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재고개 한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소동(3-2)
다행이도 별다른 보조기구 없이 팔걸이만 하고 있었고 왼팔과 두 다리는 멀쩡했으며, 팔걸이를 한 채로 외부 충격이 없으면 통증도 없었으므로 잡혀 있는 일정을 일단 소화해 보기로 하였다. 사고 후 첫 일정이 인사동 한국미술관에서 있는 갈물서회 연례 전시회였다.
태재고개에서 조계사 앞 가는 직행버스를 이용하였으므로 이동에도 무리 없고 전시장 관람 회원들과 식사회동 등 무난하다. 다음날 있은 낙성대 강감찬 축제도 부담 없이 참석하였다.
오히려 팔걸이 하고 있는 모습에 관심을 갖는 지인들의 반응이 부담스러웠을 뿐 요양 핑계로 집에서 쉬고 있는 것 보다는 마음도 홀가분하고 건강회복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이후 이어지는 행사에 부지런히 참여하게 되었는데, 버스에 앉아 있거나 조용한 산책길, 많은 사람이 모인 연회장 등에서는 눈에 띄지 않도록 팔걸이를 가방에 넣어두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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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에는 의대생 정원문제로 의료대란이 일어나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그 와중에 팔을 다쳤으니 정상적인 의료 도움이 가능할 것인가 걱정이 앞섰다. 사고 당시 초진을 한 의사가 본인이 마무리를 짓지 못해 다른 병원을 추천하면서 한 말씀에도 큰 병원은 수술 일정 잡기가 어려우니 중소병원을 추천하노라 하였다. 이어서 찾은 제생병원 응급실에서도 외래진료 일정을 잡지 못해 3일치 약을 처방하면서 다음날 무작정 외래진료 신청하여 순서를 기다려야한다고 했다. 세 번째 찾은 분당서울대병원 응급실에서는 외래진료 일정을 10월31일로 잡았다. 10월 4일에 응급실에 갔는데 27일 이후에야 정상적인 진료를 받도록 일정이 잡힌 것이다.
그래서 사고 다음날인 토요일 오전에 초진 의사가 추천한 바른세상 병원을 찾아 갔는데, 다행히도 거기서는 대기하지 않고 바로바로 절차를 진행할 수 있었다. 엑스레이 촬영, 의사 진찰, MRI 촬영, 의사 2차 진찰 및 처방, 투약 및 전기치료, 별도로 팔꿈치 전문의 진료, 팔꿈치 물리치료 추가 등으로 1주에 3일은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니게 되었다.
치료 효과는 바로 느낄 수 없었으나, 1주 지나고 2주 지남에 따라 팔의 움직임이 점차 부드러워지고 손바닥 무감각 증세도 범위가 좁혀져 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사고 당일 분당서울대 병원에서 외래 진찰 일정으로 잡은 날이 다가왔다. 바른 세상 병원에서 MRI 영상을 CD에 다운받아 10월31일 분당 서울대병원을 찾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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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팔걸이를 하고 있었는데 의사의 첫마디가 이제 3주가 지났으니 팔걸이는 안하셔도 된다고 한다. 엑스레이 MRI 영상을 자세히 살피고 증상을 이것저것 물어 보더니 현재의 상태는 염려할 상황이 아니고 앞으로 재활치료를 잘 하면 별다른 일 없겠다고 한다. 그리고 환자 스스로 집에서 할 수 있는 재활운동을 정리한 소책자를 건네준다.
그간에 겪어 왔던 여느 병원 의사 접견 상황과 비교할 때 자상하고 구체적인 설명이 신뢰감이 가고 마음에 와 닿는다. 지금까지 재활치료를 잘 받고 있고 증세도 많이 호전되었지만 혹시나 손바닥 감각이 회복되지 않으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떠나질 않고 있었는데 이제야 안도감이 든다. 이 당시도 오른손의 쥐는 힘이 매우 약하고 손바닥의 무감각 상태는 여전하나 재활 전기 치료를 받음에 따라 차츰 되돌아오고 있다는 느낌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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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3회 전기 자극 물리치료를 받으면서, 한의원에서 침을 맞으면 도움이 되려나? 침을 잘 놓는 한의사를 만나야 할 텐데. 6촌 동생이 재활병원에서 오랫동안 근무를 했었는데 한번 만나 볼까? 등 궁리를 하기도 했는데 우선은 지금 받고 있는 재활치료에 집중을 하고 경과를 봐서 다른 수단을 알아보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큰누나가 전화를 했다. 자네 팔을 다쳤는가? 아니, 친척들에게는 알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어요? 자네가 카톡방에 올린 사진을 보니 팔걸이를 한 것이 눈에 띄길래 전화를 했지~. 그러고 보니 지난번 남이섬 갔을 때 찍은 사진을 형제간 카톡방에 몇 장 올린 일이 있다. 남이섬에서 당시 사진 찍을 때는 팔걸이를 하지 않았는데, 많은 사람이 모인 단체사진에서는 무심코 팔걸이를 한 채로 서 있었나 보다. 인물이 깨알 같은 단체 사진에서 내 동생이 어디 있나 유심히 살펴본 모양이다.
