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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시詩
임채우(시인)
나는 왜 이 자리에 서 있는가?
저는 우리詩에서 활동하기 전, 서울시 한 중·고등학교에서 30여 년 교직에 몸담았습니다. 교사는 교단에 서면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특히 국어 선생은 더합니다. 그런데 정말 말하기 싫을 때가 있거든요. 부담 없이 앉아서 남의 강의를 듣는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일전에 제가 졸시 한 편을 썼습니다. 제가 이렇게 형편없는 시를 쓰는 시인이라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지금부터 저의 이야기를 듣는 데는 아무런 무장도 필요 없고 다만 마음만 내려놓으시면 됩니다.
너는 나에게 한 말을 또 한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잘 알고 있다
내가 그들을 얼마나 혐오하는지 너는 모른다
너는 나에게 식상하다고 했다
너는 나에게 지루하다고 했다
핵심만 말하면 앞뒤가 이어지는데
진 게임을 복기하듯 늘어놓는다고 했다
너는 나에게 6·70년대 한국영화라고 했다
너는 나에게 남을 가르치듯 한다고 했다
직업은 속일 수가 없어, 성경에 교사가 되지 말라고 했다
너는 나에게 기분이 좋지는 않다고 했다
그러니 입을 다물 수밖에
너를 기분 나쁘게 할 의도가 전혀 없다
너는 또다시 나에게 기분 나쁜 것이 있느냐고 했다
입을 다물어야 할지 열어야 할지 참 어렵다
─ 졸시, 「너는 나에게」 전문
나이를 먹다 보니 저도 모르게 아내에게 한 말을 또 한 모양입니다. 아내는 그런 내가 식상하답니다. 시쳇말로 밥맛이란 뜻이지요. 교사는 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고, 아무래도 윤리적이고 보수적이며, 자기는 그렇게 하지 못하면서 듣는 이에게 도덕적이고 실천적인 말을 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러다 보니 남 앞에 서서 말하는 사람은 말과 행동이 다를 때가 많아요. 자기도 모르게 위선자가 되는 것이지요. 저에게 교단생활 30여 년 중 가장 기쁠 때가 언제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퇴직할 때였노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남 앞에서 말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이제부터는 열심히 남의 말을 듣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작정했습니다.
제가 이번 여름시인학교 행사를 추진하면서 초청강사 건에 각별하게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장님과 임보 시인께서는 저와 생각이 달랐어요. 유명 시인이나 강사를 초빙하여 말씀을 듣는 것도 유익하지만 이번에는 우리詩 시인이 자기 시를 말함으로써 오히려 시인님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동안 숱하게 치룬 여름시인학교의 외부강사초빙에 대한 반성론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결국 가까이에 있는 만만한 제가 어르신들의 포충망에 사로잡힌 나비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 번 사양도 하고, 이 잔을 꼭 제가 마셔야 합니까?라고 항변도 했지만, 결국 제 뜻대로가 아니고 어르신 뜻대로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저는 시력詩歷이 일천합니다. 첫 시집이 2011년에 나왔으니까, 시를 본격적으로 쓴 지가 5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시회도 사람들의 모임이다 보니 나름대로 위계와 질서가 있습니다. 물론 군대나 회사와 같은 계급 사회는 아닙니다만 등단의 선후배라는 것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등단을 먼저 했다는 것은 그만큼 시창작의 연륜이라고나 할까요, 형만 한 아우 없다는 속담이 그리 틀리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평범한 보통 이하 시인에 불과합니다. 그런 제가 이 자리에서, 만장하신 시인님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잔을 극구 피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오늘 여러분이나 제가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시詩’ 때문입니다. 시가 아니고 권력이나 돈과 같은 ‘이利’였다면 우리는 절대로 함께할 수 없습니다. 저는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는 크리스찬입니다. 교회는 우리 사회에 부정적으로 비춰지는 측면도 있지만, 믿음 때문에 모이는 집이고, 믿음을 나누고 깊이 체험하는 곳입니다. 시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시가 있기 때문에 모이는 곳이 시회입니다. 저는 지금부터 우리의 공동 관심사인 ‘시詩’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시와 만나게 되었고, 어떤 시를 쓰고 있으며, 결국 나에게 시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교회에서는 믿는 자가 여러 교인들 앞에서 자기의 믿음을 말하는 것을 ‘간증’이라고 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 앞에 시에 대해 간증을 하려고 합니다. 간증은 교역자나 믿음이 좋은 장로들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갓 회심한 초심자들의 간증이 더욱 소중한 법입니다. 초심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오늘 저의 이야기가 그만한 폭발력이 있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시詩와 만나다
제가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를 가겠다고 말하자 선친께서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거기 나오면 무엇을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질 수 있는데, 작가가 될 수 있고, 중·고등학교 교사도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선친께서는 교사가 될 수 있다면 가라고 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사범학교를 다니다가 6·25가 터져 참전하느라 영영 교단에 서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교사가 되기를 바라셨거든요. 이렇게 해서 저의 운명은 결정되었습니다.
