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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님 눈에 띤 여왕의 소원>의 줄거리:
스바 여왕의 솔로몬 방문은 이성간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정치 외교 차원보다는 로맨스의 차원으로 부각 되어 둘 사이에 아들이 있었다는 전설까지 생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서 스바 여왕의 영성을 주목하십니다. 표적을 구하는 마음에 있어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대표하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반대편에 스바의 여왕을 세우십니다. 여왕이 솔로몬에게서 신(神)이 사람을 통해 살아 역사하는 실제 현장을 보고 싶어한 열망을 기특하게 보신 것이었지요.
예수님 눈에 띤 여왕의 소원
(열왕기상 10:1~13)
1. 스바의 여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로 그를 시험하고자 하여
2. 예루살렘에 이르니 수행하는 자가 심히 많고 향품과 심히 많은 금과 보석을 낙타에 실었더라 그가 솔로몬에게 나아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하매
3. 솔로몬이 그가 묻는 말에 다 대답하였으니 왕이 알지 못하여 대답하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더라
4.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모든 지혜와 그 건축한 왕궁과
5. 그 상의 식물과 그의 신하들의 좌석과 그의 시종들이 시립한 것과 그들의 관복과 술 관원들과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는 층계를 보고 크게 감동되어
6. 왕께 말하되 내가 내 나라에서 당신의 행위와 당신의 지혜에 대하여 들은 소문이 사실이로다
7. 내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친히 본즉 내게 말한 것은 절반도 못되니 당신의 지혜와 복이 내가 들은 소문보다 더하도다
8.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이 신하들이여 항상 당신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님 눈에 띈 여왕의 소원>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님 눈에 띤 여왕의 소원’
소원은 가장 이루고 싶은 것인데 좀 더 범위를 넓혀서 정의를 내리자면 내 눈으로 가장 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싶어 하는 이유는 내게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남편이나 자녀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자녀에게서 일어나는 좋은 일을 볼 뿐인데 내 눈으로 가장 보고 싶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100억을 벌고 싶어 하는 것도 그러한 나를 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포괄적으로 정의를 내리자면 이루고 싶은 것이라기보다는 보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나라가 통일되는 것, 자녀가 서울대에 합격하는 것, 기가 막힌 집안의 멋진 외모를 가진 여인과 결혼하는 것 등 이와 같은 것들이 얼마든지 소원일 수 있으나 솔로몬의 소원이 하나님의 눈에 띈 이유는 다릅니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은 오래 살고 싶어 하고 부를 원하고 원수를 물리치고 세상에서 으뜸 되기를 소원하는데 솔로몬 왕의 기도에 드러난 소원은 하나님께 듣는 마음이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때마다 취해야 될 판단과 생각과 행동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고 지시해 주시기를 소원했는데 하나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
이후에 예수님이 이스라엘 나라에 오셔서 구세주로 공생애를 사실 때에, 솔로몬의 소원에 하나님께서 반응하셨던 만큼은 아니더라도 특별히 스바 여왕의 소원에 대해서 깊이 주목하셨습니다. 마12:42절에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라고 하십니다.
