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넓은 세상을 향해 2 나의 기쁨 3 마리아,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4 기도의 위력 5 지상의 선행을 통한 천국의 완성
6 나의 올리브 동산 7 죽음이 아니라 삶으로 들어감
제5장 죽음 이후의 삶
8 추억으로 가득 찬 한 권의 노트 9 공경의 물결 10 리지외의 성인 데레사, 선교의 주보 11 리지외로 몰려드는 군중 12 데레사 성녀, 교회 학자 13 영원한 친구이자 자매이며 동반자인 테레사
14 저자 후기
사순ㆍ대림피정 [대림특강] 소화데레사의 삶과 사랑 9 마지막 편
옴니아.보조.기조실 23.12.30 08:38
한 권 이어 듣기 - 소화 데레사의 삶과 사랑 9 마지막 편
1 넓은 세상을 향해
곤자가의 마리아 원장 수녀님이 나를 당신의 사무실로 부른 것은 1896년 5월 말이었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는데, 원장 수녀님이 공적으로 나를 부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내가 무엇을 잘못 했나, 아무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원장 수녀님은 26살의 젊은 선교사를 내게 맡기고 싶다고 대화 중에 털어 놓았다.
아돌프 룰랑 신부는 1896년 6월 28일 사제품을 받고 중국으로 파견될 것이라고 했다. 당시에는 선교사 지망자가 아주 많았다. 많은 젊은이들이 선교 열에 불탔으며, 정부의 식민지 정복에 따른 정책 일환으로 파견되었다. 성소자는 얼마든지 있던 시대였다. 그때 나는 이미 벨리에르 신부를 영적 형제로 가지고 있었으며, 그를 위해 많은 기도와 희생을 바치고 있었으므로 또 다른 형제를 갖는다는 사실이 좀 부담스러웠다.
나는 원장 수녀님에게 우리 공동체에 이러한 소임을 기꺼이 할 수 있는 수녀님들이 많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러나 원장 수녀님은 모든 이의를 거절했다. 순명할 수밖에.
사랑하는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두 오빠를 데려가셨는데, 이제는 두 명의 선교사를 형제로 내 곁에 세워 주셨다. 가르멜의 어머니인 아빌라의 데레사 성인처럼 나는 교회의 딸이기를 원한다. 성인은 이렇게 가르쳤다. "가르멜 수녀의 기도는 온 세상을 끌어 안아야 한다."
사제품을 받은 아돌프 신부는 1896년 7월 3일에 우리 공동체와 첫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가르멜을 방문했다. 이어서 나는 면회실에서 그와 담소를 나누었다. 나는 좀 쑥스러웠지만 내가 만든 성작 덮개를 선물했다. 우리의 만남이 있은 후 그는 곧 선교사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배를 타고 중국으로 출발했다. 나는 내 작업장에 그의 긴 여행을 동행하기 위해 그 지역 지도를 하나 걸어 놓았다. 나는 그에게 편지를 썼다.
' 나의 형제여,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호해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그 거리가 우리의 영혼을 떼어 놓지는 못할 것입니다. 심지어 죽음마저도 우리의 결속을 더욱 견고하게 해 줄 것입니다. 만일 내가 천국으로 가게 된다면 당신이 있는 곳을 방문할 수 있도록 예수께 청할 것이며, 우리는 함께 우리의 사도직을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영적 형제로 맺어진 두 신부와의 빈번한 편지 왕래를 통해 선교에 대한 열망이 자라났다. 오래 전부터 공동체에서는 인도차이나에 가르멜 수도원을 세우려는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을 박해한다는 소문 때문에 계획은 중단된 상태였다. 그 후 1896년 여름 동안에 건강은 상당히 좋아졌으며, 나는 또다시 선교를 은근히 꿈꾸었고, 그곳에서 예수님을 위해 순교자로 죽길 고대했다.
그리고 11월에는 공동체에서 나를 두고 인도차이나 통킹으로 파견하는 것에 대해 본격적으로 거론했다. 나는 감격하여 아돌프 룰랑 신부가 중국에서 보내준 선교사의 영혼이라는 책을 펴들었다. 계획된 사업을 해낼 수 있을 만큼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공동체의 모든 일에 빠지지 않고 다 참석했다. 심지어 한밤중에 하는 독서 기도에도 참석했다.
공동체에서는 내 진로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1861년 통킹에서 참수된 젊은 순교자, 테오판 베르나르드에게 9일 기도를 드렸다. 그의 젊음과 명랑함, 그리고 가족에 대한 사랑과 죽음, 이 모든 것이 나를 감동시켰다. 나는 그의 전구를 확신했으며 이미 마음은 통킹에 가 있었다. 그러나 9일 기도를 하는 중에 나는 기침을 심하게 하기 시작했으며 건강 상태는 급격히 나빠졌다.
1896년 겨울, 원장 수녀님은 발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도구인 각파를 갖다 주었다. 나는 농담조로 동료 수녀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군요. 성인들은 그들의 고행 도구를 가지고 천국에 들어갔는데, 나는 이제 각파를 가지고 들어가게 되겠네요."
나는 수 차례에 걸쳐 거북하고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여러 번 발포고를 등에 붙였는데, 그것은 몸의 염증을 뽑아낸다고 했다. 그리고 매일 아침 7시 이전에 제노베파 수녀는 말꼬리로 만든 장갑을 끼고 내 온몸을 문질렀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혈액순환을 도와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좋은 의도로 이루어진 모든 보살핌 덕분에 나는 녹초가 되었으며, 1896년 12월 어느 날인가 더 이상 방에서 나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어찌 어찌하여 겨우 일어설 수 있었으며,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간신히 성당으로 기어갔다. 성체를 한 번 모시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지 모른다. 1897년 새해가 밝았지만 나는 어떤 환상도 가지지 않았다.