그래서 다친 경위를 설명하니 그만하기 다행이라 하며 침을 맞으러 가자고 한다. 그러면서 본인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침을 맞아 본 경험담을 늘어 놓는다. 젊었을 때는 허리 통증으로 침을 맞아 효과를 봤고 근래에는 무릎 때문에 침을 맞는데 본인에게는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여러 한의사에게 치료를 받아 왔는데 지금 찾아다니는 의사가 침을 가장 잘 놓아서 주변사람에게 소개도 하고 좋은 한의사 소개 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받곤 했단다. 그런데 그 한의사가 충남 아산에 있어서 한 달에 두 번 전철편으로 다녀 온다며 다음 진료일은 11월 5일이니 같이 가 보자고 한다. 그렇잖아도 용한 한의사를 만나고 싶었고 그날에 다른 일정이 없으므로 함께 가자고 약속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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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한 당일, 태재고개에서 아산 가는 길은 아무래도 승용차로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큰누나는 한의원에서 만나기로하고, 아침에 승용차를 몰고 길을 나섰다. 경부 고속도로가 체증이 심하여 수원까지는 잘 아는 지방도로 가고 수원영통에서 화성 평택 고속도로를 타려고 이동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집사람 목소리인데 울먹이는 소리가 먼저 들린다. 시골에서 요양원에 계신 장모님이 위중하다는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그때 내가 지나던 곳은 수원 시내이므로 즉시 차를 돌려서 집으로 되돌아온다. 큰누나에게는 상황을 알리고 한의원은 다음 기회에 가기로 했다. 집에 와서 부랴부랴 집안을 정리하고 와이프는 고속버스편으로 광양으로 먼저 보냈다.
대재고개 기슭에 있는 집에는 딸 외손녀 둘 우리 부부 이렇게 다섯이 살고 있는데, 딸은 강남역 인근 사무실에 출근했고, 외손녀 둘은 초등학생이라 학교에 가 있는 상황이었다. 외손녀 둘의 하교 후 일정을 돌봐야 하므로 나는 장모님의 상태를 더 지켜보고 내려가기로 했다.
그날 저녁에는 장모님이 편안한 얼굴로 주무시고 있다고 했는데 다음날 새벽에 운명하셨다고 연락이 왔다. 부랴부랴 장례식장을 찾았다. 그 당시는 팔걸이를 하지 않았는데, 장례식때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오른 팔이 아프지는 않지만 자유롭게 움직여지지 않아서 엎드려 절할 때에는 왼손 위주로 바닥을 짚어야 했다. 장모님은 국가유공자인 장인이 모셔져 있는 임실 호국원에 함께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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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셋째 일요일은 고등학교 동창 산악회의 정기 산행이 있었다. 이날은 관악산 연주대를 올랐는데, 서울대 공학관에서 출발하는 바위 능선을 타는 코스였다. 내가 서울에 살 때 자주 다녔던 곳이라 오랜만에 추억의 코스를 오른다는 설레임으로 가볍게 일행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오른팔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어서 애로가 많았다. 특히 가파른 바위 능선이라 두발 두손을 모두 사용해야 하는데 오른팔이 자유롭지 못하니 다소 위험하기도 했다. 일행들이 관심을 갖고 챙겨주어서 그나마 무사히 정상을 오를 수 있었다. 관악산 정상 연주대 해발 629m. 오랜만이다. 하산은 과천코스. 과천 향교 인근 식당에서 이른 저녁에 반주를 곁들이고 해산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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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인 월요일 오전, 바른세상병원 진료날이다. 10월 7일에 MRI를 찍고 처방을 받았으니 6주만이다. 오늘까지 팔걸이를 하시라고 했는데 안하고 오셨네요? 처음 처방을 내릴 때 그렇게 얘기 했다는데 나는 경황이 없어서 인지하지 못했고 서울대 병원 의사의 말에 따라 3주후에 치우고, 그동안 그럭저럭 오른팔을 움직여서 불편이 줄었는데 말이지.