그 당시 대한민국에 하나밖에 없는 중앙대학교 문창과는 준비된 자에게는 놀이터이지만 저같이 평범한 학생에게는 견디기 힘든 곳이었습니다. 당시 저희를 가르쳤던 은사님들은 시는 서정주, 박목월, 김현승, 구 상 선생님이셨고, 소설은 김동리, 유주현, 김의정 선생님이셨습니다. 제가 재학 중에 김현승, 박목월 선생님께서 돌아가셨고, 졸업 후에 나머지 선생님들도 모두 작고하셨습니다. 당시 문창과에 진학한 학생 대부분은 청소년이나 고등학교 대상 문학상 수상자들이었고, 저처럼 막연히 문학이 좋아서, 공부를 해 보고 싶어서라는 순진한 학생은 몇 안 되었습니다. 1학년부터 전공을 선택해야 한다고 하여 소설을 택했는데 독서할라, 습작할라, 술 마실라, 군대 가기 전까지 열심히 했는데도 진전이 없었습니다. 시창작실기 과목은 소설을 전공한 학생도 필수과목이어서 수강을 해야 했습니다. 1학년 때는 박목월 선생님, 2~3학년 때는 서정주 선생님, 4학년 때는 구 상 선생님께 지도를 받았는데, 시집 몇 권 개인적으로 읽은 것 외에는 특별하게 기억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때 왜 시 공부를 좀 더 진지하게 하지 않았나 지금도 가끔 후회를 합니다. 그래도 저는 아버님과의 약속은 지켰습니다. 대학을 졸업하자 중·고등학교 국어교사가 되었습니다.
제가 교편을 잡은 학교는 구한말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문 발상지로, 역사가 오래 되고, 동문들의 입김이 대단하지만 근무하기에 퍽 자유스러운 학교였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훌륭한 시인 한 분을 만나게 되는데, 그분이 바로 현재 문협이사장직을 맡고 있는 문효치 시인입니다. 문 시인님은 후배 국어 선생 가운데서도 저를 예뻐해 주셨던 것 같습니다. 시인님은 몸이 그리 건강치는 못했지만 시간만 나면 책을 늘 가까이하고, 아이들 열심히 가르치고, 시도 꾸준히 써서 시집을 발간하셨습니다. 지금도 생각이 나는데, 문 시인님하고 ‘문우회’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학생들을 지도했습니다. 방학이면 아이들하고 고적 답사도 하고 1박하면서 문학의 밤 행사도 했지요. 조그마한 소책자도 만들고, 가장 순수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문 시인님께서 그때 저에게 20대는 20대의 글, 30대는 30대의 글이 있는데, 임 선생은 언제나 자기 글을 쓰나 하고 꾸짖으며 격려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저는 끝내 한 편의 시나 소설도 쓰지 못했어요. 각종 공문 작성이며, 가정 통신문, 교육 계획서, 보고서, 학교장 글, 이사장 글, 교지 발간… 제 스스로 잡문의 대가라고 칭했습니다. 아마 이런 것을 책으로 엮는다면 연간 500쪽 자리 두 권 분량은 족히 양산했을 것입니다.
교직생활 중 시와 관련된 에피소드입니다. 저희 학교는 가을이 되면 하루 날을 잡아 전교생이 올림픽공원 같은 데로 ‘사생 및 백일장 대회’를 갔습니다. 오전에는 그림을 그리고 오후에는 백일장 대회를 치룹니다. 우리詩처럼 전교생에게 시제를 내겁니다. 산문은 원고지 10매 내외, 운문은 매수 제한 없음, 대개 자유 제목을 줍니다. 아이들이 해마다 백일장을 하다 보니 꾀가 늘어 산문을 기피하고 거의 운문을 택합니다. 이 학교에 김소월 시인이 정주 오산학교에서 전학을 와 졸업을 했거든요. 선배 중에 한국 최고의 시인이 있어서인지 아이들의 솜씨가 보통이 아닙니다. 우선 한 아이가 초등학교 때 썼던 동시 풍으로 이렇게 씁니다. “파아란 하늘에는 구름도 많다.// 뭉게구름/ 새털구름/ 양떼구름/ 조개구름// 하늘에는 구름이 참 많다.” 곁에서 친구가 보고 있다가 “야, 이런 게 시라면 나도 쓰겠다.” 하고는 즉석에서 “우리 동네에는 아파트도 많다.// 삼익아파트/ 현대아파트/ 신동아아파트/ 삼환아파트// 우리 동네에는 아파트가 참 많다.” 또 다른 아이가 “우리 동네에는 자동차가 많다” 또 다른 아이는 “우리 동네에는 나무가 많다.” 하고 무궁무진한 시들이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5분 안에 후딱 시 한 편 해치우고 모이라고 할 때까지 공놀이 하고 놉니다. 그래도 학교에서는 이 행사를 없애지 않았어요. 이렇게라도 야외에 나와서 1일 시인이 되는 것이 교육적으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42살 때, 아내가 유방암 수술을 하였고, 정확히 10년 뒤에 재발 판정을 받았습니다. 암환자가 재발하면 병원에서는 중증환자로 분류합니다. 이때부터는 그가 언제 죽을지 모르고, 치료 과정에서 사망하더라도 의료사고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어차피 죽을 사람이었다는 것이지요. 재발해서 3년 반, 오로지 아내에게만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아내의 병세는 날로 악화되어 갔습니다. 나중에는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결국 아내는 5월 어느 날 봄나들이 가듯이 먼저 천국으로 갔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2014년 《우리詩》 5월호 테마가 있는 소시집에 「상실喪失의 시」라는 제하에 밝힌 바가 있습니다. 아내가 제 곁을 떠나자 삶의 목표를 상실한 저는 깊은 우울증에 걸려 탈진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반년 정도를 격하여 또다시 아버님의 상을 치러야 했습니다. 맏이인 제가 장례를 끌고 나갈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제가 불효자여서인지 아버님 상을 치루면서 서서히 예전의 활달함을 되찾아가는 거예요. 무엇인가에 매달려야 한다고, 언제까지 넋 놓고 살 수는 없다고, 제 몸이 저에게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버님 상을 치루고 나서 저를 붙잡아 준 것이 바로 시였습니다.
