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km. 2만 3천보. 7시간 반.
진남문 - 가산 임도 - 동문 -
남포루 전망바위 - 중문 -
가산바위 - 북문 - 북포루 -
유선대 - 가산 정상 - 동포루 -
동문 - 가산 임도 - 진남문.
참석자 : 서병장님. 꽃비님. 반야행님. 봄햇살님.
덕실님. 대덕화님. 마일도님. 산사랑님. 한소.
가을 분위기에 취하여
높은 봉우리. 깊은 골. 종횡무진하였더니
평소 멀쩡하던 어깨가
자고 일어나니 뻑적지근.
다들 괜찮으신가요?
약해 빠진 깃발만 골골거릴 것 같은 예감이 팍팍!!.
대구방 회원님들.
어제 북문에서 북포루로 가는 길.
70도 넘는 급사면을 기어오르는 게
걱정되어 편한 길로 넌지시 유도했는데
전원이 호기롭게 go!! go!! 외칠 때
기함하여 정신줄 놓칠 뻔.
힘든 여정 마친 북포루에서 일행 표정 살폈더니
모두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덕실님이나
자주 뵙는 봄햇살님 실력은
익히 아는 바이고.
우려했던 반야행님. 꽃비님은 생생한데.
우리 마일도님은 오늘도 경사지에선
맥을 못 추었지요.
하산할 때 보면,
없던 힘이 어디에 숨어있다가 나오는지.
올 때마다 새로운 곳. 가산산성.
300여 년 전 맨몸으로 쌓아 올린 피와 땀의 흔적.
그냥 밟고 서있기만 해도 전율이 일어난다.
현실 세상에 지친 몸과 감정이 위무된다.
지금 여기서 우리는 에너지 충전하고
상처 난 곳 힐링한다.
그래서 가산은 항상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된다.
이 글을 통해
이토록 아름답고 소중한 곳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참으로 행복하다.
참고로, 후기에 적힌 단어는 전부 표준어다.
사투리는 '사투리'라고 꼭 표시한다.
가산산성 전체 면적은 30만 평.
성곽 둘레는
내성 외성 중성 모두 합하면
대략 12km.
크기 면에서는 다소 뒤지지만(그래도 4등)
짜임새나 방어력에선 국내 최고다.
내성 전체 6km에서
서문과 서포루 쪽
1km는 가을 땡볕이 무서워
못 갔다.
가산산성은 올 때마다
더 자세하게 살펴볼 곳이 꼭 생긴다.
가산산성은 단순한 군대 병영 그 이상이었다.
가산은 거대한 전쟁 물자 비축 저장고였다.
산성 꼭대기 향하는 잘 닦인 도로를 따라
군량미 실린 달구지가 줄을 이었다.
전쟁이 나면 경상도 지방 수령들과 그에 딸린 식구들.
그리고 군인들이 전부 이곳에 모이도록 했다.
최소 몇 달간 버틸 수 있는 식량을 저장하는 창고가
내성 안에 즐비했다.
임진년 왜변에 호되게 당한 트라우마로
지어진 산성이기 때문이다.
임진년에 쫄딱 말아먹은 것은
농성할 장소가 없었던 탓이라 생각했다.
어느 정도 뭉기적거리면 중국에서
도와주러 올 거로 믿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어처구니없는 짓이다.
이러고도 안 망하면 이상하다.
조선이 안 망할 이유가 없다.
900 고지 높은 곳에 살아도
이곳 수장 칠곡도호부사는
생활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다.
말 타고, 가마 타면 되니까.
하양이나 의성에서 군대 일 생기면 이곳까지 와야 했다.
하양 사람들은 남창마을에서,
의성 사람들은 북창마을에서 하룻밤을 유숙했을 것이다.
백성들의 원망과 고충은 뉘 집 똥개 짖는 소리로 들렸다.
조선말기 순조 때 칠곡 읍내동 평지로 이전할 때까지
무려 180 년간 칠곡지역 치소(治所) 역할을 했다.
낮은 곳으로 관청 옮겨달라는 백성의 목소리를
조선 지배충들은 자그마치 200여 년을 묵살했다.
오히려 더 보강했다.
