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리 글
2000-08
“색다르거든요”
박 병 민 목사(새터공동체)
몇 달 전에 소식지 일로 필름을 사진으로 빼어주는, 대전 선화동의 ‘사랑현상소’에 들렸다. 젊은 주인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내가 사진에 대하여 그런 이야기를 여쭈어 보았다. “화려한 색깔들이 등장하는 세태에 흑백사진은 우리들 사이에서 잊혀 저 가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한 두 색만 을 띠게 하는 흑백필름으로 사진 찍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흑백사진이 드물기에 귀하고 이뻐보이는 것 같아요”“그럼요. 많지는 않은데. 흑백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색다르거든요” 나는 그 이야기에서 “색다르다”는 말이 재미있었다. 칼라사진과 흑백사진이 서로 색다르다는 말, 바로 이런 곳에 색다르다는 말이 쓰여진 것이 제격 인 것 같았다. 어쩌면 여기에서 색다르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겠는가! 하리만큼 그 말에 한동안 붙잡혀 있었다.
우리네들은 옛날에 서양과는 다르게 색깔이 발달하지를 못하였다. 그래서 색채(色彩) 보다는 여백(餘白)의 아름다움을 지녔다. 그림을 들여다보아도 꽉 들어찬 화사(華奢)함 보다는 훤히 빈 한가로움이었다. 이런 우리들이 어찌된 일들인지? 얼마 전만 하여도 색깔에 관한 이야기를 입에 많이 들 올렸다. 흑색이니, 백색이니, 흑백논리니, 이 둘이 섞여진 회색이니, 빨강색이니, 녹색연합이니, 지나고 나니 그 시절 그 노래 마냥, 혹은 장발족(長髮族)에 뒤이은 색 따지는 유행병이었던 듯 싶다. 이 말은 둘러대기이고, 우리를 키우기 위한 홍역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다르다”는 말과 “틀리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들이 때로는 나와 다른 것은 틀린 것으로 오해 내지 곡해를 넘어 반목과 질타들을 서슴치않았다. 옛적에 그 누구는 색 다른 것을 틀린 것처럼 말하였다.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 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 뿐인가 하노라” 신약성서 누가복음 18장에 바리새사람들처럼 서서 따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누가복음 18:11). 색이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성서에서는 권하는 것, 사랑, 위로, 교재, 긍휼, 자비심이 조금이라도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빌립보서 2:1-5). 요즈음 들어서는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는 말 같이 색 다른 것을 가진 사람을 보면 “그것 색다른 데가 있는데” 말하면서, 눈이 번쩍 뜨여지며 반기게 되는 사람들이 있으니 좋다.
남북이 하나가 되자고, “한마음” 담배까지 나온 이 마당에 하나가 되기는 되어야 하겠다. 풀빛과 녹색은 같다는 말의 “초록(草綠)은 동색(同色)이라”는 얘기가 또 있다. 어울려 같이 지내는 것들은 모두 같은 성격의 무리라는 뜻이다. 우리는 한무리가 아닌가? 다른 각도의 이야기를 하자면, 장애물은 발빠른 사람들이 놓아 놓고, 사람들은, 정상인 혹은 일반인과 장애인을 구분 짖는다. 사람들은, 근시안(近視眼) 같이 자기의 먼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고, 앞섰으면서도 나앉아야 하는 노인들을 제사장이나 레위인의 시선으로 쳐다본다.
우리들은 한 동무다.
