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가복음 5장
귀신을 제어하시는 예수님 막 5:6-8
우리는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3:8)는 말씀의 확증을 얻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거라사인의 지방에 오신 것을 단 하나 본문의 귀신을 제어하기 위한 목적에 맞출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일로 인해 데가볼리 지방에 복음이 전파되었으므로 (막5:20) 복음 전파에 그 목적이 맞춰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복음 전파 역시도 '마귀의 일을 멸하는' 일에 속하는 것이므로 결국 예수님께서는 작게는 이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려 거라사 지방에 오신 것이요, 크게는 마귀의 목적하는 바 모든 일을 멸하러 오신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본문에서 귀신을 제어하시는 예수님을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귀신에 의해 입증되는 예수님의 신성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귀신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 백성들을 괴롭히는 존재이지만 그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의 입을 열어 그리스도의 위엄과 존귀와 영광과 권세를 고백하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선한 천사이든 악한 천사이든 천사역시도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시148:2-5;골1:16) 그래서 악한 천사의 우두머리인 사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에는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욥1:6-12;2:1-6) 우리는 흔히 귀신이나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필적할만한 상대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예수님의 샹대가 되지 못합니다. 사탄이나 귀신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에게 상대적인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사탄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그 능력의 차이는 상대적인 차이가 아니라 절대적인 차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기록하기를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들이 아무리 최후의 발악을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다 하더라도 기껏해야 '발뒤꿈치를 상하게 하는' 행위일 뿐이라고 말해 줍니다. (창3:15) 이것이 사탄의 한계입니다.
2. 예수님을 거절하는 귀신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이는 사탄이 자신의 사악함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메시야로서 이 땅에 오신 것을 알면서, 그리고 그의 권위와 권세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와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와 관계를 가지려 한다면 오직 두려워하고 두려움을 주는 관계에서만 가지려 합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주님께서 함께 있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그에게는 주님께서 떠나 있든지 그가 주님을 떠나든지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사탄은 이러한 속성을 그 혼자만 가지지 않습니다. 사탄은 이러한 속성을 사람들의 마음 속에 집어넣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멀리하게 하고 그와 관계를 맺는 것을 두려워하게 합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시는 것을 거부하게 하며, 영생을 얻게 하고 삶을 풍성하게 하는 예수님의 초청을 거절하게 합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이러한 마음을 성도들에게까지 집어 넣어 성도들의 입에서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합니다. 사탄이 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를 전혀 상관없는 관계로 만드는 것입니다.
3. 귀신을 제어하시는 예수님
'이는 예수께서…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원천적으로 예수님을 거절한 것은 귀신이었지만 그 말은 사람의 입을 통해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귀신들린 사람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그에게 그러한 책임을 묻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셨습니다. 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귀신이 떠나간 온전한 영혼과 평안한 육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에 얽매여 무덤을 떠나지 못하는 그에게서 귀신을 내어쫓고 무덤을 떠나 정상적으로 사람들과 함께 살게 해주셨습니다. 비록 그가 자신을 배척하는 말을 하였지만 주님께서는 귀신을 내어쫓아주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정상적으로 살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든지 이러한 일을 하십니다.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이러한 일을 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창조 원리대로 정상적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간들에게 대해서 선한 의도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선한 의도를 성취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능력으로써 사탄의 궤계를 물리치시고 인간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완전한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이제 문제는 인간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 길을 선택하는 자에게는 영원하고도 풍성한 삶이 공급될 것이며, 걸절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죽음과 함께 일생동안 고통스러운 삶만 계속될 것입니다.
군대귀신과 예수님 막 3:9-13
본문은 군대 귀신이 들렸던 사람을 예수님께서 능력과 지혜로 쫓아내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함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살펴봅시다.
