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베드로전서 4: 7-11
1931. 1. 25. 저녁
夫信爲敎會之綱領, 而無信則非敎會也. 然요한使徒曰, 神卽愛也. 神自體卽愛也. 故主受神之性而爲人, 則主亦爲愛之全體. 故吾等之信在愛, 愛無不能也. 요한晩年覺此理, 故요한一,二,三書卽愛之福音也. 世界卽愛之組織也. 事業卽愛之行動也. 主嘗說記自己之愛曰, 如空中之太陽, 如天降之雨露, 不擇善惡而喣濡也. 主之心靈果如是光明正大, 而吾等拜其足下. 當察吾心靈有何不潔, 不能受主之恩者乎. 吾人之罪如受槍之身, 無處不傷而但以主之愛掩之, 不見傷處也. 吾等日日誦主祈禱文. 吾等免人負, 主亦免我罪云, 此何意也? 主如是愛我, 我亦如是愛人也. 主語法利賽人曰, 蕩債五百兩者出而見負債者, 捉其衣領毆打, 欲懲其債, 故主還捉其人, 而因不懲其五百兩, 吾受免于主而不能免人, 則吾亦不能重主免也. 主亦投恩于人不觀人事神如何, 必觀人事人如何也. 故主曰吾等至神壇獻祭, 思人怨己, 置物于壇前, 而往與之利解云, 神觀人事人之如何而施恩也. 故人之生有三角, 有神角我角人角也. 不可須臾離者天也. 愛卽仁也, 仁二人也. 二人相對而後, 愛之德成立. 今觀 고前十三章四五節, 說愛之德也. ◇愛久忍, 吾人聞人短我, 我卽發忿, 我肉身故不能無忿, 然忍之是愛之德也. 앱四章二十六節. 曰忿發而不至犯罪, 又勿至日落也. 是忍之工也. 若不忍之則魔必試其隙, 無所不至. ◇愛溫柔, 不溫柔則不能施愛, 溫柔者卽克己之工夫也, 人以血肉而生, 誰無血氣也? 必以克去爲工, 人之一身之肉, 宛如戰鬪, 一勝一敗常演于肉國, 故常勝, 克去肉欲光復于天國者, 必以溫柔濟之, 書曰柔能制强, 肉强神柔, 然能依主血而濟之也. ◇愛勿妬忌, 妬卽魔鬼之事也. 魔卽妬之人而用事, 使人間常作不平, 至有殺人之慘劇, 見가인아별之事, 足可證矣. 가인擇農産物之最善者而誇張而獻之, 아별擇牧畜之最善者而獻之, 以羊代自己之罪而獻之, 主納아별之祭物, 故猜忌發焉, 被魔之誘惑, 至殺其弟. 敎會有三大賊, 가인也, 猶大也, 헤롯也. 毋論何代, 此三賊常常有之. 吾人常伏此三魔後, 可得勝利也. ◇愛勿自矜, 矜者誇己也. 誇不能與人合, 萬善歸己, 萬惡歸人, 如此性質人皆有之, 吾家有幼兒五名, 吾謂曰啼哭不可, 是爲下等人, 朝起問之曰, 夜間誰啼乎? 其中三歲兒曰, 吾不啼, 옵바啼矣云. 如此不美之事, 常欲歸人, 雖幼兒如此, 況世人乎? 故誇則不能成愛, 漢代有馮將軍, 軍中常論功, 却避在大樹下, 故軍中號曰大樹將軍云, 我朝古有李适, 論功不平, 故擧叛旗而敗. 妬則誇之一種, 吾等之心內妬之一事, 必掃去如靑天無雲可矣.◇愛不驕慢, 驕尤非愛之道也. 驕常自高卑人, 故人不肯歸之. 世多驕溢而信者亦多驕昻, 我信而受聖神, 祈禱則病愈, 而某牧師不受聖神故不能愈病. 驕而自資使敎會不平, 文驕富驕班驕, 世皆有之而至信驕, 又不合愛之道也. 主以神之子, 降爲人僕, 至釘十架而猶爲架下人祈禱, 信爲吾人之模範焉. ◇愛不行無禮, 信主之人當彼此尊敬, 不設階級可矣. 至男女交際, 尤可愼重, 瓜田不納履, 一堂之內男女雜坐, 交際當淸潔, 彼此如兄妹, 不可戱言, 不可狎褻. 敎會之內醜聞狼藉甚可愧也. 古之冀缺, 雖夫婦之間, 相對如賓, 此信之德也. ◇愛勿求利, 求利之時, 使彼此易如疎席, 此何故? 怒生於不利己, 不利則不怒者鮮矣. 信者深知此理, 當捨利己主義, 行損己益彼, 此眞主之道矣. 主曰汝爲世之光, 世之鹽, 皆損己益彼之物也, 吾人當學焉. 敎會不如世之會合, 彼世之會皆爲己而會, 然敎會不然, 人各思利己, 則敎人皆散矣. 故信勿求利. ◇愛不發情, 情者出於血氣也. 信者殺血氣, 釘于架上而後, 可謂信矣. 古曰忿思難, 忿而不思, 不敗鮮矣. 主釘于十架之上而不發忿, 猶爲彼無知之輩祈禱, 吾聞人短我不發忿, 是信之道矣. 任使血氣則忿言不絶於口矣. 怒字罷則奴心也. 忿亦奴心之一種矣. 非上等人之所爲也.