24살 생일이 지난 지 일주일 후, 1월 9일에 나는 아네스 수녀님에게 털어놓았다. "언니, 이제는 천국에 가고 싶어." 믿음과 희망에 대항하는 공격과 반론도 강화되었다.
나는 내 성미에는 맞지 않지만 의지를 다해 사랑하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데레사 수녀님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내가 얼마나 깊은 어둠에 빠져 있는지 수녀님은 모를 겁니다. 나는 더 이상 영원한 삶에 대해 믿을 수가 없어요. 죽어 없어질 이승의 삶 후에는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아요. 내가 빠진 어둠의 심연이 어떤 것인지 수녀님에게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어요."
1897년 1월 21일, 나는 언니 아네스 수녀님의 축일을 기념하여 시를 하나 지었는데, 내적 투쟁의 강함이 약간 드러난다.
2 나의 기쁨
푸른 하늘이 흐려질 때, 주님께서 나를 전혀 돌아보지 않으실 때, 그늘에 머물며 나를 숨기고 낮추는 바로 거기에 나의 기쁨이 있다.
나의 기쁨, 이것은 내 유일한 사랑이신 거룩한 예수님의 뜻. 이렇듯 나는 아무 두려움 없이 나아간다. 밤을 낮처럼 그렇게 사랑한다.
그가 나의 믿음을 거절할 때 나의 친절을 두 배로 한다. 죽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겠으며, 삶이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예수님, 내 기쁨은 당신을 사랑하는 것.
1897년 3월 3일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 나는 모든 선교사들의 주보인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성인에게 9일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내가 죽은 후에도 이 세상 끝까지 선행을 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빌어주시길 청했다. 나는 요셉 성인께도 같은 지향으로 그의 전구를 청했다. 같은 날 중국에 있는 영적 형제인 아돌프 룰랑 신부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나 자신을 잊고자 합니다. 사후에도 나는 영혼을 구하길 원합니다.'
내 안에서는 선교사로 파견되고자 하는 소망이 또다시 불타올랐다. 원장 수녀님은 내 선교사 성소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대면해야만 했으니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허물어져가는 육체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나의 선교 열망에 관해 확실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그분의 뜻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 나의 선교 활동은 영적인 것이 될 것이며, 활동 범위는 전 세계가 될 것이다.
나는 기도와 사랑의 작은 길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것을 통해 곧 해야 하는 일과 포기해야 하는 것, 그리고 참아 견뎌야 하는 모든 것을 통해 선교사들을 후원했다. 제외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모든 것이 소중했다.
의사는 내게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산책할 것을 권했다. 어느날, 나를 바라보던 한 수녀님이 내게 힘을 아끼라고 충고했다. 나는 이렇게 설명했다. "한 선교사가 작열하는 폭염 아래 이쪽 선교지에서 저쪽 선교지로 먼 길을 가야만 하는데, 지쳐서 곧 넘어질지도 모른다면, 그를 위해 내 수고를 기꺼이 봉헌하고자 합니다."
3 마리아,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기침, 열, 가슴에 통증, 구토, 각혈. 1897년 4월부터 이 모든 것이 내게는 일상 생활이 되었다. 그러나 동료 수녀님들은 계속해서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한 번은 열이 나서 내 얼굴이 상기되었는데, 어떤 수녀님이 이렇게 말했다. "데레사 수녀님 아주 건강해 보입니다."
나는 많이 아팠지만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아픈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다만 언니들은 내가 정말 더 나빠져 간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소임을 다했으며,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았다.
어느날 언니 제노베파 수녀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죽기 전에 할 일이 하나 있어. 그것은 오랫동안 간직해온 소망인데,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시로 쓰고 싶어."
내가 들어 온 마리아에 대한 강론은 종종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분에 대해 말할 때 천상적 거창한 덕행만을 말했으므로 마리아는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이방인이 되었다.
내가 사제였다면 성모 마리아에 대해 즐겨 강론했을 것이다. 그분을 우리가 따라 할 수 있는 모범으로 제시했을 것이다. 마리아는 하늘과 땅의 여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마리아는 여왕이라기보다 어머니에 더 가깝습니다."
성모 성월인 5월에 내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나는 온 힘을 기울여 천상 어머니 마리아에게 사랑과 공경에서 우러난 시를 바쳤다. 복음서는 시종일관 마리아의 삶이 매우 소박했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아무것도 특별할 것이 없는 단순한 믿음의 삶이었다.
마리아는 평범한 일상 생활 안에서 하느님과 동료 인간들에게, 사랑을 살아야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모범이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당신의 삶을 묵상할 때, 당신을 관상하고자 당신께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리할 때 내가 당신의 어린 아이로 여겨지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신도 나처럼 고통을 겪으며 죽어가는 한 인간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며 하느님의 작은 종이라고 부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겸손으로 당신을 황홀하게 했습니다. 이 커다란 덕행이 당신을 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겸손은 거룩한 삼위일체를 당신 품으로 이끌었습니다. 사랑의 영이 당신을 감싸주셨으며,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신 아드님께서는 당신으로부터 살을 취하셨습니다.
오, 마리아! 당신은 아십니다. 나는 작지만 당신처럼 권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내 허약함 앞에서도 나는 두려워 떨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풍요로움은 아이의 것이기도 하니까요.
오 사랑하는 어머니, 나는 당신의 어린 아이입니다. 당신의 덕행, 당신의 사랑, 그것은 또한 내 것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나를 깨우쳐 주십니다. 당신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오, 선택된 이들의 여왕이시여! 당신은 끊임없이 소박한 덕행을 실천하여 천국에 이르는 좁은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오, 마리아! 내가 당신 곁에 있게 되는 날, 나는 행복할 것입니다. 작은 자로 머무는 것에 대해 전능하신 분께서 당신에게 큰 일을 하셨습니다. 나는 그 일들을 되새기려 합니다.