1. 귀신의 능력은 예수님의 권능과 비교되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본문을 통하여 보다 분명하게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1) 귀신에게는 인간을 지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귀신은 사람속에 들어가 육체와 정신을 지배하는 귀신들입니다. 본문의 앞부분에서 그것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1-5절) 귀신은 사람을 집에서 불러내어 늘 무덤 속에서 거처하게 했으며, 밤낮으로 무덤 사이로 산으로 돌아다니며 소리지르고 돌로 제 몸을 상하게까지 했습니다. 이와 같이 귀신은 사람을 지배하여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귀신이 소유하고 있는 능력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1) 사람에게 질병을 가져다 줍니다. (눅13:11,16) 2) 인간의 신앙심을 발동시켜 경배를 받고자 합니다. (고전10:20) 3) 인간의 도덕률을 지배하여 그릇된 가치관을 가르칩니다.(딤전4:1) 이처럼 귀신은 사람보다 능력이 앞선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능력으로 사람을 언제나 해롭게 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방해하기 위해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두루 찾아 돌아다닙니다.
2) 귀신은 예수님 앞에서는 무력한 존재입니다.
사람 속에 들어가 그토록 못살게 고통을 주던 귀신도 예수님이 나타나자 꼼짝을 못했습니다. 9절을 봅시다. 이 귀신은 예수님 앞에서 벌벌 떨며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예수님의 어떠한 말씀이나 질문에도 귀신이 거부하거나 그 앞에서 대적하거나 도망갈 수는 없습니다. 또한 놀라운 사실은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귀신은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로마 군대는 약 삼천 명에서 육천 명 정도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수의 귀신이지만 한 분이신 예수님을 대적할 수는 없었습니다.
3)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능력을 소유한 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전능하신 분이기에 우리 성도들은 소망이 있습니다. 비록 귀신이 아무리 인간을 지배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귀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귀신의 어떠한 능력도 능히 이길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귀신의 역사가 임할 때 먼저 능력 많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합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비결인 것입니다.
2. 귀신의 지혜는 스스로 자멸하는 지혜입니다.
1) 귀신의 지혜는 사람의 지혜를 능가합니다.
군대 귀신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때까지 깨닫지 못했던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그 사실을 말했습니다.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7절). 귀신은 첫째로,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둘째로,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곧 귀신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바로 이 사건 전에 예수님께서 바람을 그치게 하시고 바다의 큰 파도를 잠잠하게 하셨을 때, 제자들은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막4:41)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귀신은 이와같이 지혜와 분별력이 뛰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을 의지하여 귀신의 궤계에 유혹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2) 귀신의 지혜는 예수님의 지혜에 의해서 괴멸됩니다.
교활한 귀신은 지혜를 짜내어 예수님의 심판을 피하려고 했는데, 그 지혜는 '사람에게 나와서 돼지에게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사람의 구원에 있는 것을 알고 돼지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12절) 예수님은 이것을 허락하셨는데, 그 결과 돼지떼들은 놀라서 바닷 속으로 뛰어들어 몰사하고 말았습니다. 귀신의 지혜는 자멸의 지혜였습니다. 예수님의 심판의 방법은 이와 같이 악인의 뜻에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롬1:24) 그드르이 계획이 그들에게 파멸을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지혜였습니다.
주님을 떠나보낸 거라사인 막 5:14-17
주님의 허락으로 악한 귀신들이 돼지떼에게 들어가자 자그마치 이천마리 가량의 돼지가 광란을 하며 바닷물에 뛰어들어 몰사를 해버리는 무서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만약 그 귀신들이 거라사 주님들에게 영향력을 미쳤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 주민들은 주님의 깊으신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죽은 돼지떼만 아까와하며 주님을 배척했습니다. 저들은 땅의 일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 그들의 관심
1) 이기적인 관심만 가짐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촌에 고하니'(14절). 기르던 돼지떼가 갑자기 몰사하자 그들은 즉시 주민들에게 달려가서 이 사건을 알렸습니다. 저들은 평소에 불행한 이웃이 귀신에게 사로잡혀 가정과 사회를 등지고 묘지 사이를 방황하며 신음할 때, 그를 동정하며 관심을 가져 주고 도와 주는 일에는 무심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의 재산이 돼지들이 피해를 당하자 지체하지 않고 온 주민들에게 소식을 전하며 큰 소란을 벌이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사는 사회는 더욱 이기주의가 기승을 부립니다. 불행한 이웃을 돕는 일에는 비협조적인 사람들이 자기들 아파트 상가 내에서 가난한 행상 아주머니가 광주리에다 물건을 파는 것이 미관상 불쾌하다 하여 장사를 금지시키는 것이 현대사회의 이기적 사고방식입니다.
