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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상반된 두 가지 칼의 노래>의 줄거리:
최초의 살인자 가인의 후예인 라멕이 부른 칼의 노래 입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하여간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상처나 해를 입히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를 죽이겠다는 잔학성과 교만이 넘쳐나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칼의 노래가 본문에 등장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칼의 노래입니다. 도대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노래가 어찌 칼의 노래가 될 수 있다는 말일까요?
상반된 두 가지 칼의 노래
(창4:16~26)
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18.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상반된 두 가지 칼의 노래>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여러분 다 아시는 대로 우리나라 가수 싸이가 ‘강남스타일’이라는 노래로 빌보드차트에서 7주 연속 2위를 했습니다. 기록적인 사건이지요.
빌보드차트에 아시아의 노래가 이제까지 100등 안에 들어간 게 18개밖에 없는데, 그것도 7주 동안이나 2위를 했고, 18개 노래 중에 싸이 노래가 세 개 들어가 있어요.
빌보드차트에서 7주면 어마어마하게 긴 기간이거든요, 이게 비교가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칼의 노래’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이 ‘칼의 노래’는 오늘 본문에서 라멕이 부른 노래로, 23~ 24절에 걸쳐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이게 칼의 노래입니다.
이 칼의 노래는 이 말이 담고 있는 의미로 볼 때, 라멕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계속 불리고 있는 거예요.
6천 년 가까운 세월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이 라멕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겁니다.
대단한 노래에요.
이 라멕의 노래는 도대체 내용이 무엇이냐?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이게 지금 완료형으로 쓰여 있는데, 24절에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라는 말을 염두에 둘 때, 앞으로도 계속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거나 나를 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게 누구든지 다 잡아 죽이겠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내가 티끌만큼의 상처를 입었다 하더라도 내게 티끌만큼의 상처를 입힌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이겠다, 그리고 지금까지 죽여 왔다는 거예요.
그게 소년이라도 그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잔혹하고 교만한 마음상태가 반영되고 있는 이 노래를 학자들이 ‘칼의 노래’ ‘검의 노래’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두 가지 검의 노래가 있다는 거예요.
사실 오늘 ‘검의 노래’라고 하는 라멕의 노래 속에 칼이라는 말은 안 나오는데도 ‘칼의 노래’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검의 노래가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맨 마지막에 아담이 아벨 대신에 셋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믿고, 그 셋이 에노스를 낳는데, 에노스라는 사람의 때로부터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얘기합니다.
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고 하는 것이 또 하나의 ‘칼의 노래’라는 얘깁니다.
그러나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른 칼의 노래라는 얘기에요.
이 칼의 노래를 부르는 자들이 소위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대체 이 상반된 칼의 노래에 얽힌 내막이 무엇일까?
왜 라멕은 이런 칼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을까?
지금도 우린 부르고 있어요.
얼마 전에 어떤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울산에서 교통사고가 일어났어요.
중앙선을 넘어가지고 마주오던 택시를 들이받아 62세 된 택시기사가 그 자리에서 돌아가시게 됩니다.
이 사고 경위가 어떻게 된 거냐?
벤츠 스포츠카를 29세 된 젊은이가 타고 가는데 국산 스포츠카가 자기 옆을 쌩 하고 지나갑니다.
그러니까 열을 받아서 시속 135Km로 쫓아가면서 레이스를 벌리게 된 거예요.
그러다가 50Km로 속도를 줄여야 지날 수 있는 급한 커브 길에서 그대로 주행하다가 중앙선을 넘는 바람에, 멀쩡하게 손님 태우고 상대편에서 달려오던 택시와 충돌해서 기사아저씨가 그 자리에서 돌아가시게 된 겁니다.
국산 스포츠카를 탄 사람은 경주할 마음이 있었던 게 아니고 그냥 지나간 건데, 벤츠 스포츠카를 탄 이 젊은이가 혼자서 속에서 자존심이 팍 상해버린 거예요.
