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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소설창작론 (7~9 )
7. 육화의 방식 - 이야기와 인물.
소설이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말은, 물론 맞는 말이지만, 소설에서 이야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가를 역설적으로 증거한다. 소설은 이야기만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야기이다. 이야기 없이는 소설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어떤 빛나는 감각이나 어떤 심오한 사유도 이야기를 통하지 않고는 소설이 되지 않는다. 이야기를 갖지 않은 어떤 심오함, 어떤 고상함도 소설이라고 할 수 없다. 아니, 심오함이나 고상함이 소설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것들이 이야기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 무슨 수로 소설과 상관한단 말인가.
이야기는 소설의 육체다. 형체가 없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볼 수가 없다. 추상은 구체를 통해서만 인식되고 관념은 형상을 통해서만 식별된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이른바 형상화, 형체가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을 눈에 보이도록 형체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관념을 눈에 보이도록...관념이 먼저 있고 이야기가 있다.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 가운데 하나가 인카네이션(incar-nation), 즉 육화이다. 영(靈)인,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고 만져질 수 있도록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왔다는 사상이다.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온 하나님, 즉 예수를 통해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는 생각이다. 이 교리에 비유해서 말하자면, 소설을 쓴다는 것은 인카네이션의 작업이다. 육화. 관념에 육체 입히기. 여기서 육체는 이야기이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관념이 어떻게 소설이 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라.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은 관념이다. 이것은 영과 같아서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다. 머리 속에 웅크리고 있는 이 명제는, 온갖 장애와 어려움을 극복하고,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한 사람들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통해 실체를 획득한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을 보여 주어야 한다. 말이 아니라 그림이고, 주장이 아니라 이야기여야 한다. 소설을 읽는 독자는 작가가 하는 주장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보여 주는 이야기를 보는 것이다.
육체를 이루는 것은 살과 피와 신경과 뼈들이다. 이야기라는 육체를 만드는 것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물이다. 시간과 공간(상황) 위에서 인물들이 움직인다. 이 움직임이 이야기를 산출한다. 아니, 이 움직임이 곧 이야기이다. 움직인다는 것은 시간이 흐른다는 뜻이다. 공간은 인물에게 처소를 제공하고, 시간은 인물에게 움직임을 제공한다. 시간이 만물을 움직이게 한다. 시간이 흐르지 않으면 모든 것은 정지한다. 당연히 이야기도 멈춘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시간이라는 동력을 필요로 한다.
마땅한 공간과 시간의 배치는 이야기의 활력을 위해 중요하다. 이야기는 공간과 시간에 의해 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바닷가를 무대로 했을 때와 도시의 지하철 안을 무대로 했을 때 이야기의 방향이 같을 수 없다. 조선 시대를 택했을 때와 현대를 택했을 때, 새벽과 한낮, 겨울과 여름, 눈오는 날과 비가 오는 날도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은 이야기의 방향을 상당 부분 결정해 버린다.
이제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자. 소설은 인물이다, 라고 어떤 사람은 말한다. 이야기는 시간이나 공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물의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소설 창작을 위해 밑그림을 그릴 때, 가장 많이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 인물 설정이다. 시간이 가도 지워지지 않는 독창적인 소설 속의 인물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가령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 또는 『데미안』의 데미안, 『적과 흑』의 쥘리앵……. 인물이 이야기를 주도한다. 인물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소설 세계를 펼친다. 인물은, 많은 경우에, 작가의 대리인이다.
인물이 곧 작가 자신은 아니지만, 작가는 어떤 식으로든, 인물 속에 들어가거나 인물 뒤에 숨거나, 혹은 인물을 방치하거나 경멸하거나 함으로써, 인물을 통해 자신의 의도와 욕망을 드러낸다. 그 드러내기의 방식이 교묘해서 잘 눈치채지 못 할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인물을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 유념할 것은 전형적인 인물과 개성적인 인물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다. 우선 특정한 집단이나 신분의 유형화된 성격을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장교 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나 학교에서 초등학생을 가르치면서 평생을 보낸 사람이나 몸을 파는 여자들에게는 각각의 특징적인 성향이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그들의 몸에 밴 습관이나 태도,
가치관 같은 것을 고려해야 하고, 이 경우 소설은 현실의 인물을 반영하는 쪽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군인이라고 해서 다 똑같다고 할 수 없고, 이 세상의 모든 초등학교 교사가 모두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도 없고, 몸을 파는 모든 여자가 동일한 습관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개인은 집단의 일원이지만, 그러나 또 독립된 우주이다. 인물의 개체적 특성에 대한 관심은, 새로운 인물, 요컨대 성격의 창조라는 과제에 도전하게 만든다.
