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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사랑의 측량(愛의 測量)
에베소서 3:14-끝 제목은 19절
상동교회(尙洞 1929.10.13)
參考聖書
主愛世人如此, 요한三章十六,
王見衡의權. 但五章二十七節.
勿量人.太七章二節.
使爾心廣.고後六章十三節.
吾言不變. 太五章十八節.
人常有測人之心, 測人如何? 爲奉仕或交際之表準, 愛金錢者表測金力之如何, 愛知識者表測人知識之如何, 愛文學者表測人文學之如何, 愛地位者表測人地位之如何, 非但人也, 神亦測人, 曾衡巴比倫王벨사살 但六章二七, 以示必敗而猶不改悛竟被殺死, 故神亦測人定其年數, 定其國界而人猶傲聖自慢, 自取敗亡者甚多矣. 人如是有測人之心而當量己也, 己有貶人者乎? 己有視人芒之過乎? 太六章二節, 如是量己而勿量人之過也. 人之善亦不必量乎, 我有善于人當忘之可也. 如樹忘果, 然人有善不當忘却, 蔽芾甘棠,勿翦勿伐, 亦不忘恩之謂也. 요한曰神愛世人如此, 如此云者亦定其限度之言也. 요한三章十六節. 測예루살렘見其廣其長 셰갈(에스겔)二章二節. 亦言神恩之無限也. 保羅則莫測其富饒云 롬十一章二十三節. 此莫測云者, 言其無窮不可名狀也. 古先知先聖以其測神如何, 其信仰隨而大小之. 今吾人亦然, 隨吾知神之範圍而吾信仰隨而大小之. 保羅欲使엡에소之人, 測其神愛之如何矣. 欲知其愛之萬一, 先示以長廣高深也. 今先言主愛之廣大, 主曾以空中之太陽諭之, 不擇善惡而照之, 太五章四五節. 吾等之心胸甚狹, 比讀此言, 羞汚自發, 日本某以狹心症死亡, 揭載心狹則煩悶發作, 又不能容人, 不知自己之目樑, 反視人目芒, 故保羅初고린도人曰, 使爾心廣闊, 고후六章十三節. 此廣闊希伯來語, 測高原也.高原之內花卉美麗, 眺望絶佳, 使人愉快, 吾等心胸廣闊則諸德兼備, 能愛能恕能謙, 皆由此而生, 古語曰 心廣體胖果哉是言也! 心和則氣平故身體肥澤, 不然而心狹者, 容貌隨以毁瘠矣. 今神之愛廣大無邊, 其證何也? 爲强盜而祈禱, 爲彼架下之人而請赦宥. 曾曰恕至七七, 又赦犯淫之女, 當日猶大社會各派, 如氷炭之不相容, 猶大之亡已兆於此, 故主曾痛論其心狹之罪. 保羅亦以此意而廣大汝等之心胸, 測其主愛之廣大無窮, 慎勿被動于蒙學先生也, 次言主愛之長遠, 主曰吾 알패와오메가 言其愛之長, 自永遠前至永遠後也. 至愈久不變也. 主曰天地雖變, 吾言不變 太五章十八節. 反看吾心比讀此言則果何如也? 吾等之愛朝變夕改, 如天候之倏變倏易也. 故主亦曰吾不依汝等 요한二章二四節. 取看猶京之人心則可知, 初爲主唱호산나, 後改集架下呼曰釘殺, 何變易如是之甚乎? 甚可痛歎者也. 今主之愛則不在人嘲笑, 其大不加不減, 澄之不淸搖之不濁者何也? 主之愛不受于人而受于神故也. 派遠而流長. 子曰安平仲善與人交, 久而敬之. 交際之中甚可畏者, 憾情頻數也. 