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간의 해외연수기 (폼페이, 나폴리)12
1월 12일, 폼페이와 나폴리에서
아침 7시 45분, 남부로 3시간 정도를 달려야 폼페이 유적에 도착하기 때문에 일찍 서둘렀다. 먼길을 가기 때문에 좌석 공간이 넓은 승합차로 바뀌었다. 일요일인데도 도로가 잘 뚫려 있다. 여름 휴가철이면 이곳도 매우 복잡해진다고 한다.
시원스럽게 뚫린 고속도로 너머로는 푸른 목초지가 펼쳐진다. 이탈리아란 바로 목초지가 펼쳐진 땅이란 뜻이다. 산등성이에는 성들이 보이고 아래로는 농가들이 있다. 옛날 마을 형태가 유지되고 있는 전경이다.
또 한쪽으로는 옛 로마의 군사도로가 소나무와 함께 펼쳐지고 있다. 로마제국 시절 군사도로만 8만㎞였다고 한다. 오늘날 미국의 고속도로 총합이 9만㎞, 우리나라는 2,550㎞과 비교해보면 얼마나 길게 잘 닦여 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갈 것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지금은 로마의 인구는 3백만이 채 안된다. 유동인구를 합하면 450만 정도인데, 옛날 로마제국 시절 인구는 150만에 육박했다고 한다.
창밖으로 보이는 농촌 마을이 나폴리에 가까워질수록 허름한 느낌이다. 로마시는 부유하지만 상대적으로 농촌 지역을 가난하다고 한다. 그것도 지역에 따라 많은 차이가 나는데 특히 풍광이 좋은 나폴리 사람들은 천성이 게을러 더욱 가난하다고 한다.
가다가 휴게실에 들러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카푸치노 맛을 잊지 못해서이다. 화장실은 2센트를 내고 사용했다. 동네 노인들이 관리하는데 그분들의 용돈벌이용이란다.
다시 차를 타고 달렸다. 안내인이 나폴리를 설명해주며 나폴리 민요를 틀어주었다. 중고등학교 때 음악시간에 불렀던 노래들이다. 날씨가 화창하게 맑다면 나폴리 바닷물결과 카프리섬이 대단히 아름답다고 하는데 남부지역 날씨는 직접 가보아야 알 수 있다고 한다. 베수비오스 화산이 눈에 들어왔다.
폼페이 유적
10시 40분이 되어서야 폼페이 유적에 도착했다. 1700년대부터 발굴되기 시작한 이래 아직도 발굴이 온전히 끝나지 않은 곳이다.
서기 79년 8월 24일 번성하던 폼페이는 베수비오스화산 폭발과 함께 화산재 속에 그대로 묻히고 만다. 당시의 아비규환이 영화에 잘 묘사되어 있다.
화산재에 산채로 미이라가 된 시신들의 경악하는 표정과 뜨거운 열기를 피하기 위해 웅크린 채 죽은 사람들의 모습이 당시의 처참한 광경을 한눈에 짐작케 한다.
무거운 화산재에 눌려 지붕은 거의 무너져 내렸지만 도로와 벽들을 통해 당시의 번영했던 폼페이의 들여다 볼 수 있다. 시민포럼(공회장)과 아폴론 신전, 바실리카(列柱), 원형 극장, 시장 골목 고깃간과 생선 가게, 금방이라도 빵을 구워낼 것 같은 빵집의 맷돌과 오븐, 적나라한 음화가 그려진 공창과 사창, 원형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개인옷장인 벽감과 냉탕과 미온탕, 열탕, 맛사지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공중 목욕탕과 그 앞의 선술집,
여러 색깔의 유리조각으로 모자이크가 된 벽을 배경으로 하여 분수 시설이 있는 집, 폼페이 최고의 상인이었던 베티형제의 집, 움푹 패인 마차 자국이 있는 마을도로와 공중 수도 시설과 집집으로 연결된 수도관 납파이프.....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선명하게 남아있는 벽화들 앞으로 집주인이 걸어나올 것도 같았다.
상인이었던 베티형제의 집 현관 앞에는 재미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들은 폼페이 상권을 계속 틀어쥐기 위해 끊임없이 정치인들을 매수해야 했는데 그 방법이 재미있다.
현관 앞에는 벌거벗은 남자(성기가 매우 큰 것으로 유명한 프리아포스로 그는 애욕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술의 신 디오뉘소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가 저울로 자신의 성기와 돈을 저울질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초대받은 정치인이 그것을 보고 호탕하게 웃으면서 들어오면 술과 여자로 매수하고, 내숭떠는 표정이면 돈으로 매수했다는데 거의 실패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환락의 도시 폼페이가 천벌을 받았다고도 표현한다. 정말 그럴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번영과 영광 뒤에는 반드시 타락과 부패가 뒤따르는데 폼페이 역시 예외는 아니다.
