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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내의 중요한 사진들
손양원 목사님 부친 손종일 장로님 회갑때 찍은 모습이다. 손양원 목사님은 3남 1녀중 장남이다. 손양원 목사, 손문준 목사, 손의원 목사 그리고 당시 미국 하와이에 살고 계시던 여동생이 있었다. 현재의 생가 자리에는 먼 친척뻘 되는 조카가 살고 있다. 생가는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685번지다. 그리고 손양원 목사님이 다녔던 모교회는 칠원교회이다
당시에는 손목사님의 아버지 손종일장로님도 함께 계셨다. 애양원 안에는 환우들만 살 수 있었으므로 목사님 사택은 병원직원들이 사는 건강 마을에 있었다. 그래서 손양원목사 소원이 자신도 병이 들어서 애양원 안에 들어 가서 환우들과 함께 사는 것이었다.
한센병에 걸리면 감각 기능을 잃게 된다. 그래서 발이나 손에 상처가 나도 아픈줄을 모른다. 뜨거운 물에 넣어도 뜨거운줄을 모른다. 손목사님이 부산 감만동(戡蠻洞)에서 목회를 하실 때 한 한센환우가 발에 커다란 상처가 났는데 보니 상처가 아주 깊어 그대로 두면 다리를 절단해야 할 형편이 되었다. 그래서 손양원목사님이 그 환우의 깊은 상처를 입으로 빨아 치료를 해주고 있는 모습이다. 손목사님의 치료로 상처가 나아 건강하게 살다가 죽었다한다.
손양원목사가 일제시대 때와 육이오 사변때 옥중생활 하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목사님은 언제 화장실 옆에 자리를 하셨다. 그 키가 큰 사람들의 발을 가슴에 품고 잠을 잤다. 주먹밥은 하나님께서 자신은 키도 조그마하게 만드시고 체구 적게 만드셔서 조금만 먹어도 된다며 주먹밥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옥중생활할 때 취조받게 고문받는 장면이다.
손양원목사 순교 기념관에는 이곳에 올려져 있는 사진 이외의 많은 사진들과 손양원목사님의 친필 설교 노트, 옥중편지, 성경 등 많은 유품이 전시되었다. 그리고 당시 손양원목사님이 활용하셨던 고서들도 전시되어 있다.
1939년7월14일 부임해서 1950년9월28일 순교 하실 때까지의 애양원교회의 외부모습이다. 현 애양원 교회의 모습은 손 목사님 순교 이후에 종탑 부분과 강단 부분이 증축되었다
손양원목사님 당시 애양원교회의 당회원들이다.지금 생존해 계신분은 한분도 안계신다. 사진에 신풍교회당이라고 나와 있는데 애양원교회는 1909년 4월25일 광주 봉선리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래서 교회이름이 설립당시에는 봉선리 교회였다. 현재의 애양원으로 1925년에 이주한 이후에는 지역의 이름을 따라 신풍교회당이라 불렀다. 1936년에 애양원교회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물론 애양원이라는 이름은 손목사님 부임전에 바꾸어진 이름으로 손양원 목사와는 상관이 없는 이름이다.그 이후 1982년이 성산교회로 바뀌어서 현재 공식적인 명칭은 성산교회이다.
손양원목사는 별명이 삼경목사이다. 손양원목사를 만나면 세 번 놀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손양원목사를 만나면 외모가 멋지게 생겼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그 외모가 초라하고 볼품이 없어서 첫 번째로 놀라고, 다음으로 그 조그마한 체구에 품어져 나오는 소리에 놀라고, 세 번째는 설교말씀에 놀란다고 한다. 그래서 별명이 삼경목사다
여수사건때 동인,동신씨를 죽인 안재선씨를 용서해 아들로 받아들이는 장면이다.
공산군에게 9월13일 붙잡혀 가셔서 여수 경찰서에서 계시다가 9월28일 끌려 나가 여수시 미평 과수원에서 총에 맞아 순교 하셨다. 손목사님은 순교를 예감하시고 여수 경찰서에서 순교 장소까지 계속 공산군에게 전도를 했다. 그러자 공산군들이 시끄럽다고 총 개머리판으로 목사님의 입을 내리쳐서 입이 짖이겨졌다. 그럼에도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전도를 하셨다. 저녁 11시쯤에 순교하셨다. 현재는 여수 입구 새중앙교회 옆에 순교비가 서있다. 관리는 여수 산돌교회에서 하고 있다.