2) 물질에만 관심을 둠
'그 어떻게 된 것을 보러 와서'(14절) 그들은 소식을 듣고 곧 달려왔습니다. 그들이 온 이유는 주님을 보러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이천 마리의 돼지 생각만하고 달려나온 것입니다. 참으로 육체의 욕심만을 따라 움직이는 유물주의자들로서 물질때문에 주님을 배척하는 불쌍한 영혼들입니다.
2. 세속적인 시각을 가짐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 하더라'(15절) 그들은 귀신들렸던 사람이 구원받고 치료받은 것을 보고 기뻐하며 같이 즐거워해 주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워 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닷물에 둥둥 떠다니는 죽은 돼지들에게 눈길이 먼저 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선하고 좋은 일에 즐거워하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불우한 장애자들의 재활원과 교회를 건축하는 일은 선하고 좋은 일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그 장소가 자기들 동네로 지정되자 자녀들 교육과 집값에 지장이 있을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대인들의 비틀린 시각입니다. 또한 저들은 주님의 은혜의 행위를 형벌로 보았기 때문에 두려워했습니다. 저들은 돼지의 죽음만 보았지 돼지 안에 갇혀 바다에 잠긴 악하고 무서운 군대 귀신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은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머무르게 되면 더 많은 형벌을 당할까봐 두려워한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와 생명의 주님을 눈앞에 모시고도 탐심에 눈이 어두워져서 하늘의 축복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주님의 뒤를 따르노라면 때로는 시간과 물질과, 그리고 꿈들을 세월의 바다 깊은 곳에 부어버리며, 허비하는 것처럼 느껴질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은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가 영원하고 온전한 것들을 얻는데 거침돌이 되는 것을 제거하시는 지혜로우신 섭리임을 믿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빌3:7,8) 그러므로 성도는 추한 물욕으로 인해 신령한 눈이 가리워지는 일이 없도록 늘 성령님께 도움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3. 땅에만 소망을 가짐
'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기를 간구하더라'(17절). 거라사인들은 내일의 영광을 포기하고 오늘에 안주하기만을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께 '떠나가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영접하고 영생을 얻으며 주님과 더불어 진리의 길을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돼지 떼속에 들어가 안주하기를 원했던 귀신들과 동일한 희망을 주님께 원했습니다. 저들은 '한 그릇의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히12:16)들이요, 내일을 부정하고 오늘만을 가치있게 여기는 허무주의자들인 것입니다. (고전15:32,33)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의 독생자는 우리의 고통의 문제에 동참하시고자 영광스러운 보좌를 버리고 아수라장 같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도들은 바로 그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기에 세상 사람들처럼 나의 안일만을 추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안일을 추구하는 사고방식은 앞에 있는 영광의 약속을 잃어버리게 하고 성도의 신앙을 여리고로 후퇴시킵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하나님 아버지의 고속의 은혜를 헛된 것으로 여기는 거라사인들의 세속적인 사고방식에 물들지 않도록 믿음을 지키며(고후6:1,2). 안일주의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바울 사도처럼 오직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잡기 위하여(빌3:14) 열심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길로 가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빌3:20)
삶과 죽음의 문제 막 5:21-24
본문에 보면 가버나움의 회당장인 야이로가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간구하기를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23절)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군중들과 함께 계셨으나 개인의 급박한 호소에 귀를 기울이시고 즉시 그를 따라 그의 집을 향해 가신 것을 볼 때 예수께서는 '많은 수'의 사람보다 '한 사람'의 위급한 상황에 관심을 갖고 계심을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수'를 빙자하여 '소수'를 무시하는 일을 예수께서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마16:26) 가르치시고 아흔 아홉마리의 양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것(마18:12)이 마땅하다고 교훈하신대로 죽어가는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그날의 사역의 우선권을 거기에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
1) 죽어가고 있는 야이로의 딸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22,23절)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지금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거의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이로의 어린딸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두가지의 진리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운명적으로 죽음을 전제로 한 것이므로 태어난 모든 인간은 실제로는 '죽어가고 있는 생명'이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인간의 삶은 죽어가고 있는 삶이며 하나도 이에 예외된 자는 없습니다. 둘째는 인간의 죽음은 남녀 노소의 구별없이 다가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은 좋은 예로 아버지는 건강하게 살아 있는데 어린 딸이 먼저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죽음의 역사는 부모인 아담과 하와가 살아있을 때 둘째 아들인 아벨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창4:8) 이는 죽음의 시간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아무도 이를 알 수도 없고 거기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운명적으로 수용할 뿐입니다.
