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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무거운 마음이 부르는 피 재앙>의 줄거리:
수수께끼 하나 내 볼까요? 텅 빈 것이면서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무엇일까요? 저울 눈금이 말하는 무게가 아니라 마음이 느끼는 무게가 중요한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가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날아갈듯이 가벼운 마음일 때와 천금 만금 무거운 마음일 때의 비교 말입니다. 이렇게 무거운 마음이 되면 삶은 더 이상 삶이 아니라 버텨내는 것이 되고 맙니다. 무거운 마음이 삶에 가져다 주는 재앙의 상징, 그것이 바로 피의 재앙이지요.
무거운 마음이 부르는 피 재앙
(출7:14~25)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는도다
15. 아침에 너는 바로에게로 가라 보라 그가 물 있는 곳으로 나오리니 너는 나일 강 가에 서서 그를 맞으며 그 뱀 되었던 지팡이를 손에 잡고
16.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왕에게 보내어 이르시되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 하였으나 이제까지 네가 듣지 아니하도다
17.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니 네가 이로 말미암아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볼지어다 내가 내 손의 지팡이로 나일 강을 치면 그것이 피로 변하고
18. 나일 강의 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는 악취가 나리니 애굽 사람들이 그 강 물 마시기를 싫어하리라 하라
1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에게 명령하기를 네 지팡이를 잡고 네 팔을 애굽의 물들과 강들과 운하와 못과 모든 호수 위에 내밀라 하라 그것들이 피가 되리니 애굽 온 땅과 나무 그릇과 돌 그릇 안에 모두 피가 있으리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무거운 마음이 부르는 피 재앙>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무거운 마음이 부르는 피 재앙’
‘무겁다’는 말과 연관 지어서 여러분들에게 제가 수수께끼를 내봅니다.
“텅 빈 것이면서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무엇일까요?”
“빈 지갑입니다.”
텅 비면 가벼워야 하는데 지갑이 비면 무겁게 느껴집니다.
빈 지갑은 물리적인 차원에서는 가볍지만 마음에서 삶 자체가 무겁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삶이라고 하는 것이 돈이 있어야 해결되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돈이 없으니 내 마음대로 해결되는 것도 없고 진행되는 것도 없기 때문에 삶이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독일의 대 문호인 괴테는 “지갑이 가벼우면 마음이 무겁다”라는 만대의 명언을 남겼는데, 이것이 현실이고 우리가 날마다 경험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가벼운 마음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어떤 분이 기증하셔서 현대에서 나온 산타페라는 오래 된 차를 제가 몇 년 탔었는데 그것이 LPG로 운행하는 차입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LPG차는 출력이 약합니다.
저는 그런 것을 자세히 모르고 그 차를 탔었는데 차가 묵직합니다. 제게는 좋았는데 어떤 사람은 답답하다고 합니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면 쭉쭉 나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차를 타다가 새 차가 하나 생겼습니다. 디젤차인 소렌토인데 이 차는 무슨 차가 그렇게 촐랑촐랑 가벼운지 모르겠어요. 브레이크를 밟고 있으면 삑, 삑 소리가 나요. 그래서 물어봤더니 브레이크를 꽉 밟아야 한답니다. 약하게 밟으면 디젤차라 출력이 강하기 때문에 밀려서 소리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제야 이 차가 왜 이렇게 촐랑대는지 알겠더라고요. 무게는 LPG산타페보다 더 나갑니다. 산타페는 밟으면 천천히 움직입니다. 제가 마치 좋은 차를 타고 있는 것 같았는데, 이 소렌토는 힘이 넘쳐서 차 자체의 무게가 전달되지 않는 것입니다. 무게는 더 무거워도 힘이 세면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돈은 힘이므로 돈이 많으면 모든 삶의 일들이 가벼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돈이 많은 부자는 마음이 항상 가벼울까요?
예를 들어 공인이고 상징적인 인물로 삼성의 이재용 씨, 이건희 회장이 아직 돌아가시지는 않았으니 정식은 아니지만, 이제 아버지 이건희 씨를 이어서 회장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에 사람들이 축하해주죠. 그러나 밤에 혼자 서재에서 이재용 씨가 마냥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돈은 산더미처럼 있지만 그 삼성 그룹이라는 곳을 책임지고 끌어가야 하니 가볍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마음의 무게 자체는 제가 훨씬 가벼울 것입니다. 그렇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14절에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는도다”라고 합니다.
‘완강하다’는 말이 히브리어의 ‘카바드’라는 단어인데 이것이 바로 ‘무겁다’는 뜻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바로의 마음이 무겁기 때문에 모세를 통해서 전달된 하나님의 뜻인 히브리 백성을 내보내는 것을 거절합니다.
