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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9:1-38) 뿌리 깊은 대도(大盜)의 헛 회개
오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뿌리 깊은 대도의 헛 회개>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뿌리 깊은 대도의 헛 회개’
최근에 현대판 홍길동으로 별명이 붙었던 조세형씨에 관한 이야기를 다 아실 것입니다. 70년대 말 그리고 80년대 초에 부유층과 고위층을 털어서 일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하고 해서 '대도'라는 별명이 붙은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82년에 체포되어서 15년간을 감옥생활을 하다가 98년에 감옥에서 나오게 되고, 참으로 고맙게도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전향을 하고 생활을 하게 됩니다.
경비업체에 취직을 해서 범죄예방전문위원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면서 2000년에는 16살 연하의 여자 분을 만나서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결혼 후에 한 독지가가 도와 주셔서 선교회를 열게 되면서 기독교인으로 범죄예방을 위한 '범죄예방전도사'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습니다. 하도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2000년 11월에 일본에 신앙 간증 차 초청을 받게 됩니다.
신앙 간증을 하러가서 간증이 끝난 대낮에, 도쿄의 한 주택가의 빈 집을 털다가 일본 경찰의 쏜 총탄에 맞아서 체포되고 도쿄지방재판소에서 3년 6개월 형을 받고 살다가 감형이 돼서 2005년 3월에 한국으로 극비리에 귀국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그달 3월24일에 마포구에 있는 어느 치과의사 집을 털다가 경찰이 쏜 공포탄에 놀라서 붙잡히게 되고 다시 감옥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때 나이가 67세 이었습니다. 고희를 내일 모레 바라보고 있는 이 양반이 도쿄에 신앙 간증하러 갔다가 대낮에 빈집 털다 일본경찰에 붙잡혀서 일본에서 감옥살이 하다가 풀려나왔는데 한국에서 또 도둑질을 하다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67세에.
부인이 직업이 있으셔서 돈을 잘 버셨다고 그래요. 다 살만큼. 그 선교회의 목사님의 증언에 따르면 도둑질을 해야 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었다는 거예요. 하긴 도둑질을 해야 할 이유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어쨌거나 조세형씨의 헛 회개가 우리들의 상태를 그대로 나타내 줍니다. 도대체 도둑으로서의 그 뿌리가 제거되지를 않는 거예요. 기독교인으로 심지어는 범죄예방전도사 이름을 붙여 주면서 선교회를 세워서 활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도둑으로서의 그 뿌리가 없어지질 않습니다. 이게 우리예요. 우리의 영적인 모습입니다. 영적으로 보자면 우리 모두가 다 대도 조세형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볼까요? 여러분이 오늘 아침 일어나면서 자녀의 진학문제로 생각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도둑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훔친 도둑입니다. 자녀의 인생을 훔치고 있는 도둑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으면 선악의 판단이 중지되고 생각이 멈춰야지 왜 여러분이 생각을 합니까? 도둑질을 해서 내 주머니에 넣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사업을 지금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습니까? 큰 도둑입니다. 여러분이 도둑질을 하고 있는 겁니다. 아무리 회개를 해도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지를 않는 겁니다. 계속해서 도둑질을 감행합니다. 여러분이 생각으로 붙잡고 있는 모든 것들을 여러분은 도둑질 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과 저는 피조물로 태어났기 때문에 생각의 자유가 없어요. 생각의 자유가 없다고요. 그거 아십니까? 단지 자유가 있다면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정할 자유는 있지요. 하나님 밑에 머물지 않고 내 스스로 생각하는 자유인이 되겠다고 선택할 자유는 있지만, 생각의 자유가 허용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생각하면서 도둑질을 할 수밖에 없어요.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는 가장 깊은 뿌리가 '나'라고 하는 겁니다. 나.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대대적인 회개운동이 일어납니다. 대대적인 회개운동이 일어나는데 회개내용이 우선 이방인들과의 절교를 선언합니다. 끊어버리는 겁니다. 이방인과의 절교가 끝난 다음에 세 시간 동안 율법을 강독하고, 이어서 세 시간 동안 자기들의 범죄를 자복합니다.