2) 죽음의 성격
(1) 죽음의 시간은 하나님에 의하여 정해져 있음으로 인간은 아무도 이를 거역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날만큼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2) '죽음'의 시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결정되는 시간입니다. 죽음으로써 자기 인생의 삶이 다시는 변경될 수 없는 삶으로 확정됩니다. 죽음의 시간이 오기 전에는 인간은 자기 운명을 변경시킬 가능성이 부여되어 있으나 그것은 죽음과 더불어 철회되어 버립니다. (3) 죽음의 시간은 모든 것을 포기하는 시간입니다. 이 세상에서 얻은 생명, 소유, 관계 등을 다 포기하는 시간입니다. 심은대로 거둘 수 밖에 없는 운명이 결정되는 시간입니다. '심판'의 증거가 확정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야이로가 그 땅의 죽음이 오기 전에 예수께 나아온 것처럼 '죽음'의 시간이 오기전에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2. 죽음이 오기전에 그리스도를 만나야 할 이유
1) 죽어가고 있는 삶을 살려내기 위해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23절). 회당장 야이로는 죽어가고 있는 어린 딸을 살리기 위하여 예수에게 찾아왔습니다. 회당장은 회당의 예배를 지도하고 가르치고 장로들의 모임에서 의장이 되었습니다. 당시 야이로와 같은 회당장들은 예수를 이단시하고 적대시했으나 야이로는 예수께 찾아와 그 발 아래 엎드리어 간청했습니다. 환란은 믿음을 길러내는 토양이 되고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망치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현명하게 합니다. 모든 인간은 야이로의 딸처럼 죽어가고 있고 살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그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입니다. 세상의 지식이 죽음에서 인간을 구해낼 수 없습니다. 세상의 의술이, 재물이, 권력이 인간을 죽음에서 건져낼 수 없습니다.
2)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구원이 예비되어 있음.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23절) 야이로는 예수께서만 죽어가고 있는 딸을 살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사실 속에서 우리는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안에 예비되어 있는 구원을 내것으로 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 뿐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죽음보다 강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진 여인 막 5:25-29
당시의 의술로는 치료가 불가능했던 혈루증을 열두해 동안이나 앓고 있던 가련한 여인이 '예수의 옷을 만짐'으로써 그의 삶이 완전히 변화되는 놀라운 사건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절망과 영적인 기갈 상태에 빠져 있는 많은 영혼들에게 새로운 힘과 소망을 안겨주는 복된 소식인 것입니다. 이제 본문에 나타난 여인의 신앙과 그에 따른 축복 속에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여인의 상태
1) 절망적인 환경이었습니다.
열두해 동안이나 고질병을 앓고 있던 여인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절망의 상태에 놓여있는 인생을 의미합니다. 그녀는 육체적으로 쇠잔해졌으며, 앞으로의 삶에 대해 아무런 소망도 없었고, 사람들로부터 커다란 실망도 받았으며 더불어 효험도 얻지 못하면서 재산만 허비했을 뿐입니다. 이제 위로받을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잃어버린채 절망 속에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에게도 주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의 날, 소망의 날이 도래하였습니다.