또한 소설 속에 그려지는 인물은 한 작품 안에서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물론 이 말은 인물이 평면적이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시간은 인물을 움직이게 만들고, 인물의 태도와 세계관을 변화시키고, 따라서 인물은 시간과 함께 이동한다. 하지만 전라도 사투리를 쓰던 사람이 납득할 만한 근거 없이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든가, 돼지고기를 싫어하던 사람이 돼지고기를 맛있게 먹는다고 나온다든가, 소박하고 단순한 성격으로 설정된 사람이 온갖 장신구를 다 갖추고 나타난다면 독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설정된 조건을 초월할 수 없다는 것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운명이다.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9남매의 막내인 열두 살짜리 초등학교 여자아이를 묘사할 때 당신은 그 아이가 구사할 수 있는 수준의 말을 하게 해야 하고, 그 아이의 조건과 환경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게 해야 한다.
인물을 드러내기 위한 방식으로, 전통적으로 많이 사용된 것은 생김새나 신체의 특징을 묘사하는 것이다. 눈이 어떻다든지, 코가 어떻게 생겼다든지, 입술이 어떤 모양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신체의 특징적인 부분을 묘사함으로써 그 인물의 성격을 드러낼 수 있다. 이 방법은 좀 지루하고 고루하긴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용하다. 말버릇이나 특징적인 몸짓, 또는 습관을 이용하여 성격을 드러내는 방법도 좋다. 다른 인물의 입을 통해 소개하는 방법도 괜찮다. 사건에 반응하는 그만의 개성적인 태도를 보여 줌으로써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보여 줄 수 있다면 더 좋다.
권하고 싶은 한 가지 방법은 주변에서 모델이 될 만한 인물을 선택하여 소설 속에 이용하는 것이다. 가상의 인물을 막연하게 설정하고 써나가다 보면, 그 인물의 성격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명쾌한 서술이 어려워지고, 일관성 유지가 힘들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자기가 잘 아는 실제 인물을 염두에 두고 쓰면, 그 인물이 등장하는 대목에서는 그 사람을 떠올리면 되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피할 수 있다. 데뷔작을 쓸 때, 나는 내 은사 가운데 한 분을 거의 그대로 베껴서 한 인물을 만들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교적 선명하고 일관성있는 인물 만들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8. 누구에게 말하게 할 것인가 - 화자의 문제.
다음 질문에 대답해 보라. 목포가 가까운가, 수원이 가까운가. 대답할 수 있는가? 목포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고 수원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말할 수 없다고 답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목포라고 대답한 사람은 왜 목포가 수원보다 가깝다고 생각한 것일까? 수원이라고 답한 사람은? 그것은 그가 서 있는 위치 때문이다. 자기가 어디에 위치해 있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예컨대 광주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목포는 수원보다 가깝다. 그러나 서울이나 인천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수원이 목포보다 가깝다. 기준은 언제나 그가 서 있는 자리이다.