그러고 나서 7절부터 마지막 38절까지 길게, 길게 아브라함을 선택한 하나님의 역사로부터, 자기 조상들을 끊임없이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하나님께 반역하는 자기의 선조들을 향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구원의 활동의 역사들을 다시 상기하게 되는데 회개운동입니다. 이 회개운동의 핵심은 ‘나’를 다시 찾는 겁니다. 이 '나'를 다시 찾지 않는 한 도둑으로서의 뿌리가 없어지지 않아요. 신앙 간증하러가서 도둑질을 합니다. 교회 들어와서 도둑질을 합니다. 이 '나'를 다시 찾지 못하는 한.
이 나를 찾기 위한 행동이 오늘 본문에서 어떻게 나와 있을까요? 우선 절교합니다. '이방인과 절교한다'는 것은 이 세상 속에서 나를 죽이는 것이고, 나를 포기하는 것이고 나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규정해준 나. '당신은 돈이 없는 사람이다. 당신은 못난 사람이다. 당신은 똑똑한 사람이다. 당신은 엘리트다. 당신은 누구다.'라고 이 세상이 정해준 나, 그 나를 끝내는 겁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기준에 의해서 '내가 부자다. 가난하다. 배웠다. 못 배웠다. 직업이 있는 사람이다. 직업이 없는 사람이다. 좋은 대학을 들어갔다. 못 들어갔다. 졸업했다. 말았다.' 등등 이 세상이 갖고 있는 기준에 따른 그 ‘나’가 온전히 죽지 않으면 도둑의 근성이 없어지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마태복음 6:31-32절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 모든 것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요.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있어야 될 것을 미리 아신다.”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도 이방인의 삶의 패턴과 삶의 풍습과, 하늘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들의 풍습을 완전히 구분을 해버립니다. 그런데 여전히 이방세계 속에서 찾은 나를 나로 알고 살고 있는 것이 도둑의 뿌리이고 나를 도둑질하는 겁니다. 이방인들과의 절교를 통해서 ‘나’가 죽어버리는 것이 회개의 절반입니다. 이방인과의 절교는 이 세상과의 절교예요.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동안 세상이 정해준 나로 '당신은 무능한 사람이야. 당신은 능력이 있는 사람이야. 당신은 돈이 있어. 당신은 배웠어.'라고 하는 이러한 '나'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왕도 죽고 왕비도 죽고 거지도 죽고 언젠가 말씀드렸습니다마는, 과부도 죽고 창녀도 죽고 다 죽는 겁니다. 이세상이 규정한 신분과 모든 것이 다 죽어야 됩니다. 그게 살아있는 한 도둑의 근성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그 나를 토대로 해서 그 나를 어떻게 바꾸려고 하고 향상시키려고 하고 유지하려고 하고 발전시키려고 하고 그러면서 계속 도둑질을 하게 되는 겁니다. 아무리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고, 그것은 조세형씨와 마찬가지로 아주 위험한 동거입니다.
'위험한 동거'가 뭐냐? 밴쿠버에 있을 때 극소수에 해당되는 것일 수 있겠습니다마는, 한국에서 유학 온 우리 자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애들이 말입니다. 이 아이들 중에 남녀 아이들이 동거를 합니다. 아주 극소수예요. 아이들을 유학 보낸 부모님들은 또 이 말씀을 듣고 우리 자식은 그러지 않느냐는 생각하실 것 없고 그저 하나님께 기도하시면서 믿어야지 어떻게 합니까? 극소수의 아이들이 그런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어떻게 하느냐? 너의 과거를 묻지도 않고 나의 과거를 얘기하지도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거예요. 그냥 편의에 따라서 동거합니다. 집세도 절반으로 내려가고 생활용품도 절반으로 내려가고 그리고 또 잠자리를 같이 합니다. 그리고 밴쿠버에서 떠나면 완전히 끊어지는 겁니다. 엄마가 누구냐? 아빠가 누구냐? 어느 학교를 졸업했느냐? 전혀 묻지 않고 서울에서는 집이 어디냐? 전화번호가 뭐냐?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냥 밴쿠버에 있는 동안에만 같이 지내다가 깨끗이 끝나는 겁니다.
