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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천상의 오페라 '금 면류관의 반납'>의 줄거리:
보좌가 펼쳐진 하늘나라에 대한 계시는 단순한 시찰보고가 아니라 마치 일관 된 주제로 진행 되는 오페라처럼 통일 된 스토리를 갖고 있습니다. 아름다움과 소중함과 존귀한 매력의 궁극이신 보석 같은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에 의해 특별히 선택되어 일대일로 관계할 상대자로 여김을 받고 게다가 금면류관의 칭찬까지 받은 24장로. 이제 이들이 하나님의 보좌에 금면류관을 반납하기 까지의 진행은 그 자체로 완벽하고 장엄한 하나의 오페라입니다.
천상의 오페라 ‘금 면류관의 반납’
(계4:5~11)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8.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9.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으로 <천상의 오페라, ‘금 면류관의 반납’>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천상의 오페라가 펼쳐지는데 그 제목이 ‘금 면류관의 반납’입니다.
여러분! 이제 4장 이후에 나오게 되는 모든 계시는 어떤 영역에서 일어날 일들에 대한 내용인가를 보여주는 그런 계시입니다.
오늘 4장에서 보여주는 울타리 안에서 이 계시가 이해되고, 또 4장의 내용이 가지고 있는 울타리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되는 내용과 연관된 일들에 대해서 내용들이 전개가 될 것입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내용이고, 그것이 일곱 교회에 대한 메시지에 이어 지금 나오고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메시지 다음에 이 내용이 나온다는 것으로 미루어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교회와 하나님과 주님과의 관계, 이게 지금 계시록의 중심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더 세분화해서 정확하게 말하면, 교회라는 단체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교회를 구성하는 한 사람, 한 교인, 한 선민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우주의 중심이고, 이 세상의 중심이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내려다보시고 이 피조의 세계를 내려다보실 때에, 하나님 관심의 초점이 바로 그것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과 한 선민과의 관계를 제외해 놓으면 계시록의 의미가 없습니다.
자, 그런데 이 이야기가 4장에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느냐?
먼저 보세요. 이 4장의 내용은 보좌가 펼쳐져있는 하늘나라를 성령님 안에서, 성령님이 사도 요한의 감각이 되어주셔서 그 느낌을 표현해 나가는 것인데, 그럴 때에 그냥 하늘나라에 기존에 있는 일들을 부분 부분마다, 그때그때 보이는 것을 적어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이라고 하는 선민의 대표로 서있는 한 인격과 관계되는 부분들이 하늘나라에서 이 인격과 무관한 일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 거예요. 이 인격과 객관적인 이야기를 보여주는 겁니다.
하늘나라가 객관적으로 존재합니다만, 하늘나라를 채우고 있는 내용들 중에서 관계가 되는 것들을 보여주면서, 계시의 내용이 하나의 통일된 주제로 일관되어서 흘러가고 있습니다.
‘여기는 어땠다. 저기는 어땠다. 네 생물이 있었는데 날개가 여섯이구나. 하나님 앞에 일곱 등불이 있구나.’라고 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렛소리가 나고, 번개와 음성이 들리고, 앞에 일곱 등불이 있고, 수정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주변에 네 생물이 있고”
이게 다 하나의 일관된 주제로 흘러가다가 마지막에 이야기가 어떻게 일단락 지어지느냐 하면, 24장로들이 자기 머리에 면류관을 쓰고 있었는데, 그 면류관을 하나님 보좌 앞에 드리는 것으로 이야기가 일단락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5장부터 이야기가 다시 전개되는 것이죠.
연관성 있는 스토리로 계시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결말은, 24장로가 면류관을 벗어서 하나님 보좌 앞에 드리는 것으로 끝이 난다는 거예요.
자, 그럼 이 내용이 도대체 무엇이라는 것인가?
3절에서 보석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성령님이 감각기관이 되어주셔서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을 사도 요한의 마음이 느낄 때, 그 느낌이 뭐냐 하면 아름답다는 거예요. 그리고 마음에 너무 소중하게 여겨지는 겁니다. 존귀한 겁니다. 존귀한 분인데 마력 같은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내 마음을 뺏어가는 불가항력적인 매력을 갖고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지옥 가는 사람들이 지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다 느끼는데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겁니다.