남방에서부터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온 스바 여왕이 일어나서 너희를 심판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은 솔로몬과는 비교도 안 되는 지혜의 원천인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솔로몬의 지혜를 열정적으로 사모해서 불원천리 찾아온 스바 여왕이 이들을 심판할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스바 여왕이 가지고 있었던 영성을 간접적으로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면 스바 여왕의 소원을 보면서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점검해 보아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스바 여왕의 맥락 안으로 우리를 대입해보아야 합니다. 스바 여왕과 같은 방향으로 소원의 시선이 향하고 있지 않다면, 자신을 돌아보고 스바 여왕 같은 소원의 시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스바 여왕이 찾아온 목적과 이유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바는 아라비아 반도의 남서쪽에 있는 무역업을 중심으로 발전했던 나라입니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만나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은, 그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늘 있어왔는데 그보다 남쪽은 좀 자유로운 지역이어서 독자적으로 정치 문화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여건이 충분했습니다. 스바는 지금의 예멘에 위치해 있으며 나름대로 꽤 잘사는 나라였던 것 같습니다. 어마어마한 예물과 수행원을 대동하고 찾아온 여왕에게 사실 솔로몬의 부귀영화나 궁전과 성전의 화려함은 대단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스바 여왕에게 주목하신 점은 다른 부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스바 여왕에 대해서 말씀하신 대목은 마12:22절에 “그때에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라고 합니다. 그러자 24절에 “바리새인들이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이라고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33절에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러고 난 뒤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표적을 구하자 39~4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스바 여왕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데 이 스바 여왕의 소원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본문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손가락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씀하시는데 마태복음 12장은 인간과 신과의 결합상태가 핵심 주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바 여왕이 보고 싶어 했던 것은 본문 1절에 “스바의 여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로 그를 시험하고자 하여”라고 하는데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성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9절에는 스바 여왕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라고 하는데 스바 여왕이 여호와 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당시 고대근동지방에는 민족마다 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스바 여왕의 소원을 주목한 것을 근거로 생각해 보면 스바 여왕이 지혜롭고 깨달음이 있었는데, 그 나라마다 민족마다 자기들의 신을 가지고 있지만 어느 신도 진짜 살아있는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나라의 솔로몬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받는다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민족 신인 여호와의 지혜가 솔로몬 왕을 통하여 이스라엘 나라의 통치전체를 지배한다는 소문을 듣고 깜짝 놀란 것입니다. 그 많은 민족 신들이 다 죽은 신들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도대체 이스라엘 나라의 신이 어떤 신이기에 한 사람의 인격을 통하여 당신의 생각을 나타내고, 모든 통치의 구석구석에 당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를 보고 싶어 했던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이 스바 여왕의 소원에 주목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했던 표적은 내 마음에 이미 돈이 들어와 있으면서 하나님이 해결사가 되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기적을 표적으로 원했는데 다름 아닌 이 세상을 향한 소원이 이뤄지는 것이었습니다. 돈을 벌고 싶고 오래 살고 싶고 으뜸이 되고 싶은데 이러한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능력을 표적으로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사건을 예로 드시며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표적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맥락에서 스바 여왕을 끌어들이신 것은 스바 여왕은 살아있는 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신학자들이 말하는 이론적인 신이 아니라 삶에서 구체적으로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신입니다. 이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표적을 요구한 것은 같았지만, 스바 여왕이 원했던 것은 외관상 굉장한 일을 하는 신을 찾았던 것이 아니라, 신이 과연 살아있는 증거를 확인하고 싶어 했으므로 솔로몬에게 와서 지혜를 시험한 것인데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겠습니까?
그 많은 예물과 수행원을 준비해서 그 먼 거리를 올 정도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신이 살아서 솔로몬에게 주시는 지혜를 시험하기 위해 많은 문제들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특히 아라비아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 사람들 못지않게 지혜를 좋아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쓰는 아라비아 숫자나 연금술도 다 아라비아에서 나온 것입니다. 수학도 아라비아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스바의 모든 지혜와 지식들을 동원하여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할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를 시험하기 위해 가장 어려운 문제를 솔로몬 앞에 내놓았을 때에 막힘이 없는 것을 보자 솔로몬의 인격 안에 신이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왕궁과 성전과 식탁과 신하들의 오고감을 보고 놀랐다고 하지만 우리가 아는 대로 성전은 현관까지 길이가 30미터밖에 되지 않습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하는 델포이신전, 타지마할, 만리장성, 피라미드, 스핑크스, 바벨론의 하늘궁전, 파로스 등대의 규모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는데 이것에 놀란 이유가 있습니다.