이게 바로 라멕의 노래입니다.
‘내가 지금 벤츠 스포츠카를 타고 가고 있는데 감히 국산 스포츠카가 추월을 해?’
그냥 보통 승용차가 추월했으면 놔뒀을 거예요, 근데 같은 스포츠카니까 열을 받은 겁니다.
자존심이 상해버린 거예요.
이런 썩어빠진 자존심 때문에 애매한 사람만 죽이고, 병원에 가서 기자가 인터뷰를 하는데, 아저씨 죽은 것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하는 말이 ‘제가 그까짓 국산차와 경주를 하려고 했겠습니까?’ 그러는 거예요.
그러지 않았으면 50Km로 속력을 줄여야 할 그 자리에서 왜 135Km나 냈겠어요?
그리고 조금만 자존심이 상하거나 하면 요즘 유행하는 게 뭡니까?
이혼이에요, 이혼.
성격 차이 때문에, 이게 라멕의 노래입니다.
어떡하다가 이런 노래를 부르게 되었을까요?
결국은 어제 우리가 말씀을 나눈 대로 걸리적거리고 내게 쪼금이라도 방해가 되는 게 있으면 다 죽여 버리고 없애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겁니다.
할 수 없어서, 나보다 더 능력이 강한 자가 나를 억누르고 있으니까 거기에 눌려서 그러는 거지, 사람의 본심에는 본성상 다 ‘라멕의 노래’가 숨어있는 거예요.
그러면 왜 이렇게 온 천지사방이 다 ‘손끝 하나라도 닿기만 해라, 내가 죽여 버리겠다!’ 이런 마음을 갖게 되고, 사방이 다 방해물로 장애물로 둘러싸이게 돼버렸습니까?
가인에게서부터 시작한 거라는 얘깁니다.
오늘 본문에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라고 나옵니다.
놋 땅이라는 게 에덴 땅과 대비가 되는 땅입니다.
놋이라는 말 자체가 유리한다, 방황한다는 뜻이 있어요.
참된 기쁨이 주어지지 않는 땅이니까 기쁨을 찾아서 방황하는 겁니다.
그리고 여호와 앞을 떠났다고 해요.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여호와 앞을 떠났다는 말은 자기 삶에서 여호와를 제거했다는 뜻 아닙니까?
물론 여호와 하나님의 눈길과 섭리를 떠날 수는 없지만, 인간 스스로의 마음에서는 여호와를 완전히 등지고, 그 사람의 의식 속에서는 자기 삶에는 여호와가 없다고 여호와를 제거해버린 겁니다.
왜 그래요?
천하 만물이 다 여호와의 것입니다.
근데 그것을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내가 소원을 만들어서 내 주체성을 살려서 살고 싶으니까, 그게 하나님 것이라고 하는 이 사실에서 벗어나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돈을 벌었어요, 근데 내 마음대로 쓰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을 제거해야 됩니다.
다 하나님 것이니까, 내 머리털부터 발끝까지 내가 입고 있는 옷, 내가 번 돈, 내 생명, 내 인생의 시간, 다 하나님 거니까.
근데 그걸 내 마음대로 쓰려면 제일 먼저 방해가 되는 게 하나님이세요.
그러니 하나님을 제거해야 돼요.
그러므로 하나님이라는 존재조차도 모르고 사는 것이 모르고 사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아담으로부터 죄가 가인으로 이어지면서 하나님을 자기 삶에서 제거해놓고 살고 있기 때문에 내 주체성, 내 생각과 소원과 계획이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을 제거한 다음에 나타나는 특징이 뭐냐 하면, 이 땅에서의 자기의 존재, 이 땅 위에서 육체로 살고 있는 자기 존재의 의미가 영속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죽거든요, 영속하기를 바라는데 죽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사랑하는 게 뭐냐 하면 자식이에요, 자식.
오늘 본문에 가인이 에녹을 낳았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성을 쌓습니다.