반면에 그러한 하나님 앞에 서있는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
지금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이 쓰여 진 이후에 이 세상에 태어날 모든 선민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 선민을 하나님이 어떻게 보고 계시느냐? 24장로로 보십니다.
24장로라는 것은 백성들 중에서 뽑힌 자들 아닙니까? 선택 받았음을 말합니다.
12지파가 구약에서 선민을 대표하고 있고, 신약 교회에서 12사도가 선민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이 24장로라는 말로 나타내려고 했던 느낌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주셨다는 것을, 교리로 깨닫거나 들어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마음속에서 인격적으로 나를 선택하신 그 하나님의 인격을 대하면서 표현한 것이 24장로입니다.
그러면 흰 옷은 뭡니까? 옷이라는 것은 신분을 나타낸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치 내가 남편이면 아내가 있기 때문에 남편이에요. 내가 선생님이면 학생이 있기 때문에 선생님이에요.
이것이 뭘 이야기하는 겁니까? 흰 옷의 신분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상대자가 되어 주시기 때문에 내가 받게 되는 신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1:1로 대하고, 학생과 선생님이 1:1로 면담하는 것처럼, 그렇게 1:1로 하나님과 내가 상대자로서 대면하고 있다는 이야기이고, 금 면류관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칭찬하실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성령님께서 보여주셨는데, 나를 택하시고 1:1로 상대하실 뿐만 아니라, 칭찬하시는 마음이 보이는 겁니다. 금 면류관으로 표현한 것인데, 오늘 이야기의 끝은 뭐냐 하면 그 금 면류관을 반납해 버리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하늘나라에 와서 보니 칭찬 받아야 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칭찬 받아야 될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하는 과정을 오늘 보여 주는 겁니다. 그리고 결말에 그 칭찬 받은 금 면류관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겁니다.
말하자면 무엇 때문에 칭찬을 받았는데, 그 칭찬의 내용을 알고 봤더니 요한이 선민들이 칭찬 받아야 될 이유가 하나도 없고, 오직 칭찬 받을 일이 이루어진 모든 이유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일곱 교회를 쭉 통과하면서 본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살고 있는 당신의 선민들을 향하여 어떨 때에 칭찬을 하십니까?
일곱 교회에 계속 반복하면서 나온 것이 뭐냐 하면, “내가 너의 행위를 아노라”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행위를 아시면서 칭찬하시거나 책망하십니다. 우리의 행위 속에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칭찬이 어디에서 주어지냐 하면 행위에서 주어집니다.
그러면 이 행위를 어떻게 했기에 하나님의 칭찬이 주어지는 겁니까?
예를 하나 들어보면 알아요, 칭찬 받을 만한 행위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사도행전 4장 18절에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공회에 잡혀가서 죽도록 얻어맞습니다. 그리고 그 산헤드린 공회 회원들이 다시는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니까 그 때에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한 것을 기억하시죠?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동 할 수밖에 없다, 너희의 말을 듣고 행동 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예요.
이것을 확대해서 이야기하면, 모든 세상 사람들이 돈을 추구하면서 어떻게 돈 벌까를 가르칩니다. 돈 버는 사람들이 그래요. ‘이렇게 하면 돈 벌 수 있고, 저렇게 하면 돈 벌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따라서 행동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만 행동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말씀은 ‘나’라고 하는 인격의 삶, 나는 유일한 존재 아닙니까? 내 삶도 유일하고 독특한 거예요. 그 나의 유일한 독특성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당되는 말씀을 해주시는 말씀을 따라 산 것입니다. 그게 칭찬받을 만한 일이라는 거예요.
이렇게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이 세상을 살았다고(너! 잘했다.) 금 면류관을 받아서 썼어요.