농사가 대수냐며 농사철에도 내몰았다.
공사판을 3번이나 벌였다.
백성의 노동력을 골수까지 빼먹었다.
조세도, 부역의 의무도 없는 떠돌이.
유랑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배층이 아니고 지배충(虫)이었다.
물론 그동안 외침(外侵)은 한 번도 없었다.
백성의 불편함보다 벼슬아치들의 목숨줄이
더 중요했던 나라. 조선이 망해야 하는 이유가 보인다.
↓((철 지난 영산홍이 남의 속도 모르고 철 없이 피어있다))
진남문 주차장 화단.
↓((외성 출입문 진남문 앞에서 포즈 취해 보았다))
모두 훤칠하고 잘 생겼지요.
진남문(鎭南門) :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①군사기지 진(鎭)의 남쪽 문.
②남쪽을 제압 또는 진압(鎭壓)하러 출정하는 문.
현판에는 영남제일관방(嶺南第一關防)이라 적혀있다.
인터불고 호텔 부속건물로 보통 착각하는 영남제일관은
만촌동에 따로 있다.
진남문 안쪽 해원정사에 있는 나무.
노란 단풍잎이 인상적이다.
마로니에가 아닌 건 확실한데.
열매가 안 보여 수종은 모르겠다.
임도 넓은 길보다
다소 어렵지만 빨리 가는 샛길로 올라갔다.
↓오빠와 여동생 같다.
붉게 물든 단풍이 나에게 무얼 말하는 것 같다.
↓어떤 소녀 머리 만지던 시절 회상하며
서병장님이 가는 그늘사초를 꼬았다.
↓남포루 전망바위 출입문이다.
남포루 암문(暗門).
적의 눈에 띄지 아니하는 곳에 만들었다.
평소에는 돌로 막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에 비상구로 사용하였다.
↓남포루 전망바위 뒷모습
↓남포루 전망바위.
꽃비님. 대덕화님. 산사랑님만 올랐다.
이곳에서 보는 남창마을 조망은 기똥차다.
안 본 사람은 그 기분 모른다.
10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간다.
↓남포루 성곽 일부가 붕괴 직전이다.
남포루에서 중성문 가는 길.
햇빛이 따가웠다.
컨디션이 안 좋은데도
몸살 약 복용하고
꽃비님 에스코트하고자
가산산성 산행에 참여해 주신
서병장님께
감사드린다.
인생길 달려오며
탈탈 다 털리고
젊은 기백은 지금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데
혼 빠진다며 사진 찍히는 걸 한사코 손사래 친다.
ㅎㅎ
↓내성 전체 드론 사진.
왼쪽 아래가 남포루와 수문터.
오른쪽 아래가 동포루.
가운데 텅 빈 곳이 6.25 때 집중 포격으로
살아있는 거라곤 개미 새끼 하나 볼 수 없었던
관아터와 산성 마을 자리.
인천 상륙 작전 이후에도 이 산성 안에
인민군 패잔병이 우글거렸다.
오른쪽 위가 가산 정상.
중성 위치가 가산 전체에서 지대가 평균적으로 제일 높다.
중성 위쪽으로는
지대가 낮아져서 사진으로 잘 안 보인다.
중성문 지나 가산바위 가는 길.
↓가산바위 남면.
일명 도선굴 입구.
가산바위 위에 올라가면 중앙에 있다.
깊이 8m 정도 되는 수직굴인데
가산바위 위에서 밧줄 타고
아래로 내려올 수 있다.
신라 도선국사가 쇠로 만든 소와 말 형상을
묻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지금은 잡석더미만 수북하다.
이번에 처음 가보았다.
여름에는 우거진 풀 때문에
접근이 불가능하다.
↓도선굴 내부. 밖에서 안으로 들여다보았다.
내부에서 가산바위 위로 올려다보았다.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위가 뚫려있다.
안에서 남쪽 바깥 입구 쪽을 내다보았다.
내부 제일 안쪽. 북쪽은 완전히 막혀있다.
어른 10명 정도 들어오면 꽉 차는 공간이다.
↓동쪽으로 가느다란 빛이
새어 들어온다.