2) 예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깊은 절망의 늪에 빠져 있던 여인이 어느 날 예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즉 구원의 복된 종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셨으며, 병든 자를 위해 대 의사로 오신 예수에 관한 소식은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들었던 어떤 소문보다도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헛된 소문에 이끌려 괴로움을 겪었던 지난 무익했던 세월을 온전히 보상하고도 남을 놀랍고도 복된 순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그럴듯한 온갖 세상의 소리는 우리를 더욱 깊은 절망의 늪으로 몰아가는 유혹 뿐입니다. 우리는 오직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된 음성에만 우리의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2. 여인의 신앙
1)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옵니다. (롬10:17) 예수의 소문을 듣는 순간 그 여인은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무한하신 능력과 자비와 긍휼을 가지신 분이심을 믿었으며, 능히 죄인을 구원하실 구주심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불행한 자신을 전적으로 예수님의 능력에 의지하는 큰 믿음을 가졌으며, 감히 부정한 몸으로 예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어 무리에 섞에 뒤로 가서 그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겸손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복음을 듣고 믿는 순간 헛된 세상의 것들을 온전히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우리의 구주와 피난처로 삼는 확실하고 겸손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주님만을 바라보는 신앙이었습니다.
여인은 구원이 자신의 행위나 노력으로 인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얻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엡2:8,9) 그러므로 자신의 불결한 상태나 인격이나 환경 등을 바라보면서도 예수께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상한 갈대로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사42:3)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클지라도 담당치 못할 것이 없으시며, 죄의 상처로 인해 아파하는 우리를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기 위하여 날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부족하고 연약한 모습을 바라보고 주께 나아가기를 망설이다가 기회를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날 위해 돌아가신 주님께 내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주님만을 바라보는 간절하고 열심 있는 신앙의 소유자가 됩시다.
3) 적극적인 신앙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병석에 있던 여인은 거동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더욱이 쇠약해진 몸으로 아우성치는 많은 군중들을 헤치고 예수께 가까이 접근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께 근접하여 그의 옷자락을 만지기 위해서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고 사력을 다해 다가갔습니다. 소망을 이루기 위한 간절한 심정, 예수께 대한 적극적인 신뢰가 여인으로 하여금 일어나 나아가게 했던 것입니다. 이 적극적인 자세야말로 안일만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과 간절하고도 적극적인 믿음은 우리에게 기적을 불러오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3. 믿고 행한 결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확고하고 적극적인 믿음으로 주께 나아가 그의 옷가를 만진 여인은 그토록 오랫동안 괴롭혀왔던 병이 깨끗이 나음을 받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긴 세월 동안 죄의 늪에 빠져 있던 영혼도 믿음으로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옷가만 만져도 넘치는 평안과 기쁨과 새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믿음 막 5:30-34
본문의 내용은 가버나움의 한 여인이 열 두해나 혈루증으로 고생하면서 여러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약도 쓰고 치료를 받았으나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심하여 고통을 받던 중 예수님의 능력의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가 일어난 역사입니다. 이 점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이 여인은 절망 가운데서 주님을 찾았습니다.
1) 혈루병을 앓는 여인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25,26). 율법에 의하면 이 여인은 부정한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고, 아무 곳에나 앉거나 잠잘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만지거나 앉거나 눕거나 한 모든 것이 부정해지므로 깨끗이 세탁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레15:25-30) 이로 보아 이 여인은 12년간이나 피를 쏟았으므로 그 육체적 쇠약과 함께 삶에 용기와 소망을 잃고 방황하는 상태에 놓여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럴 때에 거라사 지방에서 일어났던 예수님의 역사에 대한 소문을 듣고 다시 용기를 가지고 주님께로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병이 더러운 병이요, 남들이 접촉하기를 꺼리는 병이었기에 떳떳하게 나설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음에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28절)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그 믿음이 불치의 병을 순식간에 낫게 하는 역사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2) 절망을 이긴 믿음
이제 이 여인에게는 '네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들어 바다에 빠치울 수 있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회적인 제약과 뭇사람의 눈충을 의식하며 살아야 하는 저주받은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이 여인이 과감히 주님께로 가까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겨자씨만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녀는 절망 가운데서 오직 주님을 바라보았기에 그같은 용기가 생겼던 것입니다.