전능하신 분을 찬미하기 위해서 오, 당신의 설득력 있는 침묵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요. 그것은 내게 달콤하고도 기분 좋은 음악입니다. 그것은 오로지 하늘의 도움을 고대하는 한 영혼의 위대함과 전능을 알려줍니다.
예수께 말씀해 주십시오. 절대로 외면하지 말라고. 그는 숨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를 기다릴 각오가 되어 있답니다. 그날에 나의 믿음은 소멸하겠지만.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나는 마리아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관계를 묘사하였다.
아름다운 천국에서 당신을 뵙기 위해 나는 곧 떠나갈 것입니다. 마리아여, 당신은 내 인생의 아침에 웃음을 보내셨지요. 오소서 어머니! 다시 한 번 당신의 웃음을 보내 주십시오. 보십시오. 이제 저녁이 되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영광스러운 광채에 더 이상 놀라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고통을 겪지 않았습니까? 이제 당신 앞에 무릎 꿇고 이 노래를 부르렵니다. 내가 왜 당신을 사랑하는지.
4 기도의 위력
기도의 위력은 참으로 크다. 그것은 마치 언제라도 왕을 만날 수 있으며, 청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얻을 수 있는 여왕에 비유할 수 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다. 왜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기를 어려워하고 재미 없는 일로 여기는 것일까? 그들은 기도서로 경건한 기도를 많이 또는 전혀 할 수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성무일도를 제외하고 아름다운 기도문을 찾기 위해 수많은 책을 뒤져야만 했다면 참으로 서글펐을 것이다. 나는 무엇을 골라야 할지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며, 마치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아이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나는 사랑하는 하느님께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단순히 말했으며, 그는 나를 항상 이해했다.
기도는 마음의 비상이었으며, 천국을 향한 순진한 눈길이었다. 기도는 기쁨 중에 또는 고통 중에 드리는 감사와 사랑의 외침이었다. 간단히 말해 기도는 내 영혼을 넓혀 주었으며, 나를 하느님과 결합시켜 주었다.
설립자 아빌라의 데레사 성인은 이렇게 말했다. '기도는 기꺼이 함께 있고 싶은 좋은 친구와 나누는 친밀한 대화와 같다.' 나는 내적으로 바싹 마른 땅처럼 삭막함을 느낄 때 더 이상 좋은 생각도 할 힘이 없게 되면 천천히 주님께서 손수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드리고 성모송을 외웠다.
어떤 지식인이 한 번은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지렛대와 지축을 주십시오. 그러면 세상을 바꾸어 놓겠습니다. "
아르키메데스가 이루지 못한 것을 성인들이 이루었다. 하느님 손수 지축이 되었으며, 그들의 기도가 지렛대가 되어 그들은 꾸준히 세상을 변화시켰으며 바른 길로 이끌었다. 세상을 하느님께 향하게 했던 것이다.
5 지상의 선행을 통한 천국의 완성
제노베파 수녀는 1897년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월요일에 정원에서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 아마도 내 죽음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나는 무릎을 꿇고 거대한 사진기 앞에서 9초 동안 꼼짝도 하지 못하고 얼굴에는 웃음까지 띄어야 했다. 셀리나는 한 번으로 만족하지 않았으며, 두 번이나 다시 요구했다. 나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을 만큼 지쳤다. 그날 내가 곧 죽게 되리라는 것을 확실하게 느꼈다.
1897년 7월에 심하게 각혈을 했는데, 그것은 8월 5일까지 계속되었다. 7월 8일에 나는 정든 작은 방을 영원히 떠나 병실로 옮겨졌다. 병실은 정원 쪽으로 창이 하나 있었다. 갈색 커튼으로 사방이 가려진 철침대는 마치 천국의 침대 같았다. 한쪽 커튼에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고정시켰다. 어린 시절부터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웃음 짓는 동정녀상은 내 눈높이에 세워 놓았다.
이제 이것이 나의 세상이었다. 사랑하는 하느님께서는 영적 형제인 사제들과 친척들에게 작별의 편지를 쓸 수 있는 힘을 주셨다. 그러나 펜을 잡는 것이 점점 더 힘들게 느껴졌다.
나는 분명히 알아차렸다. 예수께서 곧 나를 모든 보물과 함께 당신의 끝없는 사랑의 대양 속으로 침몰시키리라는 것을. 주님 당신은 아십니다. 내 보물이란 당신이 내게 주신 영혼들이라는 것을.
당신이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께 기도를 드렸던 것처럼, 나 또한 내 인생의 마지막 밤에 당신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저는 당신께서 제게 맡기신 일을 다 이루었습니다. 당신께서 제게 맡기신 사람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이제 그들은 당신이 제게 주신 모든 것이 당신의 선물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저는 이제 당신께 가지만, 그들은 이 지상에 남아 있습니다. 그들을 악에서 보호해 주시길 청합니다. 하느님, 당신은 아십니다. 저는 그 무엇도 원치 않고 당신만을 사랑하길 원한다는 것을.
당신의 사랑은 어린 시절부터 저를 동반해 주었으며, 마치 자석처럼 저를 끌어당겼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사랑을 넘치도록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당신께 청하오니, 당신이 제게 맡기셨던 모든 이들을, 저를 사랑하듯이 사랑해 주시길 바랍니다.