過毁過讚皆不可也. 故君子之交淡如水, 願僉位終身愛主, 終身愛人, 此主義與信仰主義無異也. 然愛有順序, 先則愛主, 其次則愛人, 其次則愛國, 其次則愛自己, 此愛主愛人愛國, 名雖各異, 其實不外愛自己之一語也. 如此之愛某操持久, 如主愛之永遠不變也. 次言主愛之崇高, 彼名高位高者, 皆有危險, 至德之高則不然, 非惟不危, 反有平安. 今主愛之高果何如也? 自十字架上至于天上也. 當時猶人皆仰視十架, 爭相嘲笑曰今下于十架則吾等信矣. 可十五章三十二節. 主竟絶命于架上而不下. 佛曰天上天下唯我獨尊云, 主之尊不然以克己以成之. 在世時以克己爲主, 在架以克己爲主, 主曰吾在處使汝同處 요한十四章三節. 主之愛其高果何如也? 主以克己在至高之天國, 主不欲獨在天國也, 使萬世之人, 脫罪成聖使至天國也. 非如儒敎之獨善主義也. 卽萬民同樂主義也. 其愛之高果何如也? 願僉位使心之德祐至高尙去利己主義, 勞力于愛他主義, 以學主義之高也. 其次言主愛之深, 其深不可量也. 爲萬世之罪人, 親下地中而嘗地獄之味, 彼得曰彼以神至獄傳道彼前三章十九節.云. 至獄傳道云者何也? 有兩意, 使獄中之人, 使復活昇天以嘗在世之苦, 萬世義人以義受難, 斬刑者,釘殺者,投獅窟者,投火炎中者. 若無此拯救之日, 其寃不可言也. 主一開地獄之門, 使萬世受苦之人, 被榮光之身, 遇主于空中. 又使在獄之人, 知悔罪而知有神之罰, 墮陰府之人, 請曰請更出世, 傳于我兄弟妻子也 눅十六章. 人悔罪之者, 卽在世之事也, 非入獄後之事也. 故主如此深入地獄, 嘗其苦楚傳道于萬世也. 其愛之深不可測量也. 以上所言主愛之其廣其長其高其深, 如是測定後, 吾等之信仰可隨以大矣. 故保羅欲大엡에소人之信仰, 示主之愛如此長廣高深云矣. 主愛選民如火中之棘, 摩西測知, 曳舟至深處得魚甚多, 後彼得從主多馬色城外, 聞主之聲猶赦逼主之人, 保羅測知如是測知而後, 信仰可不撓矣. 僉位知耶蘇, 一祭祀長, 一先知, 一學者, 一醫師, 如此知之則甚不可. 主曰學我, 吾等學之不已, 如鳥數飛也, 使于天國焉.
참고 성서
주께서 세상 사람을 사랑함이 이와 같음 (요한복음 3:16).
왕이 저울에 달리는 것을 봄 (다니엘 5:27).
사람의 헤아림 (마태복음 7:2).
마음을 넓히게 함 (고린도후서 6:13).
내 말은 없어지지 않음 (마태복음 5:18).
사람에게는 남을 헤아려보는 마음이 있습니다. 어떻게 남을 헤아려 볼 것입니까? 봉사나 교제로 표준을 삼기도 하지만, 돈을 사랑하는 자는 금력(金力)을 표준으로 하여 헤아려 보고, 지식을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표준으로 하여 헤아려 보고, 문학을 좋아하는 자는 문학으로 헤아려 보고, 지위를 좋아하는 자는 지위 여하를 표준으로 헤아려 봅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헤아려 보십니다.
