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나 문인화에 쓰이는 글감은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고 많아서 세상에서 쓰이는 모든 좋은 글들이 다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 차라리 맞다.
그러나 대체로 다음과 같이 그 내용이 분류될 수 있다.
[중국 역대 명언·명구]
1. 유교 경전의 글귀
(논어·맹자 등의 글귀가 자주 인용된다. 때에 따라서는 주자의 '사서집주'도 쓰여진다.)
2. 제자백가 및 여러 학자들의 글귀
(도가나 법가, 묵가 등의 경서에서 따온 글귀이다. 최근에는 '노자'가 잘 인용된다.)
3. 한시나 산문, 대련의 글귀
('고문진보' 등에 나오는 여러 한시들이 인용된다. 그 중 '당송 팔대가'라 불리우는 시인들의 한시는 자주 쓰여진다. '대련구'는 옛날 기둥에 두 개씩 달아놓는 칠언(七言)의 시구절을 뜻한다.)
日崗(일강) 金昇植(김승식) 작, 王維(왕유)의 시
4. 여러 법첩(法帖)의 글귀
(서예에서 고인의 필적을 돌이나 나무에 새기고, 탁본을 떠서 책으로 만든 것을 법첩이라 한다. 중국 옛 서예가들의 법첩이 인용된다. 워낙 법첩은 서예 공부의 기본이라서 곧잘 임서(臨書:베낌)하는데, 이것을 작품으로 만들기도 한다.
東岡(동강) 朴龍淳(박용순) 작, 절임 안근례비
5. 고사성어(古事成語) 글귀
(네 글자로 이루어진 '고사성어'나 '사자성어'는 그 자체가 훌륭한 글감이 된다. 어떤 경우에는 긴 한시나 경전 내용 중에서 필요한 글자만 따고 순서를 바꾸어 네 글자로 만들어 쓰기도 한다.)
6. 기타 문학·역사 서적의 글귀
(그 외에도 '사기'나 '삼국지연의' 등에 나오는 명 구절이 쓰이기도 한다.)
[한국 역대 명언·명구]
1. 여러 학자들의 문집 글귀
(최치원·김시습을 비롯한 역대 한국 문인들의 문집 글귀가 요사이 두루 쓰이고 있다.)
2. 비문과 묘지명 글귀
('사산비명'은 최치원의 글이요, 김생의 '집자비문'은 신라 서예가 김생의 비석 글자를 모은 글이다. 그 외에도 '광개토대왕릉비'는 훌륭한 한자 서체로 많은 이들이 베껴 쓰고 있으며, '무령왕릉 묘지명'등도 좋은 글감이 되고 있다.)
金生, 集字碑文(집자비문)
3. 고전 한문 글귀(한시, 산문)
(우리 옛 선조들이 남긴 한문 문학 작품이 쓰인다. '동문선'같은 책에 많이 나온다.)
4. 고전 한글 글귀(시조, 산문)
(한글로 된 고전 문학 작품을 옛 글자체로 쓰는 경향이 요사이 눈에 뜨인다. 문강 선생님의 '대나무'소재 문인화도 윤선도의 '오우가'를 그 모체로 하고 있다.)
5. 현대 시인의 시
가은 최루시아 작, 용혜원의 시구
6. 기타 문학·역사 서적의 글귀
[현대·실용 명언·명구]
1. 백화문(白話文)으로 쓰여진 성경 글귀
(시작은 개신교 서예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최근에는 '한국기독서예선교원' 등에서 많은 시도를 하고 있다. 대체로 현대 중국어체로 번역된 성경책을 이용하는데, '한문성경보감'이라는 책이 가장 유명하다. 천주교 측에서는 큰 흐름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유영종, 고린도 전서 13장 3절
2. 한글로 번역된 성경 글귀
(개신교 측에서는 대한성서공회에서 발행된 '개편 성서'를 많이 쓰고 있다. 주로 시편이나 복음서, 사도행전등에서 많이 인용된다. 천주교 측에서는 '공동번역 성서'나 최민순 신부 번역의 '시편성서'가 요즘 글감이 되고 있으며, 정하상의 '상제상서', 이벽의 '천주공경가'등이 고전적 작품으로 인용되고 있다.)
