정확하고 완벽한 상호작용은 재미없다. 상대방의 역할이 없기 때문이다. - 241쪽 -
나는 가끔씩 나를 아주 잘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때도 있다. 그러다 불현 듯 나를 몰라서 혼란을 겪을 때도 있다. 나의 선택에 대한 확신이 섰을 때는 나를 아주 잘 안다고 느끼며 나에 대한 긍정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 결과물이 전혀 뜻밖의 결과를 가져 왔을 때 나는 마치 내가 아니었던 양 나를 모르는 사람처럼 스스로를 낯설게 대한다. ‘왜 그랬지?’...... 결국 나는 나도 모른 사이에 폐쇄성법칙에 들어가 있다. 그것도 깊숙이.
내가 모네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나의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같은 소재를 두고도 모네가 그려낸 ‘건초더미’를 보면 시·공간이 존재한다. 나의 기분도 한 역할을 하게 만든다. 골라먹는 재미가 있다.
모네 자신의 감정이 크게 표현되어 있지 않고 오로지 찰나에서 얻은 인상의 느낌만이 들어 있다. 누구라도 받을 수 있는 보편적인 인상을 작품 속에 붙들어 매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모네의 ‘건초더미’는 빛을 따라 변하는 건초를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렸다는 특징이 있다. 해질녘의 건초더미는 일몰 속에서 뜨겁게 달아올랐고 늦여름부터 겨울 한철에 이르는 건초더미는 계절의 변화에 의해 달라지는 인상을 포착했다고 한다. 건초더미의 그림은 빛에 의해 얼마나 다각화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본질을 벗어나서 외부의 영향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될 수 있는 모습을 건초더미에서 느끼게 된다.
작가는 일부 심리학자들의 말을 통해 공감과 감정이입을 구분 짓는다. 공감은 상대방의 기쁘거나 슬픈 감정에 호응하는 제3자의 감정인데 반해 감정이입은 자신을 대상과 동일 시 하며 완전히 결합하려는 태도라고 한다.
누군가의 말에 공감할 수 도 있고 감정이입이 될 수도 있다. 나의 경험의 깊이에 따라 공감도 될 수 있고 감정이입도 될 수 있다. 나는 내가 잘 모르는 것에는 쉽게 공감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경험에서 감정이입을 통하지 않고는 공감하지 못하는 나의 가슴회로 때문에 사람들의 ‘좋아요’가 아직도 어색하기도 하다. 아마 내가 SNS를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시선이 곧 마음이다.’ 인간만이 시선을 통해 의사소통을 한다. 그래서 ‘시선을 느낀다.’고 하는 거라는 작가의 말이 참 좋다. 아무리 타인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살겠다고 하지만 결국 그 시선을 느끼며 살아가야하기 때문이다. 내 모습을 통해서 나를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타인을 통해서 알아가기도 하기 때문이다. 뫼비우스의 띠가 되는 시간이다. 이분법적 사고보다는 가위바위보의 관계 지향적 사고가 필요하다. 나는 내가 바라는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는 여자가 되기 위한 과정을 또 하나 배운다. 가위바위보. 누구에게나 질 수도 이길 수도 있다. 상대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때로는 가변적이거나 비가시적인 시간들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타인의 모습을 통해 나를 알아가는 것 또한 나이 들어가는 모습 중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