정면에 누워계신 분이 순교하신 손양원목사님이시다. 우측부터 둘째 딸 손동임씨, 그 아래 막내 딸 손동연씨, 정양순 사모님, 사모님이 안고 있는 갓난 아기는 유복자 손동길 목사이고, 그 우측으로 양 아들 안재선씨와 셋째 아들 손동장씨이다. 큰 딸 손동희씨만 빠져있다. 중요한 것은 동인,동신씨를 죽인 안재선이 손목사님의 양아들이 되어서 손목사님의 장례식에서 맏 상주가 되었다. 안재선씨는 1988년에 목암으로 소천되었다.
사진 정면에서 왼쪽이 손동인의 묘이고 오른쪽이 손동신씨의 묘이다.그리고 보이는 비석은 두 아들의 묘 비석이다. 그 비석뒤에 손양원목사님이 안장되었다. 1948년 10월 21일 여순사건으로 두 아들이 순교하자 손목사님이 친히 두 아들의 묘를 쓰시고 현재 안장된 자리에서서 내가 죽거든 이 자리에 나를 묻으라고 했다. 그래서 순교하신 손목사님을 순교지에서 모셔와서 목사님께서 말씀한 자리에 안장을 하게 되었다. 손목사님이 안장 당시 사모님이 내가 죽거든 목사님과 합장을 해달라고 해서 1977년 11월 26일 사모님이 부산청십자 병원에서 돌아가셨는데 모셔와 합장을 했다. 그래서 현재 애양원에 있는 동도섬의 무덤들은 두아들과 합장된 손양원목사님의 묘가 있다.
여수 애양원과 손양원목사 순교 기념관 2004년5월26일 문화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발표한 손양원 목사 유적지 테마파크 개발구상이 가시화 되고 있다. 6월23일에는 성산교회(애양원)에서 여수시장을 비롯한 다수 관계자들이 모여 회의를 갖고 구체적인 유적지 개발계획을 발표한다. 총공사비 500여억원규모로 여수시는 2005년3월까지 설계와 발주를 마치고 현재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이 위치한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일원에서 공사를 시행한다. 손양원목사 유적 테마공원 5만m2, 테마전시관 연면적 6천m2 각3동을 짓고, 휴양 문화시설로는 기념 광장1만m2등 상업시설, 편의시설,등이 들어선다. 이 사업에 대한 공사비로 민자 138억원을 포함해 486억원이며 2007년까지 모두 마무리할계흭이다 여수 애양원
1909년4월, 한국에 처음으로 나병원이 광주에 세워졌다. 목포에서 의료선교활동을 하던 포싸이드 의사는 광주기독병원에서 일하는 윌슨으로부터 급한 전보 한 장을 받았다. 사연인즉, 오웬선교사가 병에 걸려 위독하니 광주로 빨리 올라오라는 내용이었다. 포싸이드 의사는 전보를 받은 즉시 60 마일이나 되는 길을 조랑말을 타고 출발했다. 때는 1909년봄, 목포에서 광주로 가는 산등성이에는 봄꽃들이 한창이었다. 광주가 13마일 남아 있는 곳에서 예기치 않는 일이 벌어졌다. 길가에 사람이 쓰러져 있지 않는가!. 포싸이트의사는 위독한 동료선교사의 병을 보러 가는 바쁜 몸이지만 그냥 갈 수 가 없었다. 그는 말에서 내려 길가에 쓰러진 사람을 보았다. 그는 남루한 옷을 입고 있었으며. 옷에는 피와 고름으로 얼룩져있었다. 자세히 보니 한센병 환자였다. 포싸이트의사는 그환자를 말에 태우고 자기는 마부가 되어 하루 밤을 노상에서 보내고 그 이튼날 광주에 도착했다. 윌슨이 원장으로 있는 기독병원에 데리고 갔으나 그런 사람을 치료해 줄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는 다시 여자 환자를 말에 태우고 병원을 나왔으나 갈곳이 없었었다. 그는 주변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며 돌아다니다 벽돌을 굽던 가마터에 그 환자의 거처를 마련하여 치료 해주고 복음을 전해준 것이 애양원의 시작이다. 1991년11월1일에는 조선 총독부로부터 병원인가를 받았으며 1923년에는 일 재의 탄압으로 페쇄된때도 있었다. 1926년11월9일에는 조선총독부의 퇴거명령으로 현재 있는 위치로 이주하게 되었다. 손양원목사
1939년 7월 14일에 여수 애양원 교회로 부임하였다. 손 목사는 항일정신과 신사참배 반대는 신학교 시절부터 남달랐다.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부산지방을 돌면서 신사 참배 반대를 외쳤다. 이로 인하여 경남 노회에서 순회 강도사 사역을 못하게 하기도 했다. 손 목사는 애양원 교회에 부임해서도 설교 때마다 신사 참배반대를 외쳤으며 손 목사가 가는 곳곳마다 신사 참배에 대한 부당성이 카랑카랑한 검사의 논고와도 같이 지적되었다. 