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金官(今 金海)
金官(今 金海)
金官은 이제 金海郡이니 古金官国이다. 或은 加羅라 하고 或은 伽倻라도 하여 或은 駕洛이라고도 하였다.
金海의 古称이다. 漢光武 十八年 三月에 駕洛의 九千이 모여 水浜에 놀고 잔치할 때 糰旨峯에 異気가 있으니 나아가 보니 紫糰에 金盒을 매어 내렸다.
盒을 여니 六個의 金色卵이 있어 조심하여 두었더니 翌日에 六卵이 剖하여 六童子가 되었다. 날마다 岐嶷하여 十余日에 身長이 九尺이었다. 무리가 一人을 奉하여 王을 삼으니 곳 首露王이다.
金盒에서 낳다하여 姓을 金이라 하고 国号를 伽倻라 하니 이에 新羅 儒理王 十八年이었다. 남은 五人은 나누어 五伽倻主가 되니 高霊은 大伽倻이고, 固城은 小伽倻, 星州는 碧珍伽倻이고, 咸安은 阿那伽倻이고 咸昌은 古寧伽倻이었다.
繩旨峯은 金海北 三里에 在하니 首露王의 宮址가 宛然하여 首露王 墓는 金海西에 있고 그 곁에 廬가 있으며 繩旨東 王妃墓가 있으니 府人이 祭하였다.
芝峯類說을 拠하건데 壬乱에 倭人이 首露王 墓를 파니 頭骨이 크기가 鋼盆과 같고 柩旁에 二女가 有하니 顏色히 如生하다가 壙外에 두니 곧 사라졌다.
文獻備考에 駕洛은 或 伽落이라도 하여 또伽倻라도 称하니 後에 金官이라 고쳤다하였다.
訪古伽椰咽竹枝
婆婆塔影虎溪湄
回看落日沈西海
正似紅旗入浦時
옛 伽倻를 訪함에 竹枝가 咽하였으니
婆婆塔의 影이 虎溪의 湄이러라.
돌이켜 보니 落日이 西海에 沈하였으니
正히 紅旗가 浦에 入할 때와 같도다.
訪古伽倻는 鄭圃隱 先生의 金海 燕子楼詩에 말하되 訪古伽倻草色春興亡幾度海為塵 그 一句를 模倣함이다.
(註、竹枝는 歌詞의일흠이오 咽은 목 메이다 라는 말이니 竹枝의 노래가 목이 메이다 라는 말은 슬프다란 말이다)
婆娑塔은 虎溪上에 在하니 무릇 五層이다. 그 色이 赤班하여 彫鏤가 甚奇하니 伝説에 許後가 西域으로부터 来할 때 船中에 塔을 싣고서 風濤를 진정하였다 하니라. 虎溪는 金海郡城中에 在하니 源이 盆山에 出하여 江倉浦에 入하였다.
紅旗入浦는 駕洛国記에 東漢建武 二十四年에 許皇後가 阿踰陀国으로부터 海를 渡하여 오니 바라보니 緋帆과 茜旗가 海의 西南隅로부터 北으로 指하니
首露王이 宮西에서 幔殿을 設하고 기다리니 王後가 배를 매고 陸에 登하여 高橋에 올라 쉬며 입었던 綾袴를 벗어 山霊에 質하고 이르매 王이 맞아 幔殿에 들어가
二日이 지낸 後에 輦을 같이하고 돌아와 세워 后를 삼으니 国人이 後의 輦 맨 곳을 称하여 曰 主浦라 하고 綾袴벗은 곳을 称하여 曰 綾峴이라 하고 茜旗가 海에 入한 곳을 称하여 曰 旗出辺이라 하다.
輿地勝覽에 말하되 許皇后는 南天竺国王의 女니 姓은 許이고 名은 黃玉이 号는 普州 太后라하다.
- 한글
김해는 예전에는 고금관국이었다. 혹자는 가라라 하고 혹자는 가야라고도 하며 혹자는 가락이라고도 했다.
김해의 古稱이다. 한광무제 18년 3월에 가락의 9천 명이 모여 수빔에서 놀고 잔치할 때 능지봉에서 이상한 기운이 있어 가까이 가보니 자두 열매에 금상자를 매달아 내렸다.
상자를 열어보니 6개의 금색 알이 있어 조심스레 두었더니 이튿날 6알이 갈라져 6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날마다 자라 10여일 만에 키가 9자가 되었다. 무리들이 한 명을 받들어 왕으로 삼으니 바로 수로왕이다.
금상자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성을 김으로 하고 국호를 가야라 했으니 이때가 신라 유리왕 18년이었다. 남은 5명은 나뉘어 5가야주가 되었는데, 고령은 대가야, 고성은 소가야, 성주는 벽진가야, 함안은 아라가야, 함창은 구령가야였다.
능지봉은 김해 북쪽 3리에 있으며 수로왕 궁터 모습이 그대로 있다. 수로왕 무덤은 김해 서쪽에 있고 그 곁에 집터가 있으며 능지 동쪽에 왕비 무덤이 있어 부인들이 제사를 지냈다.
지봉유설을 근거로 하건데 임란 때 왜인이 수로왕 무덤을 파니 해골 크기가 철솥과 같았고 관곁에 두 여인이 있어 얼굴빛이 살아있었으나 무덤 밖에 내놓자 곧 사라졌다.
문헌비고에서는 가락을 가락 혹은 가야라고도 칭하다가 후에 김관으로 고쳤다고 했다.
옛 가야를 찾아가니 대나무가지에 노랫소리가 목이 메였으니
보모탑 그림자가 호계 물에 비치는구나.
돌아보니 해는 서해에 떨어졌으니
바로 붉은 깃발이 포구로 들어올 때와 같구나.
방문구가야는 정포은 선생의 연자루시에서 "구가야를 찾아가니 풀빛도 봄과 함께 사라지고 몇 번이나 바다가 모래로 변했는가"라는 구절을 모방한 것이다.
(주: 대나무가지는 노래소리를, 목 메임은 슬픔을 뜻한다)
보모탑은 호계상에 있으며 5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색은 붉은 편이고 조각이 대단히 기이하다. 전설에 의하면 허후가 서역에서 올 때 배에 탑을 실어 풍파를 가라앉혔다고 한다. 호계는 김해 읍성 중에 있으며 원천은 봉산에서 나와 강창포로 들어간다.
붉은 깃발이 포구로 들어온 것은 가락국기에 기록되어 있다. 동한 건무 24년에 허황후가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오니 바라보니 붉은 돛과 새빨간 깃발이 바다 남서쪽 모퉁이에서 북쪽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수로왕이 궁 서쪽에서 휘장을 치고 기다리니 왕후가 배를 대고 육지에 오르며 다리에 올라 쉬면서 입고 있던 비단치마를 벗어 산신령에게 바치니, 왕이 맞이하여 휘장 안으로 들어가셨다.
이틀 후 가마를 타고 돌아와 왕후를 세우니 국인들이 왕후 가마를 멘 곳을 가리켜 주포라 했고, 치마를 벗은 곳을 비단재라 했으며 붉은 깃발이 바다에 들어간 곳을 기출변이라 불렀다.
여지승람에 의하면 허황후는 남천竺국왕의 딸로 성은 허이고 이름은 황옥, 호는 보주태후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