다시 문학청년으로 돌아갔습니다. 되지도 않는 시 한 편이 밥 한 그릇이었습니다. 시란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기 위해 이론서며, 시인들의 시집, 비평가들의 글을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본격적인 시 공부는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간 틈이 나면 한시漢詩 읽기를 좋아했습니다. 중국의 당시唐詩와 송시宋詩를 다 좋아하지만 특히 두보杜甫와 소동파蘇東坡를 좋아했습니다. 동진의 도연명陶淵明은 아내를 간병하면서도 시집을 손에서 떼지 않았어요. 우리나라 한시도 좋아해서, 솔 출판사에서 국역 발간한 『동문선』 한 질을 구입하였고, 정약용의 스승이었던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시집을 구해 가까이했습니다. 뒤늦게 대학시절 은사님이셨던 미당未堂의 시를 다시금 발견했고, 백석과 정지용, 김수영의 시를 다시 꼼꼼하게 읽었습니다. 특히 저에게 특별한 시인 한 분이 있는데, 199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의 여류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입니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끝과 시작』이라고 외대 최성은 교수께서 번역한 번역시집인데, 저에겐 너무나도 값지고 시 한 편 한 편이 몸에 척척 감기는, 저와는 궁합이 맞는 시인이었습니다. 거의 500쪽 분량의 두꺼운 시집을 밥 먹듯이 읽었어요. 나중에는 이 시집의 모든 시를 필사까지 했습니다.
그 시절에 썼던 시들입니다. 다시 보기가 부끄럽고 너무 아파서 잘 펼치지 않습니다. 그때는 이런 것들이 신들린 듯이 써졌고, 몇 편을 제외하고 6개월 만에 시집 한 권을 채웠습니다.
새 한 마리
나뭇가지를 옮겨 다니다
포르르 날아간다
조그마한 날갯짓으로 몇 번 포물선을 그으며
어디론가
나의 시선이 닿지 않은 저 너머
알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갔다
어디로 갔을까
새가 사뿐히 내려앉은
그 어듸메
또 하나의 이승이
가슴 아리게 새겨지는 것일까
새가 날아간 빈자리
나뭇가지 하나 흔들린다
─ 졸시, 「새」 전문
어느 날 빈 시간에 햇볕을 쬐며 교정을 걷노라니 자그마한 새 한 마리가 내 앞에서 몇 번 가지를 옮겨 다니더니 멀리 날아갔습니다. 그 새는 어디로 갔을까요. 나의 시선이 닿지 않은 저 너머로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습니다. 저는 여기에 혼자 남아 있고 새는 저 너머로 날아간 것이지요. 새가 있었던 흔적으로 잠시 나뭇가지 하나 흔들립니다. 저와 아픔을 같이했던 가족이며 지인들이 이 시를 읽고 눈시울을 붉혔대요. 이 시의 날아간 새가 천국에 간 제 아내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이 시집의 제목을 시의 한 행에서 뽑았습니다.
급여명세서를 건네면
아내는 미처 닦지 않은 젖은 손으로
반색하며 나꿔챘다
생활비며 두 아이 교육비, 이것저것 제하고 나면
이번 달에도 적자 인생이라는 것 번연히 알면서도
어쩌다 보너스 붙고 효도 휴가비라도 더해지는 달엔
매달 이 정도면 얼마나 좋을까
환해지던 얼굴
이제 명세서 받아 줄 손이 없다
빈방에 놓여 있는 종이쪽지 한 장
─ 졸시, 「월급날」 전문
이 시 역시 부재를 그린 시입니다. 있었던 것이 없어진 것을 부재라고 하지요. 있던 것은 영원히 있을 것 같은(항존성) 기분에 빠져 있지요. 그러나 어느 순간 없음으로 인하여 이 착각은 허방을 딛듯 충격으로 엄습하는 것이지요. 동료교사들이 가장 가슴 아파했던 시였습니다.
해지는 습지에서
바람이 나를 일으켜 세워
만날 이도
찾는 이도 없이
강가를 서성인다
지난여름 연꽃이며
연잎에 궁글던 사랑
흔적 없이 사라지고
무릎 꿇고 허리 꺾인 갈대들
썩어 문들어져
더 이상 흔들릴 것도 없다
문득 한 점, 길 떠나지 못한
해오라기 한 마리
기척에 날개 치고 오르면
터엉 빈 하늘 자리
번지는 핏빛
저녁노을
─ 졸시, 「경안천 습지」 전문
참 무던히도 방황했던 날들이었습니다. 오후 수업이 끝나면 혼자서 차를 몰고 그 어디라도 간다는 게 고작 아내와 추억이 서려 있던 곳이었습니다.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 있는 팔당호 주변의 ‘경안천 습지’는 연꽃이며 갈대밭, 새들의 천국이지요. 그곳에서 해가 서산으로 꼴깍 넘어가고 어둑어둑해져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던 게 바로 엊그제 같습니다.