이건 지금 시간이 우리 식으로 앞뒤가 없는 겁니다. 사도 요한은 주후 96년에 밧모 섬에서 지금 이 계시를 보고 있고, 하늘나라에서 일어날 일은 천 년 뒤, 이천 년 뒤에 예수님을 믿고 살던 사람들까지도 포함한 이야기들이 같이 이야기가 되고 있는 것인데, 4장의 동사들이 전부 현재형으로 쓰여 있습니다. 영의 세계에 들어가니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도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고, 이미 죽은 사람도 선민인 경우에는 하나님 마음속에는 존재하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선민들이 칭찬 받는 이유가,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움직인 것이에요. 그런데 하늘나라에 와보니 칭찬받을 이유가 아무것도 없더라는 거예요. 내가 잘한 것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며 그 말씀대로 행위를 하고 살았는데, 그 말씀이 어떤 말씀이냐 하면 “보좌로부터 번개와 우렛소리가 나고”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게 뭘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늘에서 번쩍하면서 우르르 꽝꽝 우렛소리가 들리고, 때로는 벼락이 떨어질 때에 경험이 있으시죠? 짜-작하고 벼락이 떨어지는 그 순간에 소리가 들릴 때에, 여러분 기억 속에 다른 소리가 들린 적이 있습니까? 아무 소리도 안 들려요.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산헤드린 공회에서 공회원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예수를 전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과 사도 베드로 자신은 이 공회원들이 말하는 것도 듣고,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도 듣고, 그 중에서 자기들이 예수를 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 쪽으로 선택하고 결정했다고 믿었어요.
이성적으로 의식적으로 그리고 믿음으로, 자기들이 선택했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하늘나라에 와서 알고 봤더니, 예수를 전하라는 말씀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를 전하라는 말씀을 우렛소리처럼,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처럼 내려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육체의 귀로는 산헤드린 공회의 말이 들리고 있었지만, 이 마음에는 아무 소리도 안 들렸던 거예요. 아무소리도 안 들리게 해주셨다는 겁니다.
다윗이 숨어있는 동굴에 사울 왕이 들어와서 일을 보고 있을 때, 옆에 있는 신하들이 사울 왕을 찔러 죽이라고 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선택한 종을 내 손으로 죽일 수는 없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 다윗 자신은 자기가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뜻을 붙잡았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이 신하들이 말하는 것이 육신의 귀로는 들렸지만 마음까지 도달할 수 없도록 마음의 귀에는 ‘내가 세운 종인데 아무리 원수이고 잘못된 자라도 네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라는 이야기를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거예요.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칠 때에도, 요셉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자기를 유혹하는 보디발의 아내의 말이 들릴 때에 자기는 이쪽을 선택했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셉의 마음속에 우뢰와 벼락이 떨어지듯 ‘절대 그 여자를 손대지 말라’고 말씀해주셨기 때문에, 보디발의 아내의 말이 마음에 안 들려온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산다는 것은, 이렇게 보좌에서 하나님께서 아무 소리도 안 들리도록 벼락이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로 내 마음의 귀에 들리게 했기 때문에, 그 음성을 따라간 것이지 내가 선택해서 따라간 것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면류관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 일곱 영은 뭡니까?
내가 그렇게 하나님 말씀을 이 땅에서 추구하는 이유는 마음속에 확신이 있어요.
‘이것이 옳다.’ 이것을 따라야 하는 당위성과 확실성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내가 믿었기 때문이 아니었더라는 거예요.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보니까, 일곱 영이 등불로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이 사도 요한의 마음속에 전달되는 일곱 영이 성령님이시죠. 그 하나님의 뜻을 품으시고 이 세상에 전달하시는 성령님을 볼 때에 등불로 보인 것입니다.
등불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어두움이 전제되어 있는 거예요.
어두움 가운데 마귀에게 홀린 그릇된 기준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고 사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내가 행동하는 것이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이었음을 확신시키는 것이, 완전히 등불이신 성령님의 역사였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 알려지니까, 그 말씀을 붙잡고 있었던 나 자신의 믿음과 확실성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그게 아니었다는 겁니다.
전부 성령님께 사로잡혀서 살고 있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금 면류관을 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나타나는 이야기가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나옵니다.
헬라어에서 말하는 유리는 그 당시에 요즘 같은 유리가 있었겠습니까?
유리라는 것이 뭐냐 하면, 빗방울을 말합니다.
그 당시의 빗방울이라는 것은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들 중에 가장 깨끗한 물이에요.