素軒(소헌) 具昭燕(구소연),시편42편 구
3. 한자로 쓰여진 불경 글귀
(가장 많이 쓰여지는 것이 '반야심경'이다. 불자(佛子)들은 모두 이 글귀를 서예의 기본으로 잡는 편이다. 보통 '아함경'같은 초기 경전보다 '금강경'과 같은 대승경전이 많이 쓰여진다. '법구경'은 초기 경전이기는 하나 잘 인용된다. 그 외에 '육조단경(六祖壇經)'과 같은 중국 경전, '대승기신론소', '화엄일승법계도'같은 우리나라 고승의 경전도 포함된다. 가끔씩 선승(禪僧)들이 지은 선시(禪詩)나 법어(法語)도 글감의 대상이 된다.)
秋史(추사) 金正喜(김정희), 반야심경첩(일부)
4. 한글로 번역된 불경 글귀
5. 가훈과 좌우명
(가훈과 좌우명은 대체로 동·서양에서 전해져 오는 위인들의 말이나 격언, 금언 등에서 따온 말들이다. 가문에 따라서는 대를 걸쳐 내려오는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요사이 들어와 많이 지어 벽에 거는 편이다. 회사에서도 사훈(社訓)을 고전 명구에서 따와 거는 경우가 있다.)
6. 현판·편액과 간판 글귀
(여러 사찰이나 고궁, 서원 등에 붙어 있는 편액은 그 자체가 훌륭한 글감이다. 필치가 대체로 웅장하고 대범하다. 좀 오래된 근대 건축물에는 근현대 인물들이 붓으로 써서 새겨 준 아름다운 간판이 많다.)
종남산 송광사 편액
7. 민속적 글귀(입춘축, 혼서지, 제사축문, 고사축문 등)
(정식으로 서예를 배우지 않아도 가풍이 있는 집에서 대를 이어 내려오는 전래 풍습에 따라 때에 맞게 글을 쓰는 일이 있다. 민속적 글귀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신년을 맞이해 대문 밖에 내다는 '입춘축'글귀이다. '立春大吉(입춘대길)'등 여러 문구가 있다. '혼서지(婚書紙)'는 혼례를 할 때 낭송하는 예식절차를 적은 글이다. 제사나 고사 때에 읽는 축문도 있는데, 이런 글귀들은 모두 뜻이 교훈적이고 명문장이다.)
8. (문인화의 경우) 그림 소재에 맞는 화제(畵題)
(문인화의 경우, 그림 소재와 화제(畵題) 및 낙관(落款)글씨 및 인장(印章)이 서로 의미가 맞아 떨어져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래서 문인화(특히 사군자)에 간단히 그림의 제목을 싯구의 형식을 빌어 써 놓는다. 난초그림의 옆에 '淸香倚石(청향의석:돌에 의지하여 있는 난초의 향기)'라 적는 식이다.)
如雪(여설) 허부순 작, 淸香倚石(청향의석)
[자작 글귀]
1. 자작 한시
(자신이 지은 한시를 직접 글씨로 쓰는 것이 서예의 궁극적 목표이라 할 수 있겠다. 근래에 들어 서예가가 한시를 배우거나 문장가·시인들이 서예를 배워 이 경지에 도달하는 경우가 많다. )
2. 자작 한글시, 시조
(여류 서예가들에 의해 시조나 한글시가 자작으로 많이 쓰여졌다. 자작시를 글씨로 옮길 경우, 시의 내용과 글씨의 품격이 그 작자의 풍모를 말해 주고 있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3. 기타 자작 글귀
* 서예와 관련된 '좋은 글감'이 가장 체계적으로 수록되어 있는 책은 '서묵보감(書墨寶鑑)'이다. 웬만한 서예인들은 이 책을 통해 좋은 글귀를 찾아낸다. 이 책에는 좋은 문구 1,400여개와 사군자 (四君子) 화제 250여 문구(文句)가 들어 있어서 서예인들이 언제라도 뽑아 쓸 수 있게 배치해 놓았다. 그보다 더 방대한 책으로 정후수님이 지은 '화전(話典)', 모로하시 데쓰지가 편집한 '중국고전 명언사전'이 있다. 문학 소재로는 '고문진보(古文眞寶)'를 따라올 책이 없다. 또한, 여러 서예인들의 사이트에 들어가 보아도 '좋은 글감'란을 따로 두어 네티즌들에게 글감 자료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너무 단편적인 글귀만을 따 올 경우 자칫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평소에 좋은 고전 경서를 가끔 읽어 보면서 그 안에 들어있는 숨어 있는 명 글귀를 발견하는 것도 서예공부와 수양에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