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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의 광채
전도서 8 : 1 - 8
오늘 봉독한 말씀 가운데서 특별히 하반절의 1절 말씀을 중심해서 생각하려고 합니다.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매우 의미 깊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우리가 인생의 살아가는데 얼마나 필요한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씀하는 지혜는 무엇일까요? 이미 우리가 잠언을 생각할 때 잠언 기자 솔로몬이 정의한 지혜를 이 전도서를 쓸 때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잠언 9장 10절에 지혜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참 지혜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동방의 박사들의 지혜를 말씀하였습니다마는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특별한 별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아기 예수님을 만나 뵐 수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것을 초월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것이 그치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를 경외하여 그의 뜻에 따르려 하는 사람은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말하자면 지혜있는 생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음의 눈으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마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우리도 온전한 자리를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편지하면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가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하였습니다(에베소 4:13).
우리 믿는 사람의 생활을 그저 한 마디로 말하면 주님을 닮은 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성품이 주님의 성품과 같아지고, 우리의 생활이 주님의 생활과 같아지고, 우리의 생각이 주님의 생각과 같아지기 위하여 힘쓰는 것이 믿는 사람의 생활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디모데전서 4:7).
경건이라 말은 하나님 닮은 생활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경건에 이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연습이란 말은 영어로 하면 exercise 혹은 training 연마하여 익힌다고 하는데 습득한다는 뜻입니다. 같은 일의 반복입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 신앙 생활을 가리켜서 풀무불에 연단한 금으로 비유되어 있습니다. 연습을 통해서 그 믿음이 빛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 주님을 닮는 생활을 하려면 끊임없이 연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에 이르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심령은 말하자면 어린 아이와 같은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성한 하나님의 자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은혜와 진리에 자라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닮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고 했습니다.
신앙 생활일 무엇입니까? 주님을 바라보는 생활입니다. 여러분 오늘 저녁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목사의 얼굴 보러 오셨습니까? 여러분, 목사 바라보다가는 실망할 분 많습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람 바라보지 않아야 합니다. 물론 신앙 생활 하는데 교회의 지도자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역자나 교회의 중책을 써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본의 아니게 잘못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실수하는 일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바라보는 동안은 절대로 낙심하거나 실패할 염려가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늘 바라보면 나도 모르는 동안에 닮게 되어 있습니다.
오랫동안 해로하며 잘사는 부부를 보세요. 내외간이 어딘지 모르게 닮아 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가정 생활을 처음 할 때는 아무리 연애를 해서 결혼했다고 하더라도 서로 성품이 맞지 않는 데가 있어서 마찰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러기를 10년 20년 30년 40년쯤 살게 되면 남편은 아내 닮아가고 아내는 남편 닮아가기 때문에 서로 잘 조화가 됩니다. 젊어서는 대판 싸움이 붙을 만한 일이 있어도 오래 같이 사신 분들은 그저 다 서로가 아니까 싸우지 아니하고 잘 넘어 갑니다. 왜 그래요? 서로가 닮아서 그럽니다.
아마 여러분은 어네스트 죤스의 “위대한 돌 얼굴”(The Great Stone Face)이라는 책의 이야기를 다 들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어느 시골 동네 맞은편 산에 바위가 큰 것이 있는데 그 바위는 자연석인데도 멀리서 보면 아주 인자하면서도 위엄이 있어 보이는 사람의 얼굴처럼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동리에 내려오는 한 이야기로 “저 돌과 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 우리 동리에 오게 되면 우리 동리가 큰 축복을 받는다”고 하여 왔습니다.
한번은 공부 많이 한 훌륭한 사람이 지나가는데 바로 그가 저 바위와 같은 얼굴을 한 훌륭한 분이라고 동리 사람들이 다 나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이 돌 얼굴처럼 생기지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실망하고 돌아갔습니다.
얼마 후에 권세 많은 사람이 지나가는데 바로 그 분이 우리가 기다리는 돌 얼굴과 같은 사람이라는 소문이 퍼져서 그 동리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고 또 모여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권력가를 자세히 보니 그도 역시 같지를 않았습니다.
