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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수군의 활약
이순신,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다
이순신(1545~1598)의 본관은 덕수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32세 때인 선조 9년(1576)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함경도의 동구비보 권관, 발포 만호 등을 거쳐 건원보 권관, 조산보 만호로 임명되었으나 녹둔도에서 여진족에게 패한 책임을 지고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선조 22년(1589) 정읍현감, 24년(1591)에는 진도군수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전라좌수사)에 임명되었다. 이순신은 전함을 건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며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임진왜란 최초의 승리, 옥포 해전(1592. 5. 7)
조선 함대 | 일본 함대 | |
사령관 | 도도 다카토라 | |
이순신, 원균 | ||
병력 | 50여 척 | |
판옥선 24척, 협선 및 포작선 62척 | ||
없음 | ||
피해규모 | 26척 파괴, 약 4,000명 사망 |
1592년 5월 7일 옥포(거제시 옥포동)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일본의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의 함대 50여 척을 격침한 해전이다.
옥포해전은 이순신 장군의 첫 번째 해전이었다. 장군은 부산포 근처에 먼저 탐망선을 보내어서 살피게 하였다. 5월 7일에 원균의 함대와 함께 출발하여 옥포로 향하였다. 일본군은 마을을 약탈하다가 조선 함대를 발견하자 바로 배에 탑승하였다. 이순신은 일본군이 배에 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포 사격만 하도록 명하였고, 26척을 파괴하였다. 오후에는 합포에서 5척을(합포해전), 다음날에는 적진포에서 10여 척을 격파하였다(적진포해전). 옥포해전의 승리는 조선이 이룬 첫 승리로, 이후의 전황을 유리하게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
거북선이 처음 등장한 사천 해전과 당포해전(1592. 5. 29~6. 2)
조선 함대 | 일본 함대 | |
사령관 | 이순신, 원균 | 알려지지 않음 |
병력 | 판옥선 26척과 협선 20척 | 옥포 13척, 당포 21척 |
피해규모 | 알려지지 않음 | 13척 / 21척 |
이순신은 거북선을 포함한 전선 23척을 이끌고 5월 29일 여수를 출발, 노량 앞바다에 이르러 전선 3척을 이끌고 온 원균과 합세하였다. 곤양쪽에서 사천으로 향하는 왜선 1척을 격파하였다. 사천에는 왜선 12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유인작전으로 적선을 끌어낸 다음 거북선을 선두에 세워 10척을, 다음날 나머지 2척도 쳐부수었다. 이순신도 조총에 왼편 어깨를 맞아 부상당하였다.
옥포해전 직후 이순신은 6월 1일 함대를 고성의 사량도에 정박하였다. 6월 2일 오전 10시경에 당포에 도착하자마자 전투를 벌였다. 대장선을 공격하여 대장 가메이 코레노리(亀井玆矩)를 죽이고, 당포에 있는 일본 전함 21척을 모두 격침시켰다(당포해전).
임진왜란 3대첩 한산도 대첩(견내량 해전, 1592. 7. 8)
조선함대 | 일본함대 | |
사령관 | 이순신, 이억기, 원균 | 와키자카 야쓰하루 |
병력 | 59척의 판옥선과 50척의 작은 배들 | 73척 |
피해규모 | 없음 | 59척 파괴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이 연합하여서 조선 함대에 맞서라 명하였다. 하지만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는 혼자서 출전을 결정하였다. 7월 7일 와키자카는 일본 함대를 이끌고 당시 일본 수군의 총사령부가 있었던 진해를 떠나 거제도 부근 견내량에 정박하였다. 이순신은 일본 함대를 넓은 바다로 유인하기로 하였는데, 이는 견내량 앞바다가 좁아서 판옥선이 진행방향을 바꾸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일본군은 전투 중간에 수세에 밀리면 육지로 도망갈 공산이 컸다.
5~6척으로 구성된 유인선이 견내량으로 향했고, 나머지 함대는 한산도 앞바다에서 기다렸다. 일본 함대를 공격하다가 쫓기는 척하면서 73척의 일본 함대를 유인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학익진’을 펼쳐 기다리고 있었다. 첫 공격으로 인해 2~3척의 일본 전선이 순식간에 침몰되었다. 조선 함대는 여세를 몰아, 일본 함대의 대장선에 공격을 집중하면서 59척을 격침하였다. 와키자카는 겨우 14척의 배를 몰고 퇴각하였다.