공동체 이야기
병 치 레
인생은 미완성이라고 했던가? 다들 하루살이가 아닌, 여러해살이 풀 보다도 훨씬 더한 창세기(創世記)의 이야기대로 사시사철의 사시(四時)와 일자(日字)와 연한(年限)(창세기 1:14) 속을 시간표대로 살고, 가고 있다. 산다는 뜻의 한자 活(살활)자가 재미있다. 물(氵)이 혀(舌)와 같이 있다. 살수 있음은 혀에 물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예수님도 죽음 앞에서 목마르다고 하셨다(요한복음 19:28). 법정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은덕으로 살아간다고 말한다. 약국의 약 중에 활명수(活命水)의 약 이름은 꽤나 잘 지은 것 같다. 이 즈음의 보여지는 나무들처럼 활기(活氣)가 있으면 좋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짓고, 그 코에 생기(生氣)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되었다고 말한다(창세기 2:7). 몇 일 전에 테레비에서 신라의 노장(老將)들에게 견훤의 군대인 활기군(活氣軍)이 패하였다. 살아 기운 넘치는 군사들인 활기군(活氣軍)이라는 이름이, 값은 못하였으나 군사들의 이름에 어울린다. 군사에게는 활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군사뿐만 아니라, 더위 속에서 우리들에게도 필요하다.
7월 29일 무더운 오후에, 늘푸른집 아이들이 우리에게 왔다. 그 들은 준비해온 점심을 먹고, 잠시 쉬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갔다. 아이들이 와서 함께 하는 사이에, 그들과 같이 있었던 나는, 김 선생님이 자기 방에서 뒤로 넘어저 거품을 물고 떨고 있는 모습을 몰랐다. 아이들이 간 후에 이야기를 듣고 급히 갔다. 옆에서 안타까워 할 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전에는 좀 기다리면 깨어났지만, 이번은 계속되었다. 시간이 지나도 멈추지를 않았다. 처가 급히 김 선생님의 집에 연락을 하였으나 좋은 방법을 찾지는 못하였다. 다음날 주일 이른 아침에 그 분은 주검으로 다가왔다. 전 날에 119구급대차량을 이용하여 응급실로 왜 모시지 못하였던가? 소견이 좁았음을 뉘우친다. 우리들과 같은 병치레를 하던 어른을 기어이 가시게 하는 아픔.... 8월 9일 이후로 함께 사시는 문 선생님은 13일 주일 오후에, 몇 일에 걸쳐서 들어찬 소변을 빼어내기 위하여 119차로 병원에 갔다. 처가 함께 따라 나섰다. 처도 몸이 좋지 않아 문 선생님과 그 가족들을 뒤로하고, 아이들이 있는 어머님 댁으로 갔다고 한다. 몇 명밖에 아닌 우리들이, 김 선생님 돌아가신 날 밤에 찾아든 박 선생님을 빼고는 다들 보이는 아픔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공동체가 현재 시각에는 잘 가고 있음에 감사드린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인 우리네가, 동상이몽(同床異夢)을 해서는 아니 되겠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한 상인 동상(同床)에서 밥을 먹고 있기 때문이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자라야 쓸데 있다는 얘기 같이, 의약분업인가?로 인하여 문닫아 건 병원들을 보면서 우리들에게 의원이 필요함을 보게 된다. 그 전에 본 옛 이야기에서 만병통치약 곽양기정기산 이라는 글을 보았다. 지금 만병을 하나님께 아뢴다. 통치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들에게 활기찬 아침이 오기를....
공 동 체 소 식
☻ 새터 공동체 가족
박병민,진선미,한솔,진솔. (99. 7.16)
박성규 (00. 1.12)
어귀녀 (00. 1.15)
김창준 (00. 3.21)
김병만 (00. 5. 2)
박종만 (00. 5.28)
정무래 (00. 7. 1)
박영훈 (00. 7.30)
문창식 (00. 8. 9)
* 지난 해 12월 14일에 대전에서 오셔서 함께 생활하시던 김교은 선생님께서 7월 30일에 지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 새터 공동체에서는 거처를 정하지 못하는 노인, 장애인 분들을 모시고자 합니다.
☻ 기도하며 함께하신 분들
어득자.낭월교회4여전도회.왕지교회.영운교회(이상은).대전서노회.진수정.이원교회(안천일).새빛교회.일양교회.박종만예수마을.늘푸른집(김대학).일산광성교회.이원교회.대덕교회.판암제일교회(오은탁).김종식.김정운.노정숙.박종덕.이재훈.한삼천교회.최선녀.이종국.유인숙.채윤기
(호칭은 생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