그런데 그 성의 이름을 자기 아들의 이름인 에녹으로 지었어요.
그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 에녹은 5장에 나오는 셋의 자손 중의 에녹이 아닙니다.
자식을 낳고 성채를 쌓았다고 하는 건 요새를 만들었다는 얘기에요. city를 형성했다는 것이 아니라 요새를 만들었다는 건데, 요새는 뭘 지키는 거잖아요.
무얼 지키겠다는 겁니까?
그걸 자기 자식 에녹의 이름을 붙였어요.
지키고 싶어요, 육체로 살고 있는 이 땅에서 내 존재를 오래오래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자식을 낳아서 그 자식에다 자기 존재의 의미를 갖다가 쑤셔넣습니다.
내 분신이라는 거예요, 분신.
지키고 싶은 것을 어떻게 실행합니까? 자식을 낳았고 에녹이라는 뜻이 헌신한다, 가르친다, 이런 뜻이에요. 의미가 좋은 것 같잖아요, 이 맥락에서는 완전히 이상한 겁니다.
가르친다, 헌신한다는 게 뭡니까?
자식에게 나를 주고 자식에게 내 소원과 내 뜻과 내 가치관을 그대로 가르쳐서 나의 분신이 되게 만들어버린다 이겁니다.
그래서 내가 죽은 다음에라도 나의 존재의 의미가 자식에게서 계속 살아나기를 바라는 거예요.
이렇게 육체로 이루어진 나의 삶을 내가 붙잡고 사랑하기 시작하면서 라멕의 노래가 나오는 겁니다.
내 존재를 위협하는 눈곱만큼의 상처라도 있으면 내가 그를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말겠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살려주실 때 표를 주시면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이 7배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라멕은 ‘가인을 죽인 자가 벌이 7배라고? 흥, 나를 죽이는 자가 있으면 벌이 77배일 것이다, 그러니 나를 죽이려고 생각하지도 마라! 죽이는 건 고사하고 내게 상처만 조금 줘도 내가 반드시 그를 죽여 버리고 말 거다.’
이게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 아닙니까?
다 그런 마음으로 살고 있잖아요.
나라와 나라.
일본을 보세요, 중국 보세요.
일본과 중국이 사실 다를 게 없지요.
우리가 외교적으로 중국과 좀 친하다고 해도 다를 게 있습니까?
영토 갖고 싸우는 거 봐요, 그 눈곱만한 영토 갖고.
독도, 그 눈곱만한 영토 갖고 자기네 것이라고 삼키지 못해서 안달하는 걸 보세요.
우리나라는 우리나라대로 또, 뭐 외교에 있어서 믿음이 작용합니까? 믿음이 없는 세계는 우리나라의 마음상태도 똑같은 거죠.
그 독도 조그만 것 건드리면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 실지로 제 마음도 화가 나 죽겠어요.
이게 라멕의 노래라는 거예요.
그러면 반대 되는 노래가 도대체 뭐냐?
라멕의 노래가 왜 나오는지는 아시겠지요?
다 하나님 건데 하나님을 제거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걸 내 마음대로 하고 싶었어요.
다시 말해서 이 땅에서 내 몸으로 이루어진 내 삶을 내가 마음에 붙듭니다, ‘이것이 다다, 여기서 의미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고 나니까 모든 게 다 적이 돼버려요.
그리고 나는 죽으니까 죽지 않으려고 자식에게 나를 집어넣습니다.
나의 분신이 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런데 전혀 반대의 노래가 나타난다는 거예요.
본문 마지막에 아담이 아내와 동침해서 아들을 낳고 셋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가인이 머문 땅인 놋이라는 유리방황한다는 뜻인데 반해, 셋은 정착한다, 정한다, 지정된다, 뭐 이런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셋의 아들이 에노스에요.
자, 에노스라는 이름이 특이합니다.
에노스라는 이름은 아담과 같이 사람이라는 뜻이거든요.
