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 은사야유회(恩師野遊會)(1949년 8월 27일 전 화계사)
학총(學摠)에 빛 외이는 사랑은 소학(小學)과 전문대학(專門大學)보다 중학(中學)시대가 가장 인상이 깊다. 하루는 은사 야유회라는 청장(請狀)이 날러왔다. 바쁜 손으로 피독(披讀)하니 배재졸업생중 1910년, 1911년도 졸업생들의 주최라 쓰여 있고 동소문(東小門) 밖 화계사(華溪寺)로 와 달라는 것이다.
며칠 후에 장용하(張龍何) 씨가 자동차를 가지고 최재학(崔在鶴) 선생과 같이 와서 동행을 요청하였다. 자동차를 타고 같이 중앙청년회관(中央靑年會館)에 들르니 그 곳이 여러 회원들의 임시 대합소(待合所)가 되었다. 경찰서 주임 모 졸업생이 버스 한 대를 대여하여 일행 10여 명을 태운 버스는 화계사를 향하여 질주하고 뒤에 연달아 차가 오는데 역시 졸업생들과 선생들을 태운 버스이다. 산사(山寺)에 도착하니 예전과 같이 희리(熙離)한 마음이 충일(充溢)하고 촌처(村處)이던 독산(瀆山)이던 모두 신조선(新朝鮮) 기분이 농후하여 매삽고 쌀쌀한 일인(日人)들의 기분이 일소(一掃)되었다. 예전과 같이 산사에서 직접 손님을 영접지 않고 산사일우(山寺一隅)한 궁벽(窮僻)한 곳에 두어간 정사(精舍)를 지어놓고 손님을 영접한다.
장용하 씨는 미리 주의를 준다. 선생님 오늘 맘이 어른 앞에 금하는 술 담배를 해방하여 주십시오. 나는 염려 말라고 답하고 사랑하고 귀엽던 사람들이 사제혼동(師弟混同)으로 칭토(稱吐)하였다. 인세에서 보기 드문 자리이다. 마음이 깊이 느끼는 것은 학총(學聰)에 있을 때에는 모두 오묘한 어린 사람들이 변하여 지금은 얼굴 주름살이 잡힌 이도 있고 희끗희끗 머리털이 센 이도 있다. 어쩌면 이렇게 변하였는가. 연령이 60이 가까운 이도 있고 50이 가까운 이도 있다. 지위는 교장 혹 국장 과장급이고 모두 건국에 분투하는 인물들이다.
선생 중에는 내가 최연고자(77세)이고, 그 다음은 이성렬(李聖烈)(73세)씨이요, 그 다음은 이중화(李重華)(69세)씨이요, 그 다음은 김영식(金永植)(65세)씨이요, 그 다음은 김동혁(金東赫)(64세)씨이요, 그 다음은 김성호(金成鎬)(61세)씨이요, 그 다음은 최재학(崔在鶴)(59세)씨이다.
선생들이 돌아가면서 소감을 말하는데 나도 아니할 수 없어 말하게 되었다. 나는 이 가운데 최연자로 죽지 않고 살아서 여러분을 다시 대하게 되니 감량(感量)하오. 나는 세상에 대하여 아무 욕망이 없고 다만 원하는 바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죽기 전에 나라 독립되는 것을 보면 하였더니 이제 선열의 분투한 공로와 여기 계신 여러분의 노력으로 겨우 독립이 되는 것을 보게 되었으니 원을 이루었다 할 수 있고 또 하나는 죽기 전에 사랑하는 친구를 만나는 것이올시다. 만나면 나의 마음에 품었던 정의를 부탁하려는 것이오. 먼저 자식부터 보고 너는 정의로 살며 영화언정 변치 말아라. 자식의 말이 제가 상공부에 있어 두어마디 말만 거들면 생활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도 못합니다. 아버지가 목사인 고로 더욱 못합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저윽히 위로를 받은 것 같이 여러분도 나라 위하여 분투하시고 불의와 싸워 승리하신다면 여러분이 이 사람에게 배웠다는 결과라 생각하고 많은 위로가 되겠습니다. 늙은 사람의 회포가 간절한 것은 여러분을 볼 때 친자(親者)와 다름없이 생각하고 하는 말이니 아무쪼록 배재에서 배운 정신을 잊지 마시고 앞으로 많은 성공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졸업생 중에도 일어나 기탄없는 말을 서로 주고받고 하여 동창 그 때 따뜻한 사랑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 때들은 선생들의 꾸지람이 지금 도리어 사랑으로 깨달아지고 잊을 수 없는 인상이 있다고 한다. 나는 그때 생도들에게 예수도깨비란 말까지 듣고 원망이 불무하였으나 그때 주의 말씀을 들은 생도 중에 목사도 여럿 있고 박사도 여럿 있어 배재의 정신을 발휘하였다. 한번은 모 학년생 시험기에 어느 교실에 들어가 시험을 감시하던 중 생도 중 1인이 다른 사람의 시권(試券)을 보고 써서 그냥 시권을 가지고 왔다. 시권을 보여준 생도와 시권을 보고 등사한 생도 양명(兩名)을 불러놓고 공부 않고 선생을 속인 것을 말하고 이번 시험이 진급에 큰 관계가 있는 고로 압수를 하지 않아도 다시는 그런 착오를 행치 말하고 타일렀더니 그 후로 두 생도는 감지덕지하여 품행도 더 아름답고 공부도 속도로 나아왔다. 고로 교육이 벌주기보다 가르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깨달았다. 또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은 3.1운동 때 2-3일 전부터 제군들과 같이 오후 7시에 정동교당(貞洞敎堂)에 모여 기도할 때 모두 울며 기도하고 복국(復國)을 빌었다. 진실로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 기도하던 사람 중 여러 사람이 독립선언서를 돌리다가 붙잡혀 옥에 갇혀 역(役)을 치르고 나온 이가 많았다.
여러분 배재에 자주 가보시오. 그 학교가 과학으로는 세인에게 유익을 주는 이보다 종교로 주는 것이 더 우월하오. 과학으로는 대통령을 만들 수 없어도 종교로 양성하였으니 이것이 참 위대한 증거이다. 김명신(金明信) 씨의 통쾌한 회고담과 박피득(朴彼得) 씨의 싱가폴 여행담과 김노성(金魯聖) 씨의 고문암송(古文暗誦)은 그날 모임의 특징이다. 회장 김병택(金炳宅) 씨의 폐회선언이 있었다. 인세에 드문 이 자리는 이후에 형식으로 모이지 못하여도 마음으로 종종 모여 우리 중에 이 같은 사랑을 항상 계속하기 바란다 하였다. 양현채(梁顯蔡) 군이 귀로(歸路) 자동차를 예비하여 나와 이중화(李重華) 씨와 전영식(全英植) 씨를 태워 가지고 각각 본가까지 인도하여 아무 괴롬이 없이 왔다.
다시 생각하니 오늘 일은 꿈인가 사실인가. 이 시기 많고 분쟁이 많고 괴롬이 많은 세상, 오늘 같이 잊을 수 있을까. 웃으며 가인(家人)에게 말하기를 “오늘 나는 천국을 갔다 왔지요. 기념사진을 박이고 또 기념으로 은수저 한 벌씩 증정하였는데 요다음 사진과 같이 드리겠다 하여 선생들을 태워 집까지 인도하는 것은 각각 분담 하는 모양이다. 특히 3.1운동 시 기도하던 제군들을 더욱 생각이 된다. 모험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다니던 학생이 눈에 환하다. 죽은 후)에 잊어질까?
* 참조 : 배재 1910년, 1911년도 졸업생 주최 은사야유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