‘마음이 완강하다’는 것은 마음이 무겁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그래서 거절했고, 거절했기 때문에 피 재앙이 애굽에 닥쳐옵니다.
이 이야기를 줄여서 이야기하면, 마음이 무거우므로 피 재앙을 불렀다는 것인데, 마음이 무거우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이 내 안에 들어오지 않고, 피 재앙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피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생명은 우리의 목숨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좀 더 깊은 차원에서의 생명이라는 것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유가 되는 것이고, 나의 마음속에 기쁨과 슬픔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 되면 기쁘고, 그것이 안 되면 슬픈 것입니다.
예를 들어 처음 들어보는 아프리카의 한 도시에서 불행한 일이 생겼다고 해서 내 마음이 슬프지 않습니다. 옆집에 불행한 일이 생겨도 안 됐다고 연민의 정을 느끼며 끝나지만, 내 집안에 일이 생기면 무척 슬퍼지는데 이게 바로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내 기쁨과 슬픔을 좌우하게 됩니다.
나인 성 과부에게는 외아들입니다. 외아들이 잘 되면 내가 잘 되는 것이고, 외아들이 못 되면 나의 못됨이 되는데 이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마음이 무거울 때 나타나는 일이 피의 재앙인데, 쉽게 말하면 내가 생명처럼 살아야 될 이유로 붙잡고 있고 내 기쁨과 슬픔을 좌우하는 그 생명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피 재앙의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일어났는데, 이 이야기가 영적으로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마음이 무겁다는 이야기가 무엇일까요?
흔히 하는 말로 ‘마음이 무겁다, 가볍다’라고 하고 느낄 수도 있는데 그것을 원리적으로 들여다봅니다. 어떻게 되어서 무겁게 느끼고, 어떻게 되어서 가볍게 느끼는가를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마음이 아닌 물리적인 차원에서 무게라는 것이 성립하는 것은, 몸무게가 80kg라고 한다면 만유인력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체와 물체 사이에 당기는 힘이 만유인력인데, 지구도 물체이기 때문에 지구가 당기는 힘을 우리는 중력이라고 합니다. 지구가 잡아당기기 때문에 무게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몸이 80kg로 존재하더라도 지구가 잡아당기지 않는다면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좀 가볍게 살고 싶으시다면 살을 빼시든지 달나라에 가서 사세요. 달에 가면 여러분의 몸무게가 1/6로 줄어듭니다. 60kg이신 분은 10kg로 줄어들어요.
달에도 중력이 있지만 지구 중력의 1/6입니다. 중력 가속도라는 것은 잡아당길 때의 당겨지는 속도를 말하는데 속도가 빠를수록 강하지요. 제가 지금 거기가면 한 15kg 밖에 안 됩니다.
이 물리적인 차원에서 느껴지는 무게가 마음의 무게에 대한 비유로 느껴질 수 있는데, 마음이 무거워지는 이유는,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마음에 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했다’는 것은 세상이 내 것이라고 잡아당기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금지옥엽의 딸이 있다면 그 딸이 내게 속한 것 같습니까?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딸입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시집도 안가고 장가도 안가니 족보 자체가 성립되지 않아서 내 딸도 없습니다. 그 딸 안에 있는 영혼이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죠. 영혼 대 영혼으로 만나면 딸도 아버지도 아닌데, 그 딸을 마음속에 집어넣고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산다면, 그 딸이 생명이 되어버리는데 이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을 마음에 담기 때문에 세상이 잡아당깁니다. 물리적인 차원에서도 지구의 중력이 잡아당김으로 인해서 무게가 성립하지만,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마음에 담으면 세상에 속한 것들이 잡아당기기 때문에 무게가 느껴집니다.
우리 가정도 하늘의 가정이 아니고, 세상에 속한 것이어서 세상이 잡아당깁니다.
바로가 마음에서 무겁게 느꼈다는 것은, 바로의 마음속에 애굽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15절에 “아침에 너는 바로에게로 가라”고 하십니다.
바로의 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나일 강으로 가라고 하시는데, 왜 그러셨을까요?
나일 강에 홍수를 관장하는 ‘크눔’이라는 신이 있는데, 이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아침마다 바로가 나일 강가로 나왔습니다. 신앙심이 좋은 것이 아니라 애굽을 마음에 담고, 이 애굽이 바로에게는 생명인 것입니다. 애굽이 잘 되면 좋고 애굽이 못 되면 슬픕니다.