전체 굴 평면 모양은 'ㅏ' 형태다.
동쪽으로 조금 여유가 있다.
행동이 기민한 산사랑님.
같이 도선굴 보러 왔다가 언제 가산바위 위로 올라갔는지.
대덕화님과 나는
가산바위 위로 올라갈 엄두가 안 났다.
가산 바위 위에서 수직 구멍으로
밑을 내려다보고 있다.
다정한 삼 남매 같다.
큰 누나. 중간 남동생. 막내 여동생.
그러고 보니 동그스름한 얼굴이 서로 닮았다.
배경은 가산바위 동면이다.
북문.
바리바리 짐을 진 지게꾼이 북창마을에서 가산으로
올라오는 길이다.
북문 옆으로 가산의 물이 빠지는 물길이 있다.
바로 그 유명한 사창천(社倉川)이다.
북창마을에 악명 높았던 곡식 대여소 사창이 있었다.
사창제는 본래 춘궁기에 관에서 백성들에게 쌀을 꾸어주고
가을에 싼 이자를 붙여 되돌려 받는 제도이다.
그런데 후기에는 사실상 합법적인 수탈 제도로 변질되었다.
특히 매관매직이 성행하면서 벼슬을 돈 주고 산 관리들은
원금은 물론이고 몇 배의 이익을 챙기고
더 좋은 벼슬을 사기 위해 환곡을 악용하여 수탈을 했다.
환곡은 빌려주는 원곡에 모래나 겨를 섞어 양을 줄이는 등
다양한 편법이 자행되었다. 이에 환곡 받기를 거부하는 백성에게도
강제로 배부하는 등으로 아전들이 부당한 이익을 취하였다.
정약용은 『목민심서』 ‘호전 6조 제3조 곡부(穀簿 환곡의 장부)’에서
백성을 구제할 목적으로 마련된 환곡이 오히려
백성을 곤궁에 빠뜨리고 있음을 지적했다.
“환곡은 사창(社倉)이 변한 것으로, 곡식을 내어 파는 것도 아니고
곡식을 사들이는 것도 아니면서 백성의 뼈에
사무치는 병폐만 안겨주니, 백성이 죽고 나라가 망하는 일이
바로 눈앞에 닥쳤다.”
“감사가 환곡을 이용하여 장사를 하니
수령이 법을 어기는 일은 말할 것도 없다.
수령이 농간을 부려서 남은 이익을 도둑질하니
아전들이 농간 부리는 것쯤은 거론할 것이 못 된다.”
북문에서 북포루 가는 길.
심한 곳은 70도 넘는 급경사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코와 땅바닥 사이가 50 cm 안 된다.
북포루 오르며 한숨 돌리고.
덕실님은 반팔 차림이다.
↓북포루(北砲樓). 북창(北倉) 마을이 한눈에 쏙.
군량미 일시 저장 창고가
가산 북쪽 북창마을에도 있었다.
포루는 성으로 접근하는 적을 확인하고
멀리서 포를 발사할 수 있도록
조망이 좋은, 높은 곳에 위치한다.
가산 산성 동서 남북 4개 포루에는
치(雉)도 같이 설치되어 있다.
치는 길쭉하게 성곽이 툭 튀어나온 구조물인데,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활로 제압하기 쉽다.
↓북포루에 서면 속이 뻥 뚫린다.
하늘정원 서쪽과 팔공산 북쪽사면이 한 번에 보인다.
전체 팔공산의 1/4을 보는 것이다.
노적봉에 올라도 마찬가지다.
그곳에서는 물불산 동편만 보인다.
파계사 골짜기와 한티골 서쪽은 안 보인다.
멀리 비로봉 서봉 가마바위봉 파계봉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북포루에서 가산 정상을 바라보며 찍었다.
성벽 왼쪽이 유선대와 용바위다.
↓유선대 부근에서 북포루와 북포루 아래 삼칭이 능선을 찍었다.
↓용바위.
각도에 따라, 사진 찍는 위치에 따라,
햇빛 방향에 따라 용머리가 확연히 보일 때가 있다.
제대로 나온 사진 얻으려면
1시간은 족히 걸린다. 오늘은 영 시원찮다.