이 땅에 내려온 물은 불순물과 섞이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비가 되어서 내려올 때의 물은 이 지상에 있는 어떤 성분도 포함하지 않은 그 당시로서는 가장 깨끗한 물입니다.
그러면 이 유리 바다라는 것이 뭘 말하는 걸까요?
우리 지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5감각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곳에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칭찬해 주신 내용이 무엇이냐?
너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동했기 때문에 칭찬을 해주신다고 하셨고, 두 번째로는 그 하나님의 말씀만이 온전히 옳다는 판단을 가지고 살았는데, 그것이 등불로 표현되는 성령의 역사였기 때문에 내가 칭찬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과, 나의 판단력과 분별력이 아니라 바로 성령님께서 나를 장악하셨기 때문에 분별할 수 있었던 것이고, 세 번째는 유리 바다가 막혀있는 것처럼 거리가 떨어져 있다는 거예요.
가령 육체 안에 거하면서 아직도 질퍽거리고 있는 우리가 유리 바다 안에 들어가면, 우리 속의 검붉은 죄악이 투명하게 보이는 그런 바다를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의 그런 죄악이 투명하게 보이는 바다를 건너서 하나님께 도달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그 거리는 우리의 5감각으로 도달할 수가 없는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세상에 사는데, 그런 거리를 두고 가까이 갈 수가 없는 그러한 죄인 된 형편에 머물고 있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좋아하는 그런 마음이 점점 더 자라난 겁니다. 그런 거리를 두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데, 날이 갈수록 하나님과 더 친해진 겁니다.
그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out of sight out of mind’라고 하잖아요.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없으면 마음도 멀어집니다. 육체의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데, 인간적으로 보면 정이 들 수가 없는 대상이신 하나님인데.
밧모 섬에서 일곱 교회가 있는 소아시아까지 지중해가 끼어있는 것처럼,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는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와 같은 차원의 갭이 있는데, 그 하나님을 내가 마음에 정이 들어서 점점 더 친한 자로서 이 세상을 살아갔다는 겁니다.
그것은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더 돈 맛을 아는 사람이 있어요.
우레와 벼락같은 소리가 돈! 짜-작하고 소리가 내려왔을 때에, 마음의 귀가 돈을 딱 받아들이면, 모든 행위가 돈을 따라 나타나게 됩니다.
어느 순간에 여자를 봤는데 번개처럼 짜-작하고 저 여자다! 하면서 마음속에 들리면 그 여자를 아내로 삼을 때까지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런 거예요.
그렇게 마음속에 전달 된,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이제 인격적으로 점점 친해지는 겁니다. 자꾸 하나님을 찾는 거예요.
그게 칭찬 받을 일인데, 하늘나라에 와서 ‘내가 왜 그렇게 하나님을 찾았나?’ 하고 알아 봤더니, 하나님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변에 네 생물이 있는 거예요.
네 생물이 있는데, 이게 무슨 생물인가에 대해서는 말이 많아요.
그러나 가만히 말씀 자체를 살펴보면 우리가 힌트를 가질 수 있어요.
네 생물이라는 것은 영어로는 living creature로서 살아있는 피조물이라는 뜻입니다.
왜 굳이 생물이라는 말을 붙일까요? 피조물은 다 살아있는 것 아닙니까?
아니더라는 거예요. 이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은 다 죽습니다.
인간도 지옥이든 천국이든 부활해서 영원히 살겠지만 죽음을 통과합니다.
그런데 이 네 생물이라는 것은 피조물인데 죽음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죽음이 없는 피조물이 뭘까 생각해보세요.
‘죽음이 없는 피조물’
나를 향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선민을 향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영원 전부터 계신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표현하잖아요. 로고스(logos)라고 표현하면서 그 말씀은 예수님이시고 영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과 아버지와 성령으로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께서, 나와 선민들에게 해주신 말씀들은 선민들이 피조 된 다음에 나타난 말씀들입니다.
말을 갖다 붙이자면 피조물들을 향해 주신 말씀이니까 피조 된 말씀입니다.
그게 뭡니까? 선민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면서 죽지 않습니다. 피조 된 것인데 죽지 않는 피조물은 말씀 밖에 없다는 거예요.