저의 제1시집 『새가 날아간 자리』의 시편들은 하나같이 상실의 아픔, 절망, 방황, 고독, 외로움 등 주로 부정적인 정념의 시들로 사랑의 부재를 노래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우리詩》와 만나다
제가 첫 시집을 2011년 5월에 내고, 그해 초여름에 한 동창의 장례식장에서 조봉익 시인을 만나 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처음으로 《우리詩》와 홍해리, 임 보 시인님의 존함을 들었습니다. 친구의 말이 두 어른께 시집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일면식도 없는 분에게 시집을 보낸다는 것이 뭐하고, 시집 한 권 멋대로 냈다고 하여 강호에 뛰어들 만큼 강심장도 아니었습니다. 한 달 후 주저하는 저에게 친구는 재차 권유를 했고, 두 어른께 시집을 발송했습니다. 얼마 후 조 시인의 주선으로 두 어른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두 어르신의 추천으로 2011년 8월에 우리詩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회원이라고 해 보았자 입회비 내고, 낭송회에 나가 회원님들께 인사드리고, 잡지에 시 몇 편 게재한 것 외에는 이렇다 할 활동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 사이 딸 둘을 출가시켰고, 막내아들이 대학을 졸업했고, 퇴직을 앞두고 제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의 주선으로 저와 처지가 비슷한 분을 만나 재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2013년 2월 정년 5년을 앞두고 명예퇴직을 하였습니다. 이제 자식들에 대한 의무는 다 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제부터는 그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고 나를 위하여 남은 인생을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하루는 저에게 메일 한 통이 왔습니다. 홍해리 이사장님께서 우리詩에 교정볼 사람이 없어 아직도 칠십 노인네 두 사람이 보는데 이제는 눈이 가물거려 잘 보이지 않으니 임 시인이 도와주면 고맙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사장님의 메일을 받고 시수헌詩壽軒에 도착하여 그날부로 명예로운 교정팀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시라면 몰라도 그간 아이들을 가르치며 맞춤법, 띄어쓰기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도 서울 30년 국어교사 경력이 두 분 앞에는 어림 반 푼어치도 안 되는 거예요. 스스로 잡문의 대가라고 칭했던 제가 첫날부터 완전히 케이오 당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감히 두 어르신을 평하건대 시로는 당대의 최고봉이지만 교정 솜씨 또한 천하제일의 쌍봉이라고 장담합니다. 사람이 매사 겸손해야 합니다. 의외의 고수들이 도처에 숨어 있거든요. 오죽하면 제가 이런 시를 남겼겠습니까.
늘 눈에 밟히던 것도 눈길 주면 숨어버리는 것들이 있다
음주 측정을 비웃는 상습 애주가나
딱정벌레처럼
내 여린 거름망에는 도통 걸리지 않은 놈들
차라리 무너진 성곽이라면 내 다시 축성하리
그러나 주의할 것, 나의 노둔함이
그대의 꽃밭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
성긴 포충망 하나 들고 날뛰는 아해와 같이
나의 노동은 별로 빛나지 않는다
─ 졸시, 「교정보기」 전문
퇴직하고 나서 달에 두세 번 시수헌에 들락거리며 어른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제겐 퍽 소중했습니다. 두 분께서는 저를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두 어른을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두 분의 인간적인 매력에 깊숙이 젖어들었다고나 할까요. 사실 시수헌은 말이 시인들의 사랑방이지 찾는 이가 별로 없는 쓸쓸한 곳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곳은 시가 있고, 창작의 열기가 있고, 따뜻한 인간애가 있는 곳입니다.
두 어르신의 40년 우정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두 분은 같으면서도 매우 달라요. 한 분은 너그러우시면서 절제가 있고, 한 분은 분명하면서도 안으로 의외의 따뜻함이 있습니다. 두 분의 공통점은 술을 몹시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본디 술이 약해서 술 먹는 것을 그리 반기지 않거든요. 그런데 두 어른은 술이 음료수에요. 이것은 일급비밀인데, 나중에 삼수갑산에 가더라도, 교정 작업이 있는 날 시수헌의 풍경을 잠시 보여 드리겠습니다.
약속된 날 아침 10시 30분경이면 시수헌에 모입니다. 그 전에 이사장님께서 먼저 출근하여 당일 작업 분량을 이미 출력해 놓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탁자 위에 막걸리 두 통, 추억의 건빵 한 봉지와 함께. 작업 들어가기 전 양은그릇에 막걸리 한 잔을 따라주며 이걸 한잔해야 교정이 술술 풀린다고 합니다. 저는 아침부터 눈자위가 풀리고 얼굴이 불콰합니다. 정말 두 어르신네 솜씨는 족집게 무당입니다. 교정은 단순히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문장 고쳐 쓰기 정도에서 그치는 작업이 아닙니다. 물론 숙련되지 않은 사람은 이 단계에도 못 미칩니다. 두 어르신의 교정은 일종의 편집 컨트롤타워입니다. 디자인은 물론이고 글자 크기, 배치까지 일일이 손을 봅니다. 아무리 암호 같은 원고라도 두 분 손을 거치면 제대로 된 원고로 거듭납니다. 때론 협의도 하고, 그도 풀리지 않으면 글쓴이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해결합니다. 오전 작업이 끝났습니다. 12시 반이면 인근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갑니다. 의례 점심상을 받아 놓고 한 분께서 안주가 좋다면서 소주를 시킵니다. 각 1병, 아침에 먹은 막걸리가 아직 내려가지도 않았는데 소주 몇 잔을 연거푸 받아 마시면 아무래도 자세가 흐트러집니다. 두 어르신은 끄떡없는데 젊은 놈이 취한 척할 수도 없습니다. 다시 오후 작업에 들어갑니다. 추호도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오후 4시 전후해서 작업이 끝나고 분류를 해서 제가 우체국에 가서 편집주간께 교정쇄를 등기로 부치고 나면 하루 일과가 끝납니다. 그러면 오늘도 무사히 마쳤으니 시수헌 담금주를 꺼내어 다시 건배, 집에 가면 완전히 뻗습니다. 이런 행사를 한 달에 두세 번씩 꼬박 치르다 보니 못 먹는 술이 늘었습니다. 덕분에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습니다만,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웃자고 하는 말씀입니다.
