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고의 황제중 한명인 당나라 황제 이세민과 벌인 3개월 혈전인 양만춘의 안시성 혈전과...그후의 이야기
sbs의 연개소문과 kbs의 대조영에 각각 1-2회...길게는 1-4회까지 다루는 명장면으로 고-당전쟁의 하이라이트 안시성 전투를 방영하고있습니다. 연개소문에서는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을 중심으로 하다보니 안시성 성주 양만춘 장군의 역활이 많이 약해졌지만 대조영에서는 다르게 비취지는데...실제 양만춘은 어떠한 인물일까요? 솔찍히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양만춘이 누구인지...아니면 자세히 아시는 사람은 많지는 않을겁니다. 고구려 하면 광계토대왕,연개소문,을지문덕,온달 정도만 많이 알고있는게 사실입니다.
그럼 고구려의 마지막 영웅 양만춘 대장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한국 사람이라면...꼭 알아두는 건 나쁘지 않을겁니다.
양만춘은 어릴적 예기는 너무 길어 생략하겠습니다. 무과에 올라 말단부터 시작해서 살수대첩을 성공시켰던 신장 을지문덕 장군의 신임을 온몸에 받았던 인물로 그 지략과 용맹이 남달아 연개소문조차 쿠데타를 일으킬때 멀리 안시성에서 평생을 지키고 있는 양만춘을 경계하였다고 합니다. 수나라가 을지문덕에게 패해 패망해가는 시점부터 양만춘은 조그만 안시성에 있었습니다. 그후 그후 을지문덕의 가르침속에서 안시성 성주가 되고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를 공격해 중국을 정벌하자는 대야망이 보수파에 저지당하고 중원을 떠도시다 수나라가 결국 망하자 천하의 둘도 없는 기회를 잃었다며 어린 양만춘과 연개소문에게 말했다고 하죠... 을지문덕장군이 죽자 안시성에 양만춘은 사당을 만들어 모시고 훗날 당나라에서 이세민이 형 이건수를 죽이고 황제에 오르는 대사건이 발생하는데...이세민은 지금도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황제중 한명으로 불리죠. 이세민이 즉위후 중국 변방의 모든 오랑케를 복속시키고 고구려에게 사신을 보내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하나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일으켜 보수파를 몰살시키고 오히려 신라를 압박하기에 이르자 이를 빌미로 이세민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로 밀려오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고-당 전쟁의 서막이다.
-------------고구려 vs 당나라---------------- 당나라 선봉부대 10만 이세민의 후속부대와 보급부대까지 합치면 100여만 대군을 이끌고 수군과 합세하여 밀려오니 개모성 비사성이 이따라 함락당하자 연개소문은 이세민의 군대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고 15만 구원군을 고연수등에게 주어 보내나 이세민의 계략에 빠저 절반이 죽고 36800명과 함께 항복하고 만다. 이 충격이 체 가시기도 전에 고구려의 요동방어선의 주축인 요동성인 건국 800년만에 최초로 이세민의 당나라군에게 함락당하고 만다..이어 개모성마저 항복을 하자 말그대로 평양으로 가는 길이 열린 셈이되었다. 하지만 양만춘이 이세민을 도발시켜 당나라 대군이 안시성으로 몰려오는데.....
------------------안시성 혈전--------------------- 안시성의 군사와 백성의 수는 여러가지 설이 내려와지나...일반적으로 전해지는것은 안시성의 군사는 최소 3000명 최대 8000명에 불과 했다고 전해진다...병사와 백성 강아지와 닭까지 합쳐도 10만이 안되었다고 하니 당나라 100만대군에 크게는 300배의 차이를 보이는 셈이었다. 당태종 이세민은 안시성을 하루에 작게는 일곱번씩 공격을 했으나 아시아 최강의 공성전을 자랑하는 고구려 그중 양만춘이 안시성을 지휘하자 쉽사리 뚥리지 않았다. 이에 이세민이 안시성을 수백겹으로 애워싸고 계속 밤낮없이 공격하여 안시성을 지치게 하고 식량을 바닦을 내게 했다. 안시성에 식량이 바닦났지만 신망이 두터운 양만춘장군이 성주인 안시성 백성은 당나라가 바라는 폭동은 커녕 오히려 백성...어린아이까지 모두 전쟁에 참가...항쟁하며 굶어죽은 사람의 시신으로 연명하는 대혈전을 펼진다. 이에 당황한 이세민은 "하늘아래 저런 장수와 저런 백성....저렇게 독오른 군대를 본적없다"라고 한다.