그 애굽이 잘되게 하는 유일한 근거는 나일 강입니다. 나일 강이 잘 되면 애굽이 잘 되는 것이고, 나일 강이 못 되면 애굽도 못 되는 것입니다. 나일 강이 애굽의 번영을 보장하고, 나일 강의 홍수가 삼각주를 만들고 비옥한 평야를 만듭니다. 또한 나일 강에 관계 사업을 하고 농사를 짓기 때문에 나일 강은 이집트의 젖줄입니다.
그러므로 통치 행위의 하나로서 매일 나일 강에 나와서 절을 하고 있는 것이고, 바로의 마음속에 집어넣은 애굽이 있는 자리에서 만나라고 하십니다. 바로에게 생명과도 같은 애굽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는 나일 강의 상태에 의해서 좌우되기 때문에, 홍수를 관장한다는 크눔 신에게 날마다 제사를 지내는 그 현장에서 바로의 생명인 나일 강을 피로 만들어 버리십니다.
이 이야기는 ‘히브리 사람들을 보내라’는 말씀을 거절했기 때문에 응징한다고 하는 의미 이전에, 이미 바로의 마음 상태 자체가 피 재앙에 합당한 죄악 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무거워서 거절하는데, 마음이 무거운 이유는 마음에 생명을 담고 있기 때문이고, 그 생명의 정체가 애굽입니다. 애굽은 나일 강에 의해서 좌우되는데, 바로의 마음에 애굽을 생명으로 담고 있는 것 자체가 재앙을 불러들이는 행위로써 그 나일 강을 피로 만드셨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있는 것들을 마음에 담으면 무거워지고, 그 마음이 무거워질 때는 생명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나일 강이 피로 물들어 버리면 바로의 생명인 애굽 자체가 망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나의 자식을 생명처럼 여겨서 마음에 담았습니다. 자식은 세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잡아당겨져서 무게가 느껴질 때에,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밖에서 들어오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채용하게 됩니다.
어떤 말씀? 내 안에 들여놓은 내 생명인 것들이 잘될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단어를 선별해서 채용하는 것일 뿐,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들어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장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에 내가 마음속에 담고 있는 생명인 세상의 것들이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이 바로 피의 재앙입니다. 피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모세는 어떤 상태입니까?
15절에 “그 뱀 되었던 지팡이를 손에 잡고”라고 하십니다.
‘그 뱀 되었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 말은 뱀을 장악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뱀을 장악한 상태로 바로 앞에 가라는 것입니다.
뱀에게 장악된 상태는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을 분별하는 상태이고, 이 세상에서 선악을 분별하면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마음에 담게 되고, 그것이 나의 생명이 되고, 그래서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합니다.
바로는 애굽을 담았으니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가정을 담았다면 또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자식을 담았으니 얼마나 무겁고, 애인을 담으면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애인을 담으면 처음에는 열정이 솟습니다. 마력이 세니까 무거운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한 3년 사귀고 보면 버겁습니다. 애인의 요구에 맞춰주기도 버겁고, 친구들과 놀러가고 싶은데 애인과 같이 가야하니 그런 것까지도 버겁고 자꾸만 무거워집니다.
그런데 모세가 뱀이 되었던 지팡이를 들었다는 이야기는, 선악과를 따먹은 효과가 중지되었다는 이야기이고, 모세의 마음에서 이 땅에 대한 선악의 판단이 중지되므로 이 땅에서 좋은 것을 마음에 담지 않고, 모세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담겨져 있는데, 하나님은 이상한 분이시라서 이 세상의 중력이 작용하질 못합니다.
하늘에 있는 많은 별들이 인력을 내뿜으며 우리를 잡아당기는데, 우리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지구의 중력만 느껴서 그것을 무겁게 여기고 있습니다.
별들이 당기는 인력은 느끼지 못하고 별들에게로 가지 못하는 이유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고, 인력은 있으되 작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세상의 인력이 작용하지 않는 분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인데 그 하늘이라는 곳은 세상의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곳이고, 그 분은 세상을 직접 지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니 세상의 중력이 하나님을 잡아당기지 않기에 한없이 가볍고, 가벼운 그 하나님께서 사실은 이 세상을 말씀으로 지으시고 생각으로 이끄시는 분으로, 그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가벼운 마음으로 바로에게 갔는데, 바로는 마치 만삭인 배를 산모들이 받치고 다니듯이 애굽을 마음에 담아 끌어안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 세상으로 가득차서 무거운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들어오셔야 하나님 말씀이 들리는데, 우리는 마음에 돈을 담고 있으면서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고 하니 목사도 교인도 돈 잘 버는 쪽으로 하나님 말씀이 기울어져 버립니다.