2013년 말, 저의 두 번째 시집 『오이도』가 우리詩 <움>출판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첫 시집을 내고 2년 만입니다. 『오이도』는 상실의 아픔 속에서 사랑의 부재라는 제1시집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희망과 사랑을 노래하는 시편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시수헌에 들락거리면서 시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두 어르신께 배움이 많았고, 이전보다는 훨씬 안정감 있게 사물을 보고 또 표현하고자 애썼습니다. 시집의 겉장에 두 어르신께서 추천사를 너무 좋게 써 주셔서 그 무엇보다도 자랑스러웠습니다.
이 시집이 지인들께 배포되자 참 많이들 축하해 주었습니다. 저보다 세 살 위인 누님이 가까이 사는데, 첫 시집은 동생이 너무 불쌍해서 눈물이 앞을 가려 책장을 못 넘겼는데, 두 번째 시집은 너무 밝아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시집을 읽었노라고 하셨습니다. 한 고등학교 동창은 보내준 시집을 읽어 보고는 50권을 구입해서 안양교도소 감방에 한 권씩 넣어달라고 기부하기도 했고, 서울에 사는 시골 초등학교 동창들이 송년회한다고 나오라고 하기에 나갔더니 남녀 동창 열댓이 모여 출판기념이라는 것을 어떻게 할지 몰라 대충 준비했다며 꽃바구니도 안기고 촛불도 끄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어디서 말을 들었는지 시집은 공짜로 받는 게 아니라면서 오만 원씩 걷어 봉투에 넣어 주는데, 그날 책값으로 제가 3차까지 다 내고도 돈이 남았습니다. 정말 잊지 못할 출판기념이었습니다.
제2시집 『오이도』에서 몇 편 보겠습니다.
그 시절을 얘기할라치면
달빛 내리는 지방도로를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이
은빛 갈치 달랑이며
걷던 모습이었다
그때, 우리는 시오리를 걸어 집으로 가고 있었다
난생 처음 여수로 수학여행을 가서
기차도 타보고
바다도 보고
동백나무숲도 등대도 구경했다
오동도였던가, 아이들은 바닷물을 한 옴큼 떠서 맛을 보았다
야, 짜다. 정말 소금물이다
연안부두에서
집채보다 훨씬 큰
섬진강 나룻배는 째비도 되지 않은
쇠배가 바다에 떠 있는 것을 보았다
쇠가 물에 뜬다고?
그저 입이 째지게 감탄하고
허겁지겁 눈에 넣기 바빴다
잔뜩 주눅이 든 촌놈들에게
선생님은 전라 좌수영보다도
오동도 등대보다도 커 보였다
반짝이는 동백나무숲도
꿈틀대는 바다도
말 한마디면 꼬박 죽었다
선생님은 어시장에서
먹갈치 몇 짝을 사셨다
읍내 역전에서
선생님께서 먹갈치 한 마리씩
지푸라기에 동여매어 어린 손에 쥐어주셨다
흔들지 말고 얌전히 들고 가라
집에 계시는 어머니 선물이다
갈치 떼가 헤엄을 친다
기차가 흔들거리고
짠 바다가 울렁거리고
오동도 갈매기가 끼룩거리고
동백나무 이파리가 반짝거리고
은빛 갈치, 은빛 갈치들이
달빛 어항에 꼬리치고 있었다
─ 졸시, 「수학여행」 전문
시가 확실히 밝아졌지요. 이 시는 《불교문예》에서 원고청탁서가 와서 썼습니다. 시간적 배경은 초등학교 시절, 촌놈들이 여수로 수학여행 간 이야기인데요, 사실은 저희 학년은 수학여행을 못 갔어요. 바로 위 선배까지는 해마다 갔는데, 저희 때는 한해가 너무 심해 수학여행을 못 간 거예요. 그때는 초등학교만 마치고 학업을 그만둔 애들이 대부분이었거든요. 못 간다니까 아이들이 잔뜩 부풀었던 기대감이 무너져 울고불고 난리가 났지요. 이 이야기는 누님에게 들은 이야기에요. 특히 귀가하는 날, 달밤에 은갈치 한 마리씩 달랑거리며 왔다는 이야기를 못이 박히게 들었거든요. 마지막 연에서 동화적인 분위기 속에서 달빛에 달랑거리는 은갈치의 이미지를 리듬을 타고 입체적으로 살려보려고 했어요. 막내 아들놈이 시를 전혀 모르는 이과 졸업생인데, 이 시를 읽고는 “아빠, 정말 영화의 한 장면처럼 너무 감동적이다.”라고 처음으로 아빠의 시를 인정해 주어 뿌듯했어요.
