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많은 비가 내렸다.
그 뒤로 맑은 푸른 하늘이 보였다.
공원은 다시 활기를 찾았다.
11월이 왔지만 제주는 아직 푸르다.
이런 환경에 한번 더 감사해본다.
들꽃도 피었다.
계절을 잊은 듯 하다.
이렇게 좋은날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하신 말씀을 묵상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다.
그것이 계명의 첫째라 하셨다.
그리고 둘째로 이웃을 말씀하셨다.
더 큰 계명이 없다 하셨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을 사랑함은
십자가로 보여주셨다.
이웃을 사랑함은 함께하는 삶으로 보여주셨다.
누구와 함께하셨음은 이미 알고 있다.
예수님의 이웃 사랑의 대상은
당시 사회에서 소외 받는 이들이다.
세리와 창기들이었다.
예수님께선 친구들 덕분에 손가락질 대상이었다.
예수님의 무리는
구원을 독점한 것 같은 기득권의들의 기준에는
구원받을 수 없는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과 예수님은 함께하심으로 사랑을 드러내셨다.
그렇게 보여주신 이웃 사랑 덕분이었을까
말하기 좋아하고
스스로 거룩하다 믿는 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왜 그러셨을까.
예수님은 강자에는 강하고 약자에는 약하셨다.
약한자에게 강한 것이 생존의 본능일 터인데
그러지 않으셨다
그러고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제자사장 그룹과는
끝까지 타협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강자에게는 강으로 맞서셨다.
바리새인과 제사장은 기득권이었다.
종교를 더한 권력이었고
외세에 의지한 카르텔이었다.
2000년이 흐른 지금은
누가 제사장이고, 누가 바리새인인가.
남을 쳐다볼 이유가 없다.
어쩌면 이 시대 속에서
우리가 닮아가는 것은 예수님이 아닌
바리새인들이 아닌가...
지금 교회의 모습에 모두 오버랩 되어있다.
지금 교회는 예수님과 함께했던 이들을 정죄한다.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아니다.
구분하고 분리함에 가장 앞장선다.
섬김 받아야 할 이웃을 구분하며,
보살펴야 할 에들을 새로운 이단으로 판단하면서
스스로 거룩을 말한다
이단을 말하려면 내가 정통이어야 하는데
2000년 교회 역사에서 한국교회는 존재감이 없는데도
스스로 정통인 척하고 있다.
종교 카르텔이 되어
세습과 물질로 그 자리를 유지하려한다.
또한 강자에게 기대어 서있다.
스스로 강해지고자 물질을 복이라 말한다.
화려해 보이지만 암울하다.
그져 어둠이다.
먼저 회개해야 하는데
예수님의 이웃을 행해서 회개를 선포한다.
안타깝게도
그런 무리의 집단에 내가 아직 속해 있다.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소리치는건가?
말씀 앞에 바로 서는 것인가.
오늘도 바람결에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부끄러워진다.
사랑 부족한 나의 모습이...
가장 먼저 채워야 할 것이 사랑인데
너무 적다.
그러니 이웃을 품지도 못했었다.
이제 깨달았으니 더욱 의지하여 채워야겠다.
그리고 드러내야겠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