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상수리나무
어렸을 적 나는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를 모두 ‘참나무’라고 불렀다. 최근까지도 그렇게 불렀다. 참나무가 나에겐 자연스럽다. 그런데 참나무가 갈참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등으로 나뉜다고 알려준다. 바로 엊그저께 ‘나무 따라가는 춘천여행’에서 말이다. 물론 도토리가 열리는 깍정이(깍지)에 차이가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착오를 거쳐야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
행촌리로 향했다. 모두 초행길이라 주민이 보일 때마다 묻는다.
“토목골에 커다란 상수리나무가 있다는데, 어디로 가야하나요?”
묻고 물어, 골짜기를 돌고 돌아 나이 지긋한 상수리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 먼 곳에서도 위용을 느낄 수 있는 상수리나무는 길가 집 뒤에 서 있다. 나무 전문가인 김선생님은 몇 백 년을 훌쩍 넘었을 거라고 한다. 가까이 가보니 거대하여 범접하기 어려울 정도의 기를 발산한다. 오래된 나무들이 그러하듯 이 나무도 마을 사람들의 외경(畏敬)을 받으며 살아왔다. 감히 건드리지 못하였고, 치성을 드리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 왔다. 밑에서 늠름히 뻗은 기둥과 가지를 보니 『장자』에 등장하는 상수리나무가 오버랩된다.
『장자』에 많이 알려진 이런 대목이 있다.
목수 장석이 제나라로 가다가 사당 앞에 있는 큰 상수리나무를 보았다. 그 크기는 수천 마리의 소를 덮을 만하였고, 그 둘레는 백 아름이나 되었으며, 그 높이는 위에서 산을 내려다볼 만하였다. 구경꾼들이 저자거리처럼 모여들었지만 장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갔다. 그의 제자가 장석에게 달려가 까닭을 물었다. 장석이 말했다.
“그것은 쓸데없는 나무다. 그것으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을 만들면 썩고, 그릇을 만들면 깨져버리고, 기둥을 세우면 좀이 먹는다. 그것은 재목이 못 되고 쓸모가 없어서 그토록 오래 살고 있는 것이야.”
장석이 집에 돌아와 잠을 자는데 그 큰 상수리나무가 꿈에 나타나 말했다.
“그대는 대체 무엇에 비교해 나를 쓸모없다고 하느냐? 그것은 인간에게 소용이 되는 나무에 비교한 것이리라. 그러나 보라. 저 배, 귤, 유자나무 같은 것은 단 열매가 있어 큰 가지는 부러지고 작은 가지는 찢어진다. 이들은 자기의 재능으로 고통 받는 것이다. 그래서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일찍 죽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사람이나 무엇이나 다 쓸모 있는 것이 되고자 애를 쓰는 어리석음을 되풀이 하고 있다. 나는 쓸모없기를 바란 지가 오래다.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제야 뜻대로 되어 쓸모없음이 나의 큰 쓸모가 된 것이다.”
실용이 판치는 세상에 도대체 쓸모없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전문가의 상담을 받아야한다. 맨 정신에 감히 이런 생각을 한다면 주변의 따가운 눈초리를 견뎌내는 두꺼운 철면(鐵面)의 소유자일 것이다. 어찌되었건 상수리나무는 크게 쓸모가 없어 천수를 누리게 되니, 세상 사람들에게 쓸모없게 된 것이 자신에게는 쓸모 있게 되었다. 고려시대 문장가였던 익재 이제현은 그 호를 ‘역옹(櫟翁)’이라 하고 『역옹패설(櫟翁稗說)』을 짓기도 했다. 그는 그의 소원대로 장수했다고 한다.
은유적인 표현일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상수리나무는 쓸모가 많다. 도토리로 만든 묵은 동동주와 환상의 콤비다. 밭을 파고 숯을 만들 때 넣던 나무도 참나무였다. 그리고 땔나무로 한겨울의 온돌을 덥히는데 쓸모가 있었다.
도토리묵을 만들던 엄마의 모습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붉은 함지 옆에 어른거린다. 식어서 젤처럼 흐물거리는 묵을 썰어 간장에 찍어먹던 기억도 아련하다. 그때는 무슨 맛인지 모르고 흐물거리는 촉감이 싫어, 더 먹으라는 엄마의 말을 무시하고 이내 숟가락을 놓곤 했더랬다.
이제 엄마는 허리가 굽어서 묵을 쑬 수도 없다. 어제 저녁엔 바쁘냐며 마늘을 갔다 먹으라고 전화를 주셨다. 눈앞이 동동주처럼 흐려진다.
<광판초등학교 앞 숲의 상수리나무>
<행촌리 토목골의 상수리나무>
첫댓글 글 좋습니다. 행촌리 상수리나무 이야기는 이것으로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숲해설가님들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