대개 믿음은 교회의 기본이 되는 강령(綱領)이므로 믿음이 없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요한 사도는 ‘하나님은 바로 사랑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자체가 곧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받아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즉 주님 역시 사랑의 전체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사랑에 있고, 사랑은 못 이룰 것이 없습니다.
요한은 만년에 이 이치를 깨달았으므로 <요한 1, 2, 3서>는 곧 사랑의 복음입니다. 세계는 곧 사랑의 조직이고, 사업은 곧 사랑의 행동입니다. 주님께서는 일찍이 자신의 사랑을 기록하기를 ‘공중의 태양 같으며,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이슬 같은 은혜로써 선악을 가리지 않고 다 비추고 젖게 하여 준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마음과 영혼은 과연 이와 같이 광명정대하므로 우리는 그의 발아래서 경배하고 마땅히 우리 심령이 왜 불결하며, 주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죄는 마치 창날에 찔린 몸과 같아서 상처가 나지 않은 곳이 없으나 다만 주님의 사랑으로 덮어주어 상처가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들이 날마다 외우는 주기도문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였는데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께서 이와 같이 나를 사랑해 주시는데, 나 역시 이와 같이 사람들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주께서 바리새인에게 말하기를 ‘오백 냥의 채무를 탕감해 준 자는 나가서 채무를 진 자를 보아라’고 하였는데, 채무자를 보자마자 그 옷자락을 붙잡고 구타하면서 빚을 받아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붙잡힌 사람을 돌려보내고 이어서 그 오백 냥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내가 주로부터 죄 사함을 받았으면서 남의 죄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나도 또한 주님께서 용서해 주신 것을 중하게 여길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 때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가를 보지 않고, 반드시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섬기는가를 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르기를 ‘우리가 제단에 나아가 제물을 바칠 때, 다른 사람이 자기를 원망하는 일이 없는가 생각해보고, 바칠 물건을 단 앞에 내려놓고 돌아가서 그 사람과 화해한 후에 와서 제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섬기는가를 보아 은혜를 베풉니다.
사람의 생활에는 세 가지 면[角]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면, 나의 면, 사람의 면입니다. 그 중에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은 하늘입니다. 사랑은 바로 어질 인(仁) 자입니다. 이 인(仁) 자를 분석하면 두 사람[二人]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얽힌 뒤에 사랑의 덕이 성립됩니다.
지금 <성경> 구절 중에 사랑의 덕을 설명한 것을 보십시오(고린도전서 13:4-5).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의 단점을 말하는 것을 들으면 곧바로 분한 마음이 생깁니다. 우리의 육체는 몸이기 때문에 분한 마음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참는 것이 바로 사랑의 덕입니다(에베소서 4:26). 이 <성경> 구절에 ‘분한 마음이 생기더라도 범죄에 이르지 말라, 또 해가 질 때까지 품고 있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인내의 공부입니다. 만일 참지 못하면 마귀가 반드시 그 틈을 노려 시험할 것입니다.
사랑은 온유(溫柔)합니다.
온유하지 않으면 사랑을 베풀 수 없습니다. 온유는 바로 극기(克己)의 공부입니다. 사람은 혈육(血肉)으로 태어났으니 누군들 혈기가 없겠습니까? 반드시 그 혈기를 이기는 것으로 공부를 삼아야 합니다. 사람의 몸 중에 육체는 완전히 전투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번 이기고 지는 것은 육신에서 늘 연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이기기 위하여서는 육체의 욕망을 이기어 버리게 되면 천국으로 화하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온유로써 구제하여야 합니다.
옛글에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柔能制强]’라고 하였습니다. 육체는 강하나 정신은 부드럽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피에 의지하여야 구제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고 질투하지 말아야 합니다.
