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임의 글쓰기
12시간 넘게 잤다. 몸이 으스러질 정도로 극도의 피곤함을 느꼈다. 반나절이 넘는 비행시간, 비행기를 타기 직전까지의 삶의 분주함과 정신없었음이 쓱 스쳐 지나간다. 날마다 비가 오고 흐리고 축축한 날씨에서 햇빛이 쨍하고 드라이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키 큰 야자나무와 푸르스름하면서도 갈색이 많이 있는 산들을 보며 내가 캘리포니아에 왔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오기 전에 아들은 카운트다운하면서 매일 나에게 물었다. 엄마 몇 일 남았지? 기대되지? 나는 심드렁하게 “아니 별로 기대 안 되는데, 너무 바빠서,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야.”라고 답변을 했다. 실제로 비행기 타기 전날 밤에 허겁지겁 패킹을 했다. 여기 와 보니 준비가 너무 허술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름인데 수영복, 래시가드도 안 가져오고 옷도 아침, 저녁으로는 쌀쌀한데 입을 게 없었다. 원래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것저것 세심하게 체크하고 준비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이번엔 좀 심했다 싶었다.
할머니는 우리를 만나는 게 너무 기대되고 설레어서 며칠 동안 잠을 못 잤다고 하셨다. 우리가 도착하자 직접 만드신 딸기 케이크과 시원한 수박과 색깔이 다른 멜론들을 테이블에 예쁘게 세팅해 두셨다. 무엇보다 그녀의 정원에서 2년 전 겨울에는 볼 수 없었던 나무와 선인장, 꽃들이 싱그러운 초록의 에너지를 한껏 뿜어내고 있었다.
저녁에는 정원의 소파에 앉아 시원한 공기를 느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며 서로의 얘기를 묻고 답했다. 내가 사는 이야기를 들어 보시더니, “너는 휴식이 필요해. 쉼이 필요해, 너 자신을 돌봐, 너는 싱글맘이잖아. ” 하신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도 엄마가 나에게 이러셨다. 네가 무너지면 안 된다. 너는 아이가 있잖니? 하셨다. 아... 엄마들의 공통의견이고 나를 이렇게 바라보시는구나... 느껴졌다. 그리고 이분들의 시선으로 나를 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고 저녁 5시가 되면 나는 저녁 식사도 못 하고 잠이 들었다. 12시간 넘게 잔 거 같다. 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나의 삶의 지나온 시간이 쭈욱 스쳐 지나가면서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다른 각도에서 다른 시선으로 나의 삶이 보이고 느껴졌다. 이건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매일매일 똑같은, 반복되는 일상이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진 것들이었는데, 당연한 게 아닐 수도 있고 바꿀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래서 떠남과 쉼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여기서 읽었던 책에서 나를 깨운 강렬한 문장이 있다. 버지나아 울프의 “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리 사소하거나 아무리 광범위한 주제라도 망설이지 말고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쓰라고 권할 것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하고 빈둥거리며, 세계의 미래나 과거를 사색하고 책들을 보고 공상에 잠기며 길거리를 배회하고 사고의 낚싯줄을 흐름 속에 깊이 담글 수 있기에 충분한 돈을 여러분 스스로 소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문장을 본 순간 이거다 싶었다.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연결되는 방향이고 길이구나. 충만한 기쁨이 느껴졌다. 과거에 내가 무얼 했었으며, 무엇을 좋아하고 추구했는지 생각했다. 그리고 현재 나의 상태, 미래에 꿈꾸며 해야 할 일을 완벽하게 문장으로 정리가 되었다.
매일 아침 나에게 자작한 글로 아침 인사를 하시는 분이 있다. 오늘 아침에는 글쓰기에 관한 내용이다. “글쓰기는 하늘이 내린 축복이다. 진정성 속에서 자기 삶을 통찰하기다. 통찰을 통해 깨달음을 체득하고 본성 알기다. 본성과 순결한 본질을 찾는 게 글쓰기다.” 마침 글쓰기 과제도 해야 하고 글을 써야 하는 강한 의지는 있지만 실행에 전혀 못 옮기고 있는 나를 알기라도 하듯 이런 메시지를 보내 주셔서 고맙다.
여기에서 나의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나를 다른 시각으로 보며 그동안의 삶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 새롭게 나아가야 할 방향도 찾고 그 계획을 직접 실행에 옮겨 볼 생각이다. 낯선 언어와 사람과 환경은 큰 힘과 자극을 준다. 이래서 아마 나는 여행하며 살아야 하는 것 같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것처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하고 사색하고 빈둥거리며 책을 보고 길거리를 배회하고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쓰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심장이 쿵쾅거리는 설렘을 느낀다.
첫댓글 좋았던 점 : 글쓰는 삶을 살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하고 빈둥거리며" 그렇게 살고 싶다는 말에 크게 공감이 갑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글쓰기를 미루게 되는데, 글을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쉼이 필요하다는 뜻이 잘 전달이 됩니다. 글쓰기를 향한 열망 저도 배워갑니다.
아쉬운 점 : "설레임의 글쓰기" 에 관한 내용이 나오기까지 글의 서두 부분이 길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것 같아요. 글을 써야 하는 이유는 한 가지. 글을 써야 하는 상황은 백여덟 가지. 저는 상황이 좋았습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지만 여행을 통해 걸어 다니면서 독서를 하고 있는 모습이네요.
담담하게 써 내려간 글이 편안하게 느껴졌고 작가의 생각이 깔끔하게 잘 표현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글쓰기는 하늘이 내린 축복이다. 진정성 속에서 자기 삶을 통찰하기다. 통찰을 통해 깨달음을 체득하고 본성 알기다. 본성과 순결한 본질을 찾는 게 글쓰기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하고 사색하고 빈둥거리며 책을 보고 길거리를 배회하고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쓰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심장이 쿵쾅거리는 설렘을 느낀다.
위의 두 문장이 참 좋았습니다.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저도 글쓴이를 닮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