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의 ‘참(站)’8<쿼바디스! (지금 이 나라는) 어디로 가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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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의 ‘참(站)’8
<쿼바디스! (지금 이 나라는) 어디로 가나이까?>
대낮에, 국회의원 두 명이 횟감 생선이 들어 있는 수조의 물을 맨손으로 떠 마셨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에 대한 국민 불안감을 해소한다는 이유로 노량진 수산시장을 찾아서 한 행태란다. 회는 먹을지언정 횟감 생선이 들어 있는 수조 물을 떠 마시는 사람은 없다. 그것도 한 나라의 국회의원이기에 엽기적이요, 괴기스럽기까지 한 게, 마치 여름철 납량특집을 보는 듯하다. 철모르는 어린 아이조차도 하지 않는 괴이한 행각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두고 문제없다고 한다. 하지만 과학은 불확실성을 다루는 학문이기에 늘 그 한계성을 내재한다. 더욱이 오염수 방류는 복잡한 자연 생태계까지 얽혀있다. 인간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해양 생물들의 삶터이기에 그렇다. 그 누구도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영향을 예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정부는 이를 정치적으로 접근하고 당연한 우려를 괴담으로 치부한다. 여당 의원들은 수조의 물까지 마시고 여봐란 듯이 횟집을 떼 지어 찾아 사진 찍는 곤댓짓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일부 국민들은 ‘옳다’와 ‘그르다’로 나뉘어 삿대질을 한다. ‘옳다’와 ‘그르다’ 구분은 진실과 거짓이 아니요, 내가 지지하는 편이면 무조건 ‘옳다’이고 아니면 무조건 ‘그르다’이다. 이분법적 사고가 마치 아(我,나)와 피(彼, 너)의 전쟁터 같다. 더 큰 문제는 언론이나 대다수 국민들이 유령처럼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섬뜩한 현상이다.
생각해 본다. 어떻게 국민을 대변한다는 여당 국회의원이, 기자들도 있고 사람들이 보는 데서 저런 행태를 할까?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가 우리에게 해로운 지 아닌지를 어떻게 안다고 저런 수조 물을 떠먹는 퍼포먼스를 보일까? 국회의원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모든 길은 용산으로 통한다’를 실천하려 함인가? 분명한 것은 국민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의기관으로서 나선 이의 선한 행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다. 국민들 시선은 안중에도 없는 저러한 저열한 행태는 이 나라의 누군가에게 아부하려는 행동일 뿐이다.
마치 폴란드 소설가 시엔키에비치(Sienkiewicz,1846~1916)의 역사소설 『Quo vadis:쿼바디스』를 보는 듯하다. 이 소설은 네로 황제와 그의 신하들 시대를 그린다. 네로가 시를 읊자 다른 신하들은 뛰어나다 하지만 페트로니우스는 ‘끔찍한 시’라며 이렇게 말한다. “폐하가 지은 시를 만약 동서고금의 유명 시인들이 지었다면 세기의 작품이라 칭송했겠지요. 그러나 폐하의 실력이 그들보다 월등하기에 폐하께서 자신의 재능에 걸맞지 않는 끔찍한 시를 일부러 지은 것을 압니다.” 네로가 처음부터 폭군은 아니었다. 저러한 저열한 행태들이 네로를 폭군으로 만들었다. 폭군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저렇게 아첨으로 만들어진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적극 환영하는 대통령의 견해에 화답하는 국힘당 의원들의 망동과 이를 부각시키는 어용 언론, 여기에 일부 국민들조차 확증적 편향으로 내뱉는 발언들이 도를 넘는다. 이런 외에도 차관급에 극우 유튜버를 내정하고 김건희 일가 땅 특혜를 제기하자 장관이 국책사업을 하루아침에 백지화하겠다고 선언했다. 검찰 특수활동비 292억원 중 절반 가까운 136억원(46.6%)을 검찰총장이 임의대로 썼다. 이렇게 나라가, 법치가, 민주주의가 유린돼도 이를 꾸짖는 지식인도 이를 심층 보도하는 언론도 없다. 국민들은 분노할 일에도 분노하지 않는다.
후일 우리 역사에 이 시기를 어떻게 기록할까? 쿼바디스! 지금 이 나라는 어디로 가나이까?(『쿼바디스』는 정의와 진리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줄거리로 박해받는 폴란드 민족에게 희망을 주었다. 시엔키에비치는 이 작품으로 190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