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상하이에서 3년 여간 살면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당시 나는 현재의 거대하고 발전된 도시로서의 상하이도 물론 좋아했지만, 그보다 3, 40년대 올드 상하이의 흔적에 더 강한 인상을 받았고 그것에 더욱 매료되었다. 동서양의 문화가 뒤섞이며 화려한 도시문화를 꽃피운 아시아의 문화 수도, 신구문화가 첨예하게 격돌하는 공간, 서구 열강의 각축장, 치욕의 조계지, 아시아에서는 처음 만나는 모더니티, 당시 상하이는 거대한 변화와 변혁의 용광로였다.
[그림 1] 올드 상하이 풍경
올드 상하이는 또한 당대 중국영화 산업의 메카였다. 지금이야 영화하면 홍콩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겠지만, 그 원형은 30년대 상하이로 거슬러 올라간다. 30년대 상하이는 아시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도시답게 수십 개의 극장과 영화사가 호황을 누렸고, 일 년에 수백편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말 그대로 아시아의 할리우드가 바로 상하이였다. 할리우드 영화가 미국과 동시에 상영되었고, 김염, 완령옥, 호접, 주신과 같은 중국의 전설적 스타들이 활약하던 곳, 그들의 흔적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가령 당대의 일류 영화관인 대광명영화관, 국태영화관 등은 지금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극장 안에는 30년대 전성기 시절의 사진과 당대 톱배우들의 사진이 걸려있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묘한 기분이 들면서 애틋한 감정이 생긴다. 우리 한국인 출신으로 30년대 중국 영화계를 주름 잡으며 이른바 중국영화의 황제가 된 김염, 당대의 톱스타였지만 자살로 안타까운 생을 마감한 완령옥, 중국의 그레타 가르보라 불린 호접 등등의 젊은 시절 모습은 신선하고 매혹적이다. 중국의 많은 영화인들이 아직도 상하이에서 살고 있고, 중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국제영화제 역시 상하이에서 열린다. 뿐만 아니라 상하이 외곽에는 30년대 상하이를 그대로 재현한 대규모 세트장이 있어 당시를 배경으로 하는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촬영된다.
그리하여 웅장하고 이국적인 상하이 외탄을 걷거나, 아기자기하고 낭만적인 풍경을 간직한 프랑스 조계지역을 걸을 때면 종종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을 걷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때가 있었다. 문득 김염과 완령옥, 호접, 주신 같은 당대 상하이를 주름 잡았던 스타들을 만날 것 같은 착각 말이다. 물론 그들을 만날 수는 없지만, 실제로 나는 상하이에 살면서 중국의 톱배우와 감독들을 여럿 만났다. 예컨대 후쥔, 리우예, 저우쉰 같은 대륙의 스타와 리쟈신, 관진펑 같은 홍콩의 톱배우, 유명감독 등을 만나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림 2] 상하이 대광명 영화관
[그림 3] 상하이 국태 영화관
올드 상하이를 탐험하다 보면 만나게 되는 여러 인물 중에 빠뜨릴 수 없는 사람이 작가 장아이링이다. 영화 <색계>의 원작자로 우리에게도 점차 알려지고 있는데, 중화권에서 장아이링의 지위는 오래전부터 확고하다. 그녀의 글은 올드 상하이 유한계급의 일상과 풍경을 정교하게 묘사하여, 아시아 최대의 도시 올드 상하이에 관한 독보적인 풍경화를 완성했다고 할 수 있겠다. 동시에 격변기를 건너는 중국 여성들의 신산스런 삶을 쓸쓸하게 그리고 있다. 장아이링의 소설과 산문을 통해 3, 40년대 상하이의 풍경은 정교하고 유려하게 살아난다. 가령 장아링은 고급 아파트에 살며 사생활이 잘 보장되는 아파트의 삶을 사랑했고, 자가용을 타고 남경로에 있는 영화관에 가서 할리우드 영화를 자주 보았으며, 상하이를 누비는 전차의 소음을 좋아했다. 잡지에 투고를 해서 원고료를 받으면 립스틱을 사러 백화점에 갔다. 이처럼 장아이링은 그 스스로가 화려한 도시문화를 즐기는 고고하고 세련된 상하이 여성이었고, 시대를 앞서간 천재였으며, 올드 상하이의 아이콘이다. 장아이링은 또한 소설, 산문 외에도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창작한 영화인이기도 하다. 상하이에 간다면, 그리고 장아이링에 관심이 있다면, 그녀의 흔적을 한번 따라가 보는 것도 상하이를 보는 또 하나의 루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장아이링의 소설은 중화권의 일급 감독들에 의해 여러 차례 영화화된 바 있다. 먼저 홍콩의 쉬안화에 의해 두 작품이 스크린에 옮겨졌는데 <경성지련>과 <반생연>이다. 쉬안화는 같은 여성으로서 장아이링의 작품에 대해 더욱 각별한 애정이 있었던 것 같다. 홍콩 아트무비의 자존심 관진펑도 <레드로즈, 화이트로즈>를 영화화했고, 대만의 세계적 거장 허우샤오시엔도 <해상화>를 영화로 옮겼다. 그리고 가장 성공한 작품으로 10년 전 리안이 영화화한 <색계>가 있다.
[그림 4] <반생연> 포스터
[그림 5] <색계> 포스터
헤밍웨이가 파리에 대해 남긴 유명한 말처럼, 젊은 날의 상하이 체험은 나에게 있어 큰 자산이자 축제다. 동시에 계속해서 공부하고 탐험해야 할 대상이다. 그동안 나는 올드 상하이의 문화 풍경을 나름대로 관찰, 정리하여 책으로 펴낸 바 있고, 커다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장아이링의 에세이를 번역, 출판한 바 있다. 조만간 상하이를 다룬 또 한 권의 책을 낼 예정이고, 장기적으로는 상하이를 배경으로 영화를 찍을 계획을 가지고 있다.
[무비 & 차이나]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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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 & 차이나] 펑샤오강의 <나는 반금련이 아니다> http://yonseisinology.org/archives/1551
[무비 & 차이나] 중국과 할리우드의 합작 http://yonseisinology.org/archives/1645
[무비 & 차이나] 중국 영화 속 치파오 http://yonseisinology.org/archives/1753
[무비 & 차이나] 장국영과 야마구치 모모에 http://yonseisinology.org/archives/1887
[무비 & 차이나] <뮬란>과 <쿵푸팬더> http://yonseisinology.org/archives/1922
[무비 & 차이나] 왕가위와 후효현 http://yonseisinology.org/archives/2013
[무비 & 차이나] 홍콩 반환 20년 http://yonseisinology.org/archives/2095
[무비 & 차이나] 대만 청춘영화의 계보 http://yonseisinology.org/archives/2178
[무비 & 차이나] 군복을 입은 중국영화 – 국뽕과 쇼비니즘 http://yonseisinology.org/archives/2269
[무비 & 차이나] 호금전과 무협영화 http://yonseisinology.org/archives/2348
[무비 & 차이나] 오우삼의 귀환 http://yonseisinology.org/archives/2406
[무비 & 차이나] 리안의 작품 세계 http://yonseisinology.org/archives/24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