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미국을 배웠다.
같은 패전을 했어도 일본은 온 세계인이 벌벌 떠는 원자탄 폭격을 받아 비참하게 패했다. 그 후유증이 자손대에까지 대물림되는 고약한 방법으로 패했다. 통상의 민족이라면 미국을 두고두고 원망할 것이다. 하지만 일본 사람들을 쿨했다. 패배를 인정하고 미국이 일본보다 잘났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Made in U.S.A! 미국이 만든 제품이 아니면 쓰레기였고, 미국의 GNP가 세계 GNP의 54%를 차지했던 시기, 자만에 차 있었던 미국 땅에 깃발을 든 일본인들이 줄줄이 건너가 미국을 견학했다. 미국 공장에마다 견학을 시켜달라는 일본인들이 줄을 섰다.
"저 코 납작한 잽(Japanese)은 왜 저 소란이야?" 공장장이 물었다. “아, 네. 공장을 견학시켜 달라 합니다." "그래? 다 보여줘서 얼른 보내. 일본은 백년이 가도 미국 못 따라와, 그러니 다 보여주라구." 일본인들은 특유의 감사를 표시하면서 열심히 견학했다. "우리는 배워야 한다." 일본인들의 구호였다. 한국인들처럼 실속도 없으면서 아는 체부터, 잘난 체부터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한국인들은 머리가 비었는데도 잘난 척하고 싶어서 몸이 달아오른다." 1893년 윤지호 일기장의 글이다. "조선인들은 허영심이 강하다." 마리니 콜라앙투앙 프랑스 선교사의 말이다. 일본인과 조선인은 떡잎부터가 달랐다.
SONY, 소니의 신화를 만든 사람은 '이부카 마사루'와 '모리타 아리오'였다..
이 두 사람은 태평양 전쟁 때 동굴에서 해군이 추진하던 열 추적 유도탄, 오늘의 ‘사이드 와인더’를 연구하다가 종전을 맞이했다. 두 사람은 헤어지기가 싫어 미지를 개척하자는 뜻으로 천막을 쳤다. 이들은 두 사람의 모임을 '미지의 개척자' (Seeker of the unknown)라고 이름 지었다. 녹음기를 만들기로 했다. 가느다란 철사에 녹음을 시키는 것까지는 성공을 했지만 편집했을 때 자르고 때우는 과정이 문제였다. 이때 맥아더 사령부에서 활성기가 울려퍼졌다. 저것이 녹음기일 것이라는 생각에 달려갔다. 모리타 아키오는 미군 장교를 설득해 녹음기를 몇 시간 빌렸다. 녹음은 철사에 돼 있는 것이 아니라 질긴 테이프(질긴 종이)에 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일본을 다 뒤져도 질긴 종이는 없었다. 마분지에 자석 가루를 칠해 만들기는 했지만 상품 가치가 없었다.
이들의 두 번째 목표는 트랜지스터로 라디오를 만들어, 손에 들고 다니면서 들을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라디오는 진공관 라디오, 덩치가 크고 가구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됐었다. 이 진공관 라디오는 미국 TI(Texas Instrument)사가 발명했다. 트랜지스터는 1948년 미국의 벨 연구소 (Bell laboratory)에서 발명했다. 모리타 아키오는 벨 연구소에 가서 트랜지스터 사용 권리를 사겠다고 했다.
"무엇에 쓰려구요?" "네, 라디오를 만들려구요", "그렇다면 공짜로 사용하세요" 그것이 상품 가치가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1955년, 모리타 아리오는 세계 처음으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가지고 미국시장을 노크했다. 손바닥만 한 라디오에 관심을 갖는 바이어가 없었다. 3일 동안 생각을 한 모리타는 신문광고를 생각해 냈다. 고객에 직접 알리면 바이어가 대들지 않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이것이 신문광고의 효시였다.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계 제작 회사 부로바사 중역이 찾아왔다. 20만 개를 주문하겠으니 OEM으로 해달라고 했다. 라디오에 SONY 마크가 아니라 부로바 마크를 넣어 달라는 것이었다. 일본 본부에 의사를 타진했더니 마음 변하기 전에 빨리 계약을 하라고 했다. 하지만 모리타는 이를 거절했다. 부로바 중역이 놀래서 찾아왔다. "부로바사는 50년 전통을 자랑하는 세계적인 기업입니다. 소니 제품에 부로바 마크를 넣는 것이 얼마나 횡재인지 모르십니까?" "네, 잘 압니다. 부로바사도 50년 전에는 우리 SONY사와 같은 처지에서 출발하셨겠지요. 우리도 부로바처럼 열심히 하면 50년 후에는 부로바사처럼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소니사 제품은 소니 마크로만 판매하고 싶습니다" 그 후 40년 만에 두 회사의 프로필은 완전히 역전돼 있었다. 그 다음 목표가 워크맨이었다. 모리타의 발상이었다. 소니의 초대 회장은 이부카 마사루, 그는 모리타의 연장자였다. 미국을 다녀오면서 가지고 온 영문 포켓북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서 "바로 요만한 사이즈의 캠코더를 만듭시다." 경박단소! 작고 가볍게 만드는 기술, 이것이 없으면 최첨단 전투기도 인공위성도 없었다. 그는 SONY를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오랫동안 길러온 젊은 음악가 출신 오가에게 물려주었다.