적의 본영을 공격한 부산포 해전(1592. 9. 1)
조선함대 | 일본함대 | |
사령관 | 이순신, 이억기, 원균 | 대부분의 일본 장수들 |
병력 | 74척의 판옥선과 92척의 작은 배 | 470척 |
피해규모 | 정운 및 6명의 수군 사망, 25명 부상 | 100척 파괴 |
한산도와 안골포 해전(1592. 7. 12)을 통해 제해권을 장악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부산포로 향했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의 연합함대 166척은 거북선을 앞세우고 다대포·서평포·절영도 등을 거치면서 적선 24척을 불지르고, 적의 병선 470여 척이 줄지어 있는 부산포 내항으로 돌진했다. 적선을 불태우며 쳐들어가자 일본군은 산으로 도망쳐 올라가 총포와 화살을 난사했다. 이순신은 상륙하여 싸우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적선 100여 척만을 파괴하고 가덕도 방향으로 돌려 동도 앞바다에 돌아와 진을 치고 밤을 새웠다. 이 전투에서 죽은 일본군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반면, 조선군 피해는 녹도만호 정운 장군을 비롯한 6명의 전사자와 25명의 부상자뿐이었다.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명량 해전(1597. 9. 16)
조선함대 | 일본함대 | |
사령관 |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 도도 다카토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루지마 미치후사 |
병력 | 13척의 전선과 32척의 작은 선, 약 1500명의 수군 | 133척 |
피해규모 | 알려지지 않음 | 31척 파괴 |
조정은 다시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8월 3일 교서를 받은 이순신은 8월 19일 12척의 전선을 회령진(장흥 회진)에서 인수하고 진도 벽파진에 진을 쳤다.
9월 15일, 일본 함대가 진격해온다는 소식을 듣고 명량으로 진을 옮겼다. 9월 16일, 133척의 일본 전선이 울돌목으로 들어왔다. 이순신은 일자진을 전개하면서 조류를 이용하여 일본 함대와 맞서 싸웠다. 격전 끝에 31척의 적선을 침몰시켰다. 일본 수군을 이끌던 구루지마 미치후사(來島通總)도 이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13척의 함선으로 133척을 물리친 명량해전,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승리였다.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 노량 해전(1598. 11. 19)
조선함대 | 일본함대 | |
사령관 | 이순신, 진린 | 시마즈 요시히로 등 |
병력 | 조명 연합군 200여 척 | 300 여척의 전선 |
피해규모 | 알려지지 않음 | 30여척 파괴 |
명량해전 이후 1598년 2월 17일 이순신은 고금도에 통제영을 세웠다. 다시 참전한 명의 수군은 도독 진린이 인솔하여 7월 16일 고금도에 진을 쳤다.
8월 18일 도요토미가 죽자, 일본은 퇴각을 준비하였다. 순천 왜성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명 연합함대에 막혀 고립되어 있었다. 이를 구원하기 위해 사천 왜성에 주둔 중이던 시마즈 요시히로가 노량으로 진출하였다. 이순신과 진린의 연합함대는 이를 막기 위해 11월 18일 관음포(노량)으로 진격하였다.
11월 19일 전투가 시작되자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였다. 이날 전투에서 200여 척의 일본 수군이 격파되고 50여 척만이 관음포 방면으로 겨우 달아났다. 이순신은 관음포로 마지막 도주하는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되었던 진린을 구했다. 이어 남해 방면으로 계속 도주하던 적을 추격하다가 왜적의 흉탄에 맞고 쓰러졌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 이외에도 명나라 장수 등자룡과 가리포 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홍양현감 고득장 등 많은 명장들이 사망했다. 한편, 순천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의 군사들은 남해도 남쪽을 거쳐 퇴각하여 부산에 집결한 후 철수했다. 이로 인해 7년에 걸친 임진왜란도 끝이 났다.
‘충무’라는 시호를 받고 영의정에 추증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이순신이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숨이 끊어졌으며, 조카인 이완이 그의 죽음을 숨긴 채 전투를 독려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죽음 소식을 들은 조정은 우의정을 추증했다. 1604년(선조 37)에는 선무공신 1등이 되었으며, 좌의정이 증직되었고 덕풍부원군으로 봉해졌다.