조세형씨가 기독교인이 된 것이 바로 그겁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과 위험한 동거를 하고 있어요. 내가 필요한 것 하나님께 구합니다. 그리고 일이 안되면 회개합니다. ‘하나님!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라고 회개하는 이유가 무엇인가하면 일이 잘되게 하려고, 일이 안되었다고 하는 사실로 하나님께 돌아온 것 까지는 괜찮아요. 하나님이 안 되게 하셔서 돌아오게 하신 것이니까, 돌아와서 회개하는 마음이 그다음 일이 잘되게 하려 하고 또 일이 안 될까봐 회개합니다. 일이 안돼서 돌아 왔다면 오늘 본문에 율법을 읽고 그 다음에 아브라함으로부터 긴긴 역사를 회고합니다. 무슨 얘기이겠습니까? 돌아와서 이제는 넓고 깊고 광대하신 하나님 안으로의 여행을 진행하고 시작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을 해 나가야 되는 겁니다. 이 세상의 일이 잘 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알랑 코스 하는 게 회개가 아니라, 다음일도 큰일 날까봐 하나님의 벌이 내려서 일이 망할까 그래서 회개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겁니다.
‘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셨구나. 나의 조상이 아브라함이었구나. 조상들의 반복되는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셨고 오늘에 이르렀구나. 아! 내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구나. 나를 이제 이 세상에서 찾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찾아야 되는구나.’라고 하나님을 알아가야 됩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을 깊이 알고 하나님을 넓게 알고 하나님을 많이 알면 알수록 내가 누군가가 확실해 지면서 점점 더 도둑의 근성자체가 뿌리 뽑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이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겁니다. 전혀 도둑질을 하지 않는 자리로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넓게 모르면 나를 확고하게 찾을 수가 없습니다.
자, 주님의 십자가가 어디에 위치합니까? 세상과의 절교를 선언하는 자리입니다. 세상이 나에게 가르쳐 주었어요. 그런데 태 목사에게 이렇게 얘기해요. ‘아이고, 태 목사! 한심하다. 나이 50에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 번듯한 예배당 건물하나 없이 코딱지만한 장소 빌려서 선교회라고 아침마다 사람도 하나 없이 카메라 앞에서 혼자 설쳐대고 떠들고 누가 네 목소리를 듣고 누가 널 알아주느냐?’ 라고 세상이 말합니다. 정말 어느 교회 부목사님이 이진법복음 선교회 운운했더니 '이진법복음 선교회는 우리 교회와 잽이 안 되는데 뭘 걱정하십니까?'라고 했다는 겁니다. 정말 잽이 안 되지요.
이런 세상이 나에게 하는 규정. 내가 진짜 무능합니까? 내가 못 배웠습니까? 아니면 잘 배웠습니까? 아니면 돈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대우합니까? 돈이 없습니까? 무슨 상관입니까? 십자가에서 절교하는 겁니다. 그게 나가 아니에요. 내가 부자도 가난한 자도 배운 자도 못 배운 자도 아니고 왕도 대통령도 아니고 직업이 있는 자 없는 자가 아니고 다 죽어버리는 겁니다. 세상이 날 규정한 그 규정으로부터.
그러고 나서 어떻게 합니까? 진정한 회개가 이제 세상 속으로 헤쳐 나가던 세상에서 좀 더 잘 보이겠다고 긁어모으겠다고 헤쳐 나가는 그 방향을 돌려서, 광대하신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말씀에 침잠하는 겁니다. 말씀을 듣고, 듣고, 듣고 하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을 통해 알게 된 하나님, 그 하나님과 현실에서 동행하는 겁니다. 현실에서 동행하는 방법을 우리가 지난 밤 목요영성강좌 때도 함께 생각했습니다.