2. 이 여인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몸에 손을 댄 자가 누구냐'고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시나이까'(31절)라고 말하였습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대답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좀더 가까이 접근하고자 밀고 당기는 판에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사람이 누구냐고 정색으로 물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냥 밀고 당기는 옷자락을 붙들거나 손을 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갔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사역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에게 접촉하기만 하면 능력이 나타나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기만 하면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 식탁에 가득차도 그것을 먹어야만 배고픔을 면할 수 있고, 당신의 눈 앞에 맑은 샘물이 솟아난다 하더라도 그것을 마시기 전에는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서 접촉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있는 역사가 믿음이요, 구원의 확신인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옷자락 만져도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주님께 가까이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구원이었습니다.
3. 믿음으로 받는 구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고, 믿음이 없이는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슷ㅂ니다. 따라서 구원의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받아들일 때 즉 '저분이 나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믿을 때, 의롭다함을 받고, 온전함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지식이 아닙니다. 그 믿음은 미신적인 것이 아닙니다. 확신과 체험에서 출발하는 믿음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종교가 믿음을 말하고 신을 말하지만 그들의 믿음과 체험이란 한결같이 미신적인 것이요 생명이 없습니다. 열두해 동안 혈루증을 앓다가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 여인은 일생동안 주님을 위해 헌신하며 봉사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외경 니고데모 복음서란 책에는 이 여인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로 가실 때(눅23:26-31) 도중에 손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의 땀을 닦아 드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아주 보잘 것 없고 작은 것이지만, 그 믿음을 통해 나타내시는 주님의 역사는 산을 옮기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막 5:35-36
사경을 헤매는 어린 딸을 위해 예수님을 모시고 가던 야이로는 중간에 생각지도 않던 혈루증 앓던 여인을 만나 시간이 지체되자 마음이 조급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보채지 않고 예수님과 그 여인과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 만남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어린 딸이 죽었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아마 그의 가슴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듯 철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주님께서는 야이로를 격려하며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우리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 이러한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신앙에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신앙에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신앙은 조급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급박하더라도 조급해하거나 서둘러서는 안 됩니다. 급하면 급할 수록 침착하게 여유를 가지고 주어진 상황에 따라서 힘 닿는대로 모든 일을 처리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일하실 시간을 충분히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당황해서 너무 조급히 처리하면 정작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기회가 없어집니다. 본문에서도 만일 야이로나 그의 가족이 먼저 나서서 예수님의 길을 가로막아섰다면 그의 어린 딸은 살아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끝까지 예수님의 뒤를 따라 그의 발걸음에 맞추어 따라갔기 때문에 그의 딸은 다시 생명을 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발걸음은 늘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2.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에수님께서 주시는 또 하나의 교훈은 믿음에는 인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계획적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계획을 세워놓고 그 계획에 따라 역사하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주게서 일하실 때 따라서 일하고 침묵하실 때 따라서 침묵해야 합니다. 결코 중간에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야이로도 예수님께서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잃을 여인을 보고 멈춰섰을 때 포기했더라면 그의 딸을 두번 다시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3. 내어맡겨야 합니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하는 강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질테니 몽땅 맡기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곧 삶의 전폭을 주께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삶의 전폭을 내어 맡기지 못하는 것은 우리는 믿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삶은 우리 스스로가 지기에는 너무도 무겁습니다. 그러므로 그 짐은 서로 나누어 져야 합니다. 그 짐을 조금씩만 나누면 우리의 짐은 가벼워집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짐을 몽땅 져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마11:28) 특히 본문의 야이로는 본인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질 수 없는 인간 생명에 관한 짐입니다. 그러한 짐을 우리 주님께서는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으시고 그냥 져 주셨습니다.
4. 말씀을 부여잡아야 합니다.