인조 21년(1643)에는 ‘충무(忠武)’의 시호를 받았고, 숙종 33년(1707)에는 충청도 아산에 세워진 사당에 ‘현충(顯忠)’이란 당호가 내려졌으며, 정조 17년(1793)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3. 이순신의 수군 재건로
◈ 수군 재건 입성길(구례, 양력 1597년 9월 13일)
1597년(선조 30년) 7월 16일,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칠천량 전투에서 일본 수군에 대패하였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조정은 7월 22일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하였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의 교서를 받은 것은 8월 3일(양력 9월 13일) 진주였다.
수군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군사와 무기, 군량, 전선의 확보가 중요했다. 그 답을 전라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봤다. 황대중 등 군관 9명과 병사 6명을 대동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수군 재건의 첫걸음이었다.
이순신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접경을 넘어 석주관을 지나 섬진강변을 달렸다. 강 풍경이 빼어났지만, 이순신은 한눈을 팔 여유가 없었다. 석주관을 거쳐 해질녘에 구례현청(옛 구례읍사무소)에 도착했다.이순신은 손인필 부자와 구례현감 이원춘 등과 함께 일본군을 물리칠 작전회의를 하며 밤을 지새웠다.
◈ 섬진강변 애민길(곡성, 1597년 9월 14일)
구례에서 하룻밤을 보낸 이순신은 압록을 거쳐 곡성현에 도착하였다. 텅 빈 현청에서 하룻밤을 보낸 이순신은 다음날 옥과현으로 향했다. 이순신은 옥과현감을 찾았다. 군량과 병기를 확보할 수 있는지 파악하는 게 무엇보다 급했다. 현감 홍요좌를 앞세워 곡식창고와 병기고를 찾았다.
이순신은 여기서 이복남 장군의 부대가 북상하면서 잔류하게 된 일부 병력을 모아 합류시켰다. 한 사람의 군인이라도 필요한 이순신에게는 크나큰 힘이 됐다. 보성에서 온 이기남의 아들도 군관에 합류했다.
이튿날 초저녁, 송대립이 정탐 활동을 마치고 돌아왔다. 정사준과 정사립, 이기남, 홍요좌 등 함대를 지휘해 줄 경험 있는 군관들이 여럿 합류했다. 군관 9명과 병사 6명으로 시작한 병력이 구례와 곡성을 거쳐 옥과로 오는 사이 많이 늘었다.
이순신은 겸면천을 따라 석곡으로 향했다. 석곡으로 가는 길에 군대에서 도망쳐 나와 돌아다니고 있는 병졸들을 만나 말 3필과 약간의 활, 화살을 구했다. 이순신은 능파정에서 하룻밤을 잤다. 능파정은 속마음까지도 알아주는 이순신의 오랜 친구인 신대년이 학문을 연구하는 공간으로 지어 놓은 집이었다. 이순신은 신대년과 함께 밤늦게까지 일본군을 물리칠 계략을 논의했다.
◈ 순천부 물자충원길(순천, 양력 1597년 9월 18일)
이른 새벽 대곡나루에서 배를 타고 대황강을 건넌 이순신은 창촌에 있는 부유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이순신은 부유창에서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확보하지 못했다.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서 어둠을 뚫고 달려왔는데도 불구하고 이복남이 남원성 사수 명령을 받고 철군하면서 군수창고에 벌써 불을 놓은 뒤였다.
이순신은 불에 타 재만 남은 부유창을 보면서 참담했다. 창촌마을에서 나온 이순신은 가까운 순천부로 이동했다. 순천부는 백의종군하던 4월 27일 도원수 권율을 만나러 와서 17일 동안 머문 이후 100여일 만이었다. 읍성에 도착한 이순신은 군기고와 식량창고를 점검하였다. 다행히 군기고에는 크고 작은 활과 화살이 쏟아져 나왔다. 무기가 고스란히 보존돼 있었다. 이순신은 비교적 가벼운 활과 화살을 군관들에게 분배했다. 활과 화살을 챙긴 군관들이 환호했다. 군사들의 사기도 올랐다. 총통과 화포는 따로 옮겨서 땅에 묻어두도록 했다.