↓가산 정상(900). 이곳이 제일 높다.
내성 구역이 광대하여 수비 범위가 너무 넓었다.
내성 안에서 제일 높은 곳을 따라 중성을 쌓았다.
내성 축조 100년 만이다.
관아와 군량 저장고를 집중 방어할 목적으로
축성한 것이다.
↓가산 정상에 군사 지휘소인 장대가 있었다.
아래 사진은 금정산성에 남아있는 장대.
↓북포루, 유선대, 가산정상부를
드론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오른쪽 아래 길쭉하게 나온 곳이 북포루 치성.
왼쪽 아래는 유선대와 용바위 절벽.
↓가산 정상에서 동포루로 내려가는 길.
경치가 수려하다.
키가 10cm 안 되는 구절초.
바람이 센 곳이라, 키가 크면 생존할 수 없다.
환경에 적극 대응한 결과, 이들은 살아남았다.
동포루로 내려가는 길.
동포루에서.
↓동포루에서 동문 가는 길.
동문. 꽃비님은 가산이 난생처음이다.
진남문 도착. 오후 5시.
오전 9시 반에 여기서 출발했으니 7시간 반 동안 기동한 셈.
((아래는 서병장님이 카톡으로 보내주신 사진))
남포루에서 내려다본 도덕산과 남창마을
↓북포루 등정 기념사진
↓팔공산 북사면
가산정상 부근에서 북포루를 내려다보았다.
↓이곳은 전시 군 최고 지휘소 상장대(上將臺) 터.
서쪽 맞은편에 서장대 자리가 있다.
가산바위 부근 성벽에 붙어있는 부처손을 찍고 있다.
↓((대덕화님 촬영분))
동포루로 내려가는 길.
울룩불룩한 근육질 산세가 탐난다.
해가 한참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사진에는 어스름하게 나왔다.
북포루 오르는 길.
나무가 3 그루 있는 곳이 북포루.
제일 왼쪽 봉우리(840)가 기묘하게 생겼다.
북문에서 북포루 올라가는 길.
경치가 빼어나다. 찬사가 저절로 나온다.
힘이 들어도 좋은 게 눈에 들어오면
모든 게 용서된다.
↓가산바위 가는 길.
멀리 유학산 수암산이 보인다.
저 산에서 억울한 목숨이 엄청 많이 죽었다.
도선굴 내부에서 밖으로
도선굴 입구
남포루와 암문.
치키봉 치이봉이 나란히 보인다.
↓남포루에서 동문과 수문을 내려다보았다.
이곳도 사람을 홀리는 장소다.
풍경이 그만이다.
내성과 외성의 접합부다.
↓남포루에서 중성문 쪽으로 이동하는 중.
도선굴 입구
↓((산사랑님이 보내온 사진))
부계봉 산줄기 서쪽이라서 칠곡군 가산면이다.
산줄기 동쪽은 군위군 부계면이다.
↓좌로부터 서응해산 도덕산 그리고 480 무명고지.
그리고 한티 가는 길 4구간 동무골 골짜기.
남포루 전망바위에 서면 이 경치 나온다.
남창마을과 원당마을 합치면 남원리가 된다.
북포루 오르는 길.
힘들면 좀 쉬었다 가세요.
북포루 오르며 뒤돌아보면
그냥 가서 안기고 싶은 경치가 나온다.
북포루 가는 길은 멀고 힘든다.
↓남포루 전망바위에서 가산바위 쪽으로 본 풍경.
장관이다.
↓가산바위에서 북문으로 내려가는 길. 호젓하다.
붉게 물든 단풍에 사나이 가슴마저 불 타오른다.
↓북창마을. 가운데는 북창 저수지.
가산 정상에서 정북방향이다.
가산 남쪽은 칠곡군 동명읍 남원리 남창마을,
가산 북쪽은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 북창마을이다.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 어렵다.
미세먼지층이 산능선 위로 짙게 깔려있다.
동문 옆 수문.
산성 내부의 물은 전부 이곳으로 모인다.
일부는 아직 복원 전이다.
자료사진.
↓진남문 옆 수문.
↓북포루 아래 삼칭이 능선을
북창마을에서 본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