열과 발한, 질식과 함께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나는 완전히 지쳤고, 더 이상 아무것도 쓸 수 없을 만큼 무력해졌다. 언니 아네스 수녀님은 자주 침대 곁에 앉아서 우리가 나누는 대화 중에서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모두 적었다. 나는 죽는 순간까지 인간의 구원 문제에 몰두했다.
1897년 7월 중순에 폴리나는 어쩌면 내 인생의 역사를 공개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 나는 좀 망설였지만 알 수 없는 신비스러운 예감을 느꼈고 결국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께서 많은 선을 행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머니를 통해서 사랑하는 하느님의 자비를 더 잘 깨닫게 될 것입니다. "
얼마 후 폴리나와 열망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나는 천국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있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사랑하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그것을 진정 원치 않는다면 내가 죽어서도 지상에서 선한 일을 계속하고자 하는 열망을 내 안에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천국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조용히 머무는 장소로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했다.
"사랑이 불타는 영혼은 하는 일 없이 그냥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내가 천국에 있으면서 무엇을 할 것인지 계획을 말해볼까요? 나는 선교 직무를 시작할 것입니다. 내 소명이 시작될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듯이 사랑이 하느님을 그렇게 사랑하도록 가르칠 것입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작은 길을 가르쳐주고자 합니다. 만일 사랑하는 하느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주신다면, 나는 내 천국을 세상 끝까지 완성할 것입니다. 나는 이 지상에서 선을 행함으로써 내 천국을 세상 끝까지 완성하고자 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천국에 가게 되면 이 지상에 장미를 뿌리겠습니다."
나의 대담성은 한이 없었다. "사랑하는 하느님은 천국에서 내 모든 소원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이 지상에서 내가 당신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었듯이." 나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자만하지 않고 다소곳이 말했을 뿐이다. 사랑하는 하느님께 나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으며 교회와 영혼의 구원만을 간청했다.
6 나의 올리브 동산
1897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한 고비가 왔다. 왼쪽 가슴이 무척 아팠으며 발이 붓기 시작했다. 그 때 마침 수도원 주치의는 휴가 중이었으므로 곤자가의 마리아 원장 수녀님은 친척 라네엘 박사가 나를 진찰하도록 했다. 진찰 결과 내 폐의 오른쪽 폐엽이 결핵균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왼쪽 폐엽도 절반 이상이 상했다는 것이다. 결핵은 마지막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드디어 진실이 밝혀진 것이다. 결핵균은 내 온 몸을 공격했으며 나는 처참한 고통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 공동체의 많은 수녀님들은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는 가운데에서도 한 두 시간, 또는 하루 이틀 병세가 호전되는가 싶으면 수녀님들은 내 병이 그렇게 중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빈센트 수녀님은 공동 휴식시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정말 알 수가 없어요. 왜 사람들이 그렇게도 아기 예수의 데레사 수녀를 주목하는지. 맹세코 말하지만, 데레사 수녀는 그렇게 좋은 수녀가 아니에요. 나는 그녀가 한 번도 특별한 것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한 수녀님이 그런 인정머리 없는 이야기를 전해주었을 때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대꾸했다. "내가 좋은 수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죽기 전에 알게 되어서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감추어지고 알려지지 않은 채 사랑의 작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많은 수녀님들이 온갖 어리석은 질문으로 나를 괴롭혔다.
"데례사 수녀님, 죽는 것이 두려우세요? 수녀님은 도대체 왜 죽게 되는데요?" 그 밖에도 우둔한 질문이 수없이 많았다.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유머를 실어 대답하느라 무척 애를 썼다.
"나도 죽게 될 거예요. 나라고 해서 왜 죽음이 두렵지 않겠어요? 예수께서도 슬픔에 억눌렸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슬픔 없이 고통에 시달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셨고, 당신의 아버지와 긴밀히 결합되어 사셨음에도 올리브 동산에서 겪은 죽음의 공포는 참으로 처참했어요. 그것은 하나의 신비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그것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내 안에서 그것을 체험하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 병실이 나의 올리브 동산입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고통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커졌으며,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이렇게 수녀님에게 간청했다. "제발 중환자에게 독한 약을 주지 마세요. 무신론자 중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에요. 만일 나도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이 없었다면 주저하지 않고 자살하려 했을 것입니다."
나는 폴리나가 눈앞에 다가오는 내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순순히 나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농담조로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하느님께서 작은 포도 한 송이를 무척 가지고 싶어 하시는데 죄인이 그것을 주지 않으므로 그분은 그것을 훔치려고 해요."
어느 날인가 호흡을 도와준다면서 코에다 거추장스러운 산소 마스크를 씌워 놓았다. 동료 수녀님이 이를 보고 동정심을 느껴 자기도 죽고 싶을 지경이라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더욱더 잘 사세요. 수녀님은 둘 중 어떤 것이 더 나를 환하게 하는지 알지 못해요."
나는 미숙한 유머를 통해서나마 우울해하는 수녀님들을 명랑하게 하는 데 성공했으며, 코앞에 닥친 작별의 아픔을 잊어버리게 했다. 어느 날 상태는 극도로 나빠져 주치의는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신부님이 병자 성사를 주었으며 영성체를 시켜 주셨다. 병실 옆방에서는 제의방 수녀님이 장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반쯤 열린 문을 통해서 나는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폴리나에게 "저기 초가 보이죠" 하고 말했다. "도둑이 나를 훔쳐가거든 저 초를 제 손에 쥐어주세요. 저 보기 싫은 촛대는 제외하고요. "
그러나 이번 위기도 넘겼다. 극심한 고통은 고개를 숙였지만 열과 갈증, 중압감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왼쪽 폐의 반쪽만을 사용하여 숨을 쉴 수 있었다.