이순신은 순천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 일찍 낙안으로 향했다. 마을의 원로들이 술독을 갖고 와서 이순신에게 올렸다. 이순신은 군사와 백성들도 함께 마시도록 하고, 당산나무에도 술 한 잔을 부어주었다. 백성들은 이 나무를 ‘장군목’이라 불렀다.
술로 목을 축인 이순신은 관아(낙안읍성)로 향했다. 하지만 또 빈손으로 돌아서야 했다. 청야전술로 모든 창고가 다 불에 타버린 뒤였다.
◈ 상유십이 득량길(보성, 양력 1597년 9월 19일)
낙안을 떠난 이순신은 보성으로 향했다. 보성은 1530년 경 장인 방진이 군수를 지냈던 고장이었다. 이순신이 도착한 고내(庫內)마을 조양창에는 불태워졌던 지금까지의 창고와는 달리 병사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양의 군량미가 남아 있었다. 다시 박곡마을 양산항의 집에서도 군량미를 얻어 군량미 걱정을 완전히 떨칠 수 있었다. 이곳의 지명이 ‘득량(得糧)’으로 된 것도 여기서 유래한다.
이순신이 보성으로 이동하여 보성읍성 열선루(列仙樓)를 찾았다. 8월 15일 추석날, 선전관 박천봉이 임금의 유지를 가지고 왔다. “수군을 파하고 육군에 합류하라!” 수군 철폐령이었다. 소수의 수군으로는 일본군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여긴 임금이 내린 명령이었다.
이순신은 답서를 보냈다. “아직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나아가 죽기로 싸운다면 해볼 만 하옵니다. 만일 수군을 철폐한다면 적이 만 번 다행으로 여기는 일일 것입니다. 전선의 수는 비록 적지만,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로 요약되는 장계였다. 수군을 파하고 육군에 의지에 싸우라는 어명에 따르지 않겠다는 글이었다.
이순신은 8월 17일 보성읍성을 나서 백사정이 있는 명교마을과 군영구미 군학마을로 향했다. 배설에게 전령을 보내 군영구미에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배는 보이지 않았다. 배설이 이곳을 거치지 않고 회령포로 가버린 것이었다.
◈ 회령진 출항길(장흥, 양력 1597년 9월 28일)
8월 18일 오전 이순신은 김명립과 마하수가 구해 온 배 10척에 전라도 내륙에서 확보한 병참물자를 싣고 군영구미를 출발했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된 뒤 처음 바다로 나가는 출항이었다.
군영구미를 떠난 이순신도 회령진성에 도착했다. 12척의 전선도 있었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뱃멀미를 심하게 해서 나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이순신은 회령포구에 군사들을 모이게 하고 숙배(肅拜)행사를 열었다. 숙배는 임금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며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군례다. 일종의 충성 서약식이다. 이순신은 장수와 장병들에게 선조 임금이 내린 교서와 전라좌수가 겸 삼도수군통제사 임명 교지를 공개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교서에 큰절을 하며 충성을 다짐했다. 숙배를 마친 이순신은 곧바로 회수한 전선 12척을 판옥선으로 개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개조된 판옥선이 모두 13척이었다.
◈ 우수영 명량해전 승전길(해남, 양력 1597년 9월 30일)
회령포에서 모든 군사들과 함께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죽기를 맹세한 이순신은 8월 20일 마량 앞바다를 거쳐 이진으로 갔다.
오랜만에 배에 오른 탓인지, 이순신은 속이 불편하고 머리가 심하게 아팠다. 이틀 밤을 꼬박 앓았다. 8월 23일 병세가 무척 심각해져서 배에서 내렸다. 마을 주민들의 극진한 도움을 받으며 치료를 했다. 몸을 돌본 이순신은 8월 24일 이른 아침에 배를 타고 이진을 떠났다. 낮에는 해상에서 함대 운용을 시험하며 땅끝 앞바다를 돌아 어란포구에 이르렀다. 어란진은 텅 비어 있었다. 주민들은 모두 피난 가고 없었다.