다시,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자. 여기에 방이 있고 문이 있다. 그리고 누군가 방 안쪽에서 방 바깥쪽으로 움직인다. 그럴 때 그는 (방에서 밖으로) 걸어나오는가, 걸어나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당신(말하는 사람)이 어디에 위치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당신이 방 안에 있다면 ‘그가 걸어나간다’고 말할 것이다. 당신이 방 밖에 있다면 ‘그가 걸어나온다’고 말할 것이다. 말하는 사람이 언제나 기준이다. 그가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알게 되는 것은 그 사실을 전해 주는 사람(말하는 사람)의 입을 통해서이다. 그러니까 움직이는 사람이 있고, 그가 움직이는 걸 본 사람이 있다. 우리는 그(인물)가 어떻게 움직였는지(사건)를 직접 본 것이 아니고, 그걸 직접 보고 전해 주는 사람(화자)의 말을 통해 알게 된다. 말하자면 모든 이야기는 누군가를 통해 말해진 이야기이다.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허구의 이야기는 누군가를 통해 서술된 것이다. 앞에서 예를 든 것처럼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실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역사는 그것을 기술하는 자의 역사이다. 사건의 본질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해석이 존재하는 것이다. 두 사람이 싸움을 했다. 우리가 그 싸움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은 그 싸움을 목격한 사람의 서술을 통해서이다. 그런데 그것은 전하는 사람의 욕망과 의도와 입장에 의해 해석되고 재구성된 싸움이지 싸움의 본질은 아니다. 아니, 싸움의 본질이 있는가? 그런 건 없다. 열 명의 화자는 열 개의 싸움을 기술한다. 그것은 말하는 사람의 욕망과 의도와 입장에 의해 해석되고 재구성된 싸움이다. 말하는 사람은 사건을 전하면서 은밀하게, 또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욕망과 의도를 집어넣는다. 말하는 사람의 욕망과 의도와 입장에 의해 해석되고 재구성되지 않은 사건이란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사건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사건과 함께 그 사건을 옮기는 사람의 욕망과 의도도 함께 듣는 셈이다. 이것이 소설이다.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지만, 그러나 누군가에 의해 말해진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소설을 쓰려고 할 때, 그러니까 허구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려고 할 때, 먼저 상정해야 하는 것은 누구의 입을 빌려 말할 것인가, 이다. 물론 소설을 쓰는 사람은 작가이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작가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소설을 통해 작가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작가는 직접 말하는 대신 누군가를 내세워 말하게 하고 자신은 그 뒤에 숨는다. 작가는 작품 밖에 있다. 작가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독자 역시 작품 밖에 있다. 작품 안에서, 작가를 대신하여 말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그가 화자이다. 자, 그러니 결정하여야 한다. 누구에게 말하게 할 것인가. 그는 사건에 참여하고 있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일 수도 있고, 사건에 참여하지 않은, 사건 밖의 존재일 수도 있다. 원칙은 없다. 준비된 이야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화자를 선택하면 된다.
사건에 참여하고 있는 등장 인물 가운데 누군가 한 사람을 화자로 선택할 때, 소설은 1인칭 시점이 된다. ‘나는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이 있다고 하자. 여기서 ‘나’는 작가가 아니고, 작가가 만든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작가는 자기가 만든 이야기 속의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주인공이거나 주변 인물인)을 택해 이야기를 대신 하게 한다. 1인칭 시점은 인물-화자의 내면 세계를 드러내는 데 가장 적합하다. 반면에 이야기가 ‘나’의 조건과 시각을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가령 전라도 출신의, 공부는 잘 못 하고 노래는 잘 하는 열두 살짜리 여자아이를 1인칭 화자로 설정했을 때, 소설은 그 아이의 조건과 능력을 벗어난 이야기를 전개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규칙이다. 1인칭 시점은 화자로 선택된 인물의 내면 세계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다는 장점과 화자의 처지와 조건에 제한된다는 약점을 동시에 지니는 시점이다.
화자가 사건 밖에 있다는 것은, 등장 인물로서 사건 속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 밖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이라고 쓸 수 없다.
화자는 사건에 참여하고 있는 인물들의 이름을 부르거나 그, 또는 그녀라고 호칭한다. 3인칭 시점이다. 3인칭 시점을 택했을 때, 작가는 화자에게 신적인 전지전능을 부여할 수 있다. 말 그대로이다. 화자는 모르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인물들에 대해서든 사건의 진행에 대해서든 묘사할 수 없는 것이 없고 서술할 수 없는 것이 없다.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지만, 모든 인물들을 공평하게 취급해야 하는 이 시점의 특성상 내면의 깊이를 그리는 데는 취약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작가의 지나친 개입은 독자들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반감시킬 수도 있다.