근데 사람이라는 뜻의 아담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의미에다 플러스 죽음이라는 단어가 포함돼있고, 부패해서 죽을 사람이라는 뜻이 있고, 병든 사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에노스라고 하는 단어가 쓰인 용례를 찾아보면 그렇다는 거예요.
왜 이름을 이렇게 지었을까요?
아담의 타락 이후 에덴에서 추방돼서 살고 있는 가인과 라멕은 그 형편을 정상적인 것으로 출발점으로 삼는 겁니다.
그런데 에노스는 자기의 삶의 형편을 죽음이라고 인정하는 거예요, 병든 상태라고 인정하는 겁니다. 이건 정상이 아니라고 인정하는 겁니다.
지금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이 형편 이대로는 병든 삶일 수밖에 없고, 이건 죽은 삶이라는 거예요. 죽음을 인정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걸 분명히 아세요.
선악과를 따먹고 죽는다고 했는데 안 죽었잖아요.
그래서 이 문제에 얽혀있는 삶과 죽음을 분명히 해야 돼요.
인간은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하나님의 형상이 내용적으로 부패하게 되지만, 죽지 않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아요.
그런데 육체는 죽게 만들어졌어요. 오해하면 안돼요.
학자들이 선악과를 안 따먹었으면 육체도 영원할 거라고 하는데, 육체는 죽지 않는 게 아니죠. 그러나 타락하지 않았다면 육체의 죽음을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뻔했다 이겁니다.
마귀가 육체의 죽음을 죽음이라고 속여가지고 죽는 걸 무서워 벌벌 떨고 있는 거죠, 우리가.
그러면 죽음이라는 건 뭡니까?
하나님이 없는 삶의 상태가 죽음이라는 거예요.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도록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는데, 관계가 끊어진 것이 죽음이고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기쁨이 없는 상태가 죽음인 거예요.
여러분, 지금 기쁨이 없어요? 그러면 죽은 상태죠.
그러나 인격이 죽은 게 아니에요, 하나님과 끊어짐, 하나님과의 관계가 죽어버린 것이지.
근데 그걸 죽음이라고 에노스가 인정을 했다는 겁니다.
틀린 것은 틀렸다고 말하는 게 맞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틀린 것을 맞았다고 인정하고 산 게 가인이고, 그 삶의 결과가 라멕의 노래로 무장되는 겁니다, ‘나를 건드리기만 해봐라, 다 죽여 버린다!’
그래서 경쟁하고 싸우고 짓밟고 올라서야지 인생을 성공하는 줄로 알고 사는 겁니다, 지금도.
이 라멕의 노래가 아직도 인기라니까요, 인기 정도가 아니라 전 인류가 부르는 노래에요.
아침에 일어나면 대한민국 전 국민이 라멕의 노래로 시작합니다.
‘누가 나를 건드려만 봐라, 내가 반드시 죽이고 말 것이다!’
건드렸는데도 참는 것은 지금 힘이 약하니까 언젠가 때를 기다리는 것이죠.
그러면 ‘에노스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지금의 상태가 죽음의 상태고 병든 상태고 부패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의 현실이라는 걸 인정한 겁니다, 그걸 본 겁니다.
그리고 이 삶에서 지금 제일 절실히 필요한 것은, 앞에 얘기한 두발가인이 대장장이의 조상으로 칼을 만들고 호미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야발이 목축업을 하듯이, 유발이 퉁소를 불고 노래를 부르고,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런 문화적 활동이나 문명의 창조가 아니라, 우선 중요한 것을 여호와를 찾는 것이다.
여호와를 찾는 것이 왜 칼의 노래입니까?
여호와를 찾기 위해서는 아벨이 양을 죽일 때처럼 칼이 필요합니다.
누구를 위한 칼이고 무엇을 위한 칼입니까?