만약 자신이 당시에 폼페이에 있었다고 하면 그런 말이 쉽게 나올까 의문이다. 천재지변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폼페이 유적을 돌아나오면서 인생의 무상(無常)함이 느껴진다.
인근 식당에서 오징어튀김과 새우튀김을 곁들인 스파케티로 점심을 했다. 카프리섬을 가보는게 어떠냐는 안내인의 제안에 다들 무반응이다. 솔렌토로로 가기로 했다. 잘 달려나가던 차가 솔레토로로 향하는 기다란 터널 속에서 거북이 걸음이다.
거의 30분을 서행하며 빠져나왔더니 솔렌토로로 가는 길이 새벽에 내린 비로 산사태가 져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차 한 대마다 일일이 창문을 열게 하고 사정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터널 진입하기 전에 팻말을 붙여두던가 그곳에서 지시하면 이렇게 시간 낭비가 없을텐데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내인에게 만약에 한국 같았으면 난리가 났을 거라고 했더니 안내인이 이탈리아 운전사에게 이탈리아 경찰 참 멍청하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로마 운전자 왈 그들은 나폴리 경찰이지 이탈리아 경찰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책으로만 읽었던 이탈리아의 지방색을 확실하게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차를 돌려 나폴리 항구를 구경하기로 했다. 나폴리로 들어서면서 주차시켜둔 승용차 운전대에 양철판 같은 커버를 씌어놓고 자물통으로 잠궈 둔 차량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도난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란다.
시칠리에 마피아가 있다면 나폴리에는 까모라라는 조직이 있는데 이들이 범죄용으로 쓰기 위해 차량을 도난하는 경우가 가끔씩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이들 유괴가 가끔씩 벌어진단다. 아름다운 해안을 끼고 있는 곳이라 빈부 격차가 엄청난 곳이다.
지나가는 차를 붙잡고 유리를 닦아주고 손을 내미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옆으로는 부자들의 요트가 즐비하게 정박된 항구도 있는 곳이 나폴리이기도 했다.
항구 서쪽 끝에 차를 대고 30분정도 산책하기로 했다. 항구의 방파제가 우리와는 달랐다.
우리는 철근 콘크리트 덩어리를 쓰는데 이들은 방파제조차 하얀 대리석 덩어리이다. 석회암 지대에 있던 것이지 어떤 것에는 종유석이 매달린 것도 있었다. 물은 아주 맑았다. 매우 맑은 날 같으면 잔물결조차 없이 햇볕에 반짝거리는 은빛 물결이 매혹적이란다.
나는 아직도 나폴리 항구가 왜 좋은지 모르겠다. 마도로스들은 3대 미항의 하나로 꼽는다지만 우리 관광객의 입장에서도 과연 그럴지는 의문이다.
늘 칙칙한 기후 속에서 사는 유럽 사람들에게는 나폴리와 카프리해가 아름답게 느껴지겠지만 글쎄? 나폴리보다 더 아름답고 좋은 바닷가가 우리나라에 훨씬 많은 것 같은데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나폴리를 돌아나오면서 축구 경기장이 눈에 들어왔다. 나폴리팀과 로마팀이 붙는 날이면 난리도 아니란다. 이른 아침부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로마 시민들이 이곳으로 응원하기 위해 몰려드는데 만약 로마팀이 진다면 나폴리 차량 몇 대는 박살난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지독한 지방색 때문에 이탈리아만 이웃 유로국가들과 차이나는 점이 하나 있다고 한다. 유럽연방이 발족되면서 새로 사는 차들은 유로번호판을 다는데 번호앞쪽에는 국명을, 뒤에는 도시명을 적어야 하는데 이탈리아만은 안써도 된다는 예외를 두었단다. 아닌게 아니라 유로번호판을 단 차량들 하나같이 도시명을 공란으로 두었다.
로마로 돌아오니 날은 이미 어둑해졌다. 저녁 예약까지는 조금의 시간적 여유가 있어 어제 갔었던 가게에 들러 유리세공 손목시계를 샀다. 좋아서 팔짝 뛸 아이의 표정이 눈에 선하다.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왔다. 이제 내일 오후면 서울로 향하게 된다. 그동안 샀던 책들을 훑어보았다.
