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광장에서 작은 다리 하나를 건너면 사거리 중앙에 정화보선(鄭和寶船) 조형물이 보이고 그 뒤 우측으로 붉은색 5층 건물에 홍등이 주렁주렁 달린 삼숙공(三叔公)이란 상점 건물이 보이는데 여기서 부터가 차이나타운이다. 사거리에서 직진하면 어제 저녁 구경했던 Johnker Street고 좌측 길로 가다 첫 번째 골목에서 우회전하면 탄 쳉 로크 거리(JL. Tan Cheng Lock)며 우측 길로 가다 첫 번째 골목에서 좌회전하면 하모니 거리(Harmony Street)다. 우린 우선 쳉 훈 텐 사원(Cheng Hoon Teng Temple)과 캄풍 클링 모스크(Kampung Kling Mosque)가 있는 하모니 거리(Harmony Street)를 따라 간다. Johnker Street에 비해 한산한 길 양 쪽으로는 1층은 기념품가게나 갤러리, 레스토랑으로 이용되고 2층은 살림집으로 사용하는 목조건물이나 시멘트 건물이 늘어서 있지만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 차이나타운 입구
길 옆 갤러리 몇 군데를 기웃기웃 거리다 보니 정화문화관(鄭和文化館)이란 간판이 보인다. 중국풍의 목조 2층 건물로 홍등을 단 입구를 창을 든 병사와 시종으로 보이는 사람 석상이 지키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중국 명나라 정화대장군(鄭和大將軍)의 흉상과 당시 그가 타고 바다를 누볐던 범선 모형, 대포와 말 네 마리가 끄는 마차 그리고 도자기 들이 정면에 전시되어 있어 정화대장군의 활약상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문화관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게 전시물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중국에서 수입한 차와 비단, 도자기 등이 많이 전시되어 있고 직원들도 물건 판매에 더 열중하고 있어 이곳이 문화관인지 상점인지 아리송하다.
정화는 윈난성(雲南省) 쿤양(毘陽) 출신으로 명나라 영락제 때 시작된 남해(南海) 원정의 총지휘관이다. 큰 키에 체격이 담대하였으며 성격이 활달한 장군으로 본래 성은 마(馬)씨, 본명은 마화(馬和)이다. 법명은 복선(福善). 삼보태감(三保太監 또는 三寶太監)이라 불린다. 그의 국적은 중국이지만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교 집안 출신으로 윈난성(雲南省)의 한 지방 관리였던 마합지(馬哈只)의 아들로 태어나 1382년 이곳이 명나라에 정복되자 포로가 되어 어린나이에 명나라에 끌려온 후 거세되어 환관이 되었고 연왕(燕王)을 섬겼는데 20년 동안 환관으로 일하면서 연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최고의 고문관이 되어 정난(靖難)의 변 때에 연왕을 따라 무공을 세웠고 연왕이 조카 혜제에게 제위를 찬탈하고 영락제(永樂帝)로 즉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후 환관의 장관인 태감(太監)에 발탁되고 정(鄭)씨 성을 하사받는다. 1405년~1433년 조카 혜제가 죽지 않고 해상에 숨어들었다고 의심한 영락제의 명을 받아 전후 7차에 걸쳐 대선단(大船團)을 지휘하여 동남아시아에서 서남아시아를 거쳐 아프리카 케냐 스와힐리에 이르는 30여 개 국을 원정하여 수많은 외교사절이 왕래하였고 명나라의 국위를 선양하는 한편, 중국에서 생산되는 비단과 도자기를 가지고 열대지방의 보석, 동물, 광물 등을 교환하여 중국으로 가져와 무역상의 실리를 획득하였다. 당시 선단의 대선이었던 보선(寶船)의 규모는 길이 137m, 선폭 56m이고 9개의 돛대가 달려 있는 배수량 약 2700톤으로 추측된다. 1957년 난징에서 거대한 방향 키가 발견됨으로써 정화가 이끈 원정단의 대형선박의 존재가 사실임이 밝혀졌다. 1405년 소주를 출발한 제1차 원정 때엔 보선만 62척에, 장병 2만 7800여 명이 분승하였으며 선단은 총 317척으로 말라카 해협에서 해적을 물리치고 인도 캘커타까지 도달하여 진국(鎭國)비를 건립하였다. 마지막 원정인 영락제 손자 선덕제(宣德帝)때인 1431년, 제7차원정 때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 들렀으며 아프리카 케냐의 스와힐리 해안까지 항해하는 등 정화 함대의 원정으로 중국인들은 남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으며, 동남아시아 각지에서의 화교(華僑)의 수적인 증가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정화가 지휘한 명나라 세력의 인도양 진출은 1492년 콜럼버스, 1497년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양 도달보다 80∼90년이나 앞서는 것이었으나 문신들의 환관에 대한 강력 견제에 부딪혀 원양선이 제거되고 무역이 금지되면서 더 이상의 해양개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화는 1433년 마지막 원정을 끝낸 이듬 해 병으로 사망하였으며 무덤은 난징에 위치하고 있다. [출처] 정화 [鄭和, Admiral Cheng Ho ] | 네이버 백과사전 |