1897년 8월 27일 수녀님들은 나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침대를 창문 앞 방 한가운데로 옮겼다. 이 자리에서 나는 정원을 바라볼 수 있었으며, 여름에 흐드러진 꽃을 즐길 수 있었다. 8월 30일 수녀님들은 나를 바퀴 달린 침대에 옮긴 후 회랑으로 데려왔으며, 성당 문을 활짝 열어놓고 그 앞에다 세워 놓았다. 이것이 마지막 성체 방문이었다. 나는 투병 기간 동안 나를 사로잡는 많은 생각을 털어놓았다.
폴리나는 그것을 모두 기록했는데, 그녀는 내 말이 동료 수녀님들을 위로하고 또한 그들에게 힘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내가 확언하건데 하느님은 당신이 믿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선하다. 나는 모든 것이 하느님한테서 온다는 것을 친밀하게 느낀다. 우리 삶에서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으로 하느님께서 조정하신다. 나는 주님의 기도를 묵상하며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하느님은 어떤 어머니보다도 더 사랑이 지극하시다. 이웃 사랑이란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항상 사랑으로 남을 평가해야 한다. 우리의 임무는 치안 재판관 역할이 아니다. 하느님 홀로 이 권리를 가지고 계시다. 우리의 임무는 평화의 천사로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시샘할 필요가 없도록 모든 것을 짜맞출 줄 아신다.
나는 내가 그렇게도 부족해 보이고 하느님의 자비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나는 순간순간 고통을 당한다. 다가오는 아침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내게 순간을 위한 힘을 주신다. 나는 통증이 얼마나 극심할지 모르지만 그 마지막 싸움을 전혀 겁내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실 것이며, 그분은 어린 시절부터 줄곧 나를 인도해 주셨다. 나는 그분께 의지한다. 그분이 나를 끝까지 도와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죽음이 나를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데려가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가 하느님께 이르는 유일한 가능성이다. 하느님 손수 커다란 보상이 될 것이며, 나는 그 밖에 어떤 것도 소유하길 원치 않는다. 내 길은 신뢰와 사랑으로 가득하다. 나는 이토록 사랑으로 충만한 친구, 예수님 앞에서 겁을 내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7 죽음이 아니라 삶으로 들어감
나는 고통스러운 죽음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사랑의 작은 길에 성실히 머물고자 했다. 하루하루 다음 시편 9절에서 힘과 평화를 발견했다.
"주님, 당신이 하신 모든 행업에서 나의 기쁨을 발견합니다."
나는 1897년 6월 어느 날인가, 내 작은 복음서의 마지막 장에다 이 구절을 적어 놓았다. 나는 이 말씀과 함께 살았으며, 이 말씀과 함께 죽길 원했다.
9월 중순부터 숨 쉬는 것이 힘들어졌다. 어머니이신 땅의 공기가 부족하게 되었는데,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언제 천국의 공기를 주시려는가?
9월 25일 나는 셀리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죽게 될 거야. 그것은 확실해." 그게 언제인지 모를지라도 셀리나는 이렇게 응수했다. "너는 천국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겠지? 그렇지?" "아니, 나는 아예 내려올 거야." 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셀리나는 나를 돌보기 위해 밤에 자주 일어났다. 한 번은 팔을 벌리고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나를 발견하고는 이렇게 물었다. "너 지금 뭐 하니? 잠을 자도록 노력해 봐. 너는 잠을 자야 돼." "너무 아파서 잠을 잘 수가 없어. 그래서 기도하는 거야." "그래. 예수님께 뭐라고 말하니?"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다만 사랑할 뿐이야."
9월 18일 수녀님들이 내 침대를 정돈해 줄 때, 원장 수녀님은 바싹 마른 나를 처음으로 보았다. 그분은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며 이렇게 외쳤다. "이게 웬일이냐, 이런 말라깽이라니." 나는 아무런 감정도 없이 이렇게 대꾸했다. "해골이지요."
내 삶의 마지막 며칠 동안 말은 점점 줄어들었다. 나는 자연을 무척 사랑했으므로 즐겨 정원을 바라보았다. 특히 정원의 여러 가지 아름다운 꽃을 즐겨 바라보았다.
9월 29일 수요일 아침에 수녀님들은 그르렁거리는 내 소리를 들었다. 모든 수녀님들이 병실에 모였으며 나를 위해 임종경을 바쳤다. 점심 때 나는 곤자가의 마리아 원장 수녀님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것이 사투인가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요.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포콩 신부님이 마지막 고해성사를 주었다. 그분은 내 방을 나가면서 깊은 인상을 받은 듯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영혼이 있을 수가!"
원장 수녀님은 9월 29일에서 30일로 넘어가는 밤에, 언니 마리와 셀리나가 나를 지키게 했다. 그들은 교대로 나를 보살폈다. 폴리나는 내 곁에서 잤다. 그 밤은 지독히도 무서운 밤이었다. 나는 성모님께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9월 30일 목요일 아침, 그날은 무정하고도 슬픈 날이었다. 새 언니는 공동체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내 곁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은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는 나를 홀로 남겨놓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날 하루 종일 질식으로 인한 발작에 시달렸다. 헐떡이며 폴리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언니는 모를 거야. 질식이 무엇인지, 오 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원장수녀님에게 말했다. "어머니, 정말 이제는 잔이 넘치도록 가득 찼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그분은 절대로 저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분은 지금까지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오, 하느님 당신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그러나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이 이렇게도 많은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요. 저는 이것을 하느님을 위해 영혼을 구원하려는 내 불타는 소망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어요. 나는 나를 사랑에 넘겨준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습니다. 결코 후회하지 않아요. 그와 정반대입니다." 그날 저녁 7시가 조금 지나서 나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어머니, 이것이 아직도 사투가 아닌가요? 내가 죽지 않게 되나요?" 원장 수녀님은 "그렇지 않단다. 그게 바로 사투란다" 하고 말했다. "그렇다면 좋아요. 계속해서 기다리지요. 계속해서." 그런 다음 내 손에 쥐어진 작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마지막 힘을 다해 말했다. "오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의 하느님, 당신을 사랑해요." 이것이 데레사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반짝이는 시선을 성모상 위로 향했다. 몇 분 후, 대레사는 눈을 감더니 다시 자리에 누웠으며 잠시 후 숨을 거두었다. 저녁 일곱 시 이십 분 경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름다운 웃음이 드리워져 있었다. 데레사는 어린 소녀처럼 아름다웠다. 그녀의 찬란한 삶과 행복으로.