하나님 말씀이 들리려면 하나님이 들어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돈 대신에 하나님을 모셔 들이고, 건강 대신에 하나님을 모셔 들여야 하는 것인데, 건강을 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니 맨 예수님이 병 고치는 이야기만 하게 되고,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이야기만 자꾸 변조되어서 들리게 되는데, 이것이 다 피 재앙을 불러들이게 되는 것이고, 여러분이 마음에 담고 있는 생명이 피 재앙으로 겉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왜 바보같이 이런 짓을 합니까?
여러분! 이렇게 한 번 해보세요.
서울에 성산이라는 조그만 산이 있는 성산동이 있는데, 저는 이상하게도 어렸을 때부터 산 위에 올라가서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 산에 올라가면 동네가 다 내려다보입니다.
그런 것처럼 여러분의 삶에서 마음에 담고 있는 이 세상 것들을 다 내놓은 다음에, 이 세상 삶에서부터 밖으로 빠져나가 보세요. 빠져나가서 세상을 보고 그 세상 전체가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내 마음에는 그렇게 내려다보이는 삶 속에서 보이는 것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 삶에서 빠져나와서 삶 전체를 조망할 수 있고 관망할 수 있도록 하는 자리가 갈보리 산이고 십자가 산입니다.
그 십자가에 매달려서 갈보리 산에서 내 삶을 내려다보면서 빠져 나오는 것입니다. 삶에 대해서 죽는 것이고 세상에 대해서 죽고, 그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오십니다.
하나님이 들어오시면 하늘에 속한 분이시기 때문에 내 마음이 주님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죠.
아무리 살아도 결국은 죽습니다. 그 죽는다는 것은 세상이 당기는 중력에 끌려들어간 것입니다. 나이 들수록 얼굴의 상이 젊었을 때에 비해 아래로 쳐지는데 이것도 중력에 시달려서 그런 것입니다. 젊었을 때에는 피가 잘 돌고 팽팽하고 수분도 많아서 그 힘으로 견뎠는데, 나이 들다보니 중력에 의해서 전체 인상이 아래로 쳐진 듯 나타나게 되고, 이렇게 작용하던 중력이 결국은 땅 속으로 나를 묻어버리게 됩니다.
그 가장 강력한 죽음이라는 중력을 뚫고 나오신 분이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중력에 의해서 생을 마치지 말고,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서 죽으면 내 마음 속에 담겨져 있던 세상 것들이 다 빠져나가게 되고 가벼워집니다.
그리고 걱정하지 말 것은, 이 삶은 원래부터 내가 마음에 담고 살아가야 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오히려 책임감을 느껴서 마음에 담아서 돈 벌고, 건강을 유지하고, 자식을 잘 키워야 된다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피의 재앙이 들어옵니다. 내가 마음에 담고 있는 것들이 잘될 것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십자가에서 이 세상 중력이 작용하는 어느 것도 마음에 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이 다 그렇습니다. 내 몸도 세상에 속했기 때문에 건강이나 외모를 염두에 두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마음이 무거워지면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고 하나님과의 연합이 불가능하고, 살면서도 내 마음속에 담아둔 것들이 잘못 되는 피의 재앙을 경험하게 될 뿐입니다.
바로가 애굽을 마음에 담고 있었는데 그 애굽을 좌우하는 나일 강이 피가 된 것처럼, 마음에 담고 있으면 무겁고, 무겁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안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생명에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이것이 피의 재앙이라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내 마음을 살펴서 무거움이 있으면 완강한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이 들어오시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들어오시면 기뻐요. 기쁨은 항상 마음의 가벼움과 연결이 됩니다. 마음이 무거운데 기쁠 수는 없습니다. 항상 가벼울 때에 기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마음에 담고 있는 것들이 잘되는 것은 다 일시적인 것들이고, 하루 지나면 다시 무거움으로 다가옵니다.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을지라도 그것으로 생긴 인기와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또 무거워집니다. 그러지 말고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주님의 자리인 십자가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항상 가벼운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들어오셔서 당신의 뜻을 펼쳐나가시면 모세의 막춤을 추시면 됩니다. 손끝에서 발끝에서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번 살아보고 죽어야죠.
죽기 전에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사는 것을 경험하고 죽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의 중력이 작용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죽는 것인데 십자가로 죽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십자가의 약속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내 마음으로 들어오시고, 하나님께는 중력이 작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무거운 벽돌로 지으신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지으셨습니다.
내 삶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볍게 진행될 수 있습니다. 무거울 필요가 없습니다.
제발 가볍게 사세요!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피의 재앙을 불러들이는 무거운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어서 중력이 작용하는 세상 것, 한 터럭도 마음에 담지 않게 해주시고 중력과 무관하신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가볍게 살며 하늘의 뜻을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