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외우(外憂) 중첩(重疊)
지라 하남 유복룡 등이 한림아(韓林兒)라는 자를 세워 왕을 삼고 송제(宋帝)라 칭하고 머리에 붉은 수건을 쓴 고로 홍건적(紅巾賊)이라 이름 하다. 성언하기를 중국사람이 오래 호적(胡賊)에게 압박을 당하였으니 이것을 회복하자 하고 모든 장영을 거느리고 무리를 모으니 원실에서는 토벌할 능력이 없고 또 무리 삼천여명이 압록강을 건너 변경을 침노하거늘 고려에서는 경천흥(慶千興)으로 서북면 원수를 삼고 안우(安祐)로 부원수를 삼고 홍건적을 막을 새 적이 점점 침입하여 절령(岊嶺)을 넘어 개경까지 들어오거늘 왕이 부득이 복주(福州)로 피하였더니 다행이 총병관 정세운(鄭世雲)과 안우 등이 합력 토벌하여 크게 파하여 태반이나 죽고 남은 적은 압록강을 건너다가 원군에게 부셔지고 대란이 평정되었다.
동 12년 윤삼월에 왕이 복주로부터 돌아와서 흥왕사 별궁에 거하더니 몽고 이름으로 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라는 사람의 본성명은 김용(金鏞)이니 무리 50여명이 행궁을 외어 싸고 우정승 홍언박(洪彦博)과 상장군 김장수(金長壽)와 환자 안도적(安都赤) 등을 죽이고 왕궁을 범하거늘 밀직사 최영(崔瑩)이 이 급보를 듣고 급히 왕경에 와서 행궁의 적을 쳐서 물리치고 김용은 원지로 귀양 보내다.
김용이 자기가 고려왕이 되려고 몽고와 내응하여 가지고 이변을 일으켰으나 조정에서 최영으로 이를 토벌하였으니 이는 원의 쇠퇴하는 여파가 고려에까지 미침이라. 왕이 처음 뜻을 변하여 가지고 궁중에 풍기가 문란하여 자기 몸까지 비명에 죽게 되었으니 공민의 우매함은 가석한 일이다.
그뿐 아니라 홍건적 난후에 여진의 근심도 있었고 그 보다 더 큰 근심은 남방 연해주에 가끔 침입하는 왜구이다. 그 근심이 차차 북으로 번져 강화 교동 승천부까지 침입하여 왕궁 지척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지나는 곳마다 재물을 노략할 뿐 아니라 부녀와 유아를 죽이고 전라도와 양광도 연변 각 고을에 침략을 받아 각 고을이 텅 비게 되었다.
이때 고려에서는 아무 준비가 없고 군비가 허술하여 왜구의 닥치는 곳에 패하지 않는 곳이 없고 오직 최영과 이성계군이 싸우는 곳에만 반드시 이기었다. 그러나 이 여러 가지 외우로 인하여 국력이 ㅍ폐하고 조정이 탁란하여 수습이 어려운 때 또 조정에 당파가 대립되어 국세의 위급은 각각으로 심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