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반야심경ㅡ11
제법무아 고정된실체는 없다 ㅡ2
불교든 기독교든 무슬림이든, 인도의 어떤
사상이든, 모든 종교와 철학이 내가 있다는
아트만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의 99.9퍼센트는
아트만에 근거를 둔 인식과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말했고,
현대 과학에 와서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까지 밝혀졌지만, 이런 것들이
이해가 안 되니까 무아마저도 그냥
아트만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부처님께서는 ‘아(我)라고 할 것이 없다’,
‘나라는 것은 다섯 가지 쌓임(오온, 五蘊)에 불과하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아트만적
견해로 돌아가서 ‘그 다섯 가지는 불변하는
요소다’ 이렇게 이해하는 거죠.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외우고 설명하고 따라 하지만, 철학적 기반은 뒤바뀌어 버린 거예요. 무아가 아니라 유아로 가버렸어요.
‘불성이 있다’, ‘불성을 찾아라’,
‘불성을 깨달아라’ 이렇게 얘기하면 벌써 아트만론(論)에 빠져 버립니다.
‘누구나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부처가 될 수 있다.’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불성이 있다’ 이렇게 설명하면, 다시 ‘불성을 찾는다’ 하는 식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해하다 보니까 사람들은 어딘가에 ‘참나’라고 하는 변하지 않는 불성이 있는
줄 알아요. 역사적으로도 끊임없이 유아적,
아트만적 개념을 갖고 무아를 이해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니까요.
그런 과정을 거쳐 본래 부처님 가르침의 의미가 바뀌게 되는 거예요.
세상이 신분 제도를 두면 불교도 거기에 맞추려고 하다 보니까, ‘전생에 복을 많이 지으면 양반이
되고, 죄를 지으면 상놈이 된다’ 이렇게 얘기하고, 세상이 가부장적 제도를 두면 ‘복을 지으면
남자가 되고 죄를 지으면 여자가 된다’ 이렇게 얘기하게 된 겁니다.
이것은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라 봉건 질서에 부합하는 논리로 바뀌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법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무상하고 무아이기 때문에 공하다
사람의 눈으로 우주를 보면 공이에요.
허공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눈으로 지구를 보면 색이에요.
꽉 찼어요.
그렇듯이 우주의 눈으로 우주를 보면 꽉 찼겠죠. 우주의 눈으로 우주를 본다면 색이에요.
그런데 원자의 눈으로 지구를 보면 공입니다.
텅텅 비었어요. 원자의 눈으로 원자를 보면 색입니다. 소립자의 눈으로 원자를 보면
공이에요.
그러니 색이라는 것과 공이라는 것은 결국 같은 거예요. 그래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존재는 똑같은데, 멀리서 보면 색이고, 가까이 가서 보면 공입니다.
이렇게 오늘 강의에서는 모든 존재가
공하다는 것을 다시 정신현상, 생명현상, 물질 현상의 3가지 차원에서 설명했어요.
물론 반야심경은 물질 현상이나 생명현상을
갖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현상을 설명한 것입니다.
내가 뭔가를 알 때, 눈으로 보고 알거나, 귀로
듣고,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감촉해서, 혹은 생각해서 압니다. 이게 색이에요.
색은 실체가 없고 항상 함이 없습니다.
색이 일어날 때, 기분이 좋거나 기분이 나쁜
느낌이 일어납니다.
눈으로 볼 때, 냄새 맡을 때, 맛볼 때,
감촉할 때, 생각할 때 느낌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수(受)입니다.
색이 공하듯이 수도 또한 공(空)합니다.
아는 것(색, 色)과 느낌(수, 受)은 우리에게 기록되어 있고, 그것을 꺼내서 쓸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분류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상(想)이라고 합니다.
상도 실체가 없고 항상 하지 않고 변합니다. 공합니다.
‘이래야지’, ‘저래야지’, ‘이거 하고 싶다’,
‘저거 하고 싶다’ 하는 의지 작용인 행(行)도
항상 하지 않고 실체가 없습니다. 담배를 하나 피우고 싶다는 욕구가 일어나면, 담배를
피워야 할 것 같지만, 가만히 있어보면 죽을 것 같다가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담배 피우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가라앉습니다.
이것도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일 뿐이에요.
이 사실을 직시해야 거기에 끌려 들어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인지하는 것과 옳으니 그르니, 맞느니
틀리느니 하고 분별하는 식(識)도 다
실체가 없고 영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살아오면서 어제 옳았던 것이
오늘 그른 경우를 경험하죠.
조선 시대 옳았던 것이 지금 보면 그른 것이 있잖아요. 식도 변하는 겁니다.
항상 옳다고 할 어떤 실체도 없습니다.
이렇게 나라고 할 어떤 실체도 없다는 것을 소승불교에서는 ‘무아’라고 했고,
대승불교에서는 ‘공’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사람들이 ‘진리가 있다’
이렇게 주장하니까 부처님께서는 ‘이것이
진리라는 실체가 없다’라는 뜻으로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제법개공(諸法皆空 )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렇게
이해해야 된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 반야심경이고,
대승불교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대승불교는 표현 양식으로 보면 새로운 불교이고, 내용으로 보면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동하합장()()()♥
꽃사진ㅡ이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