"나는 죽지 않고 삶으로 들어간다." 언젠가 그녀한테서 들은 이 말을, 우리는 그녀의 죽음을 통해 확인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모습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공동체 수녀들에게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다음 날인 1897년 10월 1일 셀리나는 데레사의 모습을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10월 3일 일요일에 데레사는 꽃으로 장식되어 성당에 안치되었으며, 셀리나는 다시 한 번 동생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일요일 저녁 때까지 데레사의 언니와 레오니, 그리고 친척들과 친구들, 사제와 그 밖의 대례사를 아는 사람들이 데레사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10월 4일 월요일에 많은 사람들이 수도원 성당에서 거행된 데레사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곧이어 데레사의 시신은 리지웨의 시립공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이시도르 외삼촌이 그곳에 가르멜 수도원을 위해 땅을 사 두었던 것이다. 데레사의 무덤 위에는 나무 십자가가 세워졌다. 그녀의 이름과 생년월일, 그리고 나이와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졌다.
'나는 지상의 선을 통해 나의 천국을 완성하고자 합니다.'
지난 몇 달 동안, 그리고 특히 최근 며칠 동안의 가슴 아픈 사건들이 지나간 후 가르멜 수도원에서는 다시금 질서정연한 엄격한 일과 속에 기도와 일, 공동, 휴식과 침묵 등 일상 생활이 계속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가? 추억으로 가득 찬 노트 한 권이 있었으니, 이것은 데레사가 유언으로 남긴 것이다. 이 노트는 선행에 대한 자신의 실천을 기록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감격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제5장 죽음 이후의 삶
8 추억으로 가득 찬 한 권의 노트
데레사가 죽기 2년 전에 일생을 기록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들이 관상적이고도 매력적인 이 책에서 자기의 능력에 따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체험을 하게 된다.
데레사는 임종 자리에서 그녀의 자서전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예견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법을 더 많이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온 세상이 나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 그녀는 가르멜 수도원에 감추어진 생활 뒤 사후에 비로소 활동하길 원했으며, 사람들에게 그녀의 작은 길을 세상 끝까지 가르치고자 했다. '나는 지상의 선행을 통해 내 천국을 완성하길 원합니다.'
데레사는 오해를 막기 위해 수녀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천국에 가게 되면 구운 비둘기 고기를 수녀님들의 입에 넣어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는 사랑과 희생과 신뢰의 작은 길을 걷고자 길을 나선 모든 이들을 자매로서 그리고 동반자로서 도와주길 원한다.
그녀의 선종 1년 후 데레사의 자서전은 미고랭 주교의 인준으로 출판되었다. 데레사의 자서전은 출판되자 마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현대적 매스컴의 도움도 없이 데레사는 몇 년 안 되어 전 세계에 알려졌다. 그녀가 죽은 지 18년 후인 1915년, 그녀의 자서전은 이미 21만 1515권, 그녀의 삶을 간단히 소개한 소책자 71만 권, 그리고 장미비와 함께 청원 기도문과 기적을 보고하는 템플릿 십일만 장 이상이 팔렸다. 그 사이 데레사의 자서전은 5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9 공경의 물결
데레사의 자서전이 빠르게 전파되면서 그녀에 대한 공경의 물결이 쇄도했고, 리지웨의 가르멜 수도원은 수많은 편지로 뒤덮였다. 편지를 보낸 사람들은 놀라운 치유에 대해, 개과천선에 대해, 그리고 특별한 은총의 체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자서전이나 그림 또는 유물을 갖고 싶어 했다. 데레사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공경을 받았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들 중에는 폴 클로델, 조르즈 베르나노스, 줄리앤 그린, 이다 프리데리크 괴르, 마리 노엘 같은 작가나 시인이 있는가 하면, 페터 부스트, 장 귀트용, 에디트 슈타인 같은 지성인들도 있고, 원자 학자 막스 트루카르프나 가수 에디트 피아프도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슬람교도 알렉 미모나, 올림픽 메달리스트도 있다. 그 밖에도 많은 이들이 그녀를 공경했으며,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1957년 10월 1일 27의 나이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자크 페슈는 대레사 성녀에 대한 공경을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 예수님은 내 곁에 가까이 계신다. 그분은 항상 당신 가까이 나를 이끌었으며, 나는 고요 속에서 그분을 경배할 수 있고, 사랑 때문에 죽길 원한다. 나는 마치 아기 예수의 작은 데레사 성인처럼, 그의 자비하신 사랑의 번제물이 되고자 심장의 고동이 뛸 때마다 내 의지를 새롭게 하려 한다. 나는 밤의 어둠 속에서 평화롭게 기다린다. 사랑을 기다린다. 5시간 후면 나는 예수님을 뵙게 될 것이다.'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데레사의 무덤을 찾아왔다. 그들은 병의 치유나 회개를 청했으며, 힘겨운 십자가를 그녀의 전구를 통해 가볍게 하고자 청했다. 1903년 스코틀랜드에서 토마스 니모 테일러 신부가 데레사의 시성 청원을 제안하기 위해 리지외의 가르멜 수도원을 방문했다.