일찍이 바빌로니아 왕 벨사살에게 반드시 패망할 것을 알려 주었으나, 그는 회개하지 않아서 마침내 죽임을 당했습니다.(다니엘 6:27). 그러므로 하나님도 사람을 헤아려 사는 나이의 수를 정하고, 나라의 경계도 정하여 주었거늘. 사람이 오히려 거룩함을 업신여기고 자만하여 스스로 패망을 취하는 자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 남을 헤아려 보려는 마음이 있으나, 마땅히 먼저 자신을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혹, 남을 깎아 내린 일이 있었나? 남의 작은 과실을 본 것이 있는가?(마태복음 6:2)를 헤아려보고 남의 과실을 헤아리지 말아야 합니다. 남의 선한 일도 역시 헤아릴 필요가 없지만, 내가 남에게 행한 선행도 마땅히 잊어버리는 것이 옳습니다. 마치 나무가 자기에게 매달려 있는 과일을 잊어버리듯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남의 선한 일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경, 소남>편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주 왕조의 명재상 소백(召伯)이 쉬고 간 ‘감당(甘棠)나무는 그 가지를 치지 않고 베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요한이 이르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했는데, ‘이처럼’이라고 말한 것은 역시 그 한도를 정한 것을 말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
예루살렘의 넓이와 길이를 헤아려(에스겔 2:2), 하나님의 은혜가 무한함을 말했습니다. 바울은 ‘그 사랑의 풍부하고 넉넉함을 헤아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로마서 11:23). 여기에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은 그 무궁함을 이름과 모양으로 말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옛 선지(先知)나 성인은 하나님이 신앙이 크고 적음을 헤아리셨다고 말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도 역시 그러하니, 우리가 하나님의 범위를 아는 데 따라 신앙이 크게도 되고 작게도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의 만분의 일이라도 알려주기 위하여 먼저 길고 넓고 높고 깊은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먼저 주님의 사랑이 광대함에 대하여 말하겠습니다. 주님은 일찍이 공중의 태양으로 비유했습니다. 태양은 선악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다 비추어 줍니다.(마태복음 5: 45). 우리들의 좁은 마음이 이러한 말씀을 들으면 부끄러운 생각이 저절로 생깁니다. 일본의 어떤 사람이 협심증으로 죽었는데, 신문에 실리기를 마음이 좁으면 번민이 발작하고 또 남을 용서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눈을 가린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박힌 가시는 찾아냅니다. 그래서 바울은 초기에 고린도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의 마음을 넓히라’고 하였습니다.(고린도후서 6:13). 이 ‘넓히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고원(高原)을 측정하는 말입니다. 고원 안의 화초는 곱고 예뻐서 멀리 보면 아주 아름다우므로 사람을 유쾌하게 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넓으면 모든 덕을 겸비하여 능히 사랑과 용서와 겸손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모두 넓은 마음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마음이 넓으면 몸이 살찐다[심광체반心廣體胖]’고 하였는데 이 말은 과연 옳습니다. 마음이 화평하면 기력도 펴지므로 신체가 살찌고 윤택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마음 씀이 좁으면 얼굴이나 신체도 따라서 수척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없이 넓고 큽니다.
그 증거는 무엇입니까? 주님은 강도를 위하여 기도하기도 하고, 십자가 아래 있는 사람을 위하여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일찍이 ‘용서를 일곱 번씩 일곱 번을 하라’고 하시며,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 당시 유다 사회의 각 파들은 얼음과 숯불처럼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였습니다. 유대 사회가 망하려는 조짐이 여기에 이미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찍이 그들의 마음이 좁은 것을 통렬하게 논박하셨습니다. 바울도 역시 이 뜻을 가지고 ‘너희들의 마음 씀을 넓고 크게 가지어 주님의 사랑이 광대하심을 헤아려 삼가 몽학선생(蒙學先生)에게 움직임을 당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주님의 사랑이 장구하게 먼 것을 말하겠습니다.
주께서 이르시기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여 그 사랑의 장구함을 말했습니다. 사랑은 영원한 과거에도 있었고, 영원한 미래에도 있어서, 변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기를 ‘천지가 변하여도 내 말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5:18).
우리들의 사랑은 아침저녁으로 마치 날씨가 변하듯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요한복음 2:24). 이는 당시 유대의 서울 예루살렘 사람들의 마음을 살펴보면 가히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님을 위하여 ‘호산나!’라고 외치다가, 후에는 십자가 아래에서 고쳐서 부르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했습니다.어찌 이렇게 쉽게 변할 수 있습니까? 매우 통탄할 일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이렇게 비웃었어도 그 크신 사랑은 보태지고 감해지지 않았습니다. 맑게 하려고 하여도 더 맑아지지 않고, 뒤흔들어도 혼탁해 지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주님의 사랑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물결은 멀고 길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안평중(安平仲: 嬰, 제나라의 재상)은 사람들과 잘 사귀어서, 오랜 세월에도 공경했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과 사귀는 일에서 매우 두려운 것은 서운한 감정을 갖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헐뜯고, 또 지나치게 칭찬하는 것도 옳지 못합니다. 그래서 ‘훌륭한 사람들의 교제는 담담하기가 맹물 같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여러분은 죽는 날까지 주님을 사랑하고, 죽는 날까지 사람을 사랑하십시오. 이러한 사랑의 주의(主義)는 신앙주의(信仰主義)와 다를 게 없습니다.