모두가 관광수입 비중이 매우 큰 나라들이다. 그만큼 탁월한 문화 유산이 많다는 얘기이다. 너무나 엄청난 문화들을 극히 단시일내에 훑어 지나왔다. 내일 아침 출발의 편의를 위해 짐들을 정리해 쌌다. 책과 남편을 위해 준비한 터키 민속주인 증류포도주 일명 ‘사자의 젖‘ 때문에 좀 무거워졌다.
1월 13일, 공식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오늘은 오전의 공식 방문을 마치고 서울로 향하는 날이라 짐을 꾸려 호텔을 나왔다. 10시에 ‘코뮤네 디 로마‘를 방문하기로 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로마시청 소속의 구청 같은 곳이다. 로마시청 산하에 19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였다.
다소 시간적 여유가 있어 바로 옆 테베레 강안의 조그마한 섬(티베리나 섬)을 둘러보기로 했다. 기원전 62년에 세워져 지금까지도 도보통행로로 이용되고 있는 파브리코 다리를 건넜다. 이 섬은 그리스의 의신(醫神) 아스클레피오스가 상륙한 것으로 알려져 이곳에 그를 위한 신전을 지었는데 지금은 그위에 이비인후과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티베리나 병원이 들어서 있다.
병원을 들어가보면 지하층에 당시의 신전터가 있었음을 알려주기 위해 유리벽과 유리바닥으로 들여다보게 해놓았다.
유적보호에 정말 최선을 다하는 로마인들이다. 병원 앞쪽으로는 테베레 강으로 내려가볼 수 있는 계단이 있어 따라 내려갔다. 물살은 몹시 빨랐고 뿌였다.
뿌연 것은 석회질이 많기 때문이란다. 섬에는 병원말고도 사원 하나가 더 있을 뿐이다. 약속한 시간이 되어 ‘코뮤네 디 로마‘로 갔다. 그곳의 책임자는 뚱뚱한 여성인데 그녀의 보좌관은 나이 지긋한 남성이라 역시 유럽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진시험으로 이곳 책임자가 되었다는 설명이다.
문화재와 관련된 업무 관장 영역을 물었더니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듯이 로마시는 도로만을 관장할 뿐이라고 했다. 문화유적과 관련해서는 모두가 국가 책임이라고 한다. 이들은 문화유적이 어느 곳에서 발굴될 지를 몰라 땅 하나 파는 데는 매우 신중하다고 한다.
지하 전철이 두 개 노선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문화재 때문이란다. 순간 안동의 법흥동 칠층전탑이 생각났고, 몽촌토성과 경주가 떠올랐다. 그리고 오천년 역사위에 엄청난 개발을 하면서 소리소문없이 뒤엎어졌을 우리의 문화재가 안타까왔다.
이곳의 의회제도에 대해서도 물었더니 의외로 대답이 신통치 못한 것 같았다. 비례대표제로만 의원들을 뽑으니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마공화정을 세운 나라지만 그들에게는 뭇솔리니가 있었고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정정이 가장 불안한 나라이다.
말이 좋아 비례 대표지 순번에 오른 인물은 한 세대가 지나야 바뀔 정도니 정치인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식상함이 오죽할까. 게다가 강한 지방색에 성질 급한 이탈리아인들, 붉은 여단의 입장도 다소나마 이해할 만하다.
문화재를 보호하려는 로마당국의 여러 정책들을 다시 한번 확인해가며 이야기를 나누고 나왔다.
공항 가는 길이 복잡할지 몰라 차량으로 이동중에 한인이 싸준 김밥 도시락을 받아서 그대로 공항으로 직행했다. 프랑크프루트를 경유해 서울로 가는 항공편이다. 공항에서 수속을 마치고 김밥을 먹은 뒤 2시20분발 비행기를 기다렸으나 프랑트프루트의 아침 폭설로 2시간이나 연착되었다.
오후 4시 40분에 로마공항을 출발, 7시에 프랑크프루트에 도착했다. 대한항공이 8시 출발이라 부랴부랴 뛰어 비행기를 탔다. 하지만 엔진 이상으로 거의 3시간 이상을 지체한 끝인 밤 11시 15분(현지 시각), 드디어 비행기는 서울을 향해 날아 올랐다. 시베리아 대륙을 횡단해 갔다. 가도가도 끝없는 눈 벌판이었다.
인천의 영종도 공항에 도착한 것은 14일 오후 5시 30분이었다. 버스를 타고 들어가는 한강변의 서울이 정말 아름다웠다. 어둑해진 불빛 속에 잠시 헤어져 있었던 사람들 얼굴이 하나씩 떠오른다. 해야 할 산적한 일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출처 : 家苑 문화유적답사 문집 (해외편) : http://tae11.org 2004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