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군 지휘관을 꼽으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주만 기습을 지휘한 야마모토 이소로크(山本五十六)를 떠올릴 것이다. 두 번째로 유명한 지휘관을 꼽으라면 싱가포르를 공략하여 함락시킨 야마시타 도모유키(山下奉文)를 떠올릴지 모른다. 야마시타의 지명도가 야마모토에 훨씬 미치지 못할지 모르지만 그가 싱가포르 함락 직후 영국군 사령관 퍼시발 면전에서 했다는 "예스까 노까(イエスか ノーか)"라는 말은 꽤 유명하다. 야마시타 본인은 물론이고 가장 유명한 야마모토의 지명도도 압도할 만큼 유명하다. 83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있을 뿐 아니라, 일본과 무관한 한국에서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야마시타나 '말레이의 호랑이'는 몰라도 '예스까 노까'를 모르는 한국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 어디선가 "야 복잡하게 말하지 말고 '예스까 노까만 말하라"라는 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맨 처음 '예스까 노까'를 접했을 때 머릿속에 입력된 것은, 야마시타가 퍼시발에게 " (패장 주제에) 말이 많구나! (항복할 건지 안 할 건지) 예스야 노야" 라고 윽박지르는 이미지였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외모와 일본군이라는 악(惡)의 이미지 그리고 그 악군(惡軍)의 지휘관이라는 점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이미지였을 것이다. '설마 그랬을까'라는 의문이 자리할 공간은, '일본놈=나쁜 놈'이라는 확고부동한 선입관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야마시타가 전범으로 수감 중이던 마닐라의 옥중에서 썼다는 수기가 최근 미국 버지니아주 노포크에 있는 맥아더 기념관에서 공개되었다는 기사를 문예춘추 8월 호에서 봤다. 기사에서 언급한 '예스까 노까'에 대한 진상은 이미 다른 자료를 통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사실은 아니지만, 야마시타를 우락부락한 인상처럼 무식하고 교양없는 인간으로 만든 '예스까 노까'가 알려진 것과 다르다는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었다.
그가 태평양 전쟁 서전을 진주만 기습으로 멋있게 장식한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와 쌍벽을 이루는 명장이지만, 싱가포르 작전 종료 후 만주 등 변방의 한직을 전전하다 패색이 짙던 전쟁 막바지에 필리핀 전선에 투입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 아니다. 그가 전쟁 기간 중 투입된 전투는 싱가포르와 필리핀 전투 달랑 두 번이다. 첫 전투인 싱가포르에서는 국민적 영웅으로, 마지막이자 두 번째 전투인 필리핀에서는 투항한 패장으로 급전직하했다. 3년 전 그에게 투항했던 퍼시발과 똑같은 운명을 맞이한 것이다. 빛과 그림자라는 극과 극을 각각 한 번씩 체험한 희한한 기록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1941년 12월 8일 03시에 시작된 일본 해군의 진주만 기습을 태평양전쟁의 시발로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1시간 20분 먼저 싱가포르 공략 작전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진주만 기습의 화려함에 싱가포르 공략 작전의 개시는 당연히 가려질 수밖에 없었을 것. 싱가포르 작전이 빛을 발한 것은 그로부터 2개월 후 싱가포르를 함락했을 때였고, 그것의 하이라이트는 영국군과 일본군의 항복 교섭이었다.
1942년 2월 15일 일본군 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山下奉文)와 영국군 사령관 아서 퍼시발(Arthur E Percival)이 포드 자동차 조립공장 사무실에서 항복 협상이 시작되었다. 퍼시발은 이런저런 조건을 제시했는데, 그 가운데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영국인 보호를 위해 영국군에게 치안을 맡겨달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때 통역을 맡은 일본군 통역관이 기초적인 군사용어도 모르는 데다 영어 레벨이 너무 낮아 양측 의견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고 한다. 유명한 '예스까 노까'라는 말은 바로 이때 나왔는데, 알려진 것처럼 야마시타가 퍼시발에게 강압적으로 대놓고 윽박지른 게 아니고, 버벅거리는 통역관에게 "복잡하게 말하지 말고 항복할 건지 아닌지 '예스까 노까'로 간단히 물어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장면을 창밖에서 취재하고 있던 종군기자가 각색(脚色)과 분식(粉飾)을 가미해, "야마시타, 퍼시발에게 예스까 노까를 요구!" 하는 식으로 본사에 타전한 것이 야마시타가 퍼시발에게 강압적으로 윽박지른 것처럼 와전되었다는 것이다. 결과론이지만 통역관과 기자가 '예스까 노까'라는 말을 만들어낸 공로자(?)라고 할 수 있다.
싱가포르 함락 직후 동경 히비야(日比谷) 공원에서 대대적인 환영 행사가 있었는데, 이때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된 야마시타와 함께 '예스까 노까'도 유명세를 치렀다. 그러나 야마시타는 이후 중용되지 않고, 만주 등에서 한직을 전전했다. 당시 일본 육군은 통제파와 황도파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통제파가 '집권 여당'이고 황도파(皇道派)는 '야당'이었는데 야마시타는 황도파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 실권자이자 통제파의 '두목'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는 야마시타가 국민적 영웅이 되는 것이 "배가 아파" 질투심과 견제 차원에서 한직에 기용했던 것 같다. 그가 다시 일선에 기용된 것은 패전 직전의 필리핀 전투였다. '국민적 영웅'이 될 개연성이 거의 없는 전투에 반대파인 야마시타를 기용한 것 같다. 도조히데키가 그런 의도로 그를 기용했는지 알 순 없지만, 결국 두 번째이자 마지막 전투에서 투항한다. 그리고 전범으로 몰려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한다.
야마시타가 후일 회견했던 일을 친구에게 말하면서 '예스까 노까'와 관련하여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의 '예스까 노까'를 창밖에서 본 사람 가운데에는 야마시타가 승리에 도취되어 으스대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한 오만한 태도로 비쳤을 수도 있다. 그렇게 봐도 나로선 어쩔 수 없지만, 신문에 '예스까 노까'로 집요하게 쓴 것에 대해서는 두 손들었다. 지금까지 이것과 관련하여 단 한 번도 변명한 적은 없지만, 진실을 알릴 수 없는 것은 씁쓸하다."
위 야마시타의 푸념을 읽으면서 "역사 기록은 당사자가 아닌 사가의 펜끝에 달려있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총보다 펜이 더 강하다는 것이 생뚱맞은 말은 아닌 것 같고, 기록은 기록하는 자의 신성불가침한 영역일지도 모른다.
"야구 기록은 선수가 아닌 기록원의 펜끝에 달려있다"라는 말도 마찬가지일 것. 안타냐 실책이냐를 판단하는 것은 기록원 고유의 신성불가침한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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