토요다의 카이치로, 자동차에 관심을 가졌다. 미국에서는 한 개의 차종을 제작하기 위해 컨베어 벨트를 설치하면 수만 대씩 만들어 내고, 다른 차종을 위해 세팅을 했다. 그러나 일본에는 생활 수준으로 인해 한번 세팅을 하면 수천 개 정도만 생산했다. 생산효율상 미국 차와 경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카이치로는 세팅 시간을 10분의 1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미국의 소품종 대량생산 체계에 대항해 일본은 다품종 소량생산 체계를 발전시켰다.
사람들은 남과는 다른 옷, 남과는 다른 독특한 차량을 갖기를 원한다. 따라서 일본의 다품종 소량 생산시스템이 국제시장에서 미국을 따돌리게 된 것이다. '적시 생산'(JIT Just IN Time)시스템도 토요다의 창조물이었다. 간단히 모델화하여 설명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12대의 기계가 있었다. 기계 한 대에 한 사람씩 서서 일했다. 각자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신바람'이 나서 열심히 일할수록 기업의 손익계산서에는 이윤이 줄어들었다. 더 열심히 일할수록 이윤은 더 많이 감소했다.
김영삼 시대인 1993년 서울공대 산업공학과 실력 교수인 이면우가 [W이론을 만들자]는 책을 써서 베스트 셀러가 됐었다. 이론의 요지는 열심히 일하도록 신바람 문화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신바람 나게 열심히 일해서 1인당 생산량이 증가했는데 왜 토요다에서는 이윤이 더 빠르게 감소했는가? ‘참으로 이상하다. 왜 1인당 생산성이 향상되면 될수록 손익계산서 상의 이윤이 저하되는 것인가?’ 토요다의 '오노' 부장, 식사를 하면서도 화장실에서도 그 생각만 했다. 그러다 한순간 무릎을 쳤다. 12사람의 작업대 앞에는 각자가 작업한 부품이 많이 쌓여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쌓여 있는 재고는 1개월 동안 소화가 안됐다. 1개월 후에 가공해도 되는 것을 미리 가공해 놓은 것이다. 열심히 일하면 일할수록 이자가 더 많이 날아가는 것이었다. "아하~. 전 공정은 후공정에서 소화한 것만큼만 생산하고 시간이 남아도 일하지 않는 것이 이익이 된다." 기막힌 논리를 찾아낸 것이다. 차라리 쉬는 것이 더 이익이었다. 각자에게 남는 시간이 또 아까웠다. 그래서 1인이 2개의 기계를 다루도록 했다. 결국 12사람이 다루던 12대의 기계를 한 사람이 다루게 된 것이다. 12대의 기계를 한 사람이 다루게 하려면 기계를 U자형의 연속으로 배열해야 했다. "전 공정은 후공정이 소화한 것만큼만 생산하라" 재고가 쌓이지 않았다.
커플링! (Coupling)! 에누리 없이 찰카닥 궁합처럼 공장이 가동되어 공정과 공정 사이에 재고가 없도록 한 것이다. 이를 이름 짓기를 JIT시스템(적시생산)이라 했고, 이는 토요타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일본 사원들의 학습능력, 몰두능력,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그것이 일본의 강점이다. 일본을 욕하고 멸시하는 한국인들에 묻는다. 왜 일본에는 노벨상이 많이 떨어지는데 한국에는 노벨상이 김대중이 탄 이상한 평화상 말고는 단 한 개도 안 떨어지는 것인가?
일본이 이렇게 노력하는 동안 미국은 자만했다. 1957년 미국 국무장관 덜레스가 구름처럼 운집한 일본 군중에게 연설을 했다. "존경하는 일본 국민 여러분,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파자마를 만듭니다. 그리고 손수건도 만듭니다. 왜 이런 걸 더 많이 만들려 하지 않습니까?" 그는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흔들어 보이면서 일본인들을 비꼬았다. 이런 거나 만들면 됐지 왜 Made in U.S.A를 흉내 내겠다고 공업제품과 전자제품을 만들려고 애를 쓰느냐, 비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로부터 25년 후인 1982년, 미국인의 자동차 선호도 조사에서 일본이 1, 2, 3등을 차지했다. 미국차는 겨우 7위를 차지했다. 미국의 거리거리에 일본차가 미국차보다 많아보일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