사랑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주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사람을 사랑하고, 또 그 다음에 나라를 사랑하고, 그 다음은 자기를 사랑해야 합니다. 여기 주님과 사람과 나라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명칭은 비록 다르지만 그 실상은 자기를 사랑하라는 말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사랑을 오래 지니게 되면 주의 사랑은 영원하게 됩니다.
다음은 주님의 사랑이 숭고함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명예가 높고 지위가 높은 것에는 위험이 있습니다. 지극히 훌륭한 덕(德)은 그렇지 아니하여, 위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평안을 줍니다. 주님의 사랑이 고귀한 것은 어떻습니까?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쳐다보며, 조롱하기를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를 믿게 하라’고 하였습니다.(마가복음 15:32).
주님은 마침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시고 절명하셨습니다. 부처는 ‘하늘 위로나 하늘 아래로나 오직 내가 홀로 높도다.’[天上天下唯我獨尊]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존귀함은 그렇지 아니하여, 자기를 이기는 극기(克己)로 이루셨습니다. 세상에 있을 때도 극기로 이기셨고, 십자가에서도 극기로 견디셨습니다. 주님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요한복음 14:3).
주님의 사랑에 그 높이가 어떠합니까? 주님은 가장 높은 하늘에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홀로 천국에 계시려 하지 않고,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죄에서 벗어나 천국에 이르도록 하셨습니다. 주의 사랑은 유교의 독선주의(獨善主義)와 같지 않습니다. 만민동락을 표방하셨습니다. 그 사랑의 고귀함은 어떻습니까? 바라건대 여러분은 마음에 덕을 쌓아 고상한 곳에 이르도록 할 것이며, 이기주의를 버리고 애타주의(愛他主義)를 실현하도록 노력하며, 주의의 고상함을 배우도록 하십시오.
다음으로, 주님 사랑의 깊이에 대해 말씀하겠습니다.
그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친히 지옥으로 내려가 지옥의 맛을 보셨습니다. 베드로가 이르기를 ‘그가 하나님으로써 옥에 가서 전도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베드로전서 3:19). 옥에 가서 전도하였다고 한 것은 무엇입니까? 옥중의 사람으로 하여금 부활하여 승천하도록 하셨습니다.
의인(義人)은 고난을 받고 참형(斬刑)을 당한 자, 못 박혀 죽은 자, 사자 굴에 던져진 자, 불꽃 속에 던져진 사람들을 건져서 구원할 길이 없다면 그 억울함을 헤아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지옥의 문을 여시고, 고통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영광의 몸으로 주님을 하늘에서 만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또 지옥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뉘우치게 벌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음부로 떨어진 사람이 ‘바라건대 세상에 있는 나의 형제와 처자에게 전하여 주시오’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6장).
그런데, 인생이 죄를 회개하는 것은 세상에 있을 때 행하는 일이지, 지옥에서의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옥에 가시어 그 고초를 맛보며 전도를 하셨으니 그 사랑의 깊이를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이상에서 주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간증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의 믿음을 크게 하기 위하여, 주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주님은 선택된 백성을 불속의 가시나무와 같이 사랑하였습니다.
뒤에 바울은 다메섹에서 주님을 핍박한 사람도 용서해 주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일을 헤아려 알고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한 사람의 제사장(祭祀長)이나, 선지(先知), 학자나 의사로 알고 있지만, 이와 같이 아는 것은 매우 잘 못 된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배우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그치지 않고 배우기를 마치 새가 자주 나는 것처럼 하여야 천국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