본문의 예수님의 명령 속에는 우리가 그 명령을 부여 잡아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환경을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의 환경은 우리의 믿음을 쉽게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본다는 것은 그처럼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거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 도움을 주고 힘이 되는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였습니다. (히12:2)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가 주신 말씀을 부여잡아야 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동안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양식을 공급받았습니다. (신8:3)
5. 긍정적인 사고를 해야 합니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는 예수님의 명령 속에는 또한 온갖 부정적인 생각을 다 버리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일이 되어가는 부정적인 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실 성경을 보면 야이로는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를 따르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는 혈루증을 앓는 여인으로 인해 시간이 지체되는 것이나 사람들이 와서 딸이 죽었다고 하는 것에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믿음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았습ㄴ다. 예수님께서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을 고쳐주신 사건은 그에게 매우 긍정적인 믿음의 시각을 열어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처럼 능력이 있으시고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이시라면 자기의 죽어가는 딸을 능히 고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고 자기의 죽어가는 딸을 고쳐주시기 위해서 발길을 옮기고 계시다는 사실이 긍정적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긍정적인 믿음을 주님께서는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긍정적인 믿음은 언제나 기적을 불러일으킵니다.
죽음과 삶 막 5:37-40(상)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시고 야이로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린다는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매우 민감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일이므로 예수께서는 매우 신중하게 처신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세 제자를 대동하심으로써 야이로의 딸이 죽음에서 소생하는 증인으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증인의 요건은 3인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은 모든 생명의 주인이시며 죽음을 지배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제자들에게 보이기 위한 배려도 있었습니다.
1. 죽음의 슬픔
1) 죽음의 슬픔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38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대동하고 도착하셨을 때 회당장 야이로의 집은 그 딸의 죽음으로 인하여 큰 슬픔에 빠져 있었습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슬픔을 가져다 줍니다. 인간의 학식도 덕망도 죽음의 슬픔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영국의 역사가 카알라일은 아내가 죽은 후에 평생토록 슬픔 속에 있었으며, 철학자 밀도 아내가 죽은 후에 그 무덤에서 멀리 떠난 곳에서는 살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죽음이 슬픈 것은 죽은 자나 살아 있는 자나 마찬가지로 '인간의 무력'을 실감하는 데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죽음 앞에 인간은 속수무책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수용하고 방관할 따름입니다. 거기에 깊은 비애가 있습니다.
2) 죽음과 단절
죽음이 슬픈 것은 또한 그것이 모든 것을 단절시키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죽는 자와 살아 있는 자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부모와의 관계, 형제와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그리고 자기와 관련되었던 모든 관계로부터 단절시킵니다. 죽음은 모든 희망과 가능성을 단절시킵니다. 죽음은 죽는 자가 누릴 수 있었던 축복을 단절시키고, 마지막에는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서 그 사람의 모습을 단절시킵니다. 죽음은 단절이며 따라서 그것은 슬픔의 극치입니다.
2. 죽음의 극복
1) 죽음에 대한 새 개념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아기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희가 비웃더라'(39,40절) 주님께서 '죽음'을 '잔다'고 말씀하셨을 때 모든 사람들은 비웃었다고 했습니다. '죽음'을 '잠'으로 생각한 것은 구약시대부터 있었던 사상이나(창47:30;신31:16;단12:2), 이 사상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일반화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을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러한 선언은 인간의 죽음과 삶을 완전히 장악한 분이 아니고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는 '복음'입니다. 인간의 육체적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잠시 동안 잠자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 후에 있을 영적인 죽음이 진정한 죽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계20:14,15)
2)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39절)는 말씀은 인간의 '생명'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잔다'는 것은 다시 '깨어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며, 그 전제대로 될 때 그것은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따라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요11:25)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육체적으로는 죽었으나 다시 깨어날 것이므로 잠자는 것이며(고전15:51),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육체적으로는 살았으나 영원히 죽은 것입니다. (계3:1)
3. 죽음의 허구
1) 그리스도 안에는 죽음이 없음
예수께서는 그 공생애 기간 중에 죽은 자를 소생시키신 일이 세번 있었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으며(눅7:11-17),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으며, 마르다의 오라비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요11:43,44) 이 세 경우 모두 예수께서는 마치 잠자는 자를 깨우듯이 '일어나라!','나오라!'고 명령하심으로써 소생시키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그리스도 안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음은 허구입니다.