가정역 앞 두게세월교 앉은뱅이 다리 위에서
우리는 봄비로 세안한 강안이
흩날리는 산안개에 얼굴을 훔치며
설핏 신기루처럼 보였다 사라지는 환한 매화무덤과
내가 뛰어내려 몸을 섞으면
데면스럽게 굴지 않고 나룻배 태워
저 건너로 건네줄 듯
낮게낮게 흐르는 강물을
진저리치며 바라보았다
죽은 것들 여태 그 모습 허물지 않고
봄이라 신생이여 여린 속잎 돋아나는 강가에
세월 다리 아래 강물은 속절없이 흐르고
연둣빛 보리피리 한 소절에
강은 먹빛 번지는 바위 위 해오리처럼
각자의 강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어느 햇볕 쨍한 유년의 은어 떼를 쫓기도 하고
아지랑이 백사장 그 금빛 햇살에 눈부시다가
금이빨 야메꾼 심 씨의 투망에 끌려 나오던 여울의 살떨림
어느 구비던가 문둥이 처자의 피 묻은 홑치마
탯줄을 이빨로 질겅질겅 씹으며
강물에 흘려보낸 그 피울음이여
이곳에 와 닿은 여정이 범상치 않음을
나로 미루어 그대들을 본다
그대들이 바라보는 이 봄의 찬란함을
흩날리는 산안개 꽃 비치는 강물로 그리겠지만
나는, 이 환장할 봄날을
두게세월교 상판만큼이나 덕지덕지한 나의 남루를
내 핏속에 흐르는
또 하나의 섬진과 만나고 있다
─ 졸시, 「섬진강에서」 전문
이 시는 결국 제가 만나 해결해야 할 제 고향 이야기입니다. 제 고향은 저 남녘, 앞에는 섬진강이 흐르고 뒤에는 지리산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강가에서 나고 자라 비록 가난하지만 이야깃거리가 풍성한 곳이지요. 봄날을 당하여 친구 셋이 고향 강가를 방문하고 나서 이 시를 썼습니다. 말년에 고향행을 포기하기로 결정을 내린 계기가 된 시이기도 합니다. 너무나도 사무치게 그립고 보고픈 것은 늘 붙어 있기보다는 서로 떨어져 연애하듯 연연하며 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활어를 잡아야 해
파닥거리는 물고기를 수족관에서 뜰채로 뜨며
수강생들의 머리 위에 물방울을 튀기면서
강사는 도사처럼 계시를 전한다
죽은 고기는 안 돼, 감칠맛이 없어
냉동고기는 더더욱 안 돼, 선도가 떨어져
강사는 숙련된 솜씨로
요동치는 물고기의 골통을 한방에 날리고
지느러미를 제거하고 껍질을 벗긴다
최초의 칼집, 이것은 신이 내린 경지야
칼질이 깊어 뼈에 닿아서는 안 돼
너무 노골적이야
얕아도 안 돼
그건 핵심을 찌르지 못해
너무 서두르지는 말아
손끝의 감각으로 한 켜 한 켜 말아 올리면 돼
물론 두꺼워도 안 돼
입안에서 물컹거려
종잇장처럼 너무 얇아도 안 돼
씹히는 맛이 없어
눈으로 맛을 보고
절대 미감에서 놀아야 해
강사의 안달복달에
백지장처럼 머릿속이 하얘진 수강생들
포정의 칼날에 살점이 이리 튀고 저리 튀고
윤편은 천치처럼 수레바퀴를 어지러이 굴리고
─ 졸시, 「시창작 교실」 전문
이 시는 난생처음 시창작 교실이란 곳을 가보고 쓴 일종의 참관기입니다. 시 쓰는 과정을 마치 횟집에서 생선회를 뜨는 작업에 비유해서 실감나게 풍유적으로 그려본 것입니다. 덕분에 수업하신 강사 시인님을 뒤에 만났을 때 자기를 깡패처럼 그렸다고 소리를 들었지요.
시詩의 바다에 빠지다
제가 좋아하는 폴란드 할머니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시를 안 쓰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 시를 써서 웃음거리가 되는 편을 더 좋아한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시인도 시를 쓰든 안 쓰든 웃음거리가 된다고 하는데 하물며 허섭스레기를 시랍시고 쓰고 있는 본인은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조롱과 수치를 돌돌 감고 다니는 것이지요. 그러나 웃음거리를 무릅쓰고 써야만 하는 것이 또한 시인의 숙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2시집 『오이도』 발간 이후, 저는 30년 남짓 살았던 강동구 명일동에서 본댁과 형제들 가까이 북한산 자락으로 우거를 옮깁니다. 명일동 일대는 골목이며 길거리, 인근 야산에 이르기까지 저의 눈길이 속속들이 닿지 않은 곳이 없어 내 생애의 가장 활동적인 시기가 고스란히 숨 쉬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 새로운 삶을 위하여 아픔을 감내하며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첫 대면은 서먹서먹했지만 은평구 뉴타운 초입의 북한산 자락은 시간이 갈수록 운치 있는 곳으로 다가왔습니다. 산자락 바로 밑동에 터 잡은 아파트 단지는 울타리가 북한산 둘레길입니다. 이 아파트의 뒤뜰이 우리나라 최고의 국립공원인 셈이지요. 철따라 꽃이 피고지고, 산새는 종일 우짖고, 산바람이 기슭을 타고 납작 엎드려 파고듭니다. 이 집을 계약할 때 집주인께서 “이 집에서 글쓰기에는 최고일 겁니다.”라고 장담하더니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단지 아래 낯선 거리보다 이웃집에 마실에라도 가듯 둘레길을 걸었고 가까운 산봉우리에 혼자 올라 세상을 발아래 두었습니다.