병원을 다니면서 수술환자가 많고 인공관절을 끼운 환자도 많은 것을 접하게 되니 나의 경우처럼 어깨뼈 빠진 것은 사고도 아닌, 아주 경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담당의사도 어깨뼈 수술을 많이 하다 보니 6주 정도는 팔걸이를 해야 안심이 된다고 여기는 눈치이다. 어쨌거나 팔걸이를 일찍 탈피한 것은 별 문제가 아니었고, 이날부터 본격적인 재활치료를 처방하는데 도수치료를 주 2회 정도 권한다.
절차에 따라 재활병동에 가서 상담을 했다. 그동안 나는 병원신세를 져본 일이 거의 없고 건강하게 지내왔으므로 실손 보험에 관심이 없었다. 도수치료는 의료보험 적용이 되지 않아 환자부담이 크다.
이 치료는 물리치료사가 재활이 필요한 부위를 손으로 주물러 근육 기능을 회복시키는 치료방법인데, 전문 물리치료사가 몸으로 직접 주무르고 하는 것이다 보니 비용이 만만찮다. 최종적으로 나를 담당하는 물리치료사와 협의하여 주1회 20분 도수치료, 기계로 하는 각도치료, 기존에 해오고 있던 어깨 전기치료, 팔꿈치 전기치료 등 4가지를 하기로 정하고 이날부터 도수치료를 시작하였다.
도수 치료가 효과는 분명히 있다. 그간에는 오른쪽 어깨에 무리가 가면 탈이 날까봐서 조심조심 하였는데, 물리치료사가 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시도하는 동작이 나에게 희망을 갖게 하였다. 이정도의 동작은 가능한 것이로구나.
이후 회복속도가 빨라져서 2개월이 될 즈음에는 많이 좋아졌다. 오른팔의 동작 범위가 넓어지고 손바닥 감각도 90%정도 회복되었다. 나머지 10%가 문제이기는 한데 꾸준히 노력을 하면 완쾌되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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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작은 소동이 벌어지는 가운데 반가운 소식이 전해진다. 금년도 노벨문학상을 한국 작가가 수상했다는 뉴스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노벨 문학상이라니. 우리나라의 국격 상승이 가슴에 와 닿는다.
당시에 나는 신체 활동이 자유롭지 않아서 그동안 해오던 서예, 전각, 목공, 당구 등을 중단하고 있었는데, 마침 적절한 소일꺼리가 생긴 것이다. 물리치료를 받고 오는 길에 분당 교보문고에 들러 한강 작가의 책을 구하는 일이다. 매스컴에 보도된 대로 책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을 하고, 여전히 치료받으러 갈 때마다 서점엘 들러본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책이 도착하면서 책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맨 처음 채식주의자가 도착하였는데 오랜만에 읽는 소설이라 흥미로웠다. 나도 구세대를 살았던 사람이므로 이 책을 청소년이 읽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염려가 되기도 했지만, 세상이 변하여 청소년기의 정보 접근이 예전보다 용이하며 범위가 넓기도 하고, 이 책이 국제적으로도 인정되고 있는 만큼 이 정도는 허용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 본다.
다음에 읽은 작별하지 않는다. 무거운 주제를 다뤘는데 서술 방식이 이채롭다. 남의 이야기처럼 알고 있던 역사의 한 부분을 구체적으로 느끼는 계기가 되고, 당사자의 심리상태를 공감할 수 있었다.
소년이 온다. 광주사태를 주제로 피해자의 입장에서 심금을 울리는 내용이다. 광주사태 당시 나는 결혼 1년전으로 대우빌딩 7층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전해에 벌어진 부마사태 10.26사태 12.12사태 이후 전두환이 집권하자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년초부터 산발 적으로 이어졌으며 5월 들어서는 서울역앞 광장 시청앞 광장에서 격렬한 시위가 이어졌다.
나는 근무하는 사무실에서 서울역 앞 광장에서 벌어지는 시위를 직접 보았고, 5.18 당시에는 광주사태에 대한 유언비어가 많아서 금융 공기업이었던 직장에서 유언비어 단속에 대한 교육도 받았다. 본인 눈으로 직접 본 것 아니면 모두 유언비어이므로 말을 옮겨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때 유언비어라고 치부했던 이야기들이 소년이 온다 소설 속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광주시 전체가 출입 통제 상태에 들어갔을 때, 나는 인사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광주지점에서 근무하던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본가가 전주라서 주말에 본가에서 지내고 월요일에 광주지점으로 출근을 하려 하는데 광주시내로 들여보내 주지 않아 출근이 불가능한 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내용이다. 회신은 ‘일단 가까운 전주지점으로 출근하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