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자유롭게 의사 결정하고, 협상을 통해 거래한다. 그러나 전쟁의 승패로 형성된 정치 체제에서는 이긴 쪽이 모두 갖는 정복과 약탈의 경제였다. 전쟁에 패한 국민들은 노예가 되었고, 그들이 생산한 결과물은 노예 주인에게 귀속되었다. 약탈한 토지와 노예 노동을 기반으로 생산한 상품은 정당한 보수를 지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시장 경제 원리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보수에 가까운 비용으로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었다.
정복과 약탈의 정치 체제 속에서 노예 노동과 과학적인 영농법으로 대규모 토지에서 경작하는 것이 플랜테이션이다.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생산한 농산물은 로마 자영농이 생산한 농산물과 시장에서 경쟁했다. 결국 로마의 자영농들은 가격과 품질 경쟁력을 모두 갖춘 플랜테이션 농장과의 경쟁에 패하면서 몰락하기 시작했다. 노예 노동을 이용한 플랜테이션은 대토지를 경작했던 로마의 ‘라티푼디움’뿐만 아니라, 공산품을 생산하던 그리스의 ‘에르가스테리온’등 다양하게 나타났고, 16세기 라틴아메리카의 ‘이시엔다’까지 이어졌다.
귀족들이 운영하는 플랜테이션 농장과의 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한 농민들의 생활은 점점 궁핍해졌고, 대부분 농민들이 토지를 잃었다. 로마 자영농들은 자신들이 정복한 식민지 농장에 의해 몰락한 것이다. 귀족들이 소유할 수 있는 토지 규모를 제한하고, 농민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개혁이 시도되었으나 원로원 귀족들의 반발로 실패했다.
기원전 133년 호민관에 당선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토지 개혁을 착수하면서 “지휘관들은 부하들에게 로마인들의 재산과 가정을 보호하기 위하여 싸워야 한다고 요구했으나, 많은 로마인들은 쉴 수 있는 집조차 가지지 못했다. 로마의 병사들이 세계의 주인이라는 이름은 얻었지만 내 것이라고 부를 만한 한 뼘의 땅도 가지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또 기원전 123년과 122년에 티베리우스의 동생 가이우스가 호민관에 연임하면서 개혁을 다시 시도했으나, 결국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로마는 초기에 왕정 체제였으나, 기원전 510년에 왕정을 폐지하고 왕 대신 두 명의 집정관이 나라를 관리하는 공화정이 되었다. 공화제(republic)는 ‘공공의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에서 유래된 말이다.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 지배하는 군주제와 달리 국민이 선출한 복수의 주권자가 통치하는 정치 체제이다.
로마 공화정의 중심 기관은 원로원이다. 귀족으로 구성된 원로원은 2명의 집정관을 선출해 행정과 군대를 다스렸다. 시민 총회인 민회는 10명의 호민관을 선출해 평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임무를 담당했다. 그러나 로마의 공화정은 귀족 공화정이었다. 대부분의 평민들은 빈곤한 생활을 면하기 어려웠고, 노예로 전락하기도 했다. 로마 자영농과 평민층의 붕괴는 결국 공화정의 해체를 가져왔고, 다시 황제가 통치하는 제정을 불러왔다. 이렇게 정치는 경제를 바꾸고, 경제는 다시 정치를 바꾼다. 정치와 경제는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며, 근대 고전학파의 경제도 정치경제(classical political economy)라고 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