자기 자신을 죽이기 위한 칼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버린 상태, 죽음의 상태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나타나는 죄적인 성향, 병든 성향, 이 병든 인격적 성향이 나타나고 있는 자신, 자꾸 이 땅에서 머물려고 하고 땅의 것을 좋아하려고 하는, 근데 가인과 라멕은 이 땅의 것을 좋아하는 대로 그냥 뛰쳐나가버린 겁니다.
그리고 이 땅의 것을 좋아하다보니까 방해가 되는 것은 다 죽여 버리면서 나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에노스는 이 땅의 것을 좋아하고 이 땅의 것이 없다고 불만스럽고 걱정스러운 자체가 병든 상태라는 걸 알면서 여호와 이름을 부르는데, 부르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오시라는 것 아닙니까?
여호와께로 나가려 하고, 여호와께서 오셔서 여호와와의 관계가 회복되려면, 이 병든 내가 칼에 죽어야 된다는 걸 아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벨이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셨다는 얘기는, 이 세상에서 자꾸 마음이 좋은 것으로 끌려가는 이것이 원죄의 성향이고 체질이 돼버렸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그런 내가 죽는 의미로 양을 죽여서 제사를 드렸던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으로 드린 제사라고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셨던 거죠.
이 세상에서 자꾸 마음이 첫 번째로 끌려가는 좋은 것들이 있으니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첫 번째로 마음이 드려지는 게 하나님이라야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문명과 문화가 나와도 나와야 되는 거다 이겁니다.
그런데 문명과 문화조차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인과 라멕의 기질과 성향으로부터 나와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문화와 문명이 하나님과 등지게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칼을 만들었다.
에노스가 칼을 만들면 그 칼은 평화로운 도구로 쓰일 수 있는 칼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주체성이 에노스 안으로 들어와서 나타나게 되니까.
그런데 이 라멕이 칼을 쥐니까 사람을 죽이는 거예요.
문명과 문화가 그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라멕의 노래를 부르면서 그 자손들이 발전시킨 것 같은 그런 문명이냐, 아니면 에노스가 여호와를 찾으면서 여호와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나타나는 문명이냐, 이 차이가 큰 거죠.
칼의 노래를 불러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칼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노래에요.
하나님 말고 이 땅에서 자꾸 뭔가 좋아서 내 마음이 끌려가잖아요, 좋아하는 것이 이 땅에 있고 소중한 것이 이 땅에 있고.
내가 좋아하고 내가 소중한 것들은 내가 안 좋아하고 소중하게 여기지 않아도, 소중하게 여기고 좋아할 임자가 따로 있습니다.
그게 여호와 하나님이세요.
근데 내가 소중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 이게 바로 하나님을 제거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방해물이 되는 겁니다.
이런 것이 병든 것이란 걸 에노스는 안 거예요.
그래서 여호와의 노래를 부르면서 그는 칼을 쥡니다.
잘못된 인격 병든 인격 부패한 인격이 죽어야 된다는 걸 아는 거죠.
다른 사람을 향해 칼을 들이대지 말고, 다른 사람을 이기려 하고, 외부적인 장애를 극복하고 장애물을 넘어서려고 하지 말고, 원죄의 성향이 체질이 돼버린 나를 십자가에서 죽이는 겁니다.
나를 죽일 때, 내가 죽은 그 자리에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당신의 창의성을 가지고 나로 인해서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켜 나가실 것입니다.
칼의 노래를 불러야 됩니다.
라멕이 부른 칼의 노래가 아니라, 남을 향한 칼의 노래가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나를 향한 칼의 노래를 부를 때 하나님께서 이 땅을 원하시는 대로 나를 통해 이끌어 가시는 통치를 실현시켜 가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인류 역사 이래 태고부터 빌보드차트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라멕의 노래가 내 입에서 내 심령에서 중단되게 하시며, 타고난 내 삶의 형편 자체가 부패한 것이고 죽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서 에노스가 부른 칼의 노래를 부름으로써, 병든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 온전한 부활의 주님과 연합한 새로운 심령으로 이 땅을 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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