피카소가 젊었을 때에 식당에 들어갔다가 냅킨에 식당 주인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그것이 나중에 몇 백만 불이 되어 팔려나갑니다. 또는 임금님이 물을 마신 뒤에 놔두고 갔습니다. 그보다 더 비싼 물 컵이 많지만 그 컵이 가보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스바 여왕도 성전 자체의 규모나 화려함 때문에 혼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를 시험하는 대화를 통해서 솔로몬에게 신의 존재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나자, 모든 것들을 신이 직접 하신 일을 대면하며 기절하는 것입니다. 그 많은 민족 신들이 있었지만 어느 신도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는 없었는데 그 영성이 있었던 것이고 그 영성이 예수님의 눈에 띄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예수님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스바 여왕은 솔로몬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좋아 했던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점에서 스바 여왕을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스바 여왕은 성전의 규모나 왕궁의 화려함보다 그것을 신이 살아서 사람에게 직접 당신의 생각대로 건축된 것에 놀라워하고 감격하는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소원을 가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므로 악하고 음란한 소원은 하나님의 자리인 내 마음에 돈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소원하고 그것이 이루어질 때에 기뻐하려는 것이 음란한 것이고 그러한 일에 하나님을 해결사로 동원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스바 여왕의 소원은 하나님이 이 땅에서 얼마나 크거나 화려한 일을 하시는가를 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신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 자체를 보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는 들풀과 백합화 한 송이에서 하나님께서 움직이는 것을 발견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이와 같은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이 땅에서 신이신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내 생각이 하나님이 생각이 되고, 내 행동이 하나님의 행동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이 주관하실 것이지만 사소한 백합화 한 송이에서라도 하나님을 발견하는 기쁨이 우리의 기쁨과 소원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이 소원을 위해서 요나의 표적을 예로 드셨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하시는 표적을 보고 싶어 하는 자들을 위해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가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하시는 하나님 자신이 소원이면 그 소원을 들어줄 수 있게 길을 열어 놓겠다고 하시면서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싶은 것이 소원인 자들에게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함께 죽자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 죽으면 이 세상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스바 여왕의 소원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성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신들이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존재로서의 신은 다 죽어버렸습니다. 살아있는 신이 하나도 없는데 솔로몬에게만은 신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가 실제 살아서 신의 생각을 주시고 그 생각이 지혜로 나타나고 그 지혜로움을 따라 성전이 건축되고 왕궁이 건축되고 나라가 다스려지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자 그로인해 지어진 성전과 왕궁이 귀하게 보이고, 그 통치에 의한 신하들의 모습까지도 귀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스바 여왕은 살아있는 신을 보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이 소원이 있으면 길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한 나의 마음을 무조건 죽여야 합니다. 그러면 죽는 순간마다 대상마다 하나님께서 살아서 이끌어 가시고 역사해 가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단 외관상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일만을 기대한다면 반드시 시험에 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발견함의 기쁨이 있어야지, 하나님이 무슨 일을 이루시는가에 대해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 수준(밴댕이)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계획과 뜻(봉황)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지금 그런 외관상에 대한 일을 하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으시기에, 그것을 세상적인 기준으로 좋고 나쁨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심을 보면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하심을 보고 싶어 하는 스바 여왕과 같은 소원을 성취하는 길을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열어놓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내 마음을 빼앗아가는 일들에 대해서 죽고, 오직 내 마음은 하나님께만 드려야 하는 고백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눈을 떠서 주위를 보면 천지가 다 하나님의 손길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스바 여왕이 그렇게 많은 예물을 준비하고 어렵사리 계획하여 먼 곳까지 와서 이룬 소원을 우리는 순간마다 때마다 이룰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면 스바 여왕의 마음을 황홀하게 했던 행복감이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스바 여왕의 소원이 우리의 일상적인 소원이 되고 또한 성취되는 소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로 스바 여왕의 그 모든 솔로몬을 만나기 위한 준비를 우리는 단 한순간에 하면서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을 발견하며 스바 여왕의 황홀감을 행복감으로 만끽하며 살아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