화자가 이야기 바깥에 있되, 신적인 전지전능을 갖는 대신 특정한 인물의 안에 들어가는 시점을 택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작가는 한 인물의 입장이 되어 그가 보고 듣고 생각한 것만을 들려 주게 된다. 효과는 등장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을 내세운 1인칭 시점과 거의 유사하다. 누구에게 말을 하게 할 것인가는 작가의 선택이다. 각각 장점이 있고 단점도 있다. 자신이 구상한 이야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해 줄 수 있는 적임자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일은 그 이야기를 구상한 사람의 몫이다. 작가는 작품 바깥에 있고, 작품에 우선한다.
9. 어울리지 않는 장식은 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좋은 문장의 조건
소설은 이야기이고, 그러나 이야기만은 아니고, 세계에 대한 작가의 입장, 즉 세계관이 들어가야 하고, 그러나 그것이 이야기 속에 적절하게 용해되어야 하고, 그래서 마치 추어탕 속의 미꾸라지가 그렇듯 이야기에 완전히 녹아들어 작가의 생각이나 의도가 보이지 않아야 하고, 독자는 다만 이야기를 통해 그것을 전달받아야 한다. 이야기는 관념을 품어야 하고, 관념은 이야기를 향해 열려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재미있는 이야기든 심오한 생각이든 작가는 그것을 어떻게 전달하고 독자는 그것을 어떻게 전달받는가?
여기에 ‘자유’라는 제목을 단 조각이 하나 있다고 하자. 학생모 차림의 젊은 청년들이 깃발을 들고 함성을 지르고 있다고 하자. 이 조각 작품 역시 작가의 어떤 생각과 형상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재료는 돌이거나 청동이다. 조각가는 돌이나 청동을 잘 다루어야 한다. 표현하려고 하는 관념이 훌륭하고 형상이 근사하다고 해서 좋은 조각품이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 훌륭한 관념, 그 근사한 형상이 돌이나 청동에 잘 표현되었을 때 좋은 작품이라고 한다. 돌이나 청동을 잘 다루어야 한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소설의 재료는 언어이고 문장이다. 어떤 고상한 생각이나 어떤 근사한 이야기가 좋은 소설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잘 표현되어야 한다. 조각가가 돌이나 청동을 잘 다루어야 하는 것처럼 소설을 쓰려는 사람은 문장을 잘 다루어야 한다. 문장은 소설의 처음이고 또 마지막이다. 소설의 기본을 이루는 것도 문장이고, 소설을 완성시키는 것도 문장이다. 소설이 되었느냐 되지 않았느냐를 가늠하는 첫 번째 기준이 문장이고, 소설의 격과 차원을 운위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마지막 기준도 문장이다.
소설을 쓸 때 우리가 이용하는 문장의 양식은 대체로 서사와 묘사이다. 더러 설명을 하기도 하고 드물게는 논증을 써먹기도 하지만 그러나 소설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서사와 묘사이다. 서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밝히는 글이다. 묘사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글이다. 서사는 시간의 흐름을 기술하고, 묘사는 공간의 양상을 기술한다. 서사는 시간적인 글쓰기이고 묘사는 공간적인 글쓰기이다. 서사는 움직임이나 행동에 대해 말해 주고,
묘사는 모양이나 양상에 대해 그림을 그려 보여 준다. 서사는 동사를 필요로 하고 묘사는 형용사를 필요로 한다. 작가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묘사 위주의 소설을 쓰거나 서사 위주의 소설을 쓰기는 하지만 묘사만으로 된 소설, 서사만으로 된 소설은 없다. 묘사만으로 일관된 글은 실감을 자아내지만 지루해지기 쉽고, 묘사가 빠진 채 서사만으로 씌어진 글은 속도감을 주는 대신 스토리 위주라는 인상을 줄 가능성이 높다.
