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범 교수의 이야기 가문사(家門史)(11)- 묵재공의 생애와 일화4
3월 29일 한양에 입성한 이괄은 선조의 아들인 흥안군(興安君) 이제(李瑅)를 왕으로 추대했다. 하지만 그날 안령(鞍嶺)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이 이끄는 토벌군에 크게 패하여 한 밤중에 남은 병사를 이끌고 광희문(光熙門)을 통해 경기도 이천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그리고 경안역(慶安驛) 부근에서 한명련과 함께 부하 장수에게 살해되었다.
이괄의 난으로 인조께서 공주(公州)로 몽진(蒙塵)할 때 묵재공께서 호종(扈從)하였다. 인조는 공주에 내려가서 공산성(公山城)에 머물렀고 공산성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위치했던 쌍수(雙樹: 두 그루 나무)에 기대어 난이 평정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공산성에서 인조를 모시다.
공산성은 원래 우리(同福吳氏) 집안의 어른들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공산성은 백제시대 축성된 산성으로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초기까지도 토성이었는데 조선중기에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공산성을 석성으로 개축한 분이 당시 충청도 관찰사로 있었던 류근(柳根)이라는 분이다. 그런데 류근은 만취공 오억령 선생과는 사돈 관계에 있었다. 즉 만취공의 셋째 아들인 인주(麟洲)공 오전(吳전)이 이 분의 사위인 것이다.
그런데 인주공은 아들이 없어서 묵재공의 아들인 오단(吳端)선생의 아들인 오정위(吳挺緯)를 후사로 삼았다. 그런고로 공산성을 석성으로 개축한 류근 선생은 동사(東沙)공 오정위 선생의 외조(양가로)가 되시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동사공이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 그때까지 많이 허물어진 상태로 남아 있던 공산성을 전면 개축하고 공북루(拱北樓)도 크게 수리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하였다.
공산성이 이렇게 우리 집안 어른들과 관계가 깊은 산성인데 거기에 인조반정 당시 인조대왕께서 피신하실 때 복천군(福川君) 오백령 선생께서 호종하셨으니 이래 저래 공산성은 우리 집안의 역사와 관계가 깊은 사적지라 아니할 수 없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이괄의 난은 무사히 수습되었고 복천군도 임금을 모시고 다시 한양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괄의 난이 수습된 뒤 선생은 왕을 공주까지 성공적으로 호종한 공로로 한 계급 더 승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