이러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그러나 번번히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입니다. 서산에 해가 지려 할 무렵 앞 산 붉은 햇빛이 비치는데 그 바위 얼굴을 홍안 소년처럼 보였습니다. 들에서 일을 하다가 괭이를 메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년 농부를 보고 옆에 있던 사람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은 그 농부의 얼굴 모습이 어쩌면 저 바위 얼굴과 꼭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동리에 들어서며 외쳤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던 분이 여기 계십니다!” 그러나 처음에 동리 사람들이 별로 반응이 없었습니다. 하도 여러 번 속아서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도 간절하게 말해서 한 두사람씩 나왔다가 이 중년 농부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자기들이 찾는 바위 모습의 얼굴을 한 사람이 바로 자기 동리에서 자란 분인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안 일입니다마는 이 중년 농부는 어릴 때부터 아침저녁 앞산의 바위를 바라보면서 “내가 저 바위와 같은 인자하고 위엄 있는 얼굴의 소유자가 되었으면”하고 언제나 바라보고 흠모하는 가운데 그 얼굴의 모습이 닮아 갔다고 합니다.
늘 바라보면 닮아 갑니다. 바라보는 것은 사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성품을 사모하는 것, 주님의 인격을 사모하는 것, 주님의 생활을 사모하는 것, 이것이 사실 신앙 생활입니다.
사람이 바라보는 데 따라서 그 사람의 생활이 달라집니다. 옛날 롯은 소돔과 고모라 지방의 푸른 풀밭과 비옥한 땅만 바라보았습니다. 그 속이 얼마나 죄악이 넘치고 있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바라보면 자연히 따라 갑니다. 세상의 영광 바라보면 자연히 그리로 따라 갑니다. 세상의 향략 바라보면 그리로 따라가게 됩니다. 바라보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십니까?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의 신령한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왔는데 그 얼굴이 어떻게 되었어요? 무엇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광채가 발했어요.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면 우리 얼굴에 광채가 납니다. 사나운 얼굴도 변하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저녁 예배당에 오셔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바라 뵙고 돌아가실 때는 광챈가 나는 얼굴로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것 바라보면 우리 얼굴에서 광채가 없어집니다. 돈 바라보면 욕심이 생겨서 얼굴이 어두워집니다. 명예 권세 바라보면 권세욕 생겨서 얼굴이 어두워집니다. 육신의 향락 바라보면 정욕 생겨서 어두워집니다.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납니까? 히브리서에 보면 주님을 바라볼 뿐 아니라, 늘 주님을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닮으려면 주님을 언제나 생각해야만 합니다.
길을 갈 때도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일할 때도 주님을 생각하면서 일해야 합니다.
말을 할 때도 주님을 생각하면서 말해야 합니다.
공부할 때도 주님을 생각하면서 공부해야 합니다.
장사할 때도 주님을 생각하면서 공부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할 때도 심지어 잠을 잘 때도 주님을 생각하며 잠을 자야 합니다.
형통한 일을 당해서 기뻐도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어려움 당해서 괴로워도 주님 생각하므로 낙심하거나 지쳐 버리지 말고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파스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갈대와 같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이다.” 매우 뜻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연약하기가 갈대와 같습니다. 그러나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생각하는데 따라서 사람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잠언에도 ‘그 생각이 어떠하면 그 사람이 그러하고“하였습니다. 생각이 우리의 생활을 좌우합니다. 인격을 좌우합니다.
남의 물건을 보아도 훔칠 생각을 하는 사람은 그냥 보지 아니하고, 어떻게 하면 저 물건을 훔칠까? 하고 봅니다. 음탕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사람을 볼 때 그냥 보지 아니하고 음란한 눈으로 봅니다. 사기꾼은 언제나 속일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얼굴에 빛이 있을까요?
마음에 사랑이 없고 기쁨과 평화가 없는 사람은 밤낮 미워하는 생각, 원망의 생각을 품고 있으니까 그 얼굴에 빛이 있을까요? 얼굴에 빛을 잃고 맙니다.
그러나 마음에 언제나 선한 생각을 하면 어떨까요? 남을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셨습니까? 마음에 기쁨과 만족 그리고 감사가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세요. 남을 도울 생각을 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세요. 그 얼굴에 광채가 납니다.
Thomas a Kempis의 「Imitation of Christ」(그리스도를 본받아)하는 책의 내용은 언제나 무엇을 하든지 주님만을 생각하며 ‘주님이 만일 이것을 하신다면’하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의 생각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으려 애쓸 때 자연히 주님을 닮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닮는 생활 그것이 곧 신앙 생활이 아닙니까?
우리 찬송가에도
“너 성결키 위해 네 머리 숙여 저 은밀히 계신 네 주께 빌라
주 사귀어 살면 주 닮으리니
널 보는 이마다 주 생각하리“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40쯤 나면 그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뜻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40쯤 나면 어느 정도 그 인격이 조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 우리 젊은이들 여러분 계신데 여러분이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남을 시기하는 생각을 늘 하게 되면 그 얼굴이 시기에 찬 얼굴로 일그러지고 맙니다. 남을 미워하고 헐뜯는 말하고 살면 여러분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분의 얼굴에서 빛은 사라지고 미움이 가득찬 얼굴로 변해 버리고 맙니다.