8월 26일 저녁나절, 적선이 이진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받았다. 조선수군은 그때까지 격군과 기구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틀 뒤인 28일, 새벽녘에 적선 8척이 모습을 드러냈다. 재건에 나선 조선수군과 적선과의 첫 만남이었다. 이순신의 명령에 따라 수군은 땅끝마을까지 쫓아갔다. 첫 번째 해상추격전에서 수군은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조선 수군은 8월 29일 아침, 벽파진으로 옮겨갔다. 열세한 병력으로 어떻게 일본군을 물리칠 것인지에 대해서 골몰했다. 이순신은 9월 15일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겨가기 전까지 이곳 벽파진에 머물렀다.
◈ 벽파진 명량해전 승전길(진도, 양력 1597년 10월 9일)
벽파진은 명량해전의 전략과 전술을 구체적으로 구상했던 공간이다. 이순신은 이 벽파정과 벽파진 앞바다에서 열세한 병력으로 일본군을 격퇴시킬 전략과 전술을 구상했다.
9월 7일 일본군의 동향을 파악한 임준영으로부터 이진에 머물고 있던 일본군 전함 가운데 열세 척이 선발대로 어란 앞바다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오후 늦게 직선 열세 척이 조선수군을 향해서 돌진해 왔다. 이순신은 수군 전함의 닻을 올려 바다로 나아갔다. 돌진해 오던 적선이 갑자기 방향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조선 수군은 달아나는 적선을 먼바다까지 쫓아갔다. 적극적인 공격에 적선이 쫓겨 도망갈수록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상대적으로 더 강해졌다. 적선과의 전투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심감도 얻었다.
9월 14일. 명량해전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정탐을 나간 임준영이 “적선 이백여 척 가운데 쉰다섯 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들어와 있습니다”고 보고했다. 먼저 전령선을 우수영으로 보내 피난민들을 뭍으로 올라가도록 했다. 자칫 백성들이 화를 입지 않을까 염려해서였다. 이순신은 제장들과 일본군의 기습 공격에 대응 및 아직도 열세에 놓인 병력으로 일본군과 어떻게 맞서야 할지 방어책을 논의했다.
◈ 전라도 백성과 함께 이룬 명량대첩(울돌목, 양력 1597년 10월 26일)
명량대첩을 하루 앞둔 9월 15일, 이순신은 함대를 이끌고 조수를 따라 수군진을 벽파진에서 우수영으로 옮겼다.
울돌목의 좁은 바닷길이 적은 병력으로 일본군의 공격을 막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강한 해류 때문에 쉽사리 적선의 진격이 쉽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울돌목은 육군과 협공작전을 펴며 한양으로 진격하려던 일본군이 반드시 거칠 수밖에 없는 길목이었다.
이순신은 모든 장수와 병사들을 모아놓고,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을 것이다(必死則生 必生則死).”,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經 足懼千夫).”며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9월 16일 아침, 구루지마가 이끄는 일본군의 선봉대와 13척의 조선 수군과의 전투는 한나절 간 계속되었다. 해가 서쪽으로 약간 기울 무렵, 바닷물이 역류하면서 소수의 전선으로 싸우는 조선 수군에 유리하게 바뀌었다.
거제현령 안위, 중군장 미조첨사 김응함, 전라우수사 김억추, 녹도만호 송여종, 평산포대장 정응두, 순천부사 권준 등 여러 장수와 병사들이 지자총통과 현자포, 화살을 빗발처럼 쏘았다. 조선 수군의 사격으로 적장 구루지마가 바다로 떨어졌다. 이순신은 구루지마의 목을 베어 함대 위에 높이 매달았다. 일본군이 동요하자 이순신은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적선 31척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사망자도 4,000명을 헤아렸다. 아직 가라앉지 않은 적선은 도망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조선의 수군들은 울돌목이 떠나가도록 승리의 함성을 외쳤다. 칠천량 전투에서 패하면서 잃은 제해권을 두 달여 만에 다시 장악하는 순간이었다. 13척과 지역 주민이 함께 일군 쾌거였다. 목숨까지 내던진 전라도 의병과 백성들의 희생이 만들어낸 눈물겨운 승리였다. 이로 인해 바다를 통해 다시 서울로 진격하려는 일본군의 작전은 물거품이 되었다. 아울러 전쟁을 포기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