2) 생명의 원리
하나님은 생명 그 자체이시므로 하나님 안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인간은 존재를 생물과 무생물로 분류하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무생물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흙도, 돌도, 물도, 공기도, 햇빛도 다 살아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과 '소멸'은 하나님께 있어서 단지 하나의 '변화'일 뿐입니다. 생명이 생명일 수 있는 것은 '죽지 않는 것'이어야 합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것, 그것이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사역 막 5:40(하)-43
야이로의 집에 오신 예수께서는 먼저 혼란스러운 환경부터 정리하셨습니다. 통곡하고 애곡하는 사람들을 다 내어보내시고 야이로 부부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들만을 데리고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소녀의 손을 잡으시고 '달리다굼'이라고 하셨습니다. '소녀야 일어나라!'죽었던 소녀는 잠을 깨듯 일어났습니다. 비웃던 사람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져갔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다시 행복이 찾아왔습니다. 슬픔은 간 곳 없어지고 큰 기쁨이 그 집에 가득했습니다. 주님이 사역하시는 곳에서는 언제나 이런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 그리스도의 사역의 절대성
1) 환경을 지배하심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보내신 후에'(40절). 예수께서는 야이로의 집에 오셔서 먼저 훤화하고 통곡하는 사람들을 다 밖으로 내어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잠'으로 생각하고 계시는 주님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통곡과 수선스러움이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주님은 어디를 가시든지 그 자리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야이로의 집에서는 이제 주님께서 주인이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명하여 밖으로 내보내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창조되었으므로(요1:3;골1:16;히1:2,10)주님은 만물의 주인이시며 어디를 가시든지 그 자리의 주인공이 되셔서 환경을 지배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성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2) 죽음을 지배하심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소녀야 일어나라!' 이 말씀은 죽음을 향하여 주님께서 하시는 명령입니다. 창조주께서 죽음을 지배하시기 위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생명이 죽음에게 하시는 하시는 말씀입니다. 소녀는 즉시 일어나 걸었습니다. 죽음은 생명에게 순종했으며, 죽음은 창조주에게 복종했습니다. 죽음이 있는 곳이 가정이든, 길거리이든(눅7:11-17), 무덤이든(요11:1-44) 예수께서 계신 곳에서는 '죽음'이 변하여 '생명'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삶과 죽음을 지배하시는 절대적인 권세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2.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인간들의 상반된 태도
1) 많은 무리 (비웃다가 놀람)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 두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42절). 예수께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실 때 비웃던 무리들이 소녀가 살아 일어나자 놀라고 또 놀랐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도저히 믿어지지 않던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일을 본 일이 없었으며, 그들의 상식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상식을 초월합니다. 신앙은 과학적 지식을 초월합니다. 신앙은 자연법칙을 초월합니다. 신앙은 모든 합리적 사고를 초월합니다.
2) 야이로 부부(믿음의 보상을 얻음)
예수와 함께 그 딸의 소생을 지켜본 야이로 부부는 그들의 '믿음'에 대한 보상을 받음으로써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주님의 발 아래 엎드려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23절)라고 하던 야이로의 믿음이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그의 가정에서 그 딸이 얼마나 귀한 존재였느냐 하는 것은 그 딸이 죽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훤화하고 통곡한 것으로(38절) 알 수 있습니다. 야이로의 믿음이 이제 그 죽은 딸을 살려내는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36절) 믿음은 만능입니다.
3. 그리스도의 사역과 목적
1) 자기 영광을 위함에 있지 않음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43절). 예수께서는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다음에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사역의 목적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는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전15:45;살전5:9,10) 그리스도의 사역의 목적은 '죽음'을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일이며, 진리의 구현에 있고, 결코 자기를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2) 모든 사람들에게 확신과 기쁨을 주기 위함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43절). 소생한 소녀에게 음식을 주라 하시는 뜻을 그 집에 모여있는 모든 사람들이 죽었다가 살아난 소녀에게 음식을 줌으로써 살아난 기쁨과 감격을 실감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사역은 생명을 살리는 사역이며,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에 대한 확신과 생명의 기쁨을 주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