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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희집 옆에는 '순경네'라 부르는 이웃이 살았다.
'순경네'라고 하는 이유는 남편이 순경이라는 의미인데 유감스럽게도 순경인 남편은 다른 여자와
함께 시내에서 따로 살았다.그럼에도 틈틈히 와서 애들을 낳는 일은 게을리 하지 않아서인지
형님과 동창인 큰아들 'ㅇ진'이 형과 누나와 동창인 첫자가 돌림자이며 끝자가 '자'자인 누나를
비롯 숙,옥 3명의 여자,그리고 막내 ㅇ일이가 있었다.
아주머니는 대가 쎗고 생활력도 강했다.어쩌면 그런 환경에서 다섯명의 자녀를 키워 낼려면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농사를 조금 지었으니 남자처럼 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살기 위해 좁은 집이었음에도 토끼,닭은 물론 돼지까지 키웠다.당시는 집집마다 목돈을 쥐기위한 수단으로
돼지를 한,두마리씩 키우면서 집에서 나오는 모든 음식찌꺼기와 농작물 부산물을 먹여 키웠다.
큰 아들은 어렵사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려운 가정환경을 극복 해보기 위해 월남전에 참전
하였고 귀국할 때 높다란 다리가 있는 TV를 사가지고 와서
한동안 우리 높은한질에서 유일하게 TV를 보유한 가정으로서
얘들에게 대단한 영향력을 과시했다.큰 딸은 키가 컷다.
어느 이웃이나 그렇듯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산업전선에
뛰어 들어야 했다."큰 딸은 살림밑천"이라는 말이 있듯
그시절에는 가족을 위해 희생을 해야하는 위치에 있었으니
어쩔수가 없었다.큰 딸은 생목 너머에 있는 가내 수공업으로 하는 과자공장에도 다녔고 일본 민속의상에 들어 가는 무늬를 만드는 '시보래'라고 하는 기계 작업을 하기도 했다.시보래 기계 4대를 놓고 공장을 운영하는 곳이 생목 너머 순창연탄공장 옆에 있었다.나중엔 쉐터를 짜는 수편물을
하기도 했다.동생은 아마도 마산 수출자유지역 내 한일합섬을 다니면서 산업체 고등학교를
다녔던 것 같고 막내 여자 아이는 언니,오빠들의 도움으로 중학교에 진학한 것으로 안다.
그 때는 ㅇ숙이네 처럼 살아가는 가정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많은 여자들이 모순된 결혼 생활을
운명이라 여기며 받아 들이고 살아 간 것이다.아들을 못 낳는다는 이유로 씨받이용 여자와 같은
집에서 엄마가 다른 얘들을 서로 기르며 한 집에서 평생을 사는 집도 많았는데 조강지처와 후처는
위계질서가 분명했다.또는 연애중에 부모의 강권으로 본의 아니게 장가를 가서 정이 없는 본 처는
의무감으로 연을 맺고 살고 연애했던 애인을 후처로 들여 사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과거 혼인
풍습은 서로 얼굴도 안보고 가문끼리 성사시키는 경우가 많아 막상 결혼하고 보니 여자가 맘에
안들어 겉돌다가 결국 다른 여자를 만나 살면서 본처는 방치하는 경우도 있었다.
남여 사이는 감정과 느낌이 대단히 중요하다.하지만 가문 차원에서 보면 상대를 서로 보고 외모로
판단하여 결혼하는 것보다는 가문끼리 혈통을 살펴보고 결혼 하는 것이 유전학적 측면에서 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것도 같다.인간은 감정적인 동물이 아니고 지극히 이성적인 동물이라면
더더욱 후자가 합리적일 것이다
주변에서 봐도 간암이나 급사등은 거의 유전에 의한 것이고 맘씨의 성급함,조급함,후덕함,잔인함도 유전적이며 영리한 정도도 유전의 영향을 받으니 가문과 혈통을 중시하는 우리 조상들이 생물학적인 차원에서보면 현명하였는 지도 모르겠다.
순경네는 한길 가에 탱자나무 울타리
안 쪽으로 폭 20미터 가량의 밭을 사이에 두고 안채가 있었고 길 가에는 초가로
아랫채 비슷하게 지어서 전빵을 해도 되고 살림을 해도 되는 집을 가지고 있었다.