시회 활동은 여전했고, 혼자 있는 시간에 찾아오는 시마詩魔를 그냥 보내지 않았습니다. 시마가 문득 찾아오면 나의 산책은 온통 뒤범벅이 됩니다. 생각에 생각이 잇고, 꼬리에 꼬리를 물어 어느덧 머릿속에 흐릿한 집채 비슷한 것이 자리잡습니다. 소중하게 다루어야 할 물건처럼 혹 놓칠세라 깨질세라 조심조심 집에까지 와서는 컴퓨터를 켜고 시아詩芽 방에다가 시의 형태든 산문이든, 또는 최초의 한 구절이든 낱말 하나든 입력을 시킵니다. 며칠 뒤 조용한 아침나절이나 저녁에 시아에 적힌 구절과 대면하여 제작에 들어갑니다. 형태가 갖추어지면 다시 입력합니다. 그러고 나서 시간이 나는 대로 고치고 또 고칩니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고치기라고 생각합니다. 이백처럼 일필휘지 시 한 수가 아니라, 두보처럼 고치고 또 고치는 자가 천재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신제품을 내 시의 후원자이자 제1독자인 아내에게 읽힙니다. 아내의 반응이 영 션찮으면 불량 처리를 합니다. 아내의 입에서 최초의 일성이 “괜찮은데”, 혹은 “좋아” 아니면 “재미있는데” 라는 탄사가 나오면 일단 그 놈은 구제를 받습니다. 내가 봐도 되지도 않은 놈을 아내가 용기를 준답시고 괜찮다고 하는 경우가 많아 그리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내 시의 확실한 독자가 곁에 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졸시 대부분은 이와 같은 경로를 밟아 세상에 나옵니다.
그렇다면 시마가 찾아주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시마는 번뜩이는 시적 영감으로 마치 은총처럼 다가오는 것이지 제가 능동적으로 만나고 싶다 하여 억지로 불러 낼 수 없습니다. 시마가 찾아주지 않을 때는 담담히 일상 중에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의 시 쓰기는 노새나 당나귀를 타고 가는 것과 같다고. 남들은 준마를 타고 저만치 앞서 바람을 일으키며 멋지게 내달립니다. 저의 둔마는 해가 중천에서 서쪽으로 기울어서야 느지막이 출발했을 뿐만 아니라 어찌 그리 걸음도 느리고 해찰이 심한지요. 느릿느릿 꾸벅꾸벅 타박 걸음입니다. 한때는 앞서 내달리는 준마를 부러워도 했지만 이젠 부러울 것도 서러울 것도 없습니다. 어차피 남보다 늦게 출발했으니 꼴찌면 어떻습니까. 꼴등에도 미학과 철학이 있어요. 남보다 앞서려는 자는 이 맛을 모릅니다. 내가 서두른다고 시가 써지는 것도 아니고, 어떤 시인은 시집 한 권으로 만고에 빛나는데, 내가 내 키만큼 시집을 쌓은들 문학사에 이름 석 자나 남겠습니까?
하지만 한 편 한 편 써 가면서 예사롭지 않은 사물들이 저를 사로잡습니다. 시를 통해 존재가 본질을 드러내는 순간과 조우합니다. 사유는 시를 통해, 시는 사유를 통해 뫼비우스 띠와 같은 꼬리물기가 이루어집니다. 이런 시적 체험이 마땅한 언어를 얻었을 때 그 환희란 말할 수 없는 것이지요. 저는 그것을 ‘들뜸’이라고 표현합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식은재처럼 가라앉는 사유의 무거움과 차가움 속에서 어린 아해와같이 달뜨는 기분으로 살고 싶습니다.
다음 시 한 편을 보겠습니다.
두돌쟁이 꼬마 친구
엘리베이터에서 놀이터에서 만나면
하부지, 안녕?