어린아이 때는 누구나 똑 같습니다. 그 눈을 보세요. 어린 아기의 눈은 조용한 호수같이 맑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 나쁜 것 바라보고 좋지 않은 것 생각하는 동안에 이 눈이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혈기를 한번 내면 핏줄이 하나 더 늘어납니다. 그래서 그렇게 아름답고 깨끗하던 눈이 시뻘겋게 돼 버리고 맙니다.
베드로전서 3장 3-4절에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은 온유하고 안정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마음에 사랑을 품으세요. 평화를 가지세요. 기쁨을 가지세요. 그대 여러분의 얼굴이 빛납니다.
저는 관상을 보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을 많이 상대하다 보니까 자연히 그 얼굴에서 그 사람의 마음을 대개 읽을 수 있습니다. 얼굴만 한번 보고, 그 눈빛만 한번 쳐다봐도 그 사람의 성격같은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제일 불쌍한 사람은 얼굴에 빛을 잃은 사람입니다. 세상에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기에 얼굴에 핏대를 들어내고 빛을 잃어버린 생활을 하겠습니까? 내려오는 말이 “일노일노 일소일소” (一怒一老一笑一少)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번 성내면 한번 늙고 한번 웃으면 한번 젊어진다는 뜻입니다.
전에 안창호 선생님은 웃음을 잃어버린 우리 국민에게 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이 “여러분 벙글벙글 웃으며 삽시다”하였습니다. “웃는 얼굴에 침뱉지 못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여러분, 웃으면 웬만한 걱정은 다 물러가고 맙니다. 그러나 얼굴을 찡그리면 별 것 아닌 것이 심각해집니다.
저는 예배가 끝나고 나갈 때 성도들과 인사를 나누는 기쁨이 있습니다. 만나서 반갑고 또 은혜 받고 기쁨으로 나아가는 모습, 서로 인사하며 헤어질 때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우리 갈보리교회 성도들 대개는 인사도 잘하고 웃으면서 대하는 교양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그렇지 못한 분이 눈에 띄일 때가 있습니다. 아마 다른 교회에서 손님으로 오신 분일 거예요. 기왕이면 웃으면서 인사하면 서로가 기쁜 일인데 어떤 분은 아직 늙지도 않았는데 얼굴이 아주 굳어져서 웃을 줄을 모르는 분이 계셔요. 아마 자기 남편한테나 부인한테는 그렇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교회 오셔서 성도 사이에 만나서, 더구나 교회 목사가 웃으면서 인사하면 웃으면서 인사를 받지야 못하겠어요?
처음에 잘 안되시면 좀 연습하세요. 좋은 연습은 유익한 거예요. 그때그때 기도하세요. “주님 도와주세요”하고.
생각은 우리 마음일 뿐만 아니라 외모에 비칩니다. 우리 마음에 근심이 늘 있고 기분이 나쁘면 그 사람의 얼굴에는 구름이 돌고,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인상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사랑이 있고 평화와 기쁨이 있으면 자연히 그 사람이 얼굴에는 화기가 돌고 빛이 있고 남 보기에도 부담이 없고 기쁨이 줍니다.
잠언에 보면 “마음의 즐거움이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언 15:13) 하였느니라.
끝으로, 얼굴에 광채가 나려면 주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나는 마음의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주님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온유와 겸손은 우리 주님의 근본 성품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라고 하는 우리가 이 성품을 배우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여러분, 배운다는 것은 듣는 것, 보는 것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이해하는 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실지로 해야 합니다.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우리 생활 가운데서 나타내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교만하고 강퍅한 사람의 얼굴에는 빛이 없습니다. 그러나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에겐 그 얼굴에 빛이 있습니다. 저는 어떤 좌석에서 교회에 다니는 직분까지 맡은 분인데 그렇게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고 말썽을 부리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 “그 분은 교회는 오랫동안 다녔고 직분까지 맡기는 했지만 예수님은 한번도 만나 보지 못한 모양이지요”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거 큰 일입니다.
그리고, 정말 우리 얼굴에 빛이 나면 내가 말하기 전에 다른 사람이 압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정말 우리는 아씨시 성의 프란시스처럼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로서의 사명을 다 해야겠습니다. 태양처럼 빛나지 못해도 태양 광선을 반사하는 달처럼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의 빛, 온유의 빛, 겸손의 빛, 봉사의 빛을 이 세상에 반사하게 되기는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