▶ 정화문화관(鄭和文化館) 입구
▶ 정화문화관(鄭和文化館) 내 전시물
정화문화관을 나와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녹색 삼각형 지붕이 유난히 눈에 띠는 캄풍 클링 모스크(Kampung Kling Mosque)가 좌측에 있는데 대대적인 보수공사 중이라 내부 관람이 어렵다. 인도계 이슬람교(클링)에서 유래한 이름을 지닌 이 건물은 수마트라의 건축양식을 도입해 지었다고 하는데 미나렛(첨탑)의 모양이나 높이, 사원 건물의 구조가 중국이나 터키 등 지금까지 다른 나라에서 봤던 모스크와 매우 다르고 쿠알라룸푸르의 국립 모스크와도 많이 다른 특이한 모습이다.
▶ 캄풍 클링 모스크(Kampung Kling Mosque)
바로 위쪽엔 중국풍 불교사원인 쳉 훈 텐 사원(Cheng Hoon Teng Temple)이 보인다. 관광객과 참배객들로 붐비는 사원 입구부터 전형적인 중국풍의 화려한 산문이 우릴 맞이한다. 이 사원은 17세기 말라카와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할 때 공주를 보호하기 위해 따라 온 리 위킹이란 해군 장교가 명나라 대장군 정화를 기리기 위해 명나라에서 모든 자재를 가져와 1646년 완공한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큰 중국 불교사원이다. 사원으로 들어서는 산문 지붕위에는 사천왕상을 비롯해 불교 신화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의 조각상들로 장식되어 있고 쌍사자 석등이 산문 좌우를 지키며 벽엔 용틀임 장식을 한 매우 화려하고 특이한 산문의 모습을 보여 준다. 사원 안 마당엔 참배객들이 피운 향으로 향내와 연기가 그윽하다. 경내로 들어가면 가운데는 부처상이, 왼쪽엔 바다의 신이, 오른쪽엔 땅의 신이 안치되어 있다. 그리고 이곳저곳에 도자기와 유리 등으로 장식되어 있어 중국 사원 특유의 멋이 돋보인다. 4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사원 건물은 매우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고 건물 기둥마다 금색 글씨가 새겨져 있다. 본전 지붕에도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용, 봉황, 기린, 관우, 장비 등등을 화려한 채색조각으로 장식하여 사원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본전 앞 현판엔 자비영현(慈悲永現 : 부처님의 자비가 영원히 나타난다?)이란 금색 현판이, 본전 안엔 자안관세(慈眼觀世 :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들을 자비로운 마음으로 사랑하신다'라는 뜻과 사부대중 모두가가 '모든 사람을 자비롭게 사랑하라'라는 뜻을 가진다 한다.)란 금색 현판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참배객들에게 전해 주고 있다. 본전 불당 안엔 이곳을 찾은 참배객들이 합장을 하며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있는데 그 신심이 전해지는 듯하다.
▶ 쳉 훈 텐 사원(Cheng Hoon Teng Temple) 입구 산문
▶ 쳉 훈 텐 사원(Cheng Hoon Teng Temple) 본전
▶ 쳉 훈 텐 사원(Cheng Hoon Teng Temple) 본전 불상
▶ 저 두 모녀는 무얼 기원할까?
▶ 쳉 훈 텐 사원(Cheng Hoon Teng Temple) 지붕 장식
▶ 쳉 훈 텐 사원(Cheng Hoon Teng Temple) 마당에 모셔진 불상
쳉 훈 텐 사원을 나와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니 향림사(香林寺)란 불교사원이 보인다. 현대식 콘크리트 2층 건물로 지어진 사원은 쳉 훈 텐 사원보다 규모는 크지만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나 참배객들은 거의 없다. 더위도 식힐 겸해 들어가 보니 1층 중앙엔 아미타불을 모셔 놓았고 좌우로 익살스런 모습의 나한상들을 모셔 놓았다. 2층은 대웅전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셔 놓았는데 법당이 넓고 시원해 낮잠이라도 한숨 자고 가면 좋을 듯하다. 아무도 없는 2층 대웅전에서 잠시 더위도 식히고 다리도 쉰 후 법당을 나선다.