질투는 마귀의 일입니다. 마귀는 바로 질투하는 사람을 통하여 일을 벌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늘 불평하게 하여 살인의 참극까지 이르게 합니다. 가인과 아벨의 일을 보아 족히 증명할 수 있습니다. 가인은 농산물 중에 가장 좋은 것을 골라서 과장하여 드렸고, 아벨은 목축 중에 가장 좋은 것을 골라 드셨는데, 양으로써 자기의 죄를 대신하여 바쳤더니 주께서 아벨의 제물을 받아드렸습니다. 그리하여 시기하는 마음이 생겨났으며 마귀의 유혹을 입어 그 아우를 죽이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교회에는 대적(大賊) 셋이 있습니다. 가인과 유다와 헤롯입니다.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이 세 대적은 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종류의 마귀를 복종시킨 뒤에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랑한다는 것은 자기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자랑은 다른 사람과 화합할 수 없고, 잘 한 일은 모두 자기에게 돌리며 악한 일들은 모두 타인에게 돌립니다. 이러한 성질은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집에 어린이가 다섯이 있습니다. 내가 이르기를 ‘울면 안 된다. 우는 자는 나쁜 사람이다.’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묻기를 ‘어제 밤에 누가 울었느냐?’하니, 세 살짜리 아이가 말하기를 ‘나는 울지 않고, 오빠가 울었어’ 하였습니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은 늘 남에게 돌리려고 합니다. 세 살짜리 아이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어른들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자랑은 사랑을 성취시킬 수 없습니다.
중국 한나라 때, 풍장군(馮將軍)이 있었습니다. 군대에서 그가 전쟁에 나가 세운 공훈을 논하게 되면 그 자리를 피하여 큰 나무 밑에 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군대에서는 그를 대수장군(大樹將軍)이라는 칭호를 붙였답니다.
옛날 우리 조선에 이괄(李适)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논공(論功)을 잘못했다고 불평하며 반기를 들고 나라에 반항하다가 실패하였습니다. 질투는 자랑의 일종입니다. 우리 마음속의 질투심 하나만은 반드시 싹 쓸어버리어 마치 구름 없는 푸른 하늘과 같이 해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교만은 사랑의 도리가 더욱 아닙니다. 교만은 늘 스스로를 높이고 남을 비하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싫어합니다. 세상에는 교만이 가득한 자가 많고, 믿는 자 중에도 자신을 추켜올리는 자가 많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성령을 받아들여 기도하면 병이 낫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병이 낫지 않았습니다.교만하여 스스로 방자하면 교회가 불평하게 됩니다. 문학의 교만, 부자의 교만, 양반의 교만이 세상에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교만은 또한 사랑의 도리에 합치지 않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세상에 내려와 사람의 종이 되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오히려 십자가 아래 있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함으로써 신앙에 있어 우리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주를 믿는 사람은 마땅히 피차에 서로 존경해야 합니다. 계급을 설치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녀가 교제하는데 이르러서는 더욱 신중히 해야 합니다. 참외 밭에 들어가서 신발을 고쳐 신지 아니하듯 해야 합니다. 한 교회당 안에 남녀가 섞여 앉아 있지만 교제는 마땅히 청결해야 합니다. 피차가 형제이고 자매이니 희롱하는 말을 하여도 안 되고 잡스러운 행동을 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 내에 추한 소문이 어지러이 들리면 매우 부끄럽습니다.
옛날 중국 춘추시대의 기결(冀缺)은 부부간에도 서로 대하기를 손님처럼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덕입니다.
사랑은 이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이익을 구하게 될 때는 피차가 소원해 집니다.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에게 이롭게 해 주지 않으면 화를 내게 됩니다. 이롭지 못할 때 성내지 않는 자는 드뭅니다. 신자들은 이 이치를 깊이 이해하고 마땅히 이기주의를 버리고 자기는 손해가 나더라도 상대가 이익이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주님의 도리입니다. 주님께서 이르기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다 자신은 손해가 나더라도 상대가 이익이 되는 경우들이니 우리는 이를 마땅히 배워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회합과 다릅니다. 저 세상에서의 모임은 다 자기를 위한 회합이지만 교회는 그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각각 이기적인 것만 생각한다면 교인은 다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 신앙은 이익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에 감정을 나타내서는 아니 됩니다.
감정은 혈기에서 나옵니다. 신자는 혈기를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은 뒤에라야 가히 믿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옛말에 ‘분하거든 어려움을 생각하라’고 하였는데, 분하다고 생각 없이 행동한 사람 치고 실패하지 않는 이가 드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분한 감정을 터뜨리지 않고, 오히려 저 무지한 무리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의 단점을 들었어도 분함을 터뜨리지 않는 것이 바로 신앙의 도리입니다. 감정을 혈기에 맡기면 분한 말이 입에서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성낼 노(怒) 자를 분석해 보면 ‘종 노’ 자와 ‘마음 심’ 자입니다. 곧 분하다는 것은 역시 ‘종이 되는 마음’의 일종입니다. 상등인(上等人)의 할 바가 못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