묘사와 서사, 대화와 설명이 서로 섞여서 소설의 문장을 이룬다. 심지어는 한 문장 안에 이 요소들이 한꺼번에 들어가기도 하다. 따라서 묘사냐 서사냐를 따지고 신경 쓰고 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따지고 신경 써야 할 일은 좋은 문장을 쓰는 일이다.
좋은 문장의 첫 번째 조건은 정확성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문법적으로 정확해야 하고 논리적으로 정확해야 한다. 올바른 어휘를 구사해야 하고 주술 관계를 올바르게 써야 하고 문장 성분들을 적절하게 배치할 수 있어야 한다. 논리적으로 부정확하여 의미의 혼동을 야기해서도 안 된다. 흔히 문법학자는 문법을 만들고 문학가는 문법을 파괴한다고 하는데, 완전히 옳은 말은 아니다. 문학가라고 해서 문법에 맞지도 않는 얼토당토않은 문장을 함부로 쓰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문법으로는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전하는 데 한계를 느낄 때 어쩔 수 없이 기존의 문법에 없는 문장을 사용한다는 뜻이지 문법을 무시한다는 뜻은 아니다.
문법은 글을 쓰는 이가 걸어가는 길이다. 문법을 파괴할 수 있는 사람은 문법으로 갈 수 있는 길을 다 걸어 보고 그 끝에 이른 사람일 것이다. 장식적인 문장, 표현의 효과를 의식한 문장은 정확한 문장을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 추구해야 할 다음 조건이다. 정확한 문장만을 구사하다 보면 자칫 글이 건조해지기 쉽다. 소설 문장이 다른 문장과 다른 것은 단순한 의사 소통 수단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설명하는 글이나 설득하는 글은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의사를 분명히 알리면 그만이다. 사실의 정확한 전달과 의사의 빠른 소통이 유일한 목적이므로 되도록 직접적이고 분명한 어휘와 문장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문학 작품은 정확한 전달과 빠른 소통만을 지향하지 않는다. 한 걸음에 갈 수 있는 길을 열 걸음에 가기도 하고, 한 마디면 될 말을 여러 마디 말로 나누어 전하기도 한다. 간접적인 어휘들, 우회하는 표현들, 상징적인 장치의 도입 등이 매우 중요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애매 모호하거나 막연한 문장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애매 모호한 문장이라는 것은 담고 있는 의미, 즉 내포가 흐리멍덩해서 그 문장이 지시하는 바를 가늠하기가 어려운 문장을 말한다. 막연한 문장이라는 것은 담고 있는 의미, 즉 내포가 지나치게 넓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는 문장을 말한다. 은유적인 문장은 의미의 전달을 지연시키긴 하지만 의미의 전달을 방해하는 문장은 아니다.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 하는 장식으로서의 문장은 공허하고 무의미하다. 문맥이 잡히지 않는 문장, 무슨 말인지 종잡을 수 없는 문장, 문법적으로 틀리고 논리적으로도 오류인 문장, 아예 문장이 되지 않는 문장을 장식적인 표현으로 가리려고 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 생각한 것이다.
어울리지 않는 장식은 하지 않은 것만 못 하다.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고 표현의 효과를 높이는 문장을 쓸 줄 안다면 이제 필요한 일은 자기만의 문장을 갖는 것이다. 소설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창의적인 발상이고 남다른 시각이고 자기만의 문장을 구사하는 일이라는 사실은 소홀하게 다뤄질 수 없다. 소설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행위이다. 창조 행위는 새로움과 변별성을 요구한다. 누구나 하는 말을 누구나 하는 방식으로 늘어놓는 문장에 이끌릴 리 없다. 평범하고 상투적인 표현을 무엇보다 경계해야 한다. 몇 줄만 읽어 보아도 누구 소설인지 금방 알아 맞출 수 있는 작가들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독특한 자기 목소리를 문장에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자기 문체를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문체는 글을 쓰는 이의 개성과 체질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어떤 문체를 선택할 것인가. 문체 사이에 옳음과 그름, 우월함과 열등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에게 적합한 문체가 있을 뿐이다. 자신의 체질과 개성에 맞는 문장을 개발하는 일이 문장 훈련의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