수녀들은 그의 의견을 듣고 아연실색했다. 원장 수녀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많은 가르멜 수녀들이 시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성 청원에 대한 생각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으며, 사람들은 아기 예수의 작은 데레사를 교회가 시성하기 훨씬 오래전부터 공경해 왔다.
10 리지웨의 성인 데레사, 선교의 주보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날이 갈 수록 데레사의 시성을 간절하게 원했다. 1907년 3월 15일 교황 비오 10세도 하느님의 백성과 같은 생각임을 표명했다. 그는 개인 알현 때에 데레사를 현대의 위대한 성인으로 불렀으며, 이렇게 대담한 진술을 함으로써 시대를 앞서갔다. 3년 후에야 바위에 교구에서 교구 소송을 시작했는데, 그것은 지역 주교가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가르멜 수녀들은 주교로부터 아기 예수의 데레사 수녀에 대한 모든 기억을 기록해 줄 것을 위임받았다. 37명의 증인 중에는 데레사와 함께 살았던 9명의 가르멜 수녀들이 있었으며, 그 외 증인들은 모두 주교관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100여 차례가 훨씬 넘는 심리에 참석하여 데레사에 대해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답했다. 로마 교황청은 이런 사건을 심사 처리하는데 통상적으로 십여 년을 소요하는데 이번에는 다급함을 느꼈다.
주무관청의 책임자인 비코 추기경은 이렇게 경고했다. "백성의 소리를 소홀히 하지 않으려거든, 작은 데레사의 시성식을 서둘러야만 합니다." 그리고 교황 비오 10세도 이렇게 말했다. "시성식을 최대한 빨리 준비하는 것이 시의 적절한 일입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사도자의 심리를 지연시켰으며, 1915년 8월 17일 새 교황 베네딕토 15세의 지시에 의해 다시 열리게 되었다. 사도자의 심리는 91차례의 회의로 1917년 10월 30일 막을 내렸다.
1923년 4월 29일 새 교황 비오 11세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아기 예수의 데레사 수녀의 시복식을 주재했다. 이때 두 개의 기적 사건이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야 했는데 수백 개의 기적 사건 중에서 간선되어 먼저 이루어졌다. 설암에 걸린 한 노인이 갑자기 치유되었으며, 영국의 한 사제는 기도를 드리면서 데레사 성인의 유물을 쓰다듬는 동안 놀랍게도 결핵이 치유되었다. 교황 비오 11세는 데레사에게서 20세기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을 파악했다.
그는 대레사에게서 교황직의 별을 보았으며, 집무실에 데레사의 사진을 걸고 그녀의 유물을 간직했다. 1923년 3월 23일 데레사가 시복되기 한 달 전 그녀의 시신은 리지외의 시립공원 묘지에서 가르멜 수도원으로 옮겨졌으며, 오늘날까지 이곳의 유리 상자 안에 모셔져 있다.
쌍두마차가 소중한 관을 싣고 2 킬로미터를 지나오는 동안 5만 명이 넘는 순례자들이 동참했다. 전쟁 때 부상으로 다리가 마비되었던 한 남자는 그날 완전히 치유되어 행렬을 따라 함께 걸었다. 가르멜 수도원의 정문에서 유해를 기다리고 있던 한 젊은 시각 장애인은 갑자기 눈이 열려, 수도원 안으로 들어가는 데레사의 성대한 입장을 함께 지켜보았다. 1925년 5월 17일 시복식이 있은 지 2년 만에 교황 비오 11세는 테레사를 성인 명부에 기록했다. 33명의 추기경과 250명의 주교, 그리고 수많은 신자가 시성식의 증인이었다. 그리고 다시 2년 후 비오 11세는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를 선교의 주보로 선포했다.
11 리지외로 몰려드는 군중
데레사 성인의 시성식 이후 그녀에 대한 공경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시골의 작은 성당에서도 그녀의 상을 발견할 수 있다. 제노베파 수녀가 그린 귀엽게 웃음짓는 데레사의 초상화가 세상을 가득 메웠다. 가장 유명한 그림은 십자가와 장미를 가슴에 안고 있는 데레사의 모습이다. 이 그림은 다음과 같은 그녀의 말을 상기시킨다. "내가 천국에 가게 되면 지상에 장미를 뿌릴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가르멜 수녀들은 데레사가 간직했던 많은 사진을 몇십 년 동안 책상 안 먼지 속에 방치했다. 사람들은 당연히 이렇게 물을 것이다. 데레사의 사진이 왜 그렇게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았는가. 가르멜 수녀들은 새로운 기술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며, 사진이나 초상화는 내놓을 만한 것이 못된다고 생각했다. 셀리나가 죽은 지 2년 후인 1961년에 가서야 겨우 데레사의 사진들이 공개되었다.
사진은 데레사가 작고 귀여운 성녀라는 사람들의 속단을 깨뜨리는 데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 데레사는 약속했다. "나는 다시 올 것이다." 그렇다, 데레사는 그녀의 모습 그대로 자비하신 하느님 사랑에 대한 그녀의 소명과, 복음서가 우리에게 밝혀준 하느님 대전에 진정한 어린 아이의 길에 대한 그녀의 가르침을 가지고 올 것이다.
교황 비오 11세는 예언자적 안목으로 바이웨의 새 주교에게 리지웨의 대례사 성녀에게 봉헌하는 대성전을 지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성전은 크고 아름다우며 가능한 한 빨리 완성되게 하십시오." 공사는 1929년에 시작되었으며, 1937년 7월 11일에 훗날 교황 비오 12세가 될 파첼리 추기경이 파실리카를 축성했다.
