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경 1873-1934 고영희의 아들 백작/중추원고문
1873년 7월 22일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다. 자는 성보다. 자작 고영희의 장남이다.
1885년 육영공원에 입학해 1866년 영어과를 졸업했다. 1891년 5월 증광시 진사3등으로 합격했다. 1894년 7월 외무아문 주사를 시작으로 1895년 4월 외부변역관보 1896년 5월 일본공사관 참서관 1897년 4월 교전소 기사원 1898년 6월 영국 독일 이태리 공사관 참서관 1899년 8월 법규교정소 위원 1900년 12월 예식원 번역과장 1902년 3월 영국파견 특명대사 수행원을 지냈다. 1904년 5월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방한 했을 때 편의를 제공하고 접대를 맡은 공으로 훈3등 욱일장을 받았다.
고영희의 아들이다. 다른 자들과 달리 나라를 팔고 친일에 서는 데에 아무런 고민도 없어보인다. 아비의 친일행각을 보면서 자란 탓인지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토를 접대하고 있다.
더구나 아직은 대한제국의 신하로서 그 경비를 지급받고 있을 때를 감안하면 이런 자들의 뻔뻔한 낯짝은 가공할 만하다. 물론 지금도 이런 자들은 줄을 서 있는 상황이다.
1905년 3월 예식원 예식과장 겸 궁내부 외사과장에 임명되었고 5월 일본국 특파대사 히즈야스왕 반접관으로 활동했으며 10월에 일본황태자봉영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1907년 3월에는 통감 이토를 영접하는 등 일본어와 영어에 능통해 외국 공사관과 왕실에서 통역 번역 및 의전을 주로 담당했다. 1906년 9월 궁내부 예식관 겸 궁내부 대신관방 예식과장에 임명되었다.
1907년 3월 순종가례 특파대사로 방한한 다나카궁내대신에게 편의를 제공한 공으로 훈2등 서보장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 시강원 첨사에 임명되었다. 1907년 12월 통감 이토의 주도로 한국 황태자 이은이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수학원 교관과 시강원 첨사로 영친왕의 교육을 맡았던 경력과 통감 이토의 적극적인 협력자이자 영친왕을 보좌 감시할 수 있는 적임자로 선택되어 동궁대부로서 유학에 동했했다. 이러한 공으로 1907년 12월 욱일중광장을 받았다. 1906년 10월 대한제국 정부의 주요 친일 관료들과 일본인 관료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사교단체 대동구락부의 위원과 회관 설립 설비위원을 맡았다.
합병 후인 1911년 2월부터 1926년 7월까지 이왕직 왕세자부 사무관으로 도쿄에 머물렀는데 1916년 3월 가족을 데리고 이주했다.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1915년 11월 다이쇼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정미칠적’으로 1910년 10월 자작 작위를 받은 부친 고영희가 1916년 1월 사망하자 같은 해 3월 습작했다. 1917년 12월 종4위에 서위되었다. 왕세자 영친왕 이은과 일본 황실녀 나시모토 노미야 마사코(이방자)의 결혼이 성사되자 그 공로를 인정받아 조선 귀족 중 습작자로서는 유일하게 1920년 4월 백작으로 승작되었다. 그 후 장남 고흥겸과 장손 고중덕이 대를 이어 습작했다. 1921년 8월 이왕직 사무관으로 재직한 공로로 훈1등 서보장을 받았으며 1922년 12월 정4위로 승서되었다.
1926년 7월 이왕직 왕세자부 사무관에서 해임된 날로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29년 7월과 1932년 7월 등 세 번 연속 중추원 고문으로 있으면서 사망할 때까지 매년 3000원의 연수당을 받았다. 왕세자부 사무관에서 해임된 것은 순종의 사망으로 왕세자 이은이 왕위 계승자가 됨으로써 왕세자부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순종 생존 당시 이왕직 장시사장을 맡고 있었던 한창수가 그와 동일하게 1등 1급의 지위로 이왕직에서 역할과 신임이 높아 고희경이 해임된 것이다. 1927년 1월 이왕직 장관 민영기의 사망으로 장관 자리가 공석이 되자, 이왕직 장관이 되고자 자신의 친분을 이용해 일본 궁내성에 로비를 하며 권력쟁탈전을 벌여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 왕세자부 사무관에서 해임된 후 중추원 고문으로 계속 일본에 거주했다. 1927년 5월 종3위에 올랐고 1928년 11월 쇼와‘천황’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왕공족심의회 심의관을 지냈다. 1929년 9월 도박과 아편 등으로 몰락해 가는 조선귀족들의 파산을 구호하기 위해 조직된 재단법인 창복회의 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9월 식민통치 20주년을 기념하여 조선박람회가 개최되자 8월을 기부했고, 1930년 6월에는 진해사변 조위금으로 10원을 기부했다. 도쿄에 본부를 두고 조선지부로 조직된 수양단 조선연합회본부가 1930년대에 국민정신 작흥이라는 기치 아래 조직정비와 통제를 강화하면 1930년 12월 찬조원을 지냈다. 1932년 12월 조선나예방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34년 2월 27일 일본에서 사망했다. 사망 당일 정3위에 추서되었다. 작위는 1934년 6월 장남 고흥겸이 2대째 습작했다. 1934년 3월에는 한일관계 진력, ‘한일합병’발전 내선융화등의 공으로 욱일대수장이 추서되었다. 일본 정부가 욱일대수장을 수여하기 위해 작성한 공적조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백작 고희경은 “...... 이토히로부미가 통감으로 옴에 한국궁중과 통감과의 사이에서 상호관계를 더욱 밀접하게 하기 위해 음으로 양으로 이토 통감을 보좌함으로써 그 뜻을 전하에게 전하고 일면 반일파 귀족을 설득해 마침내 다년 현안이었던 일한병합의 기운을 촉진시켰다. 1910년 일한병합 이래 존선 귀족 중에는 불만을 품고 불온의 정세에서 여하한 사태를 야기할 것인가 아닌가를 살피면서 아버지(고영희)와 함께 한마음으로 일선융화를 생각하며 귀족사회의 친일경향을 유치함으로써 조선통치상에 기여한 바가 크다. 또 병합과 동시에 이왕직 사무관으로 임명되어 당시 왕세자인 이왕전하를 모시며 전하의 동경유학도 고희경의 결단에 의해 결정한 것으로 그 수종을 명령받음에 한 뜻으로 보육의 중임에 응했다. 1920년 전하의 성혼에 특히 진력하는 등 그 일선융화 및 조선통치상 진력한 공적이 현저한 바 2월 27일 사망함에 욱일대수장을 수여한다”
첫댓글 조선을 일본과 뒤섞으려는 공작에 적극 협력한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