1940년 9월 25일, 손 목사는 수요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막 들어오자 기다렸던 여수 경찰서에서 나온 두형사에 의해 연행되어, 재판과정에서 1년 6개월 형을 받았으나 구속 기간까지 하여 거의 3년의 세월이 흘렀갔다 그 때 손 목사에게 적용된 죄는 신사 참배 거부와 백성들을 선동했다는 것이었다. 1943년 5월 17일, 출옥할 날이 가까이 왔을 때 담당 검사는 손 목사를 불러 놓고 사상의 전환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담당 검사는 손 목사에게 "덴꼬(轉向)" 해야 나간다는 위협을 하였다. 그러나 손 목사는 그 검사에게 전혀 굴하지 않고 "당신은 덴꼬가 문제이지만 나에게는 신꼬(信仰)가 문제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8·15해방과 함께 감옥에서 나오자 곧장 이 사랑의 보금 자리인 애양원 교회를 찾았고 그리하여 교우들의 신앙은 더욱 불타오르게 되었다. 5년여만의 서로 만났던 벅찬 감회도 잠간, 1948년 10월 25일, 여순 사건으로 두 아들이 잃게되는 비운을 맞게되었다. 여수, 순천 사건은 빨리 진압되어 정세는 바뀌었다. 동인, 동신 형제를 죽인 자들 중의 하나인 '안재선'이라는 학생도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손 목사는 계엄 사령관에게 찾아가서 "나의 죽은 아들들은 결코 자기들 때문에 친구가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 애들은 친구의 죄 때문에 이미 죽었습니다. 만일 이 학생을 죽인다면 그것은 동인, 동신 형제의 죽음을 값없이 만드는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그 학생의 석방을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간청은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손 목사는 그 학생을 손재선이라 하여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손 목사는 재선이를 부산의 고려 성경 고등 학교에 수학하도록 하여 전도사로 키워내는 놀라운 사랑의 역사를 보여 주었다. 양아들로 삼았던 안재선 씨는 성경 학교 졸업 후 잠시 부산의 어느 교회 전도사로 있다가 말년에는 제주도에서 어물 도매 사업을 하다 1979년 12월 서울에서 별세했다. 손 목사님은 실로 주님이 주신 계명을 말씀 그대로 순종하고 복종하여 실천한 20세기 사랑의 사도요,성자였던 것이다. 1950년 뜻하지 않는 6·25동란이 이 땅 위에 발발했다 이 때 애양원 교회의 교인들은 손 목사를 피난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했으나 허락을 하지 않자 결국은 교회의 제직들과 교역자들 모두 함께 떠나자고 간청을 하였다. 우선 몸부터 피하고 보자는 제직들의 간청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손 목사는 함께 송별 예배를 드리고 배에 올라가 마지막 찬송을 부른 후 갑자기 혼자만 배에서 가방을 들고 뛰어 내려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손 목사는 마침내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 되어 1950년 9월 28일 저녁11시 여수 근교 미평에서 총살당하여 순교의 영광을 간직하였다. 당시 손 목사의 나이는 48세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양들을 보호하고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총의 개머리 판으로 입을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 되었으며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두 손 모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시다가 공산군의 총에 맞아 순교를 하셨다. 병원 집계에 따르면 애양병원과 역사관 그리고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이 있는 이곳에는 매월 만오천에서 2만명의 관광객이 찾아들고 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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