6평 정도의 방과 홀 겸 부엌이 반으로
나뉘어진 형태였는데 처음엔 광양에서
이사 온 용님이라는 누나가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처음엔 그곳에서 찐빵을 쪄서 팔았던 것으로 기억이 되는데 나보다
두 살 위인 용님이 누나는 세 살위인 우리 누나와 잘 어울려 다녔고 피부가 곱고 예뻐서
또래 남자들로부터 많은 러브콜을 받았다.
알고 봤더니 그위로도 언니와 오빠가 있었는데 어떤 사유였는지 광양쪽에서 살다가 막내 딸만
데리고 순천으로 와 살았었다.그렇게 살다가 서울 갔던 언니가 병을 얻어 돌아 왔고 얼마후
우리집 아랫채로 이사를 왔다.용님이는 돈벌러 객지로 갔고 노모는 큰 딸 병수발로 지쳐갔다.
큰 딸은 하루종일 기침을 하였고 피골이 상접하도록 말랐었다.아마도 폐결핵이나 기관지염이
아니었나 싶다.선천적인 해소 천식은 아닌 것 같았다.가끔 잘 먹어야 하는 병이라며 닭도 삶아
주는가 하면 당시엔 귀했던 돼지껍질도 삶아주는 것을 봤었다.없는 집에서 태어나 무작정 상경하여 험한 일 하다가 병을 얻어 죽지못해 연명하는 젊은 노처녀의 인생이 그시대를 살아 가는 가난한
나라 맏딸들의 인생이 아니었나 싶다.
용님이네가 우리 아랫채로 이사를 오고 그 집에는 홀아비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의 남자 아이를
데리고 세를 들어 왔다.그 아저씨는 경기도 쪽에서 왔다고 했고 핸섬,깔끔했는데 남자 애를 하나
데리고 다니는 홀아비였다.
어린 눈에도
동네 아주머니들이그 아저씨에게는 호감가는 태도와 말씨로 대해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 아저씨는 가마니 짜는
기계를 만드는 기술자 였다.
각재들을 사다가 톱으로 자르고
못으로 밖으며 며칠만에 기계를
완성해 놓고 붉은 페인트 칠까지 손수 하는 것을 봤다.
그 기계는 누구에겐가 팔았을
것인데 그 기계가 팔리고나서
얼마후 홀연히 떠나버렸다.
높은한질 우리동네에서는
부업으로 가마니를 짜는 일이 없었으나 농촌에서는 농한기 때 가마니를 짜거나 기계로 새끼를 꼬는 일을 많이 했었다.하지만 가마니 짜는 기계를 손수 만드는 것은 처음 봤다. 대단해 보였다.
손바닥만한 밭때기를 사이에 두고 한길에 붙어있으면서 한 길보다 마당이 낮은 집이 우리집과 담을 같이 쓰는 박센 집이었다.
ㅇ기,ㅇ숙이,ㅇ조ㅇ엽이,ㅇ일이 5남매를
두셨는데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고 아저씨는 호리호리 하며 보통키보다 컷고 아주머니는 자그마 했으나 고왔다
ㅇ기형은 나보다 두 살위였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양복기술을 배운다며 순천 시내에 있는 '00라사'에 조수로 다니면서 일주일에 서너번씩 만화책을 빌려다 봤다.
그 형이 다 보고서 꼭 담너머로 넘겨 줬다.
내 꿈이 만화가였고 만화를 그대로 따라
그릴 정도로 그림에 소질이 있었기에 만화에 미쳐 있을 때인데 공짜로 일주일에 30~40권씩 볼 기회를 주었으니 얼마나 좋은가!!
대신 내가 보고나서 역전 육교앞 만화방까지 갖다줘야했다.가끔 너무 늦게 갖고 왔다며 벌금을
내라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난감할 때도 있었지만 한 번도 낸 적은 없다.있어야 줄 것 아닌가!
철도 운동장 쪽에서 순천역 대합실로 가기 위해서는 서울 방면과 광주방면으로 가는 철길을
가로질러야했다.많은 철길을 횡단해야 했으니 위험하여 내가 5학년때인가 육교가 설치되었다.