▶ 향림사(香林寺) 불교사원
▶ 향림사(香林寺) 1층 중앙의 아미타불상
▶ 향림사(香林寺) 나한상
▶ 향림사(香林寺) 대웅보전 석가모니불
다시 거리로 나와 걷다보니 MELAKA 751 Tahun(馬六甲開鬪 751週年)이라고 쓰인 선전탑이 설치되어 있는데 2013 – 751 = 1262인데 1262년에 말라카에서 무슨 일이 있음을 기념하는 것인지 도대체 모르겠다. 말라카 왕국이 건국된 해가 1405년이니 이것도 아니고 말라카가 항구로 개항된 해가 1262년이란 뜻인가?
▶ MELAKA 751 Tahun(馬六甲開鬪 751週年) 선전탑
하모니 거리 끝에서 좌측으로 돌아 중국과 말레이 문화가 융합된 독특한 문화인 페리나칸 문화가 남아 있는 탄 쳉 로크 거리(Jl. Tan Cheng Lock)로 간다. 이 거리는 승용차 두 대가 가까스로 비켜 갈 정도의 좁은 길 양 옆으로 대부분 중국풍의 오래된 2층의 시멘트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식당이나 여행자 숙소, 갤러리, 가게로 이용되는 몇몇 집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집들이 개인이 사는 주택인지 대문이 닫혀 있다.
▶ 탄 쳉 로크 거리(Jl. Tan Cheng Lock)
▶ 탄 쳉 로크 거리(Jl. Tan Cheng Lock)에 있는 바바하우스
▶탄 쳉 로크 거리(Jl. Tan Cheng Lock)에 어울리지 않는 부호의 저택
길을 걷다보니 푸리호텔 건너편에 이 거리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런 건물이 보인다. 철제 대문으로 잠긴 이 건물은 말라카 부호의 개인 저택이라는데 이렇게 철창 속에 자신을 가두고 호화로운 건물에 살면 행복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금 더 내려오니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더 바바 뇨냐 헤리티지(The Baba Nyonya Heritage)가 보인다. 19세기 후반 말라카의 대부호로 이름을 날린 페라나칸 찬 센슈의 저택이었던 건물을 그 후손이 유료박물관으로 꾸며 관리하고 있는데 가구나 미술품들이 100여년 전에 유럽이나 중국에서 들여 온 것으로 전통적인 바바 뇨냐 문화와 그 화려했던 생활모습을 모여 준다고 하지만 사진촬영을 금지하고 있어 들어갈까 말까 망설인다. 그런데 바로 옆옆 건물을 보니 오래된 골동품같은 것을 팔고 있는 가게가 보여 그곳으로 들어가 보니 이 가게 내부에도 바바 뇨냐들이 사용하던 물건들과 미술품, 가구 등이 장식되어 있는데 무료인데다 사진촬영이 허락된다. 더 바바 뇨냐 헤리티지보다 못하겠지만 이 가게로 들어간다. 박물관처럼 정돈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바바 뇨냐들이 사용하던 꽤 오래돼 보이는 가구와 옷, 생활용품, 불상을 비롯한 조각상들, 무기류 등이 전시되어 있고 일부 바바 뇨냐 기념품을 팔고 있으며 가게 뒤편은 살림집으로 사용하고 있다. "바바뇨냐"란 15세기 중국 명나라에서 많은 뱃사공들이 들어와 이곳에 정착했고 그 후에도 주석광산에 노동자로 중국인 남성들이 들어와 이 지방 말레이시아 여성과 결혼하여 그 후손(페라나칸)들이 중국과 말레이 문화를 혼합 계승하였는데 페라나칸 남성을 바바, 여성은 뇨냐라고 부르며 이들은 중국문화를 계승하면서 음식, 의복, 생활습관들은 말레이적 문화가 많다.
▶ 더 바바 뇨냐 헤리티지(The Baba Nyonya Heritage)
▶더 바바 뇨냐 헤리티지 옆 기념품 가게
▶ 기념품 가게 안쪽은 살림집으로 개방하지 않는다
▶ 기념품 가게내 장식과 전통공예 판매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