어거스틴이 이 네 생물을 4복음서라고 말한 것은 굉장히 근접한 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 네 생물을 뜻하는 것은, 사자와 독수리, 송아지, 사람 같이 피조 된 세계의 생물들의 대표를 말하는 것이면서, 그러나 그것들이 하늘에 있으면서 죽지를 않는 겁니다.
8절에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고 나와요.
쉽게 말하면 사도요한 때에는 이미 우리가 정경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성경이 다 쓰여 진 때입니다. 이 요한계시록이 기록되는 순간까지는 신약 성경까지도 다 쓰여 진 상태입니다. 정경으로 모아지지는 않았어도 다 존재한 상태입니다.
아마 사도요한 정도의 위치라면 모든 성경을 다 알았을 거예요.
그러면 이 성경과 네 생물이 무슨 상관이냐?
네 생물이 눈이 있다고 했어요.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변을 쉬지 않고 날고 있습니다.
보좌 가운데라고 하니까, 많은 학자들이 보좌 가운데에는 하나님이 앉아 계셨는데 어떻게 보좌 가운데 있을 수 있느냐고 하는데, 이건 우리가 시간과 공간의 논리에 매여서 하는 소리이고, 보좌 가운데에서 날고 있다는 것은, 그 눈이 하나님을 보는 눈이에요.
그리고 쉼 없이 날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거룩하다’라는 것은, 최고로 좋음을 말합니다. 최고로 사랑하실 만 한 분을 말합니다. 최고로 소중함을 말합니다, 더 이상이 없을 만큼.
그럼 이게 다 뭡니까?
아마 사도 요한이 요즘 계시를 받았다면 눈을 카메라라고 표현했을 거예요.
네 생물이 가득한 눈으로 보좌 가운데서 하나님의 속을 들여다보고, 보좌 주변에서 하나님의 겉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오는 반응이 ‘최고다! 최고다! 최고로 아름다우시고 최고로 사랑할 만 한 분이시다! 최고로 귀중하시다.’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카메라로 찍히는 모습에 반응을 하고 있는데, 찍히는 모습에 대한 내용이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성경 말씀으로 전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펴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성경 모든 구절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이 십자가라고 했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발견하자마자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도달하면서,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라는 그 어마어마한 갭을 넘어서 하나님께 가고 하나님과 사귀게 됨으로써, 이 땅에서 그렇게 머나먼 차원과, 차원의 갭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친해지는 삶을 살았던 겁니다. 알고 봤더니 성경을 열 때마다 하늘에서 네 생물이 생방송을 해주는 거예요. 그 네 생물의 가득한 눈을 통해서 하나님 속의, 나를 향한 사랑과 긍휼과 용서의 마음, 죄를 지으면 안타까워하시는 마음들을 중계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겉모습이 극히 아름답고, 이 세상의 돈도 명예도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느낄 만큼 하나님이 좋은 분이시라는 것을 계속해서 방송하고 있는 겁니다.
말씀을 열면 그 말씀 속에서 그 방송을 접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나는 땅에 있는 그런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고 느껴질 수도 없는 하나님을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내가 특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체질이었던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말씀을 접할 때에 끊임없이 지금도 생방송으로 하나님의 안팎이 내게 전달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정을 붙이고 하나님을 점점 더 좋아하고 친해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땅에서 살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붙잡고 남편이나 자식보다 제일 친하고 가까운 분으로 모실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자랑과 칭찬의 근거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배려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면류관을 벗고 하나님께 바치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내가 선민으로서 땅에서 살면서, 하나님께서 칭찬하실만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배려와 사랑이었음을 알고, 이제 칭찬을 반납해 드린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칭찬받고 살게 해주시고 그리고 칭찬받을 수 있는 상태에 있는 나를 볼 때마다 칭찬의 금 면류관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삶이 이 지상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합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아버지께서 십자가의 자리까지 몰아 오시고 마침내 아버지를 주셔서 그야말로 자유, 평강, 기쁨을 누리게 하시니 면류관을 벗어서 아버지께 드림이 당연한 것이겠지요.
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영광을 홀로 받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