서울에나 있는 줄 알았던 육교는 우리들에게 색다른 경험과 볼거리를 제공해 주어 오르내리기
불편함보다 신기한 호기심으로 힘들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육교 근처에는 높은 철탑이 있었고 그곳에는 대형 스피커가 사방을 향해 4개가 달려있었다.
그 스피커에서는 매일 낮 12시 즉 정오에는 '오포'라 불리는 사이렌이 울렸다.시계가 귀했던 때라
점심시간을 시민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하여 하루 전체 시간을 가늠케 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그리고 육교가 놓일 무렵 한길 옆 논에 2층짜리 양옥집이한 채 지어졌다.
가정집으로서는 처음보는 이층집이었기에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요 꿈이요 목표가 됐었다.
그 때 그 집값이 100만원정도 간다고 했다.양송이 공장 다니면서 남자 장정이 월급으로 받는 돈이
5,000원~6,000원이었으니 지금 우리회사 30대 월급을 300만원 정도로 가정하면 6억원 정도 되는
거같다.그 때 최고의 큰 돈 단위가 우리 어린이들에게는 100만원이었을 때다.
자신 있는 내기를 할 때 "내가 지면 100만원 줄께"라는 얘기를 많이 했을 때다.
다시 ㅇ조네 얘기를 하자면 그 집에는 제사가 많았다.반면 우리는 아버지가 작은 아들이어서 제사가 1년에 하나 있었다.홍조네에서는 제사가 끝나면 밤 12시쯤에 대나무 걸대바구리에 흰 제사밥과
고추가루 양념이 안들어간 탕국,무우나물,조기나 민어찜,들깨가루로 무친 나물등 가득 채워서
담 너머로 넘겨 줬다.쌀밥은 고사하고 쌀과 보리가 반씩 섞인 반숙 밥도 먹어보기 힘든 때라서
흰쌀로만 지은 제사밥은 씹지 않아도 부드럽게 잘 넘어갔는데 평소 보기조차 힘든 진수성찬이니
얼마나 맛있었겠는가? 어쩌다 ㅇ조네 제삿날이라는 것을 알 때면 잠을 참고 기다린다.
그러나 꼭 제사밥이 담을 넘어오기 직전에 잠이 들어버려 제대로 먹어 본 적이 없다.
그 제사밥은 늦게까지 공부했던 형님이 제일 많이 받아 먹었다.
부모님 맘에도 작은 아들들이 많이 먹는 것보다 뿌뜻 했으리라 생각된다.
그 때는 큰아들은 가문의 기둥이라 여기고 빈약한 경제력을 모두 큰아들 위주로 집중시키던 때였다.큰아들을 성공시키기 위해 큰 딸은 희생하는게 관례였다. 홍조 어머니 성씨는 희성인 '탁씨'성이다.아저씨가 술이 취하면 아주머니가 통제와 견제를 하게되고 그러면 혀꼬부라진 소리로
"아이가 문딩이 광양 탁가"하셨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아주머니 성씨를 다 안다.
아저씨는 술이 취하면 갑자기 폭군으로 돌변하여 얘들에게 공격을 한다.
그러면 모든 애들이 "애앵~~~"하면서 비명과 울음을 터뜨리며 방에서 튀쳐나와 마당으로 뒤안으로 몇 바퀴 쫏겨다닌다.가끔 아주머니의 한탄섞인 비명 소리도 들리고 할머니의 "아이고 저 웬수"
하시면서 끌끌끌 혀차는 소리도 함께 들린다.
이런 때는 항상 우리 아버지가 가셔야만 상황이 종료됐다.
하지만 ㅇ조 아버지는 근본이 착한 분이셨고 성실하였다.대지 문제로 우리집과 한 때 다툼도 있었지만 연탄 배달을
하면서 성실하게 얘들을 길렀으나
공부쪽으로 소질이 없었던 얘들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는 못했다.
ㅇ기형도 양복점 일을 배우다 관두고
세탁소 일로 전환하여 세탁기술을
배우면서도 부모님 속을 많이 썩혀
드린 것으로 알고 있다.나보다 한 살 어린 ㅇ숙이도 어찌어찌 하다가 어촌으로
도망치듯 결혼 했고 그 아래 동생들은
회사도 들어가고 해서
자기들 밥벌이를 한다고 들었다.ㅇ기 형은 아직도 그곳에서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다.
