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쉬케 인물관계도
한동안 울다 어느 정도 마음의 고요를 되찾은 프쉬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궁전은 온데간데 없었다. 프쉬케 자신은 어느새 언니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들판에 와 있었다. 도시로 들어가 언니들을 만난 프쉬케는, 자기가 겪은 일의 자초지종을 소상하게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두 언니는 겉으로는 같이 슬퍼해 주는 척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은근히 기뻐하는 것은 물론, 둘 다 거의 동시에 〈이번에는 저 자가 우리 둘 중 하나를 고를 것이다〉 하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가슴에 묻고 있는 두 언니는 서로 검은 뱃속을 한 자락도 드러내지 않고 이튿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시집가는 날 프쉬케가 올라갔던 문제의 산으로 올라갔다. 꼭대기에 이른 두 언니는 제퓌로스의 이름을 부르고 부디 주인 있는 곳까지 실어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는 바위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나 제퓌로스가 실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 둘은 그대로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한편 프쉬케는 침식을 잊은 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방방곡곡을 헤매며 지아비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그러던 어느 날, 높은 산 위에 훌륭한 신전이 있는 걸 보고는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내 지아비, 내 주인은 저곳에 계실지도 모르겠구나.」
프쉬케는 산꼭대기로 오르기 시작했다.
신전으로 들어간 프쉬케의 눈에 밀낟가리가 보였다. 낟가리에는 이삭이 단으로 묶여 있는 것도 있고 그대로 갖다 쌓은 것도 있었다. 보리 이삭도 섞여 있었다. 주위에는 낫, 갈퀴 같은 연장이 흩어져 있었다. 무더위에 몹시 지친 농부들이 아무렇게나 팽개쳐 놓은 것 같았다.
믿음이 깊은 프쉬케는, 모든 것을 종류별로 고르고 나누어 제각기 있어야 할 자리, 마땅한 상태로 깔끔하게 정돈했다. 프쉬케는, 어떤 신이든 소홀하게 대해서는 안 되며, 나름의 믿음에서 우러난 행위로 덕행을 쌓으면 모든 신으로부터 자비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 신전은 바로 데메테르 여신의 신전이었다.
데메테르 여신은, 성심성의로 일하고 있는 프쉬케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프쉬케여, 참으로 우리가 가엾게 여기는 여인이여, 비록 나에게는 아프로디테의 저주로부터 그대를 지킬 힘은 없으나, 여신의 분노를 삭이는 방법은 일러줄 수가 있다. 이제부터 여신 계신 곳으로 가서 여신의 손에 네 몸을 붙여라. 그리고는 오직 겸손과 순종으로 여왕께 용서를 빌어라. 그러면 여신께서도 노여움을 거두고 사라진 네 지아비를 돌려줄 게다.」
프쉬케는 데메테르의 말을 좇아 아프로디테 신전으로 향했다. 프쉬케는 길을 가면서도 마음을 다잡아 먹으려고 애썼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할 것인지, 어떻게 하면 여신이 노여움을 거둘 것인지 그것도 곰곰이 궁리했다. 프쉬케는 아무래도 결과에는 자신이 없어 저 나름대로 걱정하며 아프로디테 신전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아프로디테는 노기 띤 얼굴로 프쉬케를 대했다. 여신의 말은 이러했다.
「세상에 너같이 불충실하고 믿음이 작은 종이 또 어디 있겠느냐? 이제 네가 한갓 주인을 섬기는 몸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알았느냐? 네가, 몸져 누운 네 서방을 찾으러 왔느냐? 네 서방은 사랑을 쏟아붓던 계집으로 인해 상처를 입고 몸져누워 있다. 참으로 밉살스럽고 비위가 틀리는 것아! 이제 네가 네 서방의 용서를 받는 길은 오직 힘써 일하고 부지런히 일하는 길뿐이다. 내 이제, 살림살이하는 계집으로서 자격이 있는지 너를 시험해 보리라.」
아프로디테는 프쉬케를 신전의 곡물 창고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비둘기 모이가 될 밀, 보리, 기장, 살갈퀴, 콩, 볼록콩이 뒤섞인 채 수북이 쌓여 있었다. 여신이 말했다.
「여기 있는 곡식을 종류별로 고르되, 한 알도 남김없이 골라 무더기로 쌓아 놓아라. 그것도 저녁 때가 되기 전에 끝마쳐야 한다.」
여신은 이 말끝에 그 자리를 떠났고, 프쉬케는 그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프쉬케는 그 엄청난 일감에 기가 꺾여 곡식 무더기에는 손도 대지 못하고 망연자실 앉아 있었다.