작은 눈이 더 작아지며 고개를 꾸벅하며
기우뚱기우뚱 잘도 걷는다
아침이면 눈물 뿌리는 이산가족 아픔이다가
엄마 퇴근길에 방실거리며 손잡고 귀가하는데
화단에 예쁜 꽃을 보고
날다 앉은 잠자리를 보고
달음박질로 탈출을 감행한다
우리 아이가 얼마나 뛰는지 몰라요
조심을 시키는데도 쿵쿵거려 죄송해요
아이와 나 사이에는 층간 소음이 있다
한사코 미안해 하는 위층과 괜찮다는 아래층이 있다
새털처럼 가벼운 아이가 뛰면 얼마나 뛴다고
염려 마시고 열심히 뛰라고 하세요
쿵쿵쿵…
토끼 한 마리가 거실을 내달린다
멀리서 뇌성 치듯 아련히 들려오는
옥토끼 절구질하는 소리
달덩이같이 환한 얼굴이
초원인 양 내달리는 기쁨이 있다
콘크리트 벽 사이로
뽀얀 연분홍 발뒤꿈치가 난타하는
생명의 소리를 들어 보라
내 몸에 키들키들 일어나는 것들
날개 같은 것, 기쁨 같은 것
살아 있다는 느낌 같은 것
─ 졸시, 「토끼의 뽀얀 연분홍 발뒤꿈치」 전문
제가 사는 아파트 위층에 두돌쟁이 꼬마 친구가 있어요. 여간 귀엽지 않은 사내아인데, 이 친구는 아무리 짧은 거리라도 반드시 달려가는 속성이 있어요. 처음에는 아이가 어리니까 들을 만했지요. 아이가 점점 자라면서 소리가 커지는 거예요. 어린이날이 되었어요. 윗집 꼬마 친구에게 무엇을 선물할까 고심하다가 나름대로 메시지를 전달하기로 했지요. 그래서 쓴 시입니다.
참 소박한 선물이지요. 그런데 아이 엄마가 초등학교 선생님이신데 육아 휴직 중이거든요. 아이 대신 이 선물을 펼쳐보고 우신 거예요. 그리고는 이 시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글로 써서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이며 대학원 동기가 원장으로 있는 유치원에서 가정통신문으로 부모님들에게 널리 알린 거예요. 그 유치원 원장님의 할아버지가 1930년대 시문학파의 일원이셨고 해방 후 서울대 사범대 교수를 역임하신, 시집 『물레방아』와 「메모광」이라는 수필로 유명한 이하윤 시인입니다. 덕분에 이웃도 생기고, 동네에서 알아보는 사람도 있고, 멀리 나를 알아주는 친구를 얻었습니다.
따뜻한 시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봅니다. 시가 삶 속에서 건강함을 획득할 때, 사람들이 시를 사랑하는 것이지 병든 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럼 어떤 시가 건강한 시냐가 문제인데, 저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원활하게 맺어주는, 역기능이 아니라 순기능을 하는 시가 건강한 시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시를 보겠습니다.
몸도 마음도 무거운 날이면 별을 보러 갑니다. 어린 시절 마당에 멍석 깔고 바라보던 맑은 밤하늘에 깨알 같이 빛나던 별을 다시 보고 싶습니다. 도시는 사람들이 내뿜는 불빛 때문에 별이 보이질 않습니다. 사람들은 별이 보이지 않는 하늘 아래에서 절망합니다. 몽고 대초원을 여행한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곳의 밤하늘은 목화송이만 한 별들이 다투어 빛난다고 합니다.
그리운 안드로메다. 한 천문학자의 별자리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이디오피아 왕인 세페우스 그의 아내인 카시오피아 또 그 곁에 딸 안드로메다와 사위 페르세우스 가을 밤하늘은 세페우스 가족의 향연장이라고 합니다. 그들을 호명하는 것만으로도 내 영혼이 가벼워져 천상의 세계로 날아갑니다. 우리의 머리 위에는 신화의 세계가 맴돌고 있습니다.
아, 그리운 안드로메다. 신도 한눈에 반할 만한 청순한 아름다움이여! 나는 지상에서 한 발짝 가까이 그녀에게 다가갑니다. 그녀는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습니다. 초속 110km로 40억 년쯤 뒤 우리는 드디어 하나가 될 것입니다.
─ 졸시, 「그리운 안드로메다 ―북한산일기·19」 전문
위의 시는 북한산 자락에 깃들어 살면서 산을 오르내리며 얻은 것을 산문시로 붙잡았습니다. 당초 계획은 북한산의 사계를 시집 한 권 분량으로 담으면 좋지 않을까 했는데, 역량 부족으로 겨우 스무남은 편 얻었습니다.
그 가을 사위가 캄캄한 어두운 밤에 저는 홀로 뒷산을 오릅니다. 내 발아래 도시의 불빛이 빛나고, 하늘에는 외로운 별들이 가물거리며 떨고 있습니다. 누군가 사무치게 그립고 보고프고 만나고 싶습니다. 나이 60이 넘은 사내가 치기어린 감정을 어디에다 쏟아내기 남부끄러워 별을 만나러 갑니다. 그리운 안드로메다, 그녀는 나의 첫사랑이자 시이며, 타자이자 미의 여신입니다.
이제 이 강의를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제껏 「나의 삶, 나의 詩」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떠들어 보니 별 볼 일 없는 인생에 시시한 시뿐이어서 씁쓸합니다. 어떤 시가 좋은 시인지 몰라서 못 쓰는 시인은 거의 없을 겁니다. 다만 현재에서 더 욕심내지 말고 한 단계만 한 걸음만 내딛었으면, 한 껍질만 깨고 나왔으면 더 이상 바람이 없겠는데, 그것이 잘 안 됩니다. 비결은 없습니다. 열심히 독서하고, 산책 많이 하고, 시마가 찾아오면 붙들고 늘어지셔야지요. 매일매일 자기 삶에 충실한 것이 시 쓰는 비결이라면 너무 막연하고 원론적인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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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채우
2011년 시집 『새가 날아간 자리』로 등단. 시집 『오이도』 등이 있음. pcklim@hanmail.net