할머니는 거의 매일 우리집에 마실 오셔서 밤 늦도록 놀다 가셨고 우리집을 꽤 부러워 하셨다.
일단 우리 아버님이 당신 아들처럼 술을 많이 안드시고 많이 마시면 그냥 주무시는 스타일이라
걱정거리가 없었고 남아 선호사상이 극심했던 그 때 5형제를 가졌고 형을 비롯한 형제들이 공부도 썩 잘했으니 어른 입장에서는 우리집이 무척 부러웠을 것이다.사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어른들은
공통적으로 학교에 가서 배운 적이 없었다.그러나 예의 범절을 지키는 정도는 다 달랐다.
또 글을 스스로 깨우쳐 이것저것 많이 읽은 사람과 전혀 관심없는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도
천양지차였다.우리 아버지는 스스로 한글,한자를 깨우치고 공부하셔서 주변 사람들보다
지식수준이 높았다.거기다 침술까지 스스로 익혔다.그러니 동네사람들이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좀 어려워 했고 어떤 사람은 질투도 했다.
거기다 형님이 단 번에 육군사관학교를 합격했으니 왕조동이 떠들썩 했다.
그 때는 육사는 곧 장군이 된다는 인식이 있었고 같은 해 순천 매산고를 나와 3수를 한 끝에 육사를 들어간 사람이 생목에 있었으니 그 사람과 대비되어 7살 초등학교 입학 후 재수없이 입학한 형님의 가치는 최고였고 덩달아 아버지 자질에 자식까지 힘을 보태주어 자연스레 카리스마가 주어졌던
것이다.해서 생목의 껄렁한 젊은 사람들도 우리 아버지를 "어른신"하면서 깍듯이 모셨고 같은
어른들도 아버지가 말씀하시면 꼼짝없이 잘 들었다.그래서 ㅇ조 아버지 술주정을 말릴 수 있는
사람도 아버지 뿐 이었다.이런 걸 보면 부모는 자식때문에 인생의 보람을 느끼고 삶의 의의를 찾는 것 같다.
ㅇ조 어머니는 자태가 고우실 뿐 아니라 아주 양순하셨다.자녀들은 호리호리한 아버지를 닮아
모두가 약골이었다.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다.나와 한 살 차이밖에 안나는 홍숙이와는
저학년때는 소꿉장난도 같이 하면서 컷지만 고학년이 되면서 내가 수즙음이 많아져 말을 거의
안했고 사춘기 이후부터는 아예 외면 하면서 지냈다.참 바보스러운 과거이다.
우리집은 도로에 인점하여 비록 초가지만 자그마한 평상이 있었고 그 뒤에 안채 옆쪽으로 기와를 이은 아랫채가 있었다.아랫채는 아버지가 돌과 흙으로 쌓아 지은 집이었는데
실고 들어가는 쪽으로 전빵을 볼 수 있도록 했다.
내가 저학년이었을 때 광양 진상쪽에서 야반 도주한 청춘
남녀가 세를 들었었다.남자는 20대 후반이었으나여자는
18세였다.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 도망쳤기에 아무 것도
없는 빈털털이였다.여자는 눈망울이 크고 괜챦았는데
잘 웃고 명랑했는데 밤이면 가끔 남편한데 맞으며 울부짖는소리가 났었다.남편은 실고생을 상대로 붕어빵을 구워
벌이를 했다.18세인 여자가 서빙을 한다고 들락거리면
실고생들이 유부녀인 줄 모르고 희롱을 하면 또래인
그 여자는 가슴이 설레일 것이고 웃음을 흘렸을 것인데
이런 것을 본 신랑은 질투 반, 교육 반으로 저녁에 쥐어 밖는 것 같았다.
그런데 결국 이런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운동 본동네 살면서 역전앞 두부집에 다니면서 두부를 만들어 자전거에 싣고 배달도 하고 팔기도
한 청년이 있었는데 아마 여자와 비슷한 또래였을 것이다.어느날 그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가
버렸다.이에 실망한 남자는 술로 며칠 밤을 보내며 날만 새면 잡아 죽인다고 시내를 쏘다녔으나
외지로 도망간 그 남녀를 잡지 못했고 얼마후 어디론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