프쉬케가 절망에 빠져 있는 걸 본 에로스는, 들판의 임자인 개미를 쑤석거려 프쉬케를 어여삐 여기게 했다. 개미탑의 대장은 다리가 여섯인 신하들을 동원하여 곡식 무더기로 진군하게 하니 개미 대군은 전력을 다해 곡식을 종류별로 골라 무더기로 쌓았다. 일이 끝나자 개미는 삽시간에 그곳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아프로디테는 저녁 무렵에 머리에는 장미 화환을 쓰고 입술로는 향긋한 술냄새를 풍기며 신들의 잔치에서 돌아왔다. 그리고는 프쉬케에게 시킨 일이 시킨 대로 되어 있는 걸 보고도 호령했다.
「못된 계집이로구나. 이게 네가 한 일이냐? 네 꼬임에 넘어가 너와 함께 팔자가 꼬인 내 자식이 한 일이지.」
여신은 저녁 식사로 검은 빵 한 조각을 던져 주고는 나가 버렸다.
다음날 아침 아프로디테는 시종을 시켜 프쉬케를 부르고는 이렇게 말했다.
「저 숲을 보아라, 물가로 길게 뻗어 있는 숲 말이다. 거기에 가면 양떼가 양치기 없이 풀을 뜯고 있을 게야. 가서 보면 알겠지만 털은 모두 금빛이다. 어서 가서 한 마리도 남기지 말고 저 값비싼 양털 견본을 모아 가지고 오너라.」
프쉬케는 어떻게든 아프로디테의 명령을 수행하리라고 결심하고 강가로 나갔다. 그러나 강의 신이 갈대들을 부추겨 이구동성으로 프쉬케에게 속삭이게 했다. 갈대들은 이렇게 속삭였다.
「아가씨, 모진 시험에 걸리신 아가씨. 이 위험한 강을 건너려고도 하지 마시고 저쪽 강둑에서 노는 무서운 양떼 속으로 들어가려고도 하지 마세요. 양떼들은 이 태양의 기운을 받고, 그 날카로운 뿔과 사나운 이빨로 기어이 인간을 박멸하겠다고 설친답니다. 인간에 대한 잔혹한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한낮이 되면 태양이 양떼를 그늘로 보내고, 강의 요정이 양떼를 쉬게 하니 그 때 건너가, 덤불과 둥치에 걸린 황금빛 양털을 거두도록 하세요.」
강의 신은 친절하게도 프쉬케에게 그 어려운 임무를 수행할 방도를 일러준 것이었다. 이 강의 신이 일러주는 대로 한 프쉬케는 오래지 않아 황금빛 양털을 한아름 안고 아프로디테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프쉬케는 무정한 여신 아프로디테로부터 칭찬 대신 이런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네가 이번에도 이 일을 해내기는 했다만 그게 네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 어찌 모르랴! 네가 아직 어느 한 귀퉁이든 쓸모 있는 계집으로 보이는 게 내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내 너에게 다른 일을 또 하나 맡기겠다. 여기 상자가 있으니 이걸 가지고 저승 세계로 내려가, 페르세포네에게 전하고 이렇게 일러라.
〈제 주인이신 아프로디테님께서 왕비마마의 화장품을 조금 나누어 주셨으면 하더이다. 몸져누운 아드님을 간호하느라 조금 수척해지셨다고 하더이다.〉
심부름을 틀림없이 하되, 내가 오늘밤에 그 화장품으로 화장을 하고서야 신들의 연회에 나갈 수 있을 것인즉 서둘러 돌아오도록 해라.」
프쉬케는 그제서야 저 죽을 때가 온 것을 알았다. 제 발로 에레보스로 내려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했기 때문이었다. 피할 수 없는 일일 바에, 시간을 지체하는 것은 서두르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여긴 프쉬케는 천 길 낭떠러지 위에 있는 탑으로 올라가 거기에서 뛰어내려 명계로 가는 지름길을 택하려 했다. 그런데 탑 속에서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불쌍한 아가씨, 무슨 사연이 있어서 그렇게 무서운 방법으로 목숨을 끊으려 하시는가? 여러 번 신들의 가호를 받은 그대가 마지막 시련에는 힘없이 무너지는 걸 보니 필시 겁을 먹은 모양이구나.」
목소리의 임자는 이어서 하데스의 나라로 통하는 동굴, 도중에서 만나는 위험을 피하는 방법, 머리가 셋 달린 개 케르베로스 옆을 지나는 비법, 암흑의 강 뱃사공 카론을 설득하는 비결, 그리고 간 길을 되짚어오는 길 등을 소상하게 일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