현실과 동행하는 방법이 뭐예요? 주어지는 현실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최선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착오가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지혜에 결함이 있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나의 생애를 주관하시는 그 섭리와 주권에 오류가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지금 내게 주어진 현실은 세상이 규정할 때는 모자라는 것이 많지만, 하나님 앞에서 찾은 내가 볼 때는 나를 위해 완벽하신 것이고 나를 위한 최선의 것입니다. 세상이 볼 때는 어떻든지 간에.
그러면 세상이 보는 관점을 붙잡고 있으면 도둑질하게 되고 이것을 개선하려고 하면 벌써 도둑질이 시작되고 대도의 헛 회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동행합니까? 주어진 현실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또 내가 사랑하는 적극적으로 사랑해야할 대상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내 가족과 내 사업과 모든 대상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려고, 역시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세상 대상자들에 대해 내가 죽은 자임을 고백하며 나가는 것이 진정한 회개의 삶입니다.
자, 여러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세상 속에서 나, '내가 이만하면, 내가 이런 사람이야.'라고 하는 그거 아니거든요. 내가 직장도 없어. 그거 아니거든요. 실업자가 당신의 신분이 아닙니다. 나는 어느 회사의 사장이야. 그게 당신의 신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신분이 아니에요. 그것을 갖고 있는 한 도둑질을 하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위험한 동거를 하고 있는 것이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나의 절교의 최 절정판은 뭐지요? 세상이 규정한 나를 십자가에서 죽은 것으로 인정하는 겁니다. 매일 아침. '그래 내가 못났다고? 웃기고 있네. 너희가 못났다고 하는 나는 죽었다. 내가 잘났다고? 웃기고 있네.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나는 죽었다. 십자가에서.'
그리고 하나님을 압니다. 나를 알려 하지 말고 하나님을 알다보면. 자꾸 말씀으로 들어가세요. 말씀을 깊이깊이, 넓게넓게 듣고 말씀에 빠지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점점 더 확실해지면서 거기서 내가 나타납니다. ‘아!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 자였구나. 내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정말 주님의 독생자의 희생을 치르고서 내가 하나님 품에 안길 수 있는 자로구나.’라고 나를 알게 됩니다.
이게 말은 다 아는데 실감이 안 나잖아요? '여러분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독생자를 희생하셨다.'라고 하는 말이 간단하잖아요. 이 사랑이 실감이 된다면 가슴이 터져나가지요. 그게 나예요. 그게 나! 그 나를 되찾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말씀을 통해 알게 된 하나님과 현실에서 동행합니다. 동행을 통해 말씀으로 알게 된 하나님이 더 확고해지고 더 실감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과 삶, 꼭 있어야 되지요.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세상과 절교하세요. 어떻게 절교합니까? 세상이 정한 내가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목사도 아닙니다. 아빠도 아닙니다. 나는 엄마도 아닙니다. 엄마이기 전에 아빠이기 전에 사장이기 전에 회사원이기 전에 학생이기 전에 다 죽고 하나님 앞에 벌거벗고 서있는 하나님의 아이일 뿐입니다. 아버지를 많이 알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나를 찾으면 드디어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기 전까지는 이 대도의 뿌리를 못 벗어나고 하는 것마다 도둑질이 될 것이에요. 오늘 도둑질 하지 마세요. 여러분! 도둑질하지 마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이 땅을 복되게 살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세상이 정해준 나 이것 죽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십자가에서 세상과 절교하며 세상이 정해준 나 죽게 하시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깊이깊이 알면서 그 하나님 앞에서 나를 되찾게 하여 주시옵소서.
분명한 하나님 앞에서의 나를 찾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짐을 보며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복지가 오늘도 하루 동안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