이 끝없는 전투속에 1달이 지나자 당나라는 연중인원 50만을 동원하여 토산을 쌓는다. 안시성보다 높게하여 안시성을 위에서 아래로 공격하려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역사서에는 토산이 무너저 고구려군이 토산을 점령했다"라고만 쓰여져있다. 어찌되었건 2달간 힘들게 만든 토산을 점령한 양만춘은 3일간 이어지는 당나라의 토산 회복전을 막아내고 3개월간 이어져온 당나라의 대군의 맹공을 막아내자 이세민은 수군마저 연개소문에게 패하자 철군을 명한다. 야설에는 전투중 양만춘의 화살에 당태종이 한쪽눈을 잃고만다고 한다. 털수하는 이세민은 안시성 아래에 비단과 금은을 남기고"천하의 어떤 장수도 양만춘 만한자는 없으며 조국을 위해 헌신을 다한 답례를 적국의 황제지만 치하한다"하고 남겼다고 한다. 수도 장안으로 돌아가는 이세민은 "하늘은 왜 양만춘을 당나라에 주지 않으셨나이까?"라 했다고 중국사서에 기록되있다고 한다.
-------------안시성전투후 양만춘----------------- 연개소문은 이틈을 타 양만춘에게 명하여 당나라를 침공하게 한다. 양만춘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당나를 공격 요서를 넘어 북경까지 함락시키고 그성을 고려성으로 개명합니다. 후에 이성에 대조영의 아버지가 지키죠. 그후 당나라 황제 이세민이 죽으며 고구려를 치지말라고 하자 고구려는 그성들을 당에게 다시 돌려주자 양만춘도 안시성으로 돌아옵니다. 이후 양만춘 지지자가 너무 많아지자 의협을 느낀 연개소문은 양만춘을 반역죄를 뒤집어쒸어 옥에 가두는데 그후 7년간 옥에서 나오질 못합니다. 이후 이세민의 아들이 아버지의 유언을 어기고 고구려를 공격하자 때마침 연개소문이 사망하고 그의 3아들이 대립해 고구려가 혼란에 빠지고 동맹국 백제마저 망하자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태반이 항복하자 평양마저 오래가지 못하고 항복하고 만다.
--------평양 항복후--------------양만춘의 죽음 평양이 항복하자 고구려 부흥을 위해 아직 요동의 무너지지 않은 성들이 대거 당나라에 항거하나 당나라의 설인귀에게 하나하나 항복하거나 함락되었고 마지막 남은 성이 양만춘의 안시성이었습니다. 양만춘은 고구려 최후의 항전을 벌이나 식량의 역부족과 이따른 사방의 지원군요청에 총 2만의 군사중 1만을 보냈고 남은 1만으로 처절하게 버티나 희망이 없음을 알자 자신이 아끼던 장수를 남은 5000명중 800명을 때어주며 탈출하게 합니다. 그들은 무사히 수로를 통해 신라로 가지요. 양만춘은 마지막 항전을 하나 당나라의 파상공세속에 4200명 남은 고구려군과 함께 모두 전사하고 맙니다. 양만춘장군도 이때..전사하니 고구려를 완전히 망하던날 마지막까지 고구려를 가슴에 안고 돌아가신 비운의 대 명장이신겁니다.
이후 고구려는 대종영이 이끄는 고구려 부흥군과 이해고의 요동 부흥군 등이 등장하지요 그리고 고구려인이면서 그 유명한 당나라의 명장 고선지(요동성 태수 고사계의 아들) 도 다들 잘모르시더라고요
훗날 역사학자들은 "고선지.대조영.이해고"중 한명이라도 10년만 일찍태어나 정상적인 고구려에서 방해없이 자랐다면 고구려는 망하지 않았을거라고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