순례자들과 데레사의 친구들이 전 세계에서 이 축복받은 장소를 방문했다.
그들은 온갖 근심, 걱정과 관심사를 가지고 찾아왔다. 길을 찾는 자는 길을 발견하고 의혹에 시달리는 자는 믿음을 갖게 되며, 고통받는 자는 희망과 힘을 얻는다.
순례자의 숫자를 헤아리기란 불가능하지만 연간 10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1980년 6월 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당신의 프랑스 사옥 방문 끝에 순례자로서 리지웨를 방문했다. 그는 바실리카 앞 광장에서 10만이 넘는 순례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성인들은 결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제의 남자와 여자가 아니며 결코 과거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와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항상 내일의 남자이며 여자입니다. 복음서가 약속한 미래의 사람들입니다. 다가오는 세상의 증인들입니다.
리지웨의 성인 데레사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영이 그녀의 가슴 속에다 현대인들이 복음서의 근본 신비를 알아볼 수 있도록 드러내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를 하느님의 아들 딸로 만드는 성령을 받았으며, 그 안에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 작은 길은 거룩한 동심의 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진리는 복음서의 기본이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자녀들입니다."
12 데레사 성녀, 교회 학자
1997년 10월 1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를 교회의 학자로 들어 높였을 때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의 시선은 로마로 집중되었다. 2천 년 역사를 가진 가톨릭 교회 안에서는 33명의 성인이 이 명예로운 직위를 수여받았다. 그들 중에는 교부 암브로시오, 예로니모, 아우구스티노,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있고, 위대한 학자로는 토마스 아퀴나스, 켄터베리의 안셀모,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등이 있다.
그리고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비로소 2명의 위대한 성인이 교회 학자 대열에 들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인과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인이 바로 그분들이다. 그리고 그들 중 최연소자로서 33번째로 교회 학자의 명예를 얻은 사람이 바로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인이다.
이것은 여러 측면에서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많은 사람들이 의문스러워 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그녀는 신학을 공부하지도 않았고, 신학 작품을 쓰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삶을 기술한 몇 권의 노트와 편지, 시, 기도, 연극 대본, 유언 등을 남겼을 뿐인데.
데레사는 자서전에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고 있다. 그녀는 고백하건데, 어떤 신학적 작품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님 손수 그녀를 가르쳤으며, 사랑의 학문 속에서 지도를 받았다고 말한다.
데레사는 그로써, 날마다 작은 일 안에서 체험하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데레사가 일상 생활 안에서 사랑의 작은 길을 발견하도록 해주었으며, 그녀는 이 길을 통해 위대한 거룩함에 도달했던 것이다.
이렇듯 그녀는 작은 길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 밖에도 데레사는 그녀의 모범적 삶과 가르침을 통해 우리 시대의 어둠에 밝은 빛을 던져준다.
사실 우리는 가치나 믿음의 상실, 삶의 의미와 방향상실, 마약 중독이 난무하는 어두운 시대에 살고 있다. 데레사는 백여 년 전에 그녀의 성서적이고도 성체적 삶을 통해 교회의 살아있는 지체이길 원함으로써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선취했던 것이다.
교회 당국을 향한 많은 비판에 대해 데레사는 교황과 주교, 그리고 사제들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을 가지고 이렇게 대답한다. "나의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부에서 나는 사랑이 됨으로써 모든 것이 될 것이다."
13 영원한 친구이자 자매이며 동반자인 데레사
데레사가 친척들과 영적 형제인 사제들에게 작별 편지에서 한 약속은 우리에게 하는 약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벨리에르 신부에게 한 약속도 마찬가지다.
' 나는 형제에게 아주 가까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볼 것입니다. 하느님은 내가 청하는 모든 것을 주실 때까지 편히 계시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에게 약속하지만 내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되면 당신은 당신 곁에 있는 친구의 영혼을 느끼게 될 것이며, 그것이 당신을 기쁘게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둘 사이에 형제적 교환이 될 것입니다.'
이 말은 데레사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도 적용된다. 우리가 그녀의 말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녀가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우리의 친구이며 자매이고 또한 동반자이다. 우리는 그녀에게서, 그녀가 작은 길을 배우고 체험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인내심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가르치고자 하는 스승을 볼 것이다. 그녀의 길은 곧장 하느님께 이끄는 길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녀는 우리에게 구운 비둘기 고기를 입에 넣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와는 달리, 나는 그대에게 깨달음을 보낼 것이다. 그대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그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 것이다. 데레사는 갈등을 겪고 있는 모든 이들과 함께 기쁨과 고통을 겪으며 우리를 사랑하고 동반하고자 한다. 데레사는 또한 당신과 함께 자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자고 우리를 초대한다.
1917년에서 1980년 사이 데레사 성인의 가르침에 따라 살고자 하는 수도 공동체가 전 세계에 50개 이상 설립되었으며, 대략 5천 명 이상의 구성원을 가지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복음 선포나 애덕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1928년에 사도좌 직속 가르멜 수도원이 메링에 설립되었다. 1972년 이후 데레사 연구소가 아우크스부르크에 자리를 잡았으며, 독일어권의 많은 데레사 친구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1996년 독일과 스위스의 청소년 그룹 불꽃이 결성되었으며 데레사 성인의 사랑이 고무되고자 한다. 모든 인간의 삶은 궁극적으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사랑의 역사다. 데레사 성인은 우리에게 이러한 사랑의 모험에 뛰어들도록 용기를 준다.
14 저자 후기
저는 이 책의 내용에서 리지외의 아기 예수의 성인 데레사의 삶이 조금도 왜곡되지 않았음을 보증합니다. 성인의 원래 글을 읽고자 하는 이들은 여